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89화 (189/307)

# 189

& 오후 속에서 여행을 떠난다. (3)

세인과 유미리는 식후 산책 겸 물가를 거닐었다.

퐁당 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수면 위로 떠 오른 물고기가 물방울을 남겨둔 채 다시 잠수한 상태였다.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둘은 주변의 풍광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운치를 즐겼다.

천천히 걷던 세인은 가슴 섶의 이물감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딱딱한 보석이 만져진다.

빛을 잃은 보석은 바로 마왕 유고의 유산인 다크 스타였다.

검은 돌멩이처럼 굳어져 있는 이것을 꺼내 유미리의 면전에 들이민다면 어떻게 될까?

이 물건이 뭔지 알아볼까?

‘내 말을 증명할 수 있겠지만, 대신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하겠지.’

이 보석의 존재를 기억해낸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걸 보여주며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였다.

유미리도 자신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대놓고 이걸 보여주며 참혹한 운명의 증거로 삼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세인의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져 버렸다.

더구나 빛을 잃은 보석으로 인해, 어설픈 수작질로 보일 수도 있었다.

세인은 앞서 걷던 유미리가 멈춰 서자 자신도 덩달아 멈춰 섰다.

유미리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이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세인은 바닥에 모여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개미들이었다.

개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유미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보면 신은 없는 것 같아.”

“왜?”

세인이 묻자 개미들을 밟을까 봐 옆으로 돌아가는 유미리가 대답했다.

“아이들은 얼마든지 개미들을 밟아 죽일 수 있잖아. 그건 너무 부당한 거 같아서. 개미에게는 천벌처럼 느껴지겠지만 신은 없어. 그런 억울한 죽음이 일어난다는 것도 그 증거가 되겠지. 신이 보살펴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면서 유미리가 세인과 팔짱을 끼려고 하는데, 세인이 약간 거리를 벌렸다.

대신 상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그녀의 팔을 살짝 쳐 준다.

물론 분위기 전환용 말 돌리기도 잊지 않았다.

“그게 마법사의 견해인가? 나로선 공감이 가는 견해야.”

피식 웃는 유미라가 그와 팔짱을 끼는 대신, 그의 소매를 살짝 잡고 걸었다.

그리고 세인은 차마 그것까진 거부하지 못했다.

*  *  *

여유가 넘치는 둘과는 달리, 멜라니는 엄청 짜증을 내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물고기를 왕창 잡아줬는데 먹은 놈들은 놀고, 내가 설거지를 하다니? 이건 불공평해. 망할 놈의 세상! 이따위 세상이, 세상이야? 신은 없어! 신은 없다고!”

이게 바로 소설가의 견해였다.

물론 성직자의 견해는 또 다를 것이다.

쪼그려 앉아 있는 그녀가 그렇게 투덜거릴 때, 레드가 다가왔다.

도와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옆에서 주저앉는 레드를 보는 멜라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패배한 개를 바라보듯 하는 얼굴이다.

“뭐야 그 표정은?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이봐 레드. 내가 충고 하나 해줄까?”

“이봐 멜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충고 따윈 듣고 싶지 않아.”

그리고 깜박 잊었다는 듯이 레드가 덧붙였다.

레드도 멜라니 앞에서는 장난을 칠 줄 알았다.

오래된 친구 사이니까 말이다.

“그것도 전혀.”

“레드,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어. 그게 뭔지 알아?”

충고를 해준다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면 멜라니처럼 멋대로 사는 사람과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인 걸까?

레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멜라니는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답을 말했다.

“너처럼 꼬리를 내린 패배한 개와 승자야.”

어떻게 한 문장만 들었는데도,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란 게 예감됐다.

멜라니는 다시 일어서려는 레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도로 주저앉혔다.

“들어봐, 레드. 세인은 네게 반말하는데 너는 대체 왜 깍듯이 대하느냐고. 유미리야 여자니까 대우를 한다고 쳐. 하지만 세인은 너랑 같은 남자에다가 거의 동년배로 보이잖아. 그런데 왜 네가 굽히고 들어가는 건데?”

“굽히고 들어갔다는 생각은 해본적 없는데?”

레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인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이 왜인지 익숙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익숙함의 정체는 곧 편안함이다.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모를 편안함 말이다.

멜라니는 혀를 찼다.

