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82화 (182/307)

# 182

& 아침이 오면 (4)

“뭘 봐?”

붉은 머리의 소녀가 쏴붙였다.

그녀의 이름은 멜라니.

아름다운 얼굴에 비해 성깔 더러운 여자였다.

그녀는 방금 카드 게임에서 진 탓을 동료에게 풀고 있었다.

“패배는 승리의 어머니야. 난 고작 승부에 졌을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게 도박꾼인 네가 할 말이냐?”

같이 있는 남자가 질렸다는 얼굴로 중얼거리자, 멜라니는 그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녀는 단신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높은 굽이 달린 부츠를 신고 있었다.

여기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두꺼운 굽으로 걷어차인 쪽은 굉장히 아팠다는 이야기다.

그게 바로 높고 두꺼운 굽에 대한 요점이다.

“으윽! 미쳤어?”

“뭐야? 단련된 남자가 고작 이거 가지고 깡충깡충 뛰어? 토끼띠도 아니고 말이야! 근성이 썩어 빠졌어!”

멜라니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레드를 노려보았다.

허리에 양손을 올린 그녀는 금색 선이 들어간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가출한 귀족 영애였고, 소설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법사의 책이라는 소설을 집필 중인 그녀는 레드를 따라다닌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이런 화풀이나 장난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사이였다.

또 오랜 친구 사이가 아니더라도, 크루세이더를 단신으로 쫓아다닐 만큼 미친 여자니까 무슨 짓이라도 가능했다. 어차피 말이다.

마법사의 책이란, 신을 멜라니의 방식대로 추적하는 탐방기라고 할 수 있었다.

신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가?

그걸 물어보려 성국으로 향하는 대신, 그녀는 크루세이더인 레드에게 달라붙었다.

그건 그 자체로 굉장히 위험한 짓이고,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며 말리던 레드도, 어느새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둘은 한차례 소란을 떤 이후로 말없이 가나안의 야시장을 거닐었다.

호객꾼들이 사방에서 귀찮게 굴었지만, 멜라니의 심술 가득한 얼굴 앞에서 결국 꼬리를 말게 되었다.

레드는 그런 멜라니 옆에서 걸으며 침묵을 고수했다.

결국 대화 단절에 지친 멜라니가 먼저 백기를 들고 말을 건다.

“여기로 온 이유가 뭐야?”

“….”

“이봐, 레드. 왜 우리가 야밤에 여길 헤매고 있냐고. 이런 너 때문에 아까 내가 도박에 휘말려서 졌잖아. 네가 저지른 짓을 봐.”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레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되살아난 자가 걸어 다니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 그것도 바로 여기에 말이야.”

“출처가 어디야?”

“내가 아까 봤어.”

멜라니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그냥 원래 그녀의 성격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해버렸다.

“하지만 네 눈깔을 믿을 수 있겠어? 좀 더 객관적인 증거는 없는 거야? 그냥 몇 번 보고나서… 아, 죽었다가 살아났군. 이랬다고? 야! 네가 점쟁이야? 점칠 거면 아까 내가 도박할 때나 조언해주지 그랬냐? 주사위 숫자 정도는 알아맞힐 수 있잖아?”

빈정대는 멜라니 앞에서 레드는 주먹을 쥐고 몸을 떨었다.

이미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렸지만, 이 작은 친구는 언제나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내 말은 여기에 죄를 범한 자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확실히 느껴졌어. 죽음이 동반된 이상한 불균형이.”

“세상에 되살아난 사람이 드문 것은 아니잖아. 하물며 걸어 다니는 시체도 있고. 대체 뭐가 문제야?”

“일시적인 게 아닌 거 같아서 걱정인 거야. 겉모습을 보면 너무 멀쩡해 보이고 말이야. 위화감이 없어. 최소 내 감각이 착각을 일으켰는지는 알아봐야 할 거 아냐? 만나서 관찰해봐야 하겠어.”

세계수는 유미리를 물질계에 고착시키는 것 외에도, 타인이 느끼기에 보통사람과 다름없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미리의 이상함을 알아차린 레드의 감이 굉장히 기민한 것이었다.

그러나 멜라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참 너도 공사다망하다. 이런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단 말이야? 제발 그 오지랖 좀 집어치우면 안 되겠니? 네 인생이나 잘 챙겨 성직자 아저씨.”

“멜라니. 제발 좀 비꼬는 것 좀 그만둬 줄래?”

멜라니와 레드는 말싸움을 하면서 계속 걸었다.

