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 아침이 오면 (6)
일행은 길을 재촉하다가 초저녁이 되면 말에게 풀을 뜯어 먹게 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야영 준비를 했다.
산 위로 달이 모습을 드러내면, 램프 몇 개에 의지한 채 보내는 밤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 세인은 몸을 웅크리고 램프 안의 불빛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력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턱을 괸 채로 앉아 있는 그의 눈은 시종일관 불빛을 담았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을 뻗어 수건으로 램프를 가렸다.
그러자 주위가 어두워졌다.
세인은 그 상태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바라본 밤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보라색 성운 같은 빛들이 번쩍이는 가운데 파란빛이 뒤엉켰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은 일대 장관이었다.
별 무리 속에서 달이 으뜸으로 빛난다.
시대를 떠나 저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달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그는 잠시 넋을 잃은 듯 하늘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세인은 불침번 중이었던 것이다.
귀를 기울이자 잠든 사람들이 침낭에서 뒤척이는 소리,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익숙해지자, 곧 그 소리를 풀벌레 소리가 뛰어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코 고는 소리 중의 하나가 점점 작아지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낭 안에 있는 레드의 목소리와 함께 말이다.
“불빛이 꺼진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레드는 좀 더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교대 시각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 더 자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일어나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결국 세인의 곁에 앉더니, 같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제 둘은 형제처럼, 친구처럼 같이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보내는 밤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를 갈던 멜라니의 잠꼬대가 둘의 분위기를 깨버렸다.
“이 바보가~ 미래에서 왔다고?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유치하다 정말.”
멜라니는 그렇게 꿈속에서 킬킬거리더니 몸을 옆으로 돌려 코를 골았다.
이제 멜라니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바보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앉아 있는 세인은 썩은 사과를 씹은 표정이 되었다.
지금의 그는 한때나마 진실을 말한 대가로 두고두고 놀림 받고 있었다.
문제는 대놓고 놀리는 것도 아니라서 정색하고 항의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이다.
자는 사람에게 왜 잠꼬대를 그런 식으로 하냐고 멱살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때 레드가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정말로 본인이 미래에서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인은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가끔 미래에서 여기로 오는 꿈을 꾸지. 그뿐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겠어?”
“그렇군요.”
레드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유미리란 여자도 짓궂은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세인이 한때 농담으로 한 말을, 유미리가 집요하게 놀리는 것이라고 짐작해버렸다.
“꿈속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괴물이 판치는 세상 그대로입니까?”
“거기의 괴물들은 궤멸 직전이야.”
“꿈속에서 천국을 보았군요.”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도 않아. 그 꿈은 너무 현실감이 넘쳐서 많은 아픔이 있었어. 거기에서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그 사람을 포기해야만 했거든. 그가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난 그를 떠나보냈지.”
세인은 레드에게, 지금의 레드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레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안타깝군요. 붙잡고 싶지는 않았습니까?”
“붙잡고 싶었지. 정말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세인은 레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태어날 때부터 걸어가야 할 길이 놓여 있었고, 가고 싶은 길이 있었다.
둘이 하나 된 길이라면 정말 좋으련만, 때때로 그러지 못하다.
운명과 소망은 꼭 일치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가고 싶은 길 위에 서 있지 못할 때의 괴로움을 잘 아는 세인이었다.
그런 그가 레드를 곁에 둘 리가 만무했다.
지금 생각해도 레드를 떠나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세인에게는 의지가 되는 레드가 필요했고, 레드의 힘이 탐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를 놓아줌으로써 세인은 그에 대한 우정을 지켰다.
그런 세인의 곁에서 레드는 세인이 램프에 덮어놨던 수건을 치웠다.
그러자 오래 참은 숨을 내쉬는 듯, 밝은 빛이 램프에게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램프의 열기가 남은 수건을 목에 두른 레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이별이 허구라서 다행입니다. 그래도 그런 꿈이라도 꾸고 싶네요.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괴물들이 패배한 세상에 말이죠.”
“그 꿈속에서 나는 죄 없는 생명도 죽였어.”
