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 아침이 오면 (5)
진력이 빠진 연주자들이 무대 인사를 마치고 퇴장하자 댄스 타임이 이어졌다.
이제 풋내기 연주가들의 차례였다.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곡을 연주하자 여자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그들은 처음 보는 사이라도 상관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어울렸다.
모르는 사이도 이럴진대, 아는 사이라면 더 자연스럽게 달라붙었다.
자매끼리 껴안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도 연출되었다.
아줌마에게 붙잡힌 한명의 처녀는, 수다스러운 아주머니의 집요한 추궁에 시달려야만 했다.
“말해봐. 저 청년이랑 어디까지 갔어?”
물론 여기서 진도를 말해 버리면 내일 아줌마들의 입방아에 한동안 오르내릴 것이다.
앉아 있던 유미리에게도 한 여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며 춤을 신청했다.
“파트너가 없어 보이는데 나랑 춤출래요?”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아가씨인 멜라니였다.
유미리는 키가 훤칠했지만, 멜라니는 키가 작았다.
키 차이가 꽤 나는 둘이 잘 어울리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꼭 손을 잡고 추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유미리는 그녀와 짝을 이뤄 가벼운 몸짓을 보였고, 멜라니도 흥겨운 듯 몸을 흔들어 댔다.
물론 처음에는 의도적인 접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멜라니는 흥이 적지 않은 여자이기도 했으므로, 곧 음악에 도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그 흥이 지나치면 엇박자를 낳기도 한다.
그걸 본 레드는 ‘왜 부끄러움은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의 몫인가.’라는 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세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용병이야?”
레드는 말을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참으로 붙임성 있는 마족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지금 상황은 할 것 없는 남자들이 나란히 앉아 잡담을 나누기 좋은 시간이다.
“성기사입니다.”
“나는 세인이라고 해, 여행자지. 그쪽 이름은?”
“레드입니다. 반갑습니다.”
성기사라고 말했을 때 레드는 상대의 눈동자를 보며 흔들림을 감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의 눈 안에 깃든 것은 호감이었다.
레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추슬렀다.
그는 세인보고 왜 초면에 반말을 하냐고 지적하는 대신 능청을 떨려고 했다.
“의외로 죽이 잘 맞는군요.”
레드가 두 여자를 가리켰다.
어느새 멜라니와 유미리는 서로 깔깔대며 손뼉을 치고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그리고서 펄쩍펄쩍 뛰기도 하는데, 그녀들에게 짓밟히는 잔디만 불쌍할 따름이다.
그 꼴을 보며 레드는, 멜라니가 분위기에 만취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세인은 레드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팔짱을 끼었다.
“상극은 서로를 끌어당길 때도 있지. 높낮이의 부조화조차 그런가 봐.”
“동행하시는 분은 같은 마족처럼 보이는데요. 서로 연인 사이?”
레드는 지나칠 정도로 상대를 떠보았다.
“그냥 동료.”
대답한 세인은 멜라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세인은 무거운 입술을 떼며 질문을 던졌다.
“저 사람은 당신의 연인?”
손사래를 친 레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담긴 난처함을 알아차린 세인도 덩달아 웃음을 지었다.
뭐 어쨌든 지금 그에게는 이 순간이 기적과도 같았다.
물론 상대는 세인을 알아볼 리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마법의 시간이었다.
“세인님은 어디로 여행을 가시나요?”
“여기서 충분히 쉬었으니 북쪽으로 갈 생각이야.”
“저희 일행도 마침 북쪽으로 여행을 할 생각이었는데, 같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서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때 춤을 마치고 헐떡거리며 다가오던 멜라니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레드가 동행을 제의한 것이다.
파악이 쉽지 않으니 붙어서 관찰하겠다는 의도 같은데, 그런 신중함이야말로 멜라니가 가장 귀찮아하는 것이었다.
‘설마 이 제안을 받진 않겠지?’
멜라니의 이런 마음과는 달리,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뭐?’
뒤에서 멜라니와 유미리는 동시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말리기에는 모든 게 한순간의 장난처럼, 요정이 나타나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들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진 후, 유미리가 세인에게 물었다.
“무슨 속셈이야?”
생판 모르는 사람을 합류시킬 정도로 쉬운 여행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가 본 레드에게서는 성직자 느낌이 났다.
아무리 세인이 세계수가 권한 동행자라 할지라도, 그는 유미리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합류를 결정해버렸다.
“정말로 일손이 필요하잖아? 북쪽까지 매우 먼 길이야. 도와줄 사람은 많을수록 좋아.”
“그 남자는 우리의 적이 될 수 있다고. 제정신이야?”