지금 그들은 오늘 밤 최고의 화젯거리가 되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오늘 밤 평소보다 큰 규모의 야시장이 열린 것도, 모두 그 구경거리 덕분이다.

“그래서 그놈이 어디 있는데?”

“지금 가는 곳에 내가 말한 자가 있어. 그리고 놈은 아니야. 여자지.”

그의 대답에 멜라니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난 남자가 좋은데.”

레드는 그녀의 말을 깨끗이 무시했다.

*  *  *

이따금 운동 경기가 열리기도 하고, 특수한 장이 서기도 하는 공터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연인들은 손을 잡은 채 참석했고, 삼삼오오 몰려나온 가족 단위도 보였다.

잔디밭이 펼쳐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들은, 바닥에 먹을 걸 잔뜩 풀어놓았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이벤트를 기다렸다.

그중에는 세인과 유미리도 있었다.

멜라니와 레드는 그들의 반대쪽에 자리를 잡았다.

레드는 멜라니 곁에서 눈을 빛내며 세인과 유미리를 관찰했다.

세인은 겉보기에 분명 마족처럼 보였다.

그리고 곁의 유미리는….

“아무리 봐도 이상해.”

레드는 신음을 흘렸다.

주의 깊게 여자를 보니 계속 본능적인 거부감이 느껴졌다.

마족이라서 느끼는 이질감이랑은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 레드의 속도 모르고 곁에서 멜라니가 속삭였다.

“옆의 남자를 보니 마족처럼 보이는데? 여자도 창백한 안색인 걸 보면 마족이야. 둘 다 그냥 마족이잖아. 혼혈 특유의 느낌을 보고 네가 착각하는 거 아냐?”

“….”

“야. 그만둬. 그냥 근처의 신전에 신고하고 말아. 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랑잎 같은 인생이면서 웬 참견이 그렇게 많니?”

“….”

“이봐, 레드. 내 말 듣고 있어? 너나 챙기라고. 이러니까 왠지 스토커 같잖아. 당장 네 인생이 바람 앞의 흔들리는 등불인데, 여자나 훔쳐보고 있을 때야?”

멜라니가 신나게 떠드는 가운데, 팔짱을 끼며 인상 쓴 레드는 시종일관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세인과 유미리를 계속 관찰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당사자만이 알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홍수처럼 쏟아지는 수다 속에 앉은 레드의 인상이 점점 구겨졌고.

그런 친구가 재미있는지 멜라니는 계속 놀려댔다.

가나안의 유명인사들도 잔디밭 위에 천을 깔아놓고 앉는 가운데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그런 그들을 얼마나 기다리게 했을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무거운 악기를 들고 약간 높게 만들어진 무대 위로 올라간 그들은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쏟아지는 박수가 끝나길 기다린 연주자들은 전날 연습했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각자의 악기를 세우거나 품에 안아 들었다.

지휘자는 그런 단원들의 가장 앞에 섰다.

지휘봉을 든 그는 연주하기에 앞서 모여든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주곡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휘자인 맥입니다.”

맥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받침대 위의 악보를 넘겼다.

그러면서 눈은 대중들을 향해 고정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힘든 시대에 이런 연주회를 여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증명해야 합니다. 그 증명은 괴물들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증명을 느낄 가치조차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박수가 일어났다.

사람들의 호응이었다.

그게 끝나기를 기다린 맥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 땅 위의 우리가 이런 축제를 즐김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순간에도 아직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주는 감정을 잊지 않았으며 소중히 품었다고 말이죠. 이 순간 저의 바람. 그리고 가나안의 바람은 그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맥은 연주의 시작을 지시했다.

서곡은 미풍의 시작이란 곡이었다.

이 곡은 전사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맥이 직접 만든 것이다.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이 곡으로 시작된다.

잔잔한 연주가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가슴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눈을 감고 묵념에 빠져들었다.

가나안의 유력인사.

거지, 부자,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 된 모습을 보였다.

묵념이 끝나자 본격적인 연주가 시작된다.

현악기가 울리고 연주자들의 손과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장내에 불어온 음악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거기에 몇몇 악기가 내는 무거운 소리가 자연스레 섞여 들자, 자칫 붕 뜰 수 있는 환희를 붙잡아 주는 역할을 했다.

가나안의 시민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이 음악을 감상했다.

눈을 감고 듣는 사람도 있었고, 음식을 게걸스레 먹으며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숨죽인 채 손을 맞잡고 눈을 반짝이는 연인도 보인다.

세인은 유미리와 함께 조용히 음악을 들었다.