그때 멜라니가 다시 잠꼬대하며 킬킬거렸다.
세인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말을 계속 이어나간다.
“끔찍한 힘으로 사방을 폐허로 만들고 무수한 살해를 저질렀지.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악마라 손가락질했을 때, 나도 마음속 깊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어.”
레드는 무거운 세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로서는 상대가 이렇게 심각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게 꿈이라서 다행입니다.”
* * *
다음 날 아침 하늘의 색은 회색빛이었다.
그리고 왠지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지도를 보며 의논을 거친 일행은 원래의 길을 고집했다.
어렴풋이 예감은 들었지만, 정말로 비가 쏟아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과는 자연의 변덕에 달렸으니까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내린다 해도 하루만 늦게 내린다면 정말 좋겠는데.’
그런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덜미에 뭔가가 날아와 맞았다.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매만지는데, 손등으로 다시 물방울이 부딪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인은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어쩌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레드가 이렇게 말했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예정된 곳까지 가보도록 하죠.”
그렇게 걸어 도착한 곳은 폭포 옆이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위쪽에 서 있는 그들은 대화를 주고받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보통 크기의 강보다 폭이 몇 배나 되는 이 폭포는, 사람들에게 침묵의 폭포라고 불렸다.
까마득한 높이를 가진 폭포치고 소음이 적었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검은 물은 폭포 후방에서 잔잔하게 흘렀다.
그러다가 폭포를 만나면 아래로 빨려들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폭포 아래에 도사린 검은 사막이 끊임없이 물을 집어삼키는 듯 보인다.
폭포 밑에 자리 잡은 땅은 반이 물이었고, 나머지 반은 검은 진흙으로 채워진 곳이었다.
세인은 폭포 가장자리에서 위태로운 위치까지 움직여 보았다.
고개를 빼서 아래쪽을 보니 검게 고인 평원이 보였다.
숨 막힐 듯이 넓고 무거운 정적 속에 싸여 있는 아래는, 시간과 함께 정지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지나갈 수 있을까요?”
레드의 물음에 세인은 폭포 위에 놓인 돌들을 바라보았다.
폭이 좁고 평평한 암석들이 자리했지만, 물이 아래로 꺾어지는 곳 바로 옆에 있었고.
그 모습이 마치, 마법사의 책에 나오는 최후의 징검다리와도 같았다.
그 사이사이로 검은 물이 흘렀다.
돌에서 오른쪽으로 몇 미터 정도만 벗어나면 낭떠러지였다.
그들은 원래 저 징검다리를 통해 폭포를 지나갈 생각이었다.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다리로 폭포를 가로질러 지나가면, 그 자체로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다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폭포 후면 쪽으로 빙 둘러 돌아가자니 엄청나게 긴 거리를 이동해야만 한다.
최적의 루트는 예정대로 폭포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세인은 생각해 볼수록 눈앞의 징검다리가 마법사의 책, 거기에서 묘사되었던 다리와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전까지는 몰랐는데 지도로 본 설명과 달리, 이렇게 직접 보니 마법사의 책이 떠올랐던 것이다.
착각일까?
‘그러고 보니 마법사의 책에서 주인공이 낯선 사람들과 함께 폭포를 건너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후에 어떻게 전개되더라?’
하지만 세인은 그가 살던 시대에 있을 때, 마법사의 책을 제대로 정독한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대한 기억이 아주 희미했다.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을 기억하려 해봤자 헛수고일 뿐이다.
더구나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마법사의 책에 대해 기억하길 깨끗이 포기한 세인이었다.
그는 현실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근방에 다른 다리는 없어. 이대로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문제는 비가 내리면 물이 폭발적으로 불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건너편이 안 보이는 폭포를 완전히 건너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될 테니까요.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 할 수도 있죠. 그 상태로 물에 휩쓸리면 최악이고요.”
세인은 잠시 비가 그치길 기다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게 우기의 시작일 수도 있었다.
그때 멜라니가 끼어들었다.
