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86화 (186/307)

# 186

& 아침이 오고 별이 떨어지면

흘러내리는 폭포 속에서 세인이 튕겨져 나왔다.

이제 그는 맨몸으로 벼랑에서 뛰어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서운 바람 소리가 귀청을 울리는 가운데, 세인은 좋은 꼴을 보긴 힘들다고 생각했다.

보통 때라면 지금의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겠지만, 상처를 입고 아래로 떨어지는 지금은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세인은 자기 시대에 보통 사람과 차원이 다른 힘을 가졌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무력이었다. 그런데 마검이 없는 라이트닝 블러드가 무적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실제로 아레이즈의 소영주일 때, 아레이즈 영지를 초토화한 군단장에게 모진 꼴을 당한 세인이다.

그러니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그의 운명은 뻔한 것이었다.

라이트닝 블러드라서 원래 강한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도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추락하는 속도와 바닥과의 거리를 보자면 그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다.

세인의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가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새삼 각인시켰다.

섬뜩할 만큼 검은 수면이 점점 그에게 확대되어 왔다.

이 순간 그는 죽음을 예감했지만, 돌연 이해하지 못할 변수가 일어났다.

수면에 닿기 직전 검은 그림자가 그를 껴안은 것이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그 물체는 완충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

수면 위로 충격파가 일어나며 하얀 포말이 위쪽으로 치솟았다.

그 아래쪽의 세인은 부글거리는 물거품 속에서 끊임없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가 그를 끌어안고 충격을 최소화한 상태였다.

‘누구지?’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검은 물체 품에서, 세인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찔함을 느끼며 정신을 놓는다.

기절한 것이다.

그런 세인을 끌어안고 있는 검은 물체는 천천히 수면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세인을 밖으로 꺼내 놓았다.

*  *  *

사방에 검은 장벽들이 높게 솟아 있다.

장벽들이 둘러싼 광활한 공간 안에는 낮고 넓게 깔리는 폭포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 물에서 벗어난 곳에는 검은 진흙들이 가득했고, 그 진흙 위로 발이 올려졌다.

“으….”

물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를 하고 있는 여성은 바로 엘라이저였다.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육감적인 몸의 굴곡이 잘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뱀의 가죽으로 만든 한 벌 옷으로 감싸져 있었다.

외투는 물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빠져나올 때 벗어던져 버린 것이다.

뱀 가죽을 고정하고 있는 붉은 끈처럼, 빨간 혀가 그녀의 입가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곧이어 그녀는 훈련받은 개처럼 코를 벌렁거렸다.

한차례 낭패를 보았지만, 엘라이저의 눈빛은 아직 욕망으로 가득했다.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놈을 죽이겠다는 욕망이다.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결국 짧은 콧소리를 냈다.

그리고 방향을 정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맨발에 닿은 진흙이 진득하게 뒤로 밀려났다.

그녀 스스로 무겁게 운신하고 있다는 점이, 지친 엘라이저의 현재 상태를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눈 안의 욕망이 머금은 분노 때문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멈춰선 그녀는 진흙 바닥에 누워있는 세인을 바라보았다.

물에서 빠져나오느라 지친 세인과 엘라이저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세인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일어나 다시 싸워야 할 때인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영 내키지 않는 싸움이었다.

폭포 아래로 떨어져 기적적으로 살아난 마당이다.

그가 지켜야 할 유미리는 이미 멀리 있었다.

“엘라이저, 이제 그만두자.”

이제 엘라이저는 더 이상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캐묻지 않았다.

단지 이 상황이 어이없고 분해서, 눈앞의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을 뿐이다.

그녀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일그러질 때였다.

세인은 그 표정을 보고 소용없다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설득을 해보았다.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는 없어. 이대로 헤어지자. 날 보내줘.”

그러자 엘라이저가 피식하고 웃었다.

