# 191
& 오후 속에서 여행을 떠난다. (5)
옷을 벗은 토레스의 상체는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도끼가 힘차게 들렸다가 나무를 찍어 내렸다.
한발이 나무를 밟고, 그 발을 지지대 삼아 도끼날이 비틀리며 위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발을 나무 아래로 내린 토레스는 다시 힘차게 도끼질을 했다.
그 집요함에 결국 장작이 반으로 쪼개지고야 만다.
세인은 토레스가 장작 패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리고 말했다.
“토레스.”
그러자 토레스는 헐떡이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름을 말해줬던가?
“어쩔 셈이냐 토레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우린 장님이 아니야. 네 사정을 모르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토레스는 수건으로 땀을 훔치더니 말없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도끼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언제부터 알았지?”
“그건 상관없어.”
세인은 토레스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어쩔 셈이야?”
“오히려 그건 내가 되묻고 싶군.”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하겠어.”
그러자 토레스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야? 못 본 척 그냥 지나갈 수도 있다고?”
“왜 아니겠어? 네 인생이잖아.”
“마을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토레스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세인은 그런 그의 앞에서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 기다림이 결실을 본 것은 다시 토레스의 입이 열렸을 때였다.
“내 아들이 아내에게 죽었어.”
그게 벌써 삼 년 전 일이다.
“처음에는 충격 때문에 몰랐어. 누가 아들을 죽였는지 말이야. 난 복수에 혈안이 돼서 사방을 헤집고 다녔지. 괴물들을 찾아내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깨닫게 된 거야.”
집으로 돌아간 토레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내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놈이 내 아내와 하나가 되었어. 그렇게 된 것 같아. 그게 내가 밝혀낸 진실이야.”
“….”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것인지는 나도 몰라. 세상에는 너무 많은 괴물이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몬스터가 되어버린 아내 앞에서 어찌할 줄 몰랐어. 황당하지 않아? 내가 평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큰 벌을 받아야 하지? 내 증오는 누구에게로 향해야 할까?”
세인은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게 토레스를 안심시킨듯했다.
토레스는 도끼를 내려놓으며 땅에 주저앉았다.
“그 몬스터가 본색을 드러내지 않던가? 너를 해치려고 했던 적은?”
토
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없어. 차라리 이게 이야기책이라면…. 나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토레스는 이야기책이 아닌 자신의 인생 안에 있었고, 그는 기묘한 설득력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그 설득력은 현실이라는 무게였다.
“아내가 사라지면 나는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아. 미쳐버리거나 자살하겠지. 내게 남은 게 뭐겠어?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이유가 사라져. 그 느낌을 알아?”
“몰라. 난 모르겠어. 토레스.”
“밤이 되어 그녀를 안으면, 이질감이 느껴져. 알 수가 있어. 그녀는 사람이 아니야. 뭔가 낯선 것이 나와 함께 있어. 나와 함께 누워 있다고. 가끔 그런 그녀가 산양처럼 느껴져. 생쥐, 말 여하튼 나와 완전히 다른 생물이야.”
공포감이 자각되는 날.
토레스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공포감을 이기기 위해 오히려 그녀에게 손찌검했다.
그런 그의 의도 속에는, 오히려 앤이 본색을 드러내서 자신을 공격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끝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섞여 있었다.
또 그 복잡한 마음속에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도 서려 있었다.
손찌검이야말로 목숨을 건 발악이자 해방을 위한 도발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무슨 죄인가? 생각하고 생각했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아들이 사라진 것만 해도 나는 미쳐버릴 거 같은데, 앤마저 사라지면…. 나는, 끝나는 거야.”
‘같이 있어 줘 앤.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말아줘. 네가 정말 앤인지 모르지만, 그런 너라도 내게서 사라진다면 나는 미칠 것 같아. 나를 떠나가느니 차라리 나를 죽여줘.’
세인은 물었다.
“왜 아들의 복수를 하지 않지? 왜 당신은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그러자 토레스의 흔들리는 눈빛이 안정되었다.
“결혼할 때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네 아내라는 확신도 없다면서?”
“순수한 그녀는 아니지만, 나는 지금도 그녀가 무섭지만, 결국 앤은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먼저 그녀를 떠나갈 수 있겠어. 그녀를 떠나는 것은 내 가족을 버리는 거고. 내가 죽는 거와 같아. 차라리 내가 그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게 낫지.”
그리고 토레스는 3년이 넘도록 살아 있었다.
무서운 아내 곁에서 말이다.