“건널 수 있다면 기회는 지금뿐이라고. 정말 이 넓은 폭포를 돌아가겠다고? 한세월이 걸릴걸. 그리고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그때 빨리 건넜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 미련을 남겨두느니, 이렇게 고민할 시간에 빨리 건너버리자고!”
“고작 그게 소설가의 의견이냐. 결국 성질대로 하겠다는 거잖아.”
레드가 중얼거렸지만, 멜라니가 아랑곳하지 않고 앞장을 섰다.
망언까지 내뱉으면서 말이다.
“어차피 난 지적인 소설가 말고 관능적인 소설가가 꿈이니 상관없어.”
그런데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세인이다.
“뭐야?”
멜라니가 짜증을 내자, 세인이 말했다.
“내가 앞장서겠어.”
그러자 멜라니가 웃어 보였다.
“그래. 후딱 건너버리자고.”
물기로 인해 미끈거리는 바위를 세인의 신발이 밟았다.
어차피 마음을 정한 거, 세인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말들은 워낙 순하고 우직한 녀석들이라 레드를 따라 저항 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일행은 폭포 위를 걸어가게 되었다.
왼쪽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강이었고, 우측은 절벽이었다.
징검다리의 끝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의 등 뒤에 있는 땅은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는데도 중간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동안 묵묵히 걷던 세인이 갑자기 말했다.
“이거 흔들바위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세인이 바위 위에 올라가자, 바닥이 양옆으로 출렁였다.
물속에 태반이 잠겼다가 다시 나타나는 돌을 바라보며 멜라니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드는 말들을 신경 쓰느라 여념이 없었고 말이다.
“이 판국에 흔들바위라고? 그런데 이게 완전히 가라앉거나 옆으로 굴러가 버리면 어쩌지?”
그때 눈치도 없이 멜라니가 끔찍한 소리를 했다.
그러자 유미리가 긴장이 풀렸는지 픽 하고 웃어 버렸다.
그녀 딴에는 이런 상황에서 저런 농담을 던질 수 있는 멜라니가 이상하고 웃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미리와 눈을 마주친 멜라니도 같이 웃어 보였다.
이어지는 흔들바위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후로도 계속 나타났다.
사람들이야 공포를 이겨내고 전진하면 그만이지만, 말이 문제였다.
다행히 빅풋들은 끝까지 잘 따라와 준다.
대견한 녀석들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 바위들이 출렁이더니, 주위로 하얀 물거품을 일으켰다.
그때 머리 위의 하늘은 회색과 검은색이 한바탕 뒤섞인 빛이 되었다.
그리고 물방울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본격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게 끝은 아니다.
콰과광, 소리가 났을 때 멜라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뒤의 레드를 돌아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거 설마 천둥이야?”
그때 강 쪽에서 불어온 세찬 바람이 일행의 망토를 우측으로 휘날리게 했다.
매우 음습한 바람이었다.
팔을 들어 그 바람을 막은 레드가 멜라니의 물음에 대꾸했다.
“후딱 건너자며? 여기에서 돌아가고 싶어?”
“천만에. 이미 내친걸음이야. 천하의 멜라니가 검을 뽑았으면 레드의 목이라도 쳐야지.”
영양가 없는 잡담을 주고받으며 멜라니와 레드가 걷는 가운데, 유미리가 앞서가고 있는 세인의 상태를 물어왔다.
“괜찮아?”
“아직은 걸을 만해. 그런데 암석들 틈이 점점 벌어지는걸.”
“순한 말들을 본받아 보자고. 흔들리는 바위에서도 침착했어. 여기에서 난리를 피울 녀석들은 아니야. 그런데 인간들이 의기소침해져서야 되겠어?”
“그리고 점점 강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어. 아니면 바위가 낮아지던가, 둘 중 하나겠지.”
유미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늘은 이제 완연한 검은빛이 되었다.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이따금 전광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일행을 위협하는 듯하다.
이끼까지 뒤덮인 바위가 나타나자 중심을 잡는 게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건너고 있는데, 잔비가 끝나고 세찬 폭우가 시작되었다.