“내가 아무리 지쳐 있어도 너 하나를 어쩌지 못할 것 같아? 네놈을 무릎 꿇린 후에 고문을 가하겠어. 동료들이 나를 찾을 때까지 말이야. 그 긴 시간 동안 여기는 네 비명으로 메아리치게 될 거야.”

세인은 엘라이저의 눈동자가 두 개로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

보라색으로 변한 원이 두 개로 나뉘며 분열하고 있었다.

벌려진 입안에서 그녀의 변색된 혀가 보였는데, 급속도로 변색된 그 색깔은 역시나 보라색이었다.

다크 엘프라고 해서 이 정도까지 타락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내가 일어나면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다. 죽을 때 죽더라도 깊은 상처 정도는 입힐 수 있어. 그렇다면 여기서 너 혼자 어떻게 구조될 때까지 버티지? 이제라도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가. 그러면 아무 일 없을 거야. 우린 지금 서로 너무 지쳐 있다고.”

그때 엘라이저가 헛발질을 했다.

세인이 몸을 굴려 피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문 그녀는 일어나려는 세인에게 쇄도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얼굴 쪽을 찔렀다.

고개를 옆으로 젖혀 피해낸 세인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목을 노렸다.

이번에는 엘라이저가 피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녀는 목울대를 맞았으면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엘라이저는 터프하게 버티며 턱을 내려 세인의 손을 고정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서 잡았다는 얼굴로 엘라이저가 웃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사악해 보였다.

세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의 네 모습은 너무나 지독하구나.”

“괴물들이 내게 축복을 내렸어. 기분 좋은 축복이야. 더 기분 좋은 건 뭔지 알아? 곧 네 피로 세수할 거란 사실이야. 그건 또 다른 축복이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검의 손잡이가 세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녀는 세인을 고문하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킬 심산이었다.

휘청거리는 세인의 팔을 잡은 그녀는 그대로 그의 팔을 꺾어 버렸다.

우두둑 소리가 나고 뼈가 부러졌지만, 세인은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을 뿐이었다.

둘이 튕겨나듯 반대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진흙 위에 발자국을 남기기가 무섭게 다시 달라붙었다.

그녀의 단검이 민활하게 움직이며 세인의 몸을 노렸다.

세인은 허리춤의 장검을 뽑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민첩한 그녀에게 거리를 벌려서 공간을 내준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빠르게 움직이기 전에 달라붙어서 힘겨루기로 들어가는 편이 나았다.

단검을 쥔 손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엘라이저의 얼굴이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세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부딪혔다.

별이 번쩍이며 뒤로 물러나는 그녀의 멱살을, 세인이 한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그는, 다시 한번 이마로 엘라이저의 얼굴을 받아 버렸다.

“크윽!”

세인은 방심하지 않고 성한 한 손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손이 옆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단검을 막았다.

검날이 손가락을 스쳐 지나며 피를 흘리게 했지만,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지금 이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세인은 상대의 팔을 비틀며 끌어당겼고, 어깨로 엘라이저의 턱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무너지는 그녀의 뒤로 돌아가 한쪽 팔로 목을 졸랐다.

한쪽 팔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엘라이저가 두 손으로 그의 팔을 잡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미 승산이 없는 저항이었다.

결국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호흡이 끊겨 기절한 것이다.

“그냥 지나가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세인은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린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아까 폭포에서 떨어질 때 나타난 검은 물체가 생각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을씨년스러운 풍경만 펼쳐져 있을 뿐, 찾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제 엘라이저를 내려다보는 세인의 얼굴에는 복잡 미묘한 빛이 서렸다.

결국 한숨을 내쉰 그는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뭔가 이야기로 대립을 풀고 싶어도, 여기에서 머무른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의 엘라이저를 보면 그녀를 설득한다는 건 몹시 어려워 보였다.

다른 다크 엘프들이 오면 곤경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를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몸을 돌린 세인은 천천히 걸어갔다.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부러진 팔이 덜렁거렸고 고통이 엄습했다.

