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 아침이 오면 (1)
끝나지 않는 공세란 없다.
아침이 되면 끝나리라 생각했지만, 훨씬 전에 전투는 끝났다.
하늘에서 비가 그쳤을 때 세인의 주위에는 괴물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격전에 지친 사람들은 자리를 이동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잠들었다.
기절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세인은 이제 불타고 재만 남은 자리 앞에 앉아 있었다.
상단주에게서 다시 돌려받은 마검으로 내부를 들쑤시자, 힘 잃은 연기 몇 줄기가 흘러나왔다.
그때 까마귀가 푸드덕거리며 주변을 지나갔다.
옆으로 드러누워 있던 힐다는 그것에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더니 ‘뭐야.’라는 소리를 내뱉고 다시 잠들었다.
날아온 까마귀는 세인의 어깨 위에 앉았다.
까마귀는 약간 거리를 둔 곳에서 간밤의 전투를 모두 지켜보았던 것이다.
세인이 손으로 빗물에 젖은 얼굴을 훔치느라 어깨가 약간 기울어졌다.
하지만 까마귀는 흔들림 없이 그의 몸 위에 앉아 있었다.
“고생이 많군.”
까마귀의 말을 무시하며 세인은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몸을 웅크렸다.
체온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튼튼한 몸이라고 해도 격한 전투를 치렀다.
거기에 더해 땀이 식은데다가 밤 내내 비를 맞은 몸이었다.
잘못하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었다.
잿더미를 들쑤시던 마검을 허벅지 위에 올린 세인이 맞은편에서 잠들어 있는 유미리의 얼굴을 보았다.
한때 대단한 마법사였을 그녀는 지금 연약한 아기 새와 다름없었다.
자신도 이 시대에 와서 마검의 힘이 잠들었다지만, 라이트닝 블러드로 태어난 몸이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지닌 힘이 있었다.
물줄기가 다시 세인의 웅크린 몸 위로 뿌연 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빗줄기 사이를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의 몸통이 잠든 유미리를 건드렸을까.
유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렸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세인에게로 다가와 그의 등에 자신의 등을 붙였다.
그리고 전에 물었던 라이프 베슬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라이프 베슬은 생명의 영혼을 조작하는 작업이야. 영혼을 추출해 시체나 동물. 물건에 넣는 원리를 탐구하는 거지. 처음에는 괴물들이 인간을 제련하기 위해 탐구했었어.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추출해 작동 원리를 캐내고 싶었거든.”
유미리가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켜자, 세인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세인은 그 기울어짐을 느끼면서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떻게 라이프 베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야? 시체학자라서?”
“한때 동료였던 마법사 때문이야. 맥그리거라는 사람이지. 그는 소중히 여기던 친구인 스톰이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게 되자, 도저히 그걸 두고 볼 수 없었어. 그래서 코볼트의 몸에 영혼을 넣으려고 시도하게 되었지. 내가 그걸 도와주면서 지식이 쌓인 거야.”
세인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라이프 베슬은 간단히 말해 생명체의 영혼을 이리저리 옮기는 작업이었다.
물건이나 동물에 혼을 넣는 것이다.
유미리는 한때 그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 손을 털게 되었다.
“영혼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필연적으로 벌을 받게 되어 있어. 그걸 알아차린 이후로 난 최소한의 선을 지켜려 했지. 지옥만큼은 가기 싫었거든. 하지만 이제 와서는 도리가 없네. 난 지옥행이야. 이렇게 되살아나 앉아 있잖아?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더더욱 절대 용서받지 못하겠지.”
비는 계속 쏟아지는데, 그 속에서 울려 퍼지는 유미리의 웃음은 건조한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세인. 너는 내가 북쪽에 가는 것만으로도, 전황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
“그래. 넌 성공할 거야.”
“하긴. 그렇지 않다면 세계수가 나를 되살리지 않았겠지? 가망이 없었다면 말이야.”