“여기는 아직 중앙이 아니야. 정작 중앙까지 가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발견해도 받아들이기 힘들걸? 전의 네 말대로, 파티가 너 때문에 실패했다면 다들 이를 갈고 있을 텐데? 첩자를 들여보내지 말란 법도 없어. 차라리 이렇게 후방에서 찾는 게 나아. 나 혼자서 기습까지 다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어차피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나마 여기에서 이러는 게 위험성이 낮은 거야.”
그러면서 가벼운 얼굴로 검을 손질하는 세인이었다.
그걸 보며 유미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세인은 레드라는 인간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그는 성기사였다.
그가 성기사의 본분에 어긋난 일을 할 리 없었다.
설령 그의 본질이, 세인이 알던 본질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었다.
왜냐면 세인은 레드에 대한 세세한 버릇까지 몽땅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거짓말을 할 때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레드가 어떤 의중을 가지고 접근했든지 간에, 세인을 완벽히 속여 넘길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길지 않아도 좋다.
조금만이라도 함께 걸어갈 수는 없을까?
이런 판에 마침 레드 쪽에서 접근해 오니 세인도 동행을 결정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유미리 입장에서는 참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세인에게 따져댔다.
물론 레드 쪽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멜라니가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묻자 레드가 짧게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저 여자는 다시 살아난 자야. 그런데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리고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나도 혼란스러워. 좀 더 알아봐야겠어.”
* * *
상단주는 세인과 유미리를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로서는 둘을 동족이라고 생각하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인과 유미리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그가 건네주는 돈만 받아 챙겼다.
여행 경비는 필요하니까 말이다.
“북부로 간다면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어?”
상단주를 찾아갔을 때 세인이 힐다에게 한 말이다.
그녀는 용병이니까 보수만 준다면 동행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같이 싸워보니 충분히 실력 있는 용병이었고 말이다.
그러나 힐다는 고개를 저었다.
“돈도 생겼으니 당분간 여행을 즐겨야지. 난 홀로 하는 여행이 좋거든.”
“안타깝군. 건강하고 별 탈 없이 네 여행을 완성하길 바라겠어.”
둘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때 세인이 힐다에게 돌아선 것을 본 레드가 다가온다.
그리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야만인 여성도 함께 갑니까?”
“아니요.”
그러자 레드는 점점 멀어지는 힐다의 넓은 등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야만인은 질색이거든요. 그들은 너무 과격해요.”
세인은 그 말을 들으면서, 저절로 묘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로서는 아주 머나먼 미래에 레드가 어떤 자리에 앉을지 아니까 말이다.
결국 야만인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될 팔자인데….
그때 레드가 물었다.
“그런데 북부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볼일이 있어서요.”
“아, 볼일….”
넌지시 찔러보며 목적을 알아내려던 레드는 입맛만 다셨다.
* * *
그날 오후.
네 명으로 이루어진 일행이 가나안을 떠났다.
빅풋 품종 말 두 마리만을 거느린 채였다.
타고 다니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짐을 싣기 위한 말이었다.
출발하기 전 레드와 세인은 지도를 보고 북상 루트를 짰다.
대규모 행단 같은 것에 끼지 못한다면, 차라리 지름길로 가는 게 좋다는 의견이었다.
지름길은 많은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곳이고 험로인 대신, 북상하는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험지라서 마차를 탈 수 없습니다. 일단 구렁이 구릉 지역까지 간 다음에야 마차를 사서 이동할 걸 고려해 볼 수 있겠네요. 당분간은 도보 이동입니다.”
걸어가는 레드가 멜라니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멋대로 일을 짠 그를 노려보고 있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레드의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멜라니는 유미리와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걷는 내내 목이 마를 텐데도 유미리와 함께 수다를 떨어댄 멜라니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웃음은, 출발 전 레드에게 짜증을 냈던 그녀의 행동과 완전히 달랐다.
“유미리, 너는 말이 통해서 참 좋아.”
‘말이 통하는 게 아니라, 네 말을 다 받아줘서 그런 거겠지.’
레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고삐를 잡고 주위를 살폈다.
그는 후미 쪽이었고, 중간에 유미리와 멜라니가 위치했다.
그다음은 선두에 세인이었다.
세인은 방패를 든 상태로 반나절 동안 길잡이 역할을 했다.
나머지 반은 교대할 레드의 몫이었다.
선두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걷는 것은 그렇게 남자들이 다 했다.
반면 멜라니와 유미리는 중간에서 소풍이라도 나온 양 계속 떠들어 댔다.
하늘은 여전히 암울했지만 길 위는 평온했다.
코스모스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멀리 보이는 산과 너른 들은 선명한 황토색이었다.
모여있는 나무들 위 불쑥 솟아오른 원형의 돌탑 뒤로, 철새가 무리 지어 날아간다.
