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 아침이 오면 (2)
회색 망토를 걸친 세리스는 의자에 앉아 있는 캐시오를 관찰했다.
캐시오는 세리스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오로지 폭력과 조롱에서 벗어나기만을 갈구하는 동물처럼 말이다.
“오셨군요.”
캐시오는 세리스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경련시켰다.
그 덕에 그의 수갑에 연결된 사슬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조세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세리스가 천천히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이런 곳으로 장소를 정해서 죄송합니다.”
호위 기사들과 함께 나타난 조세핀의 사과에 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먼저 만남을 요청한걸요. 그리고 이곳과 같은 심처라면 주위의 눈도 신경 쓸 필요가 없으실 테고요. 몸은 불편해도 마음이 편한 장소가 최고죠.”
다른 나라들은 글리터에 대해 경계심을 조금씩 풀었다.
글리터가 가져다주는 이익이 너무나도 달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이더가 세인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되었다.
그건 주변국도 주변국이지만, 가이더의 백성들에게도 너무 많은 오해와 마찰을 동반할 수 있는 문제였다.
또 백성 중에서도 지각 있는 자들은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대놓고 공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미소를 띤 채 대답하는 세리스를 본 조세핀은 그녀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소문으론 아이를 낳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의 몸매를 보면 그게 사실인가 의심될 정도였다.
아주 날씬한 게 처녀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다.
조세핀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중에는 세인에 대한 소식도 있었지만, 묻는 걸 포기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 자리는 조세핀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세리스는 천천히 다가와 조세핀에서 두루마기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조세핀은 위아래로 펼쳐보았다.
“글리터는 가이더와 불가침 협정을 맺기 원합니다.”
“저는 공증인을 세울 수 없어요. 그리고 미래를 담보할 수 없습니다. 가이더의 실질적인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약을 나눈다고 해도 수면 아래에 묻힐 겁니다. 영원히.”
조세핀의 말에 세리스는 문제없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음지의 약속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움직인 겁니다.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세리스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고문실의 바깥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고, 뭔가 질질 끌리는 소음이 다가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질리언이었다.
그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큰 자루를 질질 끌고 있었다.
조세핀의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들은 이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조세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질리언이 자루의 입구를 열었다.
열린 주둥아리 안에서는 사람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자루 안에 알몸으로 담겨져 있는 사람은 바로 빅쏜이었다.
덩컨이 준 문서를 가지고 조세핀의 뒤통수를 친 인물 말이다.
캐시오처럼 눈가리개를 하진 않았지만, 재갈이 물려 있는 빅쏜은 바보처럼 눈을 깜박였다.
오랜만에 조명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눈이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조세핀은 형편없는 몰골의 빅쏜을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왕성에는 이리 같은 자들이 많았다.
그녀가 보기에 빅쏜도 결국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기름을 바른 듯한 입으로는 민의가 어쩌니저쩌니하지만, 그가 한 행동을 보라.
덩컨이 보여준 문서를 당파싸움에 이용했다.
그러면서 조세핀에게 모욕을 가하려 했고, 결국 저지되자 국외로 도주하려 했던 것이다.
그가 꿈꾼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설령 그 세상이 정당하다 해도, 이래서야 방법이 틀렸다.
“사실 트리엔에서 저희 쪽에게 신병을 인도했습니다.”
세리스의 말에 조세핀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힘의 균형이 완전히 글리터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트리엔은 강한 글리터에게서 뭔가 얻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빅쏜은 가이더가 아닌 글리터로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패는 지금 세리스에게 있어 적절히 쓰이는 중이다.
“원래는 트리엔에서 잠시 쉰 후 국경을 따라서 바다로 빠져나가려고 했다는군요.”
그때였다.
바다라는 소리를 들은 캐시오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기겁하며 발작 비슷한 상태를 보인 것이다.
두 여인은 잠시 서로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입에 게거품을 물며 경련하는 캐시오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은 그는 등을 뒤틀며 구더기처럼 움직였다.
그게 참 처절해 보인다.
풀문이 평소에 고문을 착실하게 잘한 덕분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캐시오는 이제 바다의 ‘바’자만 들어도 소변을 조절하지 못했다.
그의 바지가 축축해지는 것을 본 세리스와 조세핀이 시선을 돌려버린다.
이제 두 여인은 부들거리는 캐시오를 깨끗이 무시했다.
그리고 이번 회담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다 꺼냈다.
세리스로서는 조세핀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겠지만, 여기에서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세인이 부재중임이므로 그녀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조세핀이 세인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을 참았듯이, 세리스도 가이더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접어둬야만 하는 것이었다.
서로의 위치가 상대에게 공적인 자세를 유지하게끔 만들었다.