“나는 그녀와 함께해야 해. 그것밖에 없어.”
토레스의 자조적인 말 앞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일에 끼어들지 않겠어. 왜냐하면 우린 관여할 자격이 없는 이방인이니까. 하지만 충고 정도는 해도 되겠지? 마을에서 멀리 떠나는 게 좋아. 적어도 마을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잖아.”
“당신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될까?”
“세인.”
토레스는 마지막으로 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인. 당신의 충고를 잘 새겨듣겠어. 영영 사람들 곁을 떠날지라도, 나는 그녀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 대답을 듣는 세인은 침묵했다.
세인은 지금의 토레스가 흉중에 품은 감정이, 정말 사랑일까 자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았다.
지금 그렇게 느끼는 것은 세인뿐만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토레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이 술에 젖은 3년을 낳게 했다.
토레스.
결국 그는 아내를 선택했다.
불가사의한 악에 덧씌워진 아내일지라도, 그에게 있어 포기할 수 없는 대상이 바로 그녀였다.
그 해답을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너무 어려워 보였다.
그 답을 내놓기 위해 감수한 방황과, 괴로워한 시간이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다.
* * *
세인 일행은 토레스의 배웅을 받으며, 그의 집을 떠나왔다.
멜라니도, 레드도 몬스터와 뒤섞인 앤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둘은 풋내기가 아니었다.
세상을 떠돌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그래서 선과 악.
살해해야 하는 대상이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게 분류할 수 없는 경우도 충분히 겪어 보았다.
이런 경우에는 눈 감는 것이 최선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해서 순리대로 흐르게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우린 대가를 지불하긴 했지만, 그의 선의를 받았어. 집에 묵어갈 수 있었지. 그런데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그의 삶에 끼어들어 피를 봐야 할까?’
레드는 이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세인이 전해준 소식, 토레스가 곧 마을을 떠난다는 소식에 만족해했다.
3년 동안이나 별일이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는 좋은 소식이었다.
네 사람은 구렁이 구릉을 넘어 앞으로 나아갔다.
좀 더 전진하면 괜찮은 도시가 있었다.
거기에서 마차를 사고 헤카테를 지나 북부로 가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다.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일행은 습지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마음먹는다.
커다란 바위 위에서 홀로 바람을 맞고 있는 세인이 중얼거렸다.
“사람들 곁을 떠날지라도 나는 그녀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토레스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다시 속으로 되뇌었다.
‘왜냐면 사랑하니까.’
세인의 어깨 위에 있는 까마귀는, 세인의 옆얼굴을 관찰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냐? 세인.”
“뭘?”
“넌 유미리에게 끌리고 있잖아. 아니면 벌써 그녀를 사랑해 버렸나?”
세인은 짜증을 내는 대신 밑쪽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유미리를 보았다.
거리가 꽤 되었으므로 이쪽의 대화가 들릴 리 없었다.
“무슨 소리야?”
“왜 아니겠어. 그녀는 너와 닮은 점이 많잖아. 그녀는 너와 같은 소원을 품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야. 그 동질감이 이미 속삭여주지 않았나? 그녀가 바로 네 운명의 상대라고. 게다가 그녀의 신세를 보라고. 그녀는 안식조차 포기한 채 외로운 길을 가고 있어. 그녀라고, 그런 길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까? 천만에, 가끔 그녀도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짐이 부당하다고 느끼겠지.”
세인은 잠자코 까마귀의 말을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를 끝까지 강제하는 것은 없어. 하지만 그녀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임무를 완수할 거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세상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느껴. 인간으로서 세상에 은혜를 갚아야 하고, 네가 감수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해. 너와 유미리는 강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어.”
“요즘 너는 정말로 수다스러운 새 같아. 처음에는 과묵했었는데.”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세인이 피식 웃었지만, 까마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그녀에게 끌리는 건 이상한 게 아냐. 세리스처럼 능력 있고 아름다운 여성이, 꼭 사랑의 요구조건은 아니잖아. 사랑의 전부도 아니고 말이야. 그에 비해 유미리의 눈빛을 보면, 분명 너를 끌어당기는 것이 있겠지. 그게 바로 너의 해답이야. 하지만 어떻게 하지? 세인? 너는 이미 세리스를 가졌잖아. 너는 그녀를 배반할 수 없잖아.”
