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90화 (190/307)

# 190

& 오후 속에서 여행을 떠난다. (4)

토레스는 구렁이 구릉 근처에 살았는데, 그는 난폭한 남자였다.

외진 곳에 집을 짓고 사는 토레스는 하나 남은 가족에게 폭력적으로 굴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아내를 손찌검하기 바빴던 것이다.

“이게 뭐야!”

오늘도 토레스는 화를 내며 아내를 때렸다.

금발 머리의 여성은 삐쩍 말라 있었고 무척 유순해 보였다.

그 유순함이 지나쳐서 토레스가 때리는 대로 다 맞고 있는 실정이다.

아침밥이 맛없다는 이유로 저렇게 때리는 것은 심한 짓이었다.

그러나 주위에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여긴 외진 곳이니까 말이다.

토레스에게 맞은 아내는 헛간 뒤로 가서 멍하니 서 있곤 했다.

속을 삭이는 듯이 말이다.

거기에는 그녀의 아들 무덤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날이면 토레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원래는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저렇게 된 이유가 뭘까?”

“의처증 때문인가? 아내를 엄청나게 싸고도니까 말이야.”

“그의 아내가 좀 예쁘긴 하지. 그렇다고 저렇게 때려서야. 아무리 순한 사람이라고 해도 도망가겠어.”

그들은 토레스의 아들이 죽은 이유가, 토레스 본인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술김에 성질을 못 이겨 사고를 낸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말까지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한때 착하던 사람이 저렇게 되어 버렸다고 안타까워할 따름이었다.

술을 사러 마을에 들린 토레스를 향해 한 할머니는 그를 꾸짖기도 했다.

“정신 차려 이놈아! 네 성질머리 때문에 혼자가 되면 너는 죽는 거야. 누가 널 챙겨줄 거 같냐? 그런데 앤이 무슨 죄라고 그렇게 두들겨 패? 미쳤어?”

하지만 토레스는 귀찮다는 얼굴로 상대를 무시해 버렸다.

검지로 코 밑을 쓱 훑더니 술병을 들고 자리를 떠나버리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또 술판이 시작된다.

그런 그를 아내는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술에 잔뜩 취하면 토레스는 약간 친절해졌다.

그래서 그제야 아내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부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토레스의 아내인 앤은 자신의 정수리 위에 올려놓은 토레스의 턱 위에서 지독한 술 냄새가 난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상태에서도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앤.”

앤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취한 남편과 나누는 대화는 의미 없는 대화였다.

그는 내일이 되면 지금 한 말을 새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술에 진탕 취한 사람과 말싸움을 벌일 필요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는 이유였다.

“나를 버리지 마.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앤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난 토레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밭으로 나갔다.

숙취는 숙취고 오늘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래서 열심히 움직이며 일을 하는데 그 맥을 끊는 손님이 있었다.

삽을 세우고 그 위에 양손을 걸친 토레스는 멀리에서 다가오는 일행을 보았다.

총 네 명으로 남녀가 섞여 있었다.

“짝을 지어 여행 다니는 건가? 팔자 좋네.”

땀범벅이 된 토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여행자들이 걷는 길은 선택지가 있는 두 갈래 길이었다.

마을 쪽으로 이어지는 길과 그의 집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쪽으로 오는 걸 보면 토레스의 집에 볼일이 있다는 소리가 된다.

아니나 다를까, 토레스 앞까지 다가온 세인은 그에게 용건을 말했다.

“하루 쉬어가고 싶은데.”

“내 집이 여관으로 보이쇼?”

까칠한 토레스의 말에 세인은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술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세인은 다시 말했다.

“대가를 치를 테니 이틀만 쉬게 해줘.”

“왜 마을 쪽으로 안 가쇼?”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나?”

토레스는 세인과 유미리를 보았다.

다른 두 명은 몰라도, 세인과 유미리는 마족으로 보였다.

그들이 마을에 들어갔다간 입방아에 오를 게 분명해 보였다.

이렇게 외딴곳에 있는 마을일수록 폐쇄성이 강해서 외지인에게 살갑게 굴지 않았다.