좀 더 걸어가자, 돌탑 주변에서 커다란 바위들이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먼지투성이 바위는 사실 거북이들이었다.
“진정한 현자님들이 낮잠을 즐기고 있네. 팔자도 좋아.”
멜라니는 그렇게 말하며, 거북이를 존중하는 풍토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우리 멋대로 만들어낸 인식 때문에 저 좋은 고기들을 내버려 둔다는 게 이상하잖아. 존중은 개뿔. 배고픈데 무슨 상관이야. 보는 족족 먹어 치워야 해.”
그녀들의 수다를 들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세인은, 말을 끌고 잠들어 있는 거북이 바위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았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가지. 그늘도 있고 좋잖아?”
네 명은 거북이 바위 위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보통 점심은 걸으며 먹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 위에 앉아 부스럭거리고 있는데도, 팔자 좋은 거북이들은 머리를 내밀 생각도 안 했다.
그들은 알을 낳을 때만 빼놓고는 매사에 게으름뱅이였다.
가죽 주머니에서 호두를 꺼내 흔들어 보인 멜라니는 레드에게로 던졌다.
그러자 레드가 그것을 받아 악력으로 부숴버렸다.
“샌드위치를 싸 왔다면 좋았을 텐데.”
“그거 알아? 샌드위치는 원래 도박 중독자가 만들어낸 음식이래. 포커를 치다가 식사하러 자리를 옮기기 싫어서 만들어낸 거야. 그런 태만과 게으름이 간편한 음식을 발명한 거야.”
수다 속에서 작은 가방을 열자, 땅콩과 치즈를 넣고 압축한 통밀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꿀에 절인 마늘을 채워 넣은 과일도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수통에는 차가운 물이 가득 차 있다.
세인은 수통에 들은 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어느새 햄버거와 샌드위치의 차이점에 관해서 토론하고 있는 여자 둘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은 언제부터인가 레드와 닮아 있었다.
저 여자들은 지치지도 않나?
“햄버거는 햄이 들어가잖아.”
“샌드위치도 햄을 넣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이 논란을 철저히 파헤치려면 누가 먼저였느냐가 중요해. 결국, 근본 문제라고. 델루이즈에서 시작된 염소 빵이 소운에서는 나귀 빵이라고 이름 붙여서 팔려.”
“으음.”
“둘의 차이는 버터를 뿌리냐 안 뿌리냐 뿐이야. 그런데 가격 차이는 버터 정도가 아니라고. 그래서 염소 빵을 발명해낸 더이스와 나귀 빵의 창시자인 행크가 평소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는 거야. 물론 누가 베꼈을 수도 있겠지. 우연일 수도 있고. 우연일지라도 분통 터지는 일일 거야. 상대는 아류를 내놓은 거 같은데 많은 수익을 내니까.”
그녀들의 수다 속에서 세인이 건포도를 입에 넣고 있을 때였다.
그때 레드가 다가왔다.
그는 호두를 나누어 주며 말을 걸었다.
“비가 안 와야 할 텐데 말입니다. 비가 오면 걸어가야 하는 거리가 엄청나게 늘어날 겁니다.”
그의 말에 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의 하늘 속에는 태양으로 추정되는 빛 덩어리가 뿌옇게 자리하고 있었다.
차후 날씨를 예상하려 해봐도, 원래부터 하늘 전체가 비를 뿌릴 듯한 회색으로 뭉개져 있었다.
“습기는 그리 느껴지지 않는데….”
둘은 나란히 앉아 음식을 먹었다.
하늘은 변덕스러웠고 언제 그 심술을 드러낼지 몰랐다.
가끔 운에 의존해야 할 때도 있다.
레드는 이야기 도중 세인이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고 느껴지자 물음을 던졌다.
“뭐 물어볼 것이라도?”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을 많이 닮아서.”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고개를 돌린다.
그때 둘의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약간 거리를 둔 곳에서는 여전히 멜라니와 유미리가 서로 속삭이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대체 뭐가 그리 즐거운 걸까?
잠시 세인은 그런 생각을 한다.
“자기가 그래? 진짜로 자기가 미래에서 왔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야? 겉은 멀쩡히 생겨서…. 관심 끄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그래. 똑똑히 내 귀로 들었어.”
“와, 여태껏 내가 살아보며 들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오글거리는 이야기야. 이건 차마 욕도 못 하겠다.”
아니. 이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알 것만 같았다.
세인은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 둘은 킥킥거리며 세인을 씹었고, 도중에 멜라니는 실수를 가장해 땅바닥에 음식 부스러기들을 흘렸다.
일행이 다시 출발하자 바위 몇 개가 들썩거리더니 긴 목을 뺐다.