“그만둬. 난 유미리를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방금 그 말은 첫눈에 반한 사랑을 무시하는 발언이야. 실례라고. 오, 세인 너는 토레스라는 친구와 같이 해답을 발견해 냈군. 비로소 네 인생에서 말이야. 하지만 토레스 그 친구는 역경이 있어도 해답을 품고 걸어갈 수 있었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도달할 거라고. 그게 설령 죽음이라도, 그는 그 끝에서 만족할 거야. 하지만 너는 어쩌지? 해답을 눈앞에 뻔히 두고서도 너는 그것을 가질 수 없어. 그렇다면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한 사람이 누굴까?”
불을 피우는 데 성공한 유미리가 고개를 들어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을 이마에 얹은 채, 세인의 어깨 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들었다.
유미리에겐 까마귀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멜라니와 레드가 잡아 온 동물을 다듬고 있었다.
“지금도 괴롭겠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시간은 와인과도 같아서 고통을 잘 숙성시키는 성질도 있어. 네가 고통을 망각으로 외면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간절해지는 것만큼 더욱 괴로운 너의 마음이지. 어때? 이제 네 시대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넌 그런대로 만족하고 살았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결국 여기에 와서 마음이 원하는 상대를 만나 버렸어. 아뿔싸.”
그때 까마귀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날아올랐다.
세인의 손이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찰싹하고 때렸기 때문이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군. 소설은 그만 쓰라고.”
쏘아붙이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세인을, 소나무 위에 앉은 까마귀가 바라보았다.
검은 새는 세인이 비탈길을 내려가 유미리의 앞에 서는 것을 보았다.
자신을 가리키는 유미리와 세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감정은 이성적인 게 아니지. 이성적으로 흘러가지도 않고 규정할 수도 없잖아. 아무 책임도 없는 자유로운 세계에서, 너는 생애 처음으로 끌리는 사람을 만났다. 나름대로 이유를 찾아보겠지만, 찾을 수 없을걸? 마음이 움직이는 동선은 해석이나 계산이 아니거든. 네 마음을 직시할 수 있다 해도, 그녀에게 고백할 수 없을 거야. 너는 이미 세리스를 가졌잖아. 그리고 이미 그녀의 것이 되었지.”
까마귀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인간에게 사랑보다 더 큰 선물은 없어. 그 선물을 받지 못한 너는 불행한 사람. 그리고 나는 불행한 날짐승이구나.”
* * *
“또 저 새랑 뭘 한 거야?”
“대화 좀 했어.”
그러자 유미리는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했다.
아 참.
이놈은 미친놈이었지.
사랑하게 되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랬다.
세인은 미래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 멀쩡한 얼굴로 까마귀와 말을 나누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적어도 전처럼 완전히 소름 끼치진 않는다.
이게 바로 사랑의 역기능이었다.
세상에는 순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유미리는 정신 나간 놈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 그래…. 대화했겠지. 물론 그렇겠지.”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세인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지금 그의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정의하는 건 불가능했다.
세상이 정의하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미리의 목소리 그리고 눈빛.
행동과 숨결.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유미리도 세인을 가깝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여행에서 그들은 비이성적인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유미리에게 애정을 가지는 것은, 결국 세리스의 가슴을 찢어놓는 일이다.
그리고 명백한 배신이다.
세인은 고개를 돌려 까마귀를 보았다.
높은 곳 불타는 석양 아래, 검은 소나무와 하나가 된 까마귀의 모습은 생명 없는 조각상 같았다.
마치 고통과 하나 된 무생물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저 새가 보기에, 여기 서 있는 자신은 어떻게 보일까?
* * *
토레스는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그리고 짐을 챙겼다.
그는 헛간 뒤로 돌아가 아들 무덤 앞에 섰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여명은 아직 밝아오지 않았다.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던 토레스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아들 파고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앤을 죽여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토레스는 지금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그의 최종 결정이었다.
아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넨 토레스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 그의 앞에는 앤이 당나귀와 함께 서 있었다.
토레스는 그녀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숄을 머리 위까지 올려 주었다.
집을 떠나는 그가 아내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여전히 앤은 소리 없이 그의 손을 꽉 쥔다.
토레스는 마을을 위해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아주 멀리,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아내와 함께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비록 그 여생이 얼마나 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의 손은 지금 공포와 사랑을 동시에 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에 젖은 땅바닥이 질척거린다.
빗물이 고여있는 땅 위로 부부의 발자국이 하나둘씩 새겨졌다.
그 위에서 토레스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 삶이 끝나는 날이 올 때까지, 내가 당신 곁에 있어 줄게.”
그리고 사랑할게.
아내인 앤은 대답이 없었지만,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는 부부의 모습이 오후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