수군거리는 것은 둘째치고,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 쉬는 건 물 건너가는 것이었다.

“더구나 저 작은 마을에 가봤자 제대로 된 여관이 있을 리도 없잖아. 차라리 이런 곳에서 대가를 치르고 이틀 정도 묵는 게 낫지. 큰 실례가 안 된다면 말이야.”

“뭐 실례까진 아니오. 헛간도 괜찮겠어요?”

토레스가 한 발 빼자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을 막을 곳이면 충분했다.

안채를 요구한다면 그건 손님이 아니라 강도였다.

이틀 정도 자고 간다는데 돈까지 준다고 한다.

누가 봐도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을 빼고 말이다.

“하나만 지켜주면 음식도 내어주리다. 내 아내에게 얼씬도 하지 않는다면….”

그러자 멜라니가 더럽게 비싸게 군다는 듯 톡 쏘아붙였다.

“이봐. 우리에게 여자가 모자라 보여?”

사실이 그럴지라도 여자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다는 게 좀 그랬다.

토레스는 머쓱해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토레스의 헛간은 두 채나 되었다.

본채의 맞은편에 있는 헛간 중 가장 큰 곳에 세인 일행은 여장을 풀게 되었다.

바닥은 축축하지 않았다.

게다가 짚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신발을 벗고 짚더미 위에 올라간 세인은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 깍지 낀 양손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 상태로 헛간 천장을 바라보았다.

구멍 난 곳이 보였다.

하긴, 토레스 상태를 보아하니 지붕 수리까지 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헛간의 문을 잠근 그들은 신발을 벗고 낮잠을 즐겼다.

약간 어두운 내부에서 작고 큰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장 먼저 잠들었던 세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신발을 찾아 신은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크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자 안쪽을 보았지만 깨어난 사람은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바깥쪽으로 걸어간 그는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

거기로 다가가 등을 기대고 서니, 나뭇가지가 잎사귀와 함께 흔들리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려왔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멍한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왜 나온 거야. 더 자지 그랬어.”

세인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무에 다가올 때부터 유미리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꽤 높은 가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사다리도 없이 높이 올라간 것이다.

“고양이도 아니고 높은 곳에 잘도 올라가는군.”

세인이 작게 하품을 하며 말하자 유미리가 받아쳤다.

“아시다시피 엘프들이랑 같이 자랐거든.”

“토레스는 그런 네 사정을 모를 텐데.”

“토레스?”

“나무 주인이자 집주인인 남자 말이야. 나뭇가지 하나라도 부러지면 넌 그에게 미안해해야 해.”

유미리는 잠시 아까의 농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과일나무도 아닌데 뭐 어때? 그리고 이상한 걸 본 것 같아서 말이야.”

“이상한 것?”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를 본 거 같아.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는 기사 말이야.”

유미리와 세인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초록 물결이 치는 들판을 말이다.

“혼자던가?”

“혼자야.”

“그러니까 검은 기사 혼자, 네 주위에서 얼쩡거리고 있다고?”

“그러니까 본 거 같았다고. 아주 멀리에서 말이야.”

거기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던 세인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다크 엘프들이 다시 나타날까?”

“나는 점쟁이가 아니니까 모르지. 중앙을 지나면 뭔들 안 나타나겠어? 여긴 남부니까, 전화가 피부로 와 닿지는 않는 곳이야. 하지만 중부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질걸. 거긴 치안도 엉망이고, 시비 거는 사람도 많을 거야. 생각해보면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데, 괴물들의 사생아인 네가….”

말을 하다말고 유미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실수한 것이다.

상대가 정말로 괴물의 자식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실례일 수 있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이런 화제는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인데, 무심코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세인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세인은 다시 하품하기에 바빴다.

그러자 유미리가 방금 실수를 덮어버리려는 듯, 나무 그늘에서 입을 놀렸다.

“넌 잘도 자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머리 한구석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잘 텐데 말이야. 코도 크게 골고 신났던데.”

“집주인은 나쁜 사람이 아닐 거야.”

