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85화 (185/307)

# 185

& 아침이 오면 (7)

엘라이저는 무방비 상태로 다가오는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법사인 칼스에게 유미리의 주변인을 흔들어 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주변이 흔들려야 유미리가 침착함을 잃고 마인드 잽에 당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분명 칼스의 명령에는 죽이라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다.

유미리를 제외한 사람들을 모조리 처치할 심산이었다.

충분히 그럴만한 자신이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세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자 궁금함이 일어났다.

눈앞의 마족이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엘라이저에서 의문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도 세인은 점점 거리를 좁혔다.

세차게 퍼붓는 빗속에서, 그렇게 둘의 시선이 밀착되었을 때였다.

퍽!

엘라이저의 얼굴이 흔들렸다.

세인이 주먹으로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큭?”

양팔을 들어 올려 가드 하려는 그녀에게 세인이 몸을 던졌다.

순간 둘의 팔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방어하려는 자와 공격하려는 자의 다툼이었다.

팔을 들어 올리던 엘라이저는 상대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옆으로 당기는 것을 느꼈다.

‘제대로 붙으면 승산이 없다.’

이게 바로 엘라이저와 마주쳤을 때 세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현재 세인은 마검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장소도 협소했고 세찬 비까지 내려서 바닥이 미끌미끌했다.

그에 비교해, 모습을 드러낸 엘라이저는 세인에게 강한 압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살기등등했다.

극도로 단련된 엘라이저의 육신은 민첩함의 극치였다.

그녀의 능력은 이런 좁은 장소에서 극대화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검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방심을 노리고 거리를 좁힌 것이다.

세인은 승산의 희박함을 깨닫고 자신을 미끼로 사용했다.

엘라이저는 상대를 경시하다가 급소를 맞은 꼴이 되었다.

세인은 그녀를 붙잡고 발을 굴렀다.

세인이 매달려서 전력으로 엘라이저의 목을 조르고 잡아당기는 바람에, 지금의 그녀도 별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가 쌍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먼저 발이 바위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풍덩 소리와 함께 큰 물보라가 일었다.

세인이 엘라이저를 붙잡고 물속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차갑고 검은 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둘을 집어삼켜 버렸다.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 파문만 넓게 일어났다.

한편 엘라이저의 부하들은 그녀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엘라이저는 엄청난 강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앞쪽에는 신경을 끄고, 자신들이 맡은 뒤쪽에 집중하여 공격을 가했다.

칼스는 유미리의 주변이 조금 흔들리길 바랐지만, 부하들에게는 표독스러운 엘라이저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민첩한 다크 엘프들은 빗물 속에서 번개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은 레드의 실력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방패와 단검을 든 레드는 놀랍게도 다크 엘프와 비등한 속도로 대응했다.

“왜 우리를 습격하는 거지?”

게다가 레드는 싸움 도중 이렇게 중얼거릴 여유도 있었다.

다크 엘프들의 숨이 턱까지 찬 것을 보면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는 원형 방패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상대의 날카로운 무기를 흘려냈다.

그리고 꼭 필요할 때 단검을 직선으로 찔렀다.

그러면 어김없이 다크 엘프의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근처의 멜라니는 레드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긴장감이 없었다.

이런 습격자들에게 죽을 것 같았으면, 진작 레드는 어둠에 잡아먹혔을 것이었다.

멜라니에게 있어 지금의 레드보다 눈앞의 유미리가 걱정이었다.

“이봐 유미리? 정신 차려.”

유미리는 창백한 얼굴을 굳힌 채 빗속에서 석상처럼 서 있었다.

기절한 것 같지는 않았다.

눈을 빛내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멜라니는 더더욱 유미리의 몸에 손을 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대의 상태를 알 수 없으니 조심스럽게 추이만 지켜볼 뿐이었다.

그 사이에 레드는 다크 엘프 두 명을 눕혀 버렸다.

그가 발로 그중 한 명의 목을 밟아 끝을 내려는 순간, 다크 엘프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그런 상대를 가볍게 걷어차 밀쳐낸 레드다.

“레드. 어때?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겠어?”

멜라니가 그렇게 묻자 속뜻을 알아차린 레드는 대답을 했다.

“이들을 다 처리해도 선두 쪽으로 달려가진 않을 거야. 증원이 있을지도 몰라. 너와 그녀를 이 빗속에 방치할 수는 없어.”

멜라니가 혀를 차며 까치발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숄을 조심스럽게 유미리의 머리 위에 얹었다.

돌처럼 굳어진 채 비를 맞고 있는 그녀가 조금 안타까워서였다.

분명 멜라니와 레드는 유미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그녀를 겪어보자 처음의 경계심이 희석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유미리도 그녀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떻게 된 거지?”

답답한 마음에 멜라니가 중얼거려 보지만 굳어있는 유미리는 답이 없다.

*  *  *

유미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수면 위를 걷고 있었다.

마인드 잽에 이은 메시지 마법을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지금의 그녀였다.