고요하던 수면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뿌연 운무를 일으킨다.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물을 뿌린 듯 따닥이는 소리가 주변을 먹어치웠다.
요란한 비를 맞는 멜라니가 난감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어. 속도를 내서 이대로 건너야 해.”
그렇게 말한 세인은 돌 위를 더 빠르게 걸어갔다.
속도를 올려서 그대로 통과해 버릴 심산이었다.
적어도 날붙이가 빗속을 가르며 날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챙!
검집을 들어 쇠붙이를 튕겨낸 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전방을 살펴보았다.
뿌옇게 일어난 운무 사이로 거무스름한 형체가 아른거린 것도 같았다.
“전방에 적이 있어.”
큰 소리로 말한 그는 앞으로 뛰어갔다.
방금 날아온 표창 같은 것을 튕겨내며 느꼈다.
쇠붙이에 실린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여기는 일자 구조였으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 아래에서 공격해 온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적어도 측면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세인은 경고와 동시에 앞으로 뛰쳐나가며 뒤에 있는 사람들이 공격받는 포인트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뒤쪽은 레드가 맡아줄 것이다.
빗속에서 검을 뽑아 든 세인이 전방에 버티고 서있는 검은 물체와 점점 가까워졌다.
날붙이를 날린 상대는 인간의 모습을 닮아 있었고, 세인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다.
탐스러운 은색 머리카락 뒤로 늘어뜨린 후드가 세인의 눈에 확대되어 왔다.
세인은 마검을 뽑은 상태에서 가로로 날을 뿌렸다.
그러나 상대의 몸을 절단할 것 같던 검격은 허무하게도 허공만 갈랐을 뿐이다.
상대는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그대로 한 바퀴를 굴렀다.
그러면서 날렵하게 발을 뒤로 뻗는데, 그 뒤축이 세인의 턱에 닿을락 말락 했다.
상대의 신발에서 뿌려진 물방울이, 그의 얼굴에 부딪혀 부서졌다.
상대의 민첩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몸을 뒤틀어 공세를 피해낸 괴인은 쌍검을 허리춤에서 뽑아 들었다.
그렇게 빗속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 유미리와 남겨진 사람들은 전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무기를 뽑아 든 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레드는 뒤에서도 기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경계심을 세웠다.
“음?”
그때 유미리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옆쪽에 돌렸다.
검은 하늘 아래 돌변한 물바다가, 그녀의 옆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그 너머 어딘가로 고정된다.
한참 앞쪽의 세인은 상대와 계속 공방을 펼쳤다.
상대는 변칙적인 공격도 모자라 발차기까지 섞어 가면서 그를 곤란한 상황으로 밀어 넣었다. 바닥은 물로 인해 미끌미끌했고 좁아서 운신이 여의치 않았다.
거기다가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상황이었다.
습격자의 검이 세인의 검과 얽혀들었다.
상대의 검을 타고 그의 장검이 미끄러지듯 파고들 때, 다른 검이 그의 검을 막아섰다.
힘겨루기도 잠시, 세인은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상대의 무릎이 그의 복부로 빨려들 듯 파고들었다.
그 충격에 몸이 굽혀질 때 상대의 팔꿈치가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리가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것이나, 세인은 습격자를 향해 마검을 거꾸로 잡고 반격했다.
검 자루에 자칫 턱을 얻어맞을 뻔한 상대는 ‘칫.’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물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그렇게 간격을 벌린 세인은 상반신을 가누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엘라이저.”
은발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 미인이 그 부름에 눈을 깜박였다.
깜박이는 그녀의 눈은, 과거 세인이 알던 외눈이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둘 다 멀쩡했다.
단지 지금 그녀가 품고 있는 눈빛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사악해 보인다.
평소 그가 알던 엘라이저가 아니었다.
그녀 전신에서 적대적이고 표독스러운 분위기가 넘쳐났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엘라이저가 뜨거운 입김과 함께 붉은 혀로 자신의 입가를 핥았다.
그러면서 앞에 버티고 선 남자를 탐색했다.
그 앞에서 세인은 마검을 검집 안에 밀어 넣었다.
마치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