입을 일자로 다문 그는 다른 팔로 덜렁거리는 팔을 잡았다.

어서 유미리와 합류해야만 한다.

그는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레드가 유미리에게 난폭한 짓을 가할 것이라는 상상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보자면, 성기사에게 되살아난 마법사인 유미리를 던져준 셈이 된다.

그로서는 서둘러야 하는 이유인 셈이다.

한편 엘라이저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물에 젖어 무겁게 된 세인의 망토가 몸 위에 덮어져 있는 것을 깨달은 그녀였다.

엘라이저는 세인의 망토를 신경질적으로 치우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뭐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위쪽에서 뭔가가 머리를 내밀었다.

커다란 여자의 얼굴이었다.

정상이 아닌 듯 동공이 풀리고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는 여자였다.

밀랍처럼 창백한 여자는 엘라이저의 위에서 두리번거렸다.

전체적인 느낌을 보면 커다란 파충류라고 불려야 할까?

그녀의 눈에서는 파충류처럼 냉혹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몸체는 거미였다.

마지라는 여자가 저주를 받아 변한 거미 말이다.

“어디 있지?”

‘뭘?’

거미인 마지는 엘라이저를 발견하고는 다그쳤다.

“내 아들을 찾아야 해. 어디 있지?”

‘그걸 왜 나에게 물어 이 미친 괴물아.’

엘라이저는 당장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침묵의 폭포 아래쪽에는 많은 괴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마지도 그중 하나였다.

거미로 변한 그녀는 평소 바쁘게 돌아다니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강한 신경독을 분비해 상대를 마비시킨다.

거기에 힘이 약해지고 기절한 엘라이저가 걸려든 것이었다.

결국 본의 아니게, 세인이 마지에게 탐나는 먹잇감을 던져준 셈이다.

엘라이저는 평소라면 미물 취급을 할 마지 아래에서 미칠 지경이었다.

커다란 거미가 그대로 엘라이저를 깔아뭉개려는 듯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마지의 상체가 엘라이저의 위쪽을 완전히 가리게 되었다.

그때 엘라이저는 볼 수 있었다.

마지가 찾는 아들을 말이다.

엘라이저는 거미의 가슴 쪽에 도드라진 남자아이의 형상을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거미에게 집어 삼켜져 저 꼴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손끝이 움찔거리며 마비에서 풀려나려고 했다.

‘조금만 더.’

잡아먹히기 직전에 일어난 엘라이저는 거미와 싸우게 된다.

그리고 결국 거미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한쪽 눈을 거미에게 내놓아야만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녀는 세인에게 불타오르는 원한을 품게 되었다.

원래 사소한 것도 몇백 배로 갚아주는 그녀의 성격상, 세인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만들어진 것이다.

*  *  *

“습격이 계속될지 몰라. 어서 이동해야 해. 여기는 방어하기 힘든 포인트니까 말이야. 물이 점점 차오르고 있잖아.”

뿌연 물안개를 뚫고 세인이 싸우던 자리까지 걸어갔던 레드는 굳은 얼굴로 되돌아와 말했다. 그 얼굴을 보니 앞쪽에서 뭔가 사달이 났다는 걸 알아차린 멜라니였다.

그녀는 세인의 행방을 묻기보다는 굳어 있는 유미리를 가리켰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어.”

레드는 유미리에게 다가가 손을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유미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산 넘어 산이군.”

한숨을 을 쉰 레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했다.

혼이 나간 것만 같은 사람을 만지고 함부로 옮겼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다.

*  *  *

칼스와 헤어진 유미리는 길을 잃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강물이 넘실거렸다.

강물 위에 이정표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한창 마음이 심란한 그녀가 길을 잃는 것도 이해되었다.

물방울들이 비산하고 주위를 가로막는 가운데, 그녀는 한참을 헤맸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러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기는커녕 나 한 명도 구제 못 하겠네.”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결국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한 손을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댄다.