현재, 빗줄기와 함께 정지된 것만 같은 세상에서 그녀 혼자만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부른 상대를 찾아 움직이던 그녀는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세인을 보았다.

그는 여자인 다크 엘프를 안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안타까웠지만, 지금의 유미리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녀의 시선이 세인에게서 떠나, 일렁이는 물속의 엘프를 직시했다.

가라앉고 있는 다크 엘프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하는 유미리였다.

“엘라이저. 난 이제 괴물과 너를 분간할 수 없구나.”

둘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물 위를 돌아다니던 그녀는, 결국 자신에게 메시지 마법을 보낸 상대를 찾아냈다.

대마법사 칼스는 엘프로서 긴 금발 머리를 가진 미남이었다.

그는 아이였을 때의 유미리를 거두었던 모습 그대로 그녀를 기다리던 중이다.

“약해져 있구나, 유미리. 마인드 잽에 걸릴 정도라니.”

“제 정신이 약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메시지에 저항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아직도 나를 스승이라 생각하느냐?”

유미리도 칼스도 상대에게 던지는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칼스는 크게 화를 내려다가 탄식을 쏟아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죽은 자는 섭리에 따라 움직여야 해.”

말이 끝났을 때 칼스는 유미리의 정면으로 다가와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손이 유미리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 살짝 올렸다.

유미리는 그 상태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스승님. 저를 거둬주시고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할 일을 하는 거예요.”

“뭐라고! 내 귀를 믿을 수 없구나!”

칼스는 결국 자제력을 잃고 폭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미리는 자신의 친딸인 엘라이저보다 더 사랑을 주고 아꼈던 아이였다.

고아였던 유고와 유미리를 거두고 가르친 게 바로 그이다.

그리고 둘의 선한 마음에 누구보다도 기꺼워했던 것이 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지금 눈앞의 모습이 가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았다.

“네 꼴을 봐라!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라고! 너는 타락한 거야! 그 대가가 뭔지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네가 순리대로 돌아가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겠다!”

그때 미약하지만 유미리의 눈이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칼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졌을 때 그가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위험하니 가지 말아라. 그 성기사의 말에 빠져 목숨을 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네가 속한 파티는 패배할 것이다.’

‘마치 패배를 바라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그때 유미리는 자신이 몸담았던 엘프 도시가 괴물들과 한배를 타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그래서 칼스에게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유미리의 차가운 눈빛을 받은 칼스는 담담하게 대답했었다.

‘이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냉정한 현실이다.’

그리고 헤어졌던 스승과 제자는 이렇게 가슴 아픈 꼴로 재회하고야 말았다.

유미리는 한편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여기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되었다.

그런 기색을 보여서도 안 된다.

“제 동생이 죽었어요.”

“유고도 네가 다시 북쪽으로 향하는 걸 바라지 않을 거다.”

칼스는 너무나 답답했다.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미리가 가여웠다.

“바보 같은 녀석아. 네가 북쪽으로 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단 말이다. 테러 로드는 무시무시한 악이다. 이미 승패는 기울었어. 내가 좋아서 그들과 손을 잡는 줄 아니? 우리에게는 승산이 없단 말이다.”

칼스는 원래 테러 로드가 셋이며 둘은 이미 소환 때문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것까지 알았다면 더더욱 자신의 판단을 더더욱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이어지는 스승의 설득 속에서 유미리의 손이 움직인다.

유미리는 자신의 얼굴에서 칼스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올려다보고 있는 하늘은 지독했다.

악에 오염된 것처럼, 악의의 촉수가 가득한 하늘이었다.

“처음에는 저도 저를 살려낸 세계수가 좋게 보이지 않았어요. 그의 누이가 어떤 짓을 당하고 있는지 알지만, 그가 제게 한 짓은 너무 충격적이니까요.”

“그런데 왜?”

“이젠 아무래도 좋아요. 제가 죽음에서 돌아와 다시 걷고 있어도 말이에요. 스승님. 저 하늘을 보세요. 흉측하게 일그러진 저곳을 보세요. 이 비는 제게 눈물 같아요. 마치 세상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요.”

칼스의 눈가가 잔 경련을 일으켰다.

그도 가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이런 하늘 아래에서 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부서지는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에요.”

“유미리. 안 된다. 내가 무슨 수를 내어 보이겠다. 여기에서라도 멈춘다면, 너는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이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

악의 감시를 알면서도 행동한 칼스를 보며 유미리가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엘라이저를 보세요. 그녀는 악에 오염되어 이제 철저히 망가져 버렸어요. 모르겠어요? 엘프들이 살아남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그건 그들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에요. 엘프를 엘프로서 살게 해주는 게 그들을 위한 거예요.”

그러자 칼스가 가슴 아픈 듯이 웃었다.

“살아남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그런 말을 하는 넌 죽음을 경험해봤잖니. 나는 그때 너에 대한 상실을 느꼈다.”

유미리는 입을 다물었다.