“야. 성직자는 레드지, 네가 아니야. 왜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니.”

이런 식으로 유미리와 세인은 말을 주고받았다.

뭔가 큰 의미가 있는 말들은 아니었다.

그냥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나무 하나를 공유하고 수다를 떠는 것이다.

하늘에 굴곡이 지고 잔비가 내리기도 했는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너무 미미한 비였다.

회색으로 찌푸려진 하늘 아래에서 나뭇잎들이 우산이 되어 주었다.

다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나무를 잔잔히 흔들던 빗소리는, 벌판 전체를 흠뻑 적시는 소리가 되어 있었다.

둘은 대화를 하다가 중간중간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땅을 적시는 빗소리를 여백으로 즐겼다.

헛간으로 돌아간 둘은 식사를 준비했다.

토레스가 가져다준 냄비를 걸고 음식을 하는 것이다.

토레스는 돈의 위력 때문인지 의외로 친절했다.

배불리 먹고 푹 쉰 모두는 다음날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멜라니는 손바닥만 한 책을 펼쳐 들고 독서를 했다.

그러면서 드문드문 유미리와 대화를 나눈다.

레드는 무기나 외투를 손질하느라 바빴다.

그의 일상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삶의 완급을 조절하는 듯 보였다.

세인은 다시 잠을 잔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단조로운 리듬이 그를 깨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귀를 기울여 보니 도끼질 소리다.

“깼어?”

마른 입안을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니 유미리가 앉아 있었다.

새삼 그녀의 향기가 느껴진다.

머리를 늘어뜨린 유미리는, 그 긴 머리를 끈으로 정리하려는 중이었다.

그녀의 가는 손목과 애처로울 정도로 마른 팔뚝이 노출되었다.

나무 막대기라고 말해도 믿어줄 정도였다.

그 상태에서 뒤로 넘긴 머리를 묶으려 팔을 위로 올리자, 겨드랑이 부근이 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세인이 가만히 유미리를 보는 가운데,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주변에서는 멜라니와 레드가 잠들어 있었다.

레드야 언제나 얕은 잠을 자는 편이지만, 멜라니는 크게 코를 골았다.

높은 곳에 있는 그녀는 짚단에 아예 파묻혀서 두 발만 보일 정도였다.

“뭘 봐?”

유미리는 세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함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그의 코를 튕겼다.

“차가워.”

그의 말에 떨어지려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코를 매만졌다.

그런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갑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싫지만은 않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가슴이 따뜻한 여자였다.

세상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여자니까.

“세인. 너를 보면 말이야. 너무 감정 표현을 안 하는 거 같아.”

그녀의 차가운 손이 세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남에게 무뚝뚝한 한 건 상관없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엔 그게 오히려 이익일지도 몰라. 하지만 자신에겐 무뚝뚝하면 안 돼. 그것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자신이 정말 뭘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려. 우리 안에 사는 아이에게 평소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인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그리고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야기를 계속하기엔 목이 너무나 말랐기 때문이다.

헛간의 문을 열기 전에 그는 뒤돌아보았다.

땅 위에 굴러다니는 술병과 냄비.

이리저리 쌓인 짚더미 위에 유미리가 차분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침착한 분위기가 세인은 마음에 들었다.

유미리는 세리스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세리스가 찬란한 태양과 같다면, 유미리는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달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면을 봐도 세리스가 유미리보다는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세인은 어느덧 유미리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애정은 능력이나 비교로 가공되는 게 아니니까.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몸을 돌리는 세인이다.

문을 열고 나간 후 밖에서 들려오는 리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장작을 패는 토레스에게 나는 소음이었다.

한편 헛간 문이 닫히고 세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유미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길기까지 했다.

그녀의 복잡한 내심이 잘 담겨있는 표현이었다.

그 한숨은 그녀가 엘프들과 함께 살 때 종종 목격했던 거다.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대상을 사랑해 버린 얼굴.

그 얼굴로 엘프들이 짓던 표정과 한숨을, 지금의 유미리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마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세인이 깊이 담겼다.

이제 와 그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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