그것도 아주 소리 나게 찼다.

“기죽지 말고 너도 반말하란 말이야. 안될 게 뭐가 있어? 상대는 마족이고 넌 크루세이더야. 까짓 거 수틀리면 받아 버리면 그만이야. 레드. 좀 고압적으로 나가란 말이야. 레드, 너의 진가를 보여줘. 난 너에게 걸었다. 잊지 마라. 나를 패배시킨다면 넌 평생 유죄야.”

그때 레드가 그릇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뭘 나에게 걸었는데?”

멜라니는 순간 ‘앗?’하는 표정을 지었다.

유미리와 함께 내기를 한 것이 여기에서 들통나 버린 것이다.

그녀는 사흘 안에 레드가 세인에게 반말 할 것이라는 것에 불침번 시간을 걸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전의 말은 잊어버려. 왜냐면 그래야 내가 편하니까.”

자기중심적인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은 레드는 이제 묵묵히 그릇을 닦았다.

멜라니와 레드의 주위로 깨끗하게 닦여진 그릇이 쌓였을 때, 둘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아 멀리 날아가는 물새를 구경했다.

“레드.”

“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끝까지 그들을 따라가고 싶어?”

“끝까지 확인해 봐야지.”

그런 말 하는 레드를 멜라니는 묘한 여운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치 정말로 그게 전부냐는 의미가 내포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과 눈길 그대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너는 세인에게 반말을 해야 해.”

“….”

여기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결론은 그거였다.

*  *  *

레드, 그의 삶은 죽음에 대한 위협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크루세이더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세인이 그의 마경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십자가가 변하는 것을 보고 일행과 떨어져 걷는 레드의 곁엔 항상 세인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사위가 어두워지고 마경이 만들어지면, 세인은 레드와 함께 무기를 뽑아 들었다.

죽음의 땅 위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생소한 경험이었다.

너무 생소했기에 레드는 이게 정상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렸다.

보통 이런 위험한 일에 남이 자기 일처럼 뛰어드는 일은 발생하지 않기 마련이다.

뛰어들 수도 없었고 말이다.

레드가 이런 생각을 세인에게 넌지시 비췄을 때 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가질만한 생각은 아닌 것 같아. 그냥 함께하면 좋은 거 아냐? 이유를 묻기보다 좋은 게 먼저지.”

당장 네 코가 석 자인데, 뭘 그런 것까지 생각하느냐는 말이다.

맞는 말이었다.

세인 입장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눈앞의 적을 해치우고 해치우다 보면, 머리가 고요해지고 맑아졌다.

밤새도록 움직이며 잡념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 전투 속에서는 원하는 길과 걸어가야 할 길 속에서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형체를 갖추는 것들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달려들었다.

그 앞에서 세인도 간단한 목표를 고수하면 되었다.

적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다.

세인은 아침이 밝아오면 그 여명 속에서 이따금 레드와 말을 주고받았다.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없어?”

그러면 레드는 땀과 피에 젖은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곤 했다.

“한 번도.”

없다는 말이었다.

그 대답을 듣는 세인은 약간 멍한 얼굴로 자신이 떠나면 남겨질 레드를 생각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얼마나 싸우고 싸우다가 결국 사라져 갈까?

누가 지금의 그를 기억할까?

이 세상에는 이런 레드와 아델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가?

이제 세인에게 있어 흘러간 역사는, 더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자면 마법사인 유미리도 크루세이더와 비슷했다.

그녀는 이 세상을 구할지라도 결국 잊혀질 운명이었다.

세상은 그녀로 인해 구원받았지만, 극소수만 어렴풋이 그녀를 더듬을 뿐이다.

그것조차 오욕진 존재로 기억된다.

유미리가 불침번인 밤.

세인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램프를 중앙에 둔 채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 후로 한동안 둘은 램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억울하지 않아?”

세인이 말문을 열었다.

“뭐가?”

“유미리 너는 잊힐 거야.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않을 거야. 기억된다 해도 그건 진실이 아니야. 네 존재는 가려지고 일방적으로 더럽혀질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유미리의 눈빛이 램프 너머에서 반짝였다.

그 앞에서 세인은 말을 흐렸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야.”