“네 고통과 나의 상실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그게 바로 내가 오욕을 짊어지고 악이 되는 이유다. 유미리, 난 이미 자식과도 같은 너를 잃었다. 그 아픔이 아직도 내 뼈 마디마디에 선명하다. 그래서 더더욱 확신하는 거야. 모두 살해당하느니, 차라리 살해자들과 한편이 되겠노라고 말이다. 정의는 상실을 수복시켜 주지 않아. 나는 그걸 안다.”

칼스는 유미리의 머리 위에, 떨리는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와 함께 돌아가자, 유미리. 세계수에서, 이 불합리한 굴레에서 너를 해방해 주겠다. 그리고 다시 잠들어라. 나의 제자야. 그게 너를 위한 길이다.”

그러자 빗물 속에서 유미리가 웃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하늘과 검은 강.

그 중간에 선 인간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세인은 엘라이저를 붙잡은 채로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순간 수면 위에 누군가를 본 것도 같았다.

여자의 모습이 얼핏 보인 것도 같았지만, 착각일 것이다.

엘라이저가 몸부림치자 물거품이 일어나며 그런 그의 시야조차 가려 버렸다.

지금은 엘라이저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녀는 세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여긴 차가운 물속이었고, 움직임이 제한되어 매우 부자연스러운 상태였다.

한쪽은 벗어나려 하고, 다른 한쪽은 같이 죽으려는 듯 몸을 붙잡고 목을 졸랐다.

얼마나 그렇게 몸부림쳤을까?

둘의 몸이 뾰족하게 솟아 나와 있는 바위에 닿았다.

그 둔탁한 느낌이 둘의 몸에 느껴졌을 때였다.

때늦은 물의 흐름이 엘라이저와 세인을 한쪽으로 잡아당겼다.

‘폭포 쪽이다.’

어느 정도 기운이 빠지자 물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흐름은 집요하게 폭포 쪽으로 몸을 끌어당기며, 죽음을 요구했다.

힘이 빠진 것은 엘라이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둘은 차가운 물속에서 너무 오래 힘겨루기를 벌였다.

이제 문제는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었다.

누가 살아남느냐다.

그걸 눈치챈 엘라이저는 세인을 강하게 밀어내고, 위로 떠오르려고 시도했다.

팔꿈치로 상대의 가슴을 치고 위로 팔짓을 하려는 가운데, 느릿하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이 지독한 녀석!’

엘라이저는 물속에서 이를 갈았다.

숨이 부족하고 눈이 아찔해 오는 가운데, 남자가 자신의 다리에 매달린 것이다.

‘안돼. 안 된단 말이야.’

원래 계획은, 이 남자를 칼로 찌르고 희롱하며 가지고 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바둥대다가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는 엘라이저였다.

결국 그녀의 몸은 세인과 함께 폭포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다음은 정해진 순서를 밟았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물과 함께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급경사를 느끼면서 세인의 몸은 드디어 엘라이저와 멀어졌다.

그런데 그전에 그녀의 선물이 있었다.

화끈한 느낌이 차가운 수온에서 선명하게 느껴진 까닭은, 엘라이저의 검이었다.

세인은 자신의 가슴을 가로지른 검상을 안고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에는 심연과도 같은 물의 세계가 그를 반겨주며, 그 큰 검은 입을 아귀처럼 벌리고 있었다.

*  *  *

세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까마귀는 남쪽의 세계수 지역에 있었다.

그는 이 시대에 온 이후로 이곳을 즐겨 찾았다.

그리고 웅장한 폭포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딱히 뭔가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깊은 숲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세계수가 다가왔다.

그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서서히 타락해 가는 중이었다.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다가오고 있는 세계수를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충고해줄 게 많은 모습이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계수는 나무에 손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폭포 쪽을 지켜보았다.

“저기에서 내 동생과 함께 뛰어놀던 시절이 있었지.”

까마귀는 그런 그의 앞에서, 미래에 몬스터나 다름없게 변해버리는 누이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그런 것까지 입에 올릴 필요는 없었다.

“검은 왕에게 가봐야 하지 않나?”

세계수가 던진 말에 머리를 끄덕인 까마귀가 말문을 열었다.

“내 생각에 그의 시련은 힘의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선택이지. 선택이란 건 누구에게나 어렵지. 나에게도 그랬어. 또 길고 긴 후회를 동반하기도 하지. 선택을 움직였던 진심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기 마련이니까. 누구에게나 선택하고, 그 선택한 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참 어렵지. 신념은 부서지거나 변질되기 쉬우니까.”

세계수는 미래에서 온 까마귀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어차피 자신이 할 것을 다 했다.

이제 와서 질문을 던진다는 건 의미 없는 유희일 따름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운명이 어떻든 간에 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영원히 잊힌 죄인으로 남는다 해도 그렇다.”

아직도 아름다운 폭포를 배경으로 둔 세계수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의 근처에서, 까마귀는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짧은 말을 긴 한숨처럼 내뱉었다.

“정말 그런가….”

변질과 순수 사이에서 까마귀의 말과 한숨이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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