볼에 와닿는 바람은 모여든 시민들의 온기 때문인지, 밤인데도 불구하고 훈훈했다.

그리고 싱그러웠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라도 인간들은 기어이 희망을 품고야 만다.

혹자는 인간의 본능이 악과 폭력이라 말하지만, 희망 또한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 자체가 인간의 긍정적인 희망이 발현되는 장소였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새들이 아찔하게 날아올라 지저귀다가, 낭떠러지처럼 떨어지는 음악을 세인이 따라가고 있는데 차가운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옆을 보니 앞만 응시하고 있는 유미리가 보인다.

그녀는 세인의 손을 잡은 채 작게 속삭였다.

“나는 오늘날의 하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가는 거라지만, 너는 왜 나와 동행하는 거지? 세계수에 어떤 빚을 진 거야? 나와 끝까지 동행해서 좋아질 게 뭐가 있지?”

지금의 진지한 유미리는 아까만 해도 가벼운 모습을 보여줬던 그녀와 사뭇 달라 보였다.

세인은 상대의 접촉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아주 멀리 있는 세리스도 이 정도는 이해해줄 것이다.

상대의 손을 뿌리치기보단, 부서지는 조명 속에서 땀을 흘리며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는 세인이었다.

조명 속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인 연주자들을 바라보며, 그는 유미리에게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 와중에 잠시 틈이 있었고, 그 틈을 감미로운 음악이 훅 치고 들어왔다.

그리고 가슴을 누비며 온갖 감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진실을 말해도 과연 네가 믿어줄까? 그 답을 난 알고 있지. 왜냐면 난 이미 진실을 말했거든.”

그러자 유미리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녀는 진짜 심각하게 세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까지 미래 운운하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란 소리다.

그녀가 관찰해보니, 평소의 세인은 미친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멀쩡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그에 대해 물어본 것인데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었다.

입을 다문 유미리는 세인의 옆에서 노래에만 정신을 쏟았다.

멀리에서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인은 언젠가 그가 들었던 마법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상대는 마법사니까 이런 화제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지.

“유미리. 네가 한계 없는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어떤 마법을 쓰겠어? 오직 단 한 번만, 아무런 제한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다면 말이야.”

세인은 유미리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그녀가 나름대로 답을 내놓거나, 모른다고 답하리라 생각했다.

그런 세인 옆에서 유미리는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기억을 지워주고 싶어.”

“누구의 기억을?”

“아이들.”

“….”

“눈앞에서 아버지가 몬스터에게 찢기는 것을 본 아이들,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부모의 피를 뒤집어쓰고 구출된 아이들, 공포에 질려서 울지도 못하고 굳어 있던 아이들.”

그리고 유미리는 대륙 여행 때 보았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했다.

가난, 공포, 외면, 편견과 고통이 짓밟고 지나간 아이들의 눈에 대한 이야기였다.

세인은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격동 안에서 휩쓸려 나가지 않기 위해, 마치 닻처럼 상대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들의 눈 안에 있는 기억을 모두 지워주고 싶어. 단 하루만이라도 내가 무제한의 마법을 부릴 수 있다면. 그 애들의 고통을 영원히 지워주고 싶어.”

그리고서 유미리는 자신의 고백에 약간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녀의 웃음이 연주 속에서 파도처럼 부서진다.

그런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는 약간 멍한 상태에서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이런 내용을 들을 줄 전혀 몰랐던 탓이다.

그때 맥이 다음 곡을 선언했다.

“마지막 곡은 이어지는 노래라는 곡입니다. 제가 만들었죠. 비록 보잘것없는 곡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함께 살아남아 미래까지 보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지는 내일과 함께 미래로 달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자신이 방금 내뱉은 말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여기 모여있는 인간들도 익히 잘 아는 사실이다.

곡은 잔잔하게 진행되었다.

초반부터가 진군가로 쓰기에는 무리였다.

무언가를 고취 시키려는 의도도 없었다.

힘도 뺐다.

다만 그 잔잔함 속에 지금 시대의 인간들이 겪는 슬픔이 있었고, 그걸 삭혀야 하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이 곡은 응원가가 아니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노래다.

그래서 힘찬 맥동보다는 안정적이고 기초적인 멜로디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에는 웅장함이 필요하지 않았다.

간단한 휘파람 소리만으로도 필요한 것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맥의 의도는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석상이 되어 이 연주를 들었다.

아름다운 가수의 열창도 없는 연주곡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몰아쳤다.