두 여성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고 헤어졌다.
만남의 선물로 취급된 빅쏜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캐시오 곁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빅쏜이 숨긴 문서를 찾기 위해 추궁하는 것이다.
조세핀에게 있어 그런 물질적인 증거는 조속히 없애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이었다.
조세핀은 덩컨이 건네준 문서의 행방만 말해주면 고문을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빅쏜은 그걸 믿지 않았다.
그는 필사본이 아닌, 진본의 행방이 자신의 목숨줄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고문이 길어졌고, 빅쏜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고통 앞에 장사 없다고, 결국 그는 견디다 못해 문서의 위치를 자백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조세핀은 약속대로 정말 그를 풀어주었다.
그런 빅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귀족재판뿐이었지만 말이다.
반대편 증인으로 출석한 덩컨은 빅쏜에게 힐난을 퍼부었다.
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신용도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 주 골자였다.
그리고 분위기상 아무도 그를 반박하지 못했다.
덩컨이 지금 분노를 담아 말하고 있는 건 글리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귀족으로서의 상호 바탕이 될 신뢰와 기본을 지키지 않은 점을 들어, 빅쏜에게 강력한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귀족이라면 당연히 그 분노 지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앙숙인 귀족이라도 중간 지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귀족 이전에 사람이 아니었다.
또 귀족의 스킬 중 지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으로 평가받는 게 바로 협상이다.
그 협상은 처음부터 안 이루어진다면 모를까, 성립됐다면 강력한 신뢰가 요구되는 게 상식이었다.
빅쏜은 그 상식을 어겼다.
그건 귀족 사회를 정면으로 무시한 것과 다름없었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귀족들의 혐오 어린 시선은, 집요한 고문으로 인해 이성이 뭉개진 빅쏜에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빅쏜은 벼랑 끝에 몰린 심정이 되어 소리쳤다.
발작적으로 말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어! 사랑했다고! 그런데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조세핀을 변화시키고 싶었어! 그게 다라고! 그녀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어! 내가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있었는데!”
그 후에도 빅쏜은 한참을 횡설수설했다.
이제 귀족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빅쏜이 몸담았던 정당은 쥐구멍을 찾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 미친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저런 놈이 우리 대표였다고?’
보다 못한 한 귀족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한때 빅쏜과 친구였던 귀족이었다.
“오만한 자! 귀족들을 물 먹이고, 재판장을 더럽히고! 이제는 가이더의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수치를 알아야지! 지금까지 짐승과 말을 트고 지냈었구나! 내 눈을 후벼 파버리고 싶다!”
그것을 계기로 재판장은 노기에 가득 찬 귀족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빅쏜은 자신이 엄청난 발언을 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는 가이더의 국모에게 공개적으로 수치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끔찍한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빅쏜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 상황에서 재판의 결과는 이미 빅쏜의 패배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다행이었다.
캐시오 같은 경우 고문실에서 평생 고통당할 운명이었다.
그에 비해서 빅쏜에게 내려진 판결은 고작해야 광장에서의 태형 같은 공개 수치가 전부다.
사형당할 줄 알았던 그의 운명은 조세핀의 자비로 인해 용서받은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은 그런 조세핀의 너그러움을 찬양했다.
특히 빅쏜이 몸담았던 당은 더욱 열성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안달이었다.
재판장에서 벌어진 창피를 감추기 위해서다.
빅쏜은 알몸으로 거리를 걸어갔다.
사람들의 야유를 받으며 말이다.
그리고 광장에서 볼기짝에 불이 나는 경험을 당해야만 했다.
그가 재판장에서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그야말로 경미한 대가라고 볼 수 있었다.
당장 사지가 절단되어 죽임을 당해도 모자란 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그의 사회적 매장은 기정사실이었다.
* * *
그 후로도 세리스는 직접 발품을 팔며 각국의 주인을 만나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썰미로 상대를 파악하려 했고, 더 긴밀한 협조를 문서로 얻어냈다.
전의 동맹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훨씬 꼼꼼한 공조를 약속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군사적인 행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변국은 이미 글리터가 있음으로써 달콤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 후였다.
그리고 글리터가 단기적인 이익 외에도 장기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 후였다.
이제 주변의 나라들은 서로 경쟁을 하며, 글리터에게 아부를 떨려 했다.
여기에서 우위를 점한 게, 먼저 글리터에 적극적인 협력을 펼쳤던 세 나라였다.
글리터가 급부상함에 따라 그들의 위치도 덩달아 올라가 버렸다.
글리터를 자주 오가는 미스틸 테인같은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 기사 이상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을 정도다.
세리스는 계속 주변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다졌다.
외교력에서 능력을 보여주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위치는 단단해졌다.