“세인. 난 네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했어. 내게 힘이 되어줘서가 아니라, 네가 살아있어서 그 자체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 뒤늦게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

유미리는 망토 속에서 굽혔던 다리를 앞쪽으로 쭉 내밀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듯 몸을 뒤로 젖히고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흰 허벅지와 종아리가 달빛 아래에 여과 없이 드러났다.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춥겠다는 말은 지금의 그녀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난 오래전에 엘프들의 요람을 떠나 세상을 여행한 적이 있었어.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홀가분했지. 그리고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를 목격했어. 그러다가 하나의 파티에 속하게 되고, 결국 보기 좋게 실패했지.”

눈을 반쯤 감은 그녀는 노래를 부르듯이 속삭였다.

그 노래 안에는 이제 죽어버린 그녀의 동생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했어. 파티가 보기 좋게 목적을 달성하는 거야. 그리고 이 세상은 거짓말처럼 불행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탈출하는 거야. 그러면.”

“그러면?”

“세상은 평화로워져. 누구나 노력하는 만큼 결과를 안을 수 있고,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돼. 공포에 떨지 않아도 돼. 그게 바로 나라는 마법사가 바라는 세상이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는 멀리 떠나갈 거야. 세상은 평온해졌으니까.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은둔자로서 살아가는 거지.”

그녀는, 그리고 때론 세인은 모든 것이 순리대로.

마법처럼 풀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세인은 과거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저를 좋아하는 여자와 만나 사는 거죠.

아무도 저를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자연 외에는 싸울 이유도 없고요.

“거기에서 나는 나를 좋아하는 남자와 더불어 사는 거야. 그는 나를 도와주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아. 거기에서 그는 자연 외에 싸울 상대가 없고. 나도 지식 탐구 외에 다른 것과 씨름할 필요가 없어.”

뿌린 씨앗이 잘 안 자란다면 욕 정도는 하겠지만 심하게 원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거기에서의 제 관심은 오로지 그 여자의 치마 속에만 있습니다.

그런 제 생각은 저질이 아닙니다.

왜냐면 거기에서 저는 그냥 아내를 사랑하는 평민이거든요.

“가끔 그는 씨앗이 잘 안 자란다며 내게 투덜거려. 하지만 그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그는 상냥하고 내게 잘해줘. 가끔 야한 것을 요구하지만, 그건 이상한 게 아니야. 그는 나에게만 그러는 거고. 우리는 행복한 부부니까. 나는 거기에서 더는 세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아. 아주 홀가분해. 그리고 그건 내 남편도 마찬가지겠지.”

오래전에 했던 그의 말과 지금 말하는 유미리가 겹쳐졌다.

세인은 말없이 수통을 들어 마개를 열고 물을 마셨다.

왜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그게 갈증으로 이어지고 해갈이 필요했다.

목을 축이는 것은 그 일환이었다.

소매로 입가를 닦아낸 그는 건너편의 유미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받는 유미리는 계속 말한다.

“이 세계는 너무나 불행해. 하지만 거짓말처럼 불행이 끝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때론 그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기필코 이루고 싶은 이 바람은 무엇일까? 세인. 난 네가 누구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세계수는 널 믿으니까 나에게 붙여줬겠지.”

“유미리.”

하지만 세인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밤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질 뿐이다.

꿈이라는 건 지상이나 현실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니까.

꿈은 보통 별과 비슷한 거리에 있다.

꿈은 별처럼 빛나지만, 동시에 별처럼 실체를 증명할 수 없었다.

그냥 별이 존재한다고 믿는 거였다.

왜냐면 별빛이 보이니까.

믿고 싶으니까.

“거짓말처럼 이 모든 게 끝나고 나는 떠나가는 거야. 자유롭게 사는 거야.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게 결실을 맺었어. 나는 그 다가오지 않을 미래의 결실 안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불 안에서 알몸으로 서로 끌어안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내 손가락으로 상대를 느끼고, 귓결에 서로의 숨을 불어 넣는다면 그것보다 더 가치 있고 황홀한 순간은 없을 텐데.”

유미리는 노래처럼, 꿈꾸듯이 허락되지 않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 앞에서 세인이 동질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는 이 순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공감해 버렸다.

그것도 가슴 깊이 말이다.

유미리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이야기하며 밤하늘의 별을 보았고, 세인은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로 중얼거렸다.

말하는 그의 얼굴이 램프의 불빛으로 상기되었다.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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