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 아침이 오면 (3)
가나안은 고이트의 대도시 중 하나였다.
치안도 잘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으로, 상당히 발전한 도시다.
그런 곳으로 세인 일행이 들어섰다.
성문의 문지기들은 상단주의 신분 패를 보자 두말하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은혜를 입었으니 그 고마움을 갚겠습니다.”
상단주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고이트의 내부로 그들을 안내했다.
상단 지점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일행을 쉬게 하려는 것이다.
세인은 보상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유미리도 있고 해서 상단과 깊게 얽매일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주변 여관에 여장을 풀겠다고 말했다.
이는 비상식적인 일이지만 상단주는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마족이니 내키지 않는 사정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럼 잡은 여관을 알려주시면 심부름꾼을 보내겠습니다. 며칠간은 피곤하실 테니 쉬셔야겠죠? 저녁 식사에 초대할 테니, 나중에 꼭 참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단주는 같은 마족이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아니면 목숨이 얽힌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인지 끝까지 친절하게 굴었다.
세인은 저녁 식사에 응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알았다고 대답했다.
* * *
가나안의 뒤쪽엔 낮은 성벽이 많았다.
원래 도시가 확장되기 전 이곳은 작은 토성이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이 층 정도에서 일층 높이로 세워져 있는 토성은 이제 주민들의 집이 된 지 오래였다.
힐다는 상단주가 있는 상단 지점으로 따라가고, 세인과 유미리는 삼층짜리 큰 여관에 묵게 되었다.
언덕 위쪽에 지어진 곳이라 시야가 탁 트여, 가나안 일부가 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었다.
현재 인류는 비극적인 전쟁 안에 있었지만, 후방에 속하는 가나안은 전방과 비교하면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이미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은, 공기 속에 섞인 긴장감과 불안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토대 위에 이룩한 평온함이었다.
* * *
“….”
세인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였다.
그는 하루를 내리 잔 상태였다.
잠시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곧 답을 되찾고는 피식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알몸인 그는 침대 아래의 옷가지를 찾느라 한참 헤매었다.
그러다가 투덜거리며 침대 옆의 암막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태양 빛이 그의 알몸을 내리쬈다.
널브러진 바지와 상의의 위치를 확인한 세인은 걸어가 옷을 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다시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마검은 검집 안에서 얌전히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어제 목욕 후 여관 주인에게 받아들었던 음식은 문 앞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세인은 싸늘히 식은 수프를 떠먹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여기는 절약을 생활화해야만 했던 그의 성이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가면 어렵지 않게 더 따뜻한 음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발을 찾아 신은 세인이 나무문을 천천히 열었다.
복도는 좁은 편이었다.
유미리는 건너편 방에 묵고 있었는데, 세인은 문 앞으로 다가가서 노크를 하려 했다.
그러다가 곧 그만둔다.
그녀도 쉴 시간이 필요하겠지.
식당이 있는 홀은 일 층에 있었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가려던 세인은 층계 앞에서 우두커니 멈춰선 듯했지만, 사실은 위쪽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옥상에 올라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던 것이다.
원인은 위쪽에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향기였다.
배를 한 손으로 쓰다듬어 본 그는 마음을 정하고 위쪽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는다.
여관 옥상엔 작은 카페가 차려져 있었다.
금속 기둥을 타고 올라간 식물들이 지붕 겸 차양을 만들었고, 여행에 지친 손님들의 휴식 공간을 만들었다.
보라색 선인장과 만개한 꽃들이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는 가운데, 차를 든 손님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체스를 두기도 했다.
그중 몇 명이 세인의 외모를 보았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 한 점원이 찻잔을 들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난 돈이 없는데.”
“돈이 없는데 어떻게 묵으셨어요?”
차를 가져다주는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하자 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후급으로 방을 잡았어. 나중에 계산해줄 곳이 있거든.”
“그럼 이것도 그때 함께 계산하시면 되죠.”
“….”
점원은 옥상 카페에서 얻는 수익을 주인과 나눠 가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얼굴에 철판을 깐 듯 뻔뻔스럽게 굴었다.
세인은 결국 그가 안겨주다시피 하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레몬인가.”
한 모금 머금어 보니 약간 떫은맛이 났다.
하지만 그게 꼭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차를 후후 불어가면서 좋은 자리를 찾았다.
그러자 옥상 외곽 쪽에 홀로 자리한 빈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세인은 거기에 앉아 탁 트인 경치를 구경했다.
가나안의 오밀조밀한 뒷골목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뒤통수 쪽에서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 외에도, 골목과 아래쪽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그의 귀에 담겼다.
그때 그의 뒤로 다가온 점원이 말했다.