오늘도 침착한 얼굴로 글리터 룸에 앉아있는 세리스.
일을 처리하고 있는 그녀는 늘 한 가지만이 최대 관심사였다.
심지어 그 관심사는 태어난 그녀의 자식보다도 늘 우선순위였다.
그건 바로 세인이 언제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인정받는 일이었다.
힘들 때면 세리스는 종종 편지를 꺼내 읽곤 했다.
세인이 떠나기 전,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쓴 편지였다.
그 편지는 수십장이나 되었다.
마차 안에서 골똘히 생각하며 편지를 썼을 그에 모습에, 그걸 상상하던 세리스는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자주 눈물로 끝났다.
그래도 세인이 남긴 편지를 꺼내 보는 게 그녀의 큰 낙이었다.
* * *
식당 하나가 통째로 모임의 장소가 되었다.
넓은 원형 식탁에 빙 둘러앉은 기사들은 포크와 수저를 든다.
맥, 더이스, 행크.
마지막으로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아비게일까지 참석해 버렸다.
작당 모의를 꾸미는 듯, 식탁에 바싹 당겨 앉은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이게 말이나 돼?”
“그러게나 말입니다.”
“누군가가 지금 잘못된 점을 지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번에 앞으로 나셔주셔야 하겠어요.”
수저를 들고 커다란 냄비의 뚜껑을 열던 맥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 바람에 큰 그릇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그의 경직된 얼굴을 뜨겁게 쓰다듬었다.
맥은 그 열기에 상반신을 뒤로 물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럼 누가 또 나설 수 있겠어요? 행크 선배를 시킬까요? 미덥지 못하잖아요.”
더이스의 말에 행크가 인상을 썼다.
왜 나를 걸고 넘어지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애꿎은 찌개만 뒤적거렸다.
하필이면 어제도 아내에게 미덥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붉은 국물이 가득한 찌개에는 송송 썰어 넣은 대파와 소시지, 고기와 당면이 한가득하였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냄새도 끝내줬다.
아비게일이 군침 삼키는 소리가 그 증거였다.
“이봐 더이스. 행크와 나는 무기를 들고 이미 한차례 얼굴을 붉힌 상태야. 그런데 지금 나만 가서 건의하라고? 아무리 내가 기사들의 대표격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냐? 아주 눈 밖에 나라고 기도를 하지 그래?”
그렇게 말한 맥이 작은 그릇에 음식을 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과거 세리스에게 진상을 묻기 위해 행크와 맥이 직접 움직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무장을 하고 그녀를 찾아갔다.
사람들 앞에서야 그녀의 뜻에 수긍하는 척했지만, 진상규명을 위해 따로 찾아간 것이다.
그렇게 그녀에게 충분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그 개인적인 각오는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세인이 기사들에게 직접 쓴 편지를 받아보자, 더는 무력시위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행크와 맥은 좀 더 추이를 지켜보기로 하고 돌아선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민감한 건의를 하러 가라고?
그것도 세리스와 독대를?
좀처럼 그러는 일이 없는 맥도 이번만은 대놓고 투덜거렸다.
“훗날 진짜 세인님이 돌아오셔서 친자임을 확인하면? 그 후에 내가 그분 눈 밖에 난다면? 그때는 자네가 날 책임질 수 있나? 추락한 명예는 물론이고, 끊긴 내 봉급을 책임져 줄 거야? 난 이미 행크와 함께 한번 용기를 냈다고.”
머쓱해진 더이스가 머리를 긁는 가운데 행크가 불만인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더이스는 그때 참여를 안 했지. 비겁한 놈, 뒤로 빠져 있었어.”
그러자 더이스가 볼멘소리를 했다.
“순찰 때문에 외곽 쪽으로 나간 사람이 그날 어떻게 행동을 같이합니까? 저도 책임이란 게 있는 거잖아요.”
“얍삽하다 더이스. 넌 정말 얍삽해.”
“어쩔 수 없었다니까요!”
더이스와 행크가 말싸움을 하는 가운데 눈치를 보던 아비게일이 수저를 들었다.
어쨌든 세인이 정말 세리스를 짝으로 맞아들이고, 그녀가 세인의 아이를 낳은 게 맞다면….
지금 그들은 위험한 발언을 하는 셈이다.
이런 의심조차 불순하다고 받아들여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이해가 가는데, 당최 자신이 왜 여기에 앉아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아비게일이었다.
어쨌든 식욕을 북돋는 뜨거운 찌개에 아비게일이 수저를 가져다 대었다.
이해를 못 하는 건 못하는 거고, 일단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저는 찌개에 닿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비게일을 잊고 있었다는 듯이 더이스가 짠한 눈빛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 끈적한 눈빛을 받은 아비게일의 손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 사람이 왜 이래?’