그 파도가 일어난 지점은 잊힌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었고, 붓이나 글로써 표현될 수 없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공명할 수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맥의 곡은 그 선물을 되새기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연주자들을 진두지휘하며 지휘봉을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통해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어루만져 주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천재 음악가였지만 꿈은 기사였다.

몸이 약한 그의 꿈이 좌초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이 빛을 발휘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뒤따랐다.

고통스러운 시대에서 음악이 환영받기란 지난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불치병을 선고받은 그가, 이렇게 꿈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내보이고 있었다.

마지막이니까 여기에서 만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맥은 지휘봉을 흔들며 음악에 취한 사람들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고자 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아!”

“저건?”

고개를 든 사람들은 파란빛을 내며 몰려든 불빛들을 보았다.

수많은 반딧불은 누구의 초대를 받고 여기로 온 것일까?

그들은 무대 위쪽에 드리워진 나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서 빛을 내는데, 나뭇잎 전체가 파란 보석이 되어 한꺼번에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그 빛 속에서 맥은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움켜쥐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일그러진 표정은 이 순간 예술가가 모든 것을 대해 정열을 쏟아붓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주변의 이변도 그를 멈추게 하진 못했다.

어쩌면 맥은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것일는지도 모른다.

이제 곡은 빛의 향연 속에서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힘차게 움직이는 연주자들의 머리 위에서, 반딧불들이 움직이며 파란 폭포를 만들었다.

그 불가사의는 시각적으로 황홀한 장면을 연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연주자들의 손이 움찔한 건 그 순간이다.

채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눈이 당황한 채 일제히 맥에게 쏠렸다.

반딧불들은 지금 음악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어디서 나온 음악일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미물들이 모여 만든 노래는 기괴하게도 인간의 정서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의 맥에게는 위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음악이 부딪혀 온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기민한 지휘자는 그 노래에 맞서는 게 아니라 섞이는 것을 시도한다.

그러자 반딧불이 쏟아내는 음악도 그의 호응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마른 침을 삼키는 순간 드디어 두 음악은 한 몸이 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 경이는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듯, 호응을 하며 음악의 영역을 한 단계 더 높이 올려놓았다.

하지만 이건 영역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음악에 담는 진심을 얼마나 표현하느냐의 문제였다.

맥은 최선을 다해 연주를 끌고 갔다.

아름다운 음악이 서로 머리를 풀어헤친 채 한 몸이 되어 뒹굴었다.

인간의 아픔을 호소했고 위로받았으며, 슬픔을 승화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얼어붙은 관객들은 손끝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반딧불들은 몸을 파르르 떨며 빛의 갈채를 쏟아내는 것만 같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도달한 교감일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여기 모인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앞으로 영원히 이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아득한 과거와 아득한 미래는, 아찔한 포옹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은 더욱 나은 내일에 대한 공감대였을 것이다.

그렇게 죽음을 예감하는 시대.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시대와 미래의 시대는.

불가사의 속에서 함께 만나 화합을 이루고 있었다.

서로의 뜻을 음으로 주고받으며 일치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벌어진 일치는 결국, 경이와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폭풍.

그리고 다시 폭풍이 우레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의 내면으로 치달았다.

고통과 슬픔이 승화된 우레는 감성의 수면 위로 뜨거운 빗방울이 되어 쏟아진다.

이미 물투성이인 바다를 눈물처럼 적시고 다시 적신다.

연주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의 뇌리에는 하늘과 바다가 그려졌고.

그 밀착된 틈을 느꼈고.

그 사이에서 마음껏 전율했다.

그러나 환희의 극치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연소하고야 만다.

최고의 순간은 결코 길지 않기 마련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반딧불들은 기력이 다한 듯 우수수 흩어져 버렸다.

푸른빛이 사라진 가운데 연주장은 이제 적막에 휩싸였다.

모든 것을 바친 맥은 헐떡거리며 주저앉았다.

오래전부터 그의 상의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건 다른 연주자들도 마찬가지다.

짧은 순간 전력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누군가가 홀로 일어나 손뼉을 쳤다.

그가 바로 시작이었다.

모두의 갈채가 쏟아지는 가운데 맥과 연주자들이 밝게 웃었다.

모든 것을 토해낸 후 후련한 얼굴이다.

박수는 계속된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낌없이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한 소년이 외쳤다.

양팔을 들어 올리며, 탈진한 연주가들 앞에서 말이다.

“한 곡 더!”

“….”

시대를 초월하고서라도 꼭 어디를 가나, 눈치 없는 소년이 한 명은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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