노란 부리에 세 개의 눈을 가진 거북이 머리는, 멜라니가 바닥에 흘리고 간 땅콩 부스러기를 혀로 핥아 먹었다.
지친 다리를 쉬게 하려고 말 위에 잠시 올라탄 탄 멜라니는 그런 거북이들을 멀리에서 지켜보았다
입으로야 저런 놈들을 깡그리 잡아먹어야 한다고 말한 그녀였지만, 사실 험한 시대에 살아남은 생명체에 대해서 감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시대에 저런 것들이 용케 살아남아 주어서 고마웠다.
그게 멜라니의 속마음이다.
그런 멜라니를 곁에서 바라본 유미리는 옅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탑과 거북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주었다.
“현자들과 바벨탑 이야기 알아?”
“모르는데. 들려줄래?”
“옛날 옛적에 땅 위 사람들은 여러 개의 언어를 썼어. 백 가지도 넘었다고 해.”
“심한 사투리 같은 건가?”
멜라니의 물음에 유미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아예 글이나 말이 다른 나라가 백 개가 넘었다는 거야. 상상해봐. 어때? 엄청나게 불편하겠지? 자기 나라를 벗어나면, 아예 다른 언어와 글자가 판을 치는 거야. 외국에서 생활하려면 말과 글을 새로 배워야 한다고. 그것도 나라마다 다 달라.”
“으…. 나라마다 다른 말과 글자를 배우려면 몇 년이나 걸릴 텐데. 죽을 맛이겠다.”
멜라니가 몸서리를 치자 유미리는 말을 계속했다.
앞장서서 가고 있는 세인은 길가의 모난 돌을 발로 툭툭 차내면서 말의 발을 배려했다.
발굽에 박히기라도 하면 귀찮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자들이 나선 거야. 왕의 의뢰를 받은 그들은 하늘의 천사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 가장 크고 높은 탑을 짓게 했어. 그게 바로 바벨탑이야. 그 탑의 목적은 세상의 모든 언어와 글을 하나로 바꾸어 달라는 것이었지. 그러면 엄청나게 편하잖아.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옛날이야기 속 왕과 현자들은 일단 탑을 만드는 게 난관일 것으로 생각했다.
혹은 그렇게 고생해 탑을 만들어 하늘 위의 천사에게 닿아도, 그 천사가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최종 난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걱정을 뒤로하고, 결국 소원의 탑은 완성되었다.
게다가 현자들을 통해 소원을 들은 천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허락한다.”
그런 승낙 앞에서 현자들은 반색했다.
생각보다 쉽게 일이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복병은 의외로 다른 곳에 숨어 있었다.
천사는 그리고 딱 한 문장의 말을 던졌다.
무서운 화두였다.
“그런데 어느 나라의 말과 글자로 세상을 통일할 거지?”
“….”
그래서 대전쟁이 발발하였다.
끔찍한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거기까지 들은 멜라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려 보였다.
“그냥 토론으로 정하면 되잖아.”
유미리는 피식하고 웃었다.
“옛날이야기잖아. 그렇게 합리적으로 일이 풀어진다면, 이게 이야깃거리가 되겠어?”
마음과 자존심을 하나로 합칠 수 없었던 세상은, 결국 엄청난 피를 흘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시체들을 대가로 통일한 말과 글자, 허무한 영광뿐이었다.
또 거기에 상처를 받은 현자들은 죄의식을 느꼈고, 결국 현자들은 거북이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 이후로 거북이들은 돌탑만 보면 쉽게 떠나지 못한다는 이야기야. 그 앞에 서면, 과거가 생각나고 동시에 너무 착잡하거든. 후회와 미련은 그들에게 미래를 볼 수 없게 만들어. 발을 붙잡고 느려지게 만들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멜라니는 물끄러미 유미리를 바라보았다.
유미리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남을 무시하지 않았고 잘 맞춰주었다.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친절했다.
그러면서도 가끔 톡톡 쏘아대며 지루하지 않게끔 해주었다.
“유미리. 너는 음침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아는 것도 많고 참 자상하구나. 말을 계속 섞어보니 넌 좋은 사람 같아.”
“어머? 우린 서로 안 지 얼마 안 되었는걸? 사실 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야.”
그러면서 유미리가 윙크를 날리자 멜라니는 크게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유미리는 자신을 폭로하면서, 상대가 진실을 모르리라 생각하고 농담을 건 것이다.
이게 멜라니에게는 재미있었다.
그녀는 기꺼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러고 저기 앞서가는 세인은 미래에서 왔고?”
눈을 맞춘 둘은 다시 박장대소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세인은 그녀들의 말을 다 들었다.
이제 그의 얼굴은 썩은 감자를 씹은 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