대충 이런 표정이 아비게일의 얼굴에 만들어진다.
하지만 더이스는 그런 네 마음 다 안다는 듯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 아비게일. 많이 먹어. 그리고 힘내. 많이 상심했겠지. 이해한다.”
동정 어린 시선 속에서 아비게일은 다시 수저를 들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다 엉겁결에 술을 받아 마시게 되었다.
후끈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그리고 위장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그걸 딱하다는 듯이 보던 행크가 다시 아까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생각해 보라고. 이게 말이나 돼? 세인님의 자식이라면 우리 중 하나가 호위기사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미스틸 테인? 걔는 트리엔의 기사잖아. 상식적으로 글리터의 후계자를 왜 그가 맡지? 이건 우릴 우롱하는 처사 아냐? 지금 무기 들고 좀 따지러 갔다 해서, 대놓고 면박 주는 거야?”
그때 더이스가 손을 들었고, 행크가 짜증을 냈다.
“그냥 말을 해! 왜 손을 드냐고.”
“솔직히 저희에게는 섬세함이 부족하잖아요. 무기만 잘 다루지 어린아이를 어떻게 봅니까? 맡은 중책도 있는데.”
“야! 내게는 자식도 있어.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이 애를 맡아도 잘 맡지! 그리고 세인님의 친자가 맞다면 왜 글리터의 보배를 타국의 기사 손에 맡기냔 말이야! 안 그래? 내 말이 틀렸어? 틀렸냐고!”
“예? 예! 그렇죠!”
술을 벌컥벌컥 마신 후 행크가 소리치자 다시 수저를 들던 아비게일이 찔끔하며 대답했다.
그는 행크가 술잔을 들고 건배를 제안하자, 거기에 응하느라 또 술이 위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더이스의 반박이 이어졌다.
맥은 그냥 조용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고 말이다.
“솔직히 그 기사가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섬세하게 보이잖아요. 어차피 안전이야 많은 병사가 둘러쌌고, 유모도 있는데 차라리 그렇게 싹싹해 보이는 인물이 곁에 있으면 좋죠. 더구나 무기를 들고 쳐들어간 판에. 그런 기사에게 자식을 맡기고 싶겠어요?”
그러다가 더이스가 멍한 얼굴로 ‘어?’라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난 안 쳐들어갔잖아? 그런데 왜 난 배제된 거지?”
“더이스. 하관이 긴 너에게 애를 맡기고 싶겠냐? 그리고 그놈이 좀 잘생겼다고 해서, 그게 벼슬이야?”
“적어도 장점은 되죠. 게다가 그 미스틸 테인이라는 기사 말입니다. 이것도 생긴 모양입니다.”
맥은 더이스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맥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별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는 사적인 술자리였지 예의범절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벌써 그게 생겼어?”
그렇게 말하던 행크는 아차 싶어서 아비게일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더이스에게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상심한 사람 앞에서 왜 남의 분홍빛 이야기를 하냐는 뜻이었다.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자 눈치가 없어진 더이스는 계속 떠들었다.
“말도 마세요. 미녀를 데리고 다니더라고요. 라온이라는 여자인데 말이죠. 살은 엄청 희고, 아름답고, 잘 빠졌고….”
더이스가 신나게 떠드는 판국에 맥과 행크는 아비게일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아비게일 입장에서는 자꾸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니, 의미를 알 수 없어 찌개에 손도 못 대었고 말이다.
사람들은 세리스가 임신한 상태로 글리터로 되돌아 왔고, 아이를 낳았으니….
아비게일이 크게 상심할 거로 생각했지만, 막상 그는 거기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결혼식으로 인해 당장 지출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성대한 결혼식은 국비가 많이 드니까.
“그래 우리 아비게일도 나중에 라온 같은 여자 만나면 되지. 안 그래? 자 한잔 마시고 힘내!”
행크가 힘차게 잔을 들어 올리자, 아비게일은 속으로 소리쳤다.
‘또요?’
하지만 그는 결국 술잔을 마주 들고야 만다.
그렇게 기사들이 미스틸 테인에 대해서 씹는 가운데, 아비게일만 점점 취해갔다.
수저를 들라치면 그런 그의 행동이 기사들의 눈에 띄었고, 기사들은 아비게일을 위로해준답시고 술을 권하며 응원을 해주었다.
그럼 아비게일은 수저를 내려놓고 술만 진탕 마셔야 했다.
그러다가 식탁 위에 얼굴을 박아버리는 아비게일이다.
결국 기절한 것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퍼마신 거야?”
행크의 투덜거림이 아비게일의 뒤통수에 쏟아졌다.
결국, 그날 아비게일은 한 수저도 못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