“차에는 단것을 곁들이면 아주 최고죠. 그런 의미에서 호박파이 어떠십니까?”
“이미 충분히 달아.”
“단것은 많을수록 선하고 이롭습니다. 단것은 아무리 지나쳐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자고로 단 것은, 단맛으로 덮는 법입니다.”
점원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세인의 앞에서 시종일관 당당했다.
“당신 좀…. 뻔뻔하군.”
“제가 평소에 그런 칭찬을 자주 듣습니다.”
생각보다 집요한 점원이었다.
마족이고 나발이고 물건만 팔면 된다는 사고도 높이 쳐줄 만했다.
결국 고든이라는 점원의 뜻대로, 세인은 차와 파이를 양손에 들고 건물 밖을 구경하게 되었다.
‘미래에 몹쓸 짓을 하게 되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겠지.’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위쪽에 드리워진 잎사귀들을 살랑거리게 했다.
가나안의 공기는 산속처럼 상쾌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사는 활기찬 분위기로 채워져 있었다.
밀착된 집들 위로 황색 하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중심부는 태양이 부서진 자리처럼 붉었다.
누가 봐도 불길한 하늘이었지만, 세인에게는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목욕하고 여관에서 실컷 잔 뒤, 낮에 팔자 좋게 일어나 이렇게 반쯤 눈을 뜨고 낯선 도시를 감상하는 세인은 평소와 달리 느긋해 보였다.
세인은 긴장을 풀고 의자에 앉아서 상상의 나래를 폈다.
좁은 골목길에서 공 차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들의 뒤쪽으로 자신이 사라지는 상상이었다.
‘저 골목 어딘가로 사라지는 거지. 그리고 홀가분하게 사는 거야.’
그렇게 한다면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할 것이다.
물론 실현될 수 없는 상상이었다.
“뭘 그렇게 중얼거려?”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머리를 뒤로 묶은 유미리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의자를 세인의 옆에 놓았는데, 들고 옮긴 게 아니라 질질 끌며 오는 것이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며 유독 귀를 거슬리게 했다.
“내가 중얼거렸나?”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방금 말했잖아.”
“그런가….”
“원래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들은 자기 버릇을 잘 의식하지 못해.”
세인은 다리를 꼬며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리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차와 먹다 만 파이는 난간 위에 올려놓은 상태다.
유미리는 그런 그의 곁에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넌 정말 아찔할 정도로 경제관념이 희박하구나. 이게 기회란 걸 모르겠어? 지금 팔자 좋게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야?”
세인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유미리를 바라보았다.
“상단주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모든 돈을 대준다고 말했지? 그 말은 여기에서라면 돈을 물 쓰듯이 쓸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여기에서 식어 빠진 차나 마시고 앉아 있어야겠어?”
세인은 찻잔에 손을 가져다 대어 보았다.
바람이 불어오긴 했어도 미지근했기 때문에, 아직 차가 식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 여자는 틀렸다.
그러나 굳이 그걸 지적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그거 기회주의자의 말처럼 들린다.”
반박에도 불구하고 유미리는 자기 생각을 재차 강조했다.
“게다가 가나안은 풍족하고 분위기 좋은 도시야. 물주의 돈을 물 쓰듯이 쓰는 것까진 아니지만, 굳이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할 필요가 있겠어?”
유미리는 이미 세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세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일어나기 전 세인은 유미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녀에게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일부러 밝게 행동하는 걸지도 모르지. 누구보다도 오늘 하루의 소중함을 가장 잘 아는 여자일 테니까.’
* * *
가나안의 야시장은 규모가 꽤 되었다.
그리고 시끄러웠다.
여관에 두꺼운 암막 커튼이 필요한 까닭은, 꼭 햇볕 때문만이 아니라 소리를 차단하는 목적도 있었다.
세인과 유미리는 시끌벅적한 야시장을 걸었다.
천막이 대로의 양쪽을 채웠고 램프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밝게 빛났다.
그 빛에 건물들은 낮과 전혀 다른 화장을 한 상태였다.
고기를 굽는 냄새와 수다를 떠는 행인들의 모습이 길 위를 가득 채웠다.
유미리에게 끌려 나온 세인은 의문을 표시했다.
“여긴 치안도 좋다고 들었는데, 검은 왜 차고 나오라는 거야? 거치적거리잖아.”
그러자 유미리가 대답했다.
그녀는 이미 상단에 한번 들렸다가 왔기 때문에 두둑한 돈주머니를 가진 상태였다.
“소매치기가 우리 돈을 노리면 손모가지를 뎅겅 잘라야 하니까?”