“음?”

눈을 감고 집중했다.

강물이 사납게 넘실거리는 한복판에서, 그녀는 모기가 우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 왱왱거리는 미약한 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가느다란 소리는 점점 뚜렷해지더니 사람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가 되었다.

「어느 날, 별이 지상에 떨어지면

모험가들은 그 별을 쫓고

도망가는 별이 자신의 꿈이라 말한다.

고작 처음 본 별이 그들의 꿈. 홀려버린 희망.

도망가던 별이 바다에 떨어지면

바다는 그 심장을 안고 움직여 더욱 푸르게 빛난다.

생명을 선물 받은 바다가

좌절한 모험가들 앞에서 부르는 이야기.

어느 날 밤바다 위로

흐르는 별빛은 천사들의 눈빛.

검은 하늘 아래 외롭게 서 있는 남자. 그의 머리 위로 내리는 눈.

설원에 박힌 검 위로 얹어진 손길.

시간이 지나 지워지는 그의 발자국.

별을 품고 태어나는 라이트닝 블러드.

천사의 섭리가 깨어날 때

세상은 그 선의를 선물 받고

오늘 태어난 아침에 의해 구원받는다.

가파르게 떨어지는 나의 별빛.

그걸 바라본 한 남자가 걸어가는 길.

내리는 눈에 의해 잊히는 그의 발자국.

정적과 파란 겨울 하늘 아래 묻힌 그들의 왕.

고고한 왕.

그 남자의 그림자.」

*  *  *

멜라니는 유미리의 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작게 노래를 불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그녀의 입술은 약간 파란 빛을 띄우고 있었다.

노래 중간중간에 멜라니는 유미리에게 속삭였다.

“유미리. 내 노래를 듣고 찾아와. 여기야. 바로 여기라고. 우리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로부터 십여 분이 지나, 유미리의 육신은 의식을 되찾았다.

그제야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쪽으로 걸어간 그들은 전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레드는 유미리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세인은 어떤 마족이죠?”

“예?”

“우리는 여기 있을 수 없어요. 당장 떠나야 합니다.”

유미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거야 그랬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물이 무섭게 불어나고 있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동안 수면은 위로 더 차올랐다.

바보라도 여기를 당장 떠나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우측은 낭떠러지였다.

세인은 그 낭떠러지로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상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들은 서둘러 앞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걸으며 레드가 이야기를 계속했고 말이다.

“그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이동하며 몸을 숨길 위치를 정할 수 있어요. 고지대에 숨어야 하는지. 동굴 같은 곳을 찾아서 숨어야 하는지 말이죠. 우리가 낭떠러지 아래쪽으로 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찾아올 길을 예상하며 움직여야죠.”

그러나 유미리는 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해 그녀도 세인이 어떤 과거를 가진 사람인지 몰랐다.

세계수가 붙여준 사람이고 평소의 행동을 생각하면 믿을만한 아군이라는 것 외엔 정보가 없었다.

이런 유미리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레드와 멜라니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세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모습을 감추지는 않았을 것이니 물에 빠진 게 확실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런 세인이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둘 중 아무도 없었다.

유미리 조차도 그의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세인의 마지막 모습은 엘라이저와 함께 물속에 있던 모습이었다.

‘그가 엘라이저를 뿌리치고 벗어날 수 있었을까?’

폭포 밑을 바라보면, 사람이 떨어져서 살아날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계속 한자리에서 시간을 소비할 수도 없었다.

레드는 습격자들의 의도를 몰랐다.

다만 당연히 그들이 다시 습격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건 엘라이저를 찾아 아래로 내려간 그들의 사정을 모르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크 엘프들의 민첩성이라면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레드는 다크 엘프들의 습격을 예상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유미리를 추궁한다든가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째가 되는 날, 정말로 그들 앞에 적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이 예상했던 상대는 아니었다.

다크 엘프가 아닌 존재들이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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