세인은 말을 아꼈다.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야기해봐야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시장을 돌아다니며 여행 물품들을 샀다.
고급 램프나 비상식량용 육포, 두껍고 가벼운 침낭 등이었다.
상인은 오리 깃털을 넣어 만들었다는 침낭의 내부를 보여주기도 했다.
“닭 깃털 같은데….”
유미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렇게 말하자, 콧수염을 기른 상인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오늘의 유미리는 영 상종 못 할 여자이기도 했다.
그걸 상인의 반응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아니 손님! 아무리 가격을 후려치고 싶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닭털이라뇨? 이 깃털을 모으느라 일꾼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십니까? 사과하십시오! 당장 사과하라고요!”
“봐봐. 이거 봐봐. 딱 걸렸어.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걸 보니 닭털이 분명해. 손님에게 이렇게 억지를 부려도 돼?”
상인은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억울했던 탓이다.
억지는 유미리가 부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닭털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인은 닭털이든 뭐든 따듯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세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유미리였다.
“세인 보여줘. 보여주라고. 검을 찬 걸 보여주란 말이야.”
세인은 그때 깨달았다.
‘이 여자. 이러라고 검을 차고 나오라 한 거군.’
결국 침낭을 두 푼 정도 싸게 산 그들은 거리를 걸었다.
그들이 가게에서 멀어질 때 상인이 침 뱉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겨우 두 푼이 문제가 아니라 흥정에서 진 게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듯했다.
두 남녀가 새로 진입한 거리에는, 붉은색과 노란빛을 섞은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아까 전에 지나온 거리보다 훨씬 붐빈다.
게다가 과일을 잔뜩 실은 수레가 그들 주위를 돌아다녔다.
과일들은 갓 딴 듯 한결같이 싱싱해 보였다.
밤인데도 시끌벅적한 거리를 그들은 자유롭게 걸어 다녔다.
세인도 이런 게 싫지는 않았다.
필요한 물품을 사고 난 둘은 분수대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법사인 유미리는 아는 것도 많았다.
시체 학자인 그녀는 음침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반에 관해 이야기하며 지식을 뽐냈다.
그리고 종종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녀와 같은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이 시대 안에서 좀처럼 드러나기 힘들 뿐이다.
시원한 물소리를 뽐내는 분수대엔 줄이 쳐져 있었다.
그 은색 줄에 걸린 램프들이 반짝였고, 구리종이 달린 램프는 바람이 지나가면 딸랑 거리며 빛을 흔들었다.
그 위로 주황색과 노란색 띠가 뒤섞인 야광 나비가 살포시 앉았고, 지친 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세인은 노란색 부분이 섞인 날개의 움직임에 잠시 홀려 있다가, 유미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깊숙이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초록색의 보석 같은 것이 그녀의 눈빛 안에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세인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냥 깍지를 낀 손을 풀고 고개를 젖혀 나비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어느새 나비는 날아가고 없었다.
“파웰이라는 나비야.”
“뭐?”
“네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나비는 파웰이라는 나비야. 원래 군체로 움직이는데, 한 마리만 보이다니 좀 특이하네. 파웰이라는 나비들은 원래 하나의 소년이었다고 해. 그는 원래 고아였어. 그런데 빈센트라는 영주의 심부름을 받고 고요의 숲을 헤매게 된 거야.”
유미리는 잡다한 지식을 다시 뽐냈다.
“거기에서 마법사 재칼을 만나게 되었어. 그건 그에게 있어서 불행이었지. 왜냐면 재칼은 영주와 사이가 안 좋았거든. 그래서 그에게 저주를 내린 거야. 저주는 간단해. 삼 년 동안 자신의 제자로 일하다가 마을로 돌아갔을 때.”
“돌아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를 한 명이라도 기억하면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살 수 있게 되는 거였어. 아마 파웰은 속으로 생각했을 거야. 그 내기는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말이야. 고작 삼 년 만에 사람 하나가 지워질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삼 년은 고아를 잊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어. 심지어 심부름을 보냈던 영주마저도, 그가 누구인지 완전히 잊어버렸던 거야. 참 무섭지? 기억되지 않는 것은 말이야.”
“….”
유미리는 몸이 쑤시는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그러면서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결국, 파웰은 다시 재칼의 제자로 돌아가 마법사의 제자로서 평생을 살았어. 그리고 나중에 나비가 되어 흩어졌지. 그 나비들 모두가, 언젠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한다면 다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런 사연이 있는 나비지. 어때?”
“뭘?”
“저 나비는 훗날에 모여 자신이 누구였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전설일 뿐일까?”
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비가 날아간 자리에 다시 시선을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