악마 군주인 닉스는 지금 북부에서 세계수를 짓밟고 있다.
그 세계수가 바로 남부에 있는 세계수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남부의 오라비는 크나큰 대가를 치르면서 유미리를 살려냈다.
“닉스는 소멸하지 않는 이상 군대를 계속 만들어 내지. 시간만 충분히 준다면 그의 군대로 세상을 다 뒤덮어 버릴 수도 있어.”
닉스는 북부에 숨어 무한에 가까운 군대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가 바로 현재 괴물들의 부모이자 요람이었다.
마치 무한의 주머니처럼 군대를 꺼내놓는 통에 승리는 점점 괴물들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물론 본신의 전투력도 만만치 않았다.
최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테러 나이트와 비교하는 것이 불가할 정도로 강했다.
테러 로드는 저마다 권능을 가진다.
그 규칙은 그 자체로 불가침의 성격을 띠고 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적용되는 규칙이란 뜻이다.
또 그 권능을 떠나서라도 테러 로드는 세인이 살던 시대의 괴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존재들이었다.
이런 놈을 소환했으니 대머리 괴물이 세인을 비웃었던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사실 대머리 괴물조차도 자신의 소환에 무려 테러 로드가 응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둘이나 달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고 말이다.
“설명을 듣다 보니 장난이 아닌데.”
세인이 그답지 않게 가벼운 어조로 말을 건네자 유미리가 다시 웃었다.
“나라고 다시 살아나고 싶어서 살아났겠어? 이 싸움은 이노센트를 제외한 모두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어. 누구도 그놈들이 있는 북부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왜 아니겠어? 그런데 누가 내 멱살을 잡고 부활시켜서 말이야.”
그때 세인은 유미리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동병상련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이 세인에게 낯설지 않았다.
유미리는 불합리한 상황 안에서 각오를 굳힌 지 오래였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두 남녀는 그렇게 등을 맞댄 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일행은 시체들이 가득한 곳을 떠났다.
이제 목적지는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다.
상단주는 거기까지 데려다주면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이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멀리에서 세인 일행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눈이 세 개 붙은 몬스터였는데, 녀석은 시종일관 상단주를 노리고 있었다.
이제 막 추격자를 붙이려는 생각이다.
“그만둬. 네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다.”
그때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몸을 일으키며 몬스터를 말렸다.
눈을 세 개 가진 몬스터가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입니까? 오랫동안 공을 들인 일입니다.”
“대마법사가 다가오고 있다. 케이드님이 이번 기회를 통해 그의 의중을 알고 싶어 하신다. 엘프들이 진정으로 우리 편에 붙었는가 하는 것 말이야.”
그러자 세 개의 눈을 가진 몬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 마법사와 케이드라는 말이 나왔을 때, 더는 그가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거물들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아무리 이번에 공을 들였다고 해도 관여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 * *
글리터는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세인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는 자칫하면 거대한 혼란의 시초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진행하던 일이 적지 않았고 가볍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공백을 메꾼 것이 바로 세리스였다.
세리스가 세인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자 그의 측근들은 충격에 빠졌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세인의 행방에 관해 묻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하지만 세리스는 그가 정말 필요한 일이 있어서 잠시 우리 곁을 떠났으며, 모두가 그의 빈자리를 빈틈없이 메꾸어야만 한다고 모두를 설득시켰다.
“우리는 평상시 하던 대로 전쟁을 준비하면 됩니다. 뭔가 변한 게 있나요? 드레퓨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도 뭔가 설명을 들어야 한다고 불평하자 세리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분이 우리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헤아려줄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모두 그의 아랫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할 때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누가 감히 그분에게 책임을 묻고 불평불만을 말할 수 있죠? 아랫사람은, 그분의 도구는 주인에게 불평하지 않아요. 불평한다면 도구가 될 자격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항의하던 사람의 목은 자라목이 되었다.
세리스는 그 후로, 세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힘든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세인이 편지를 남겨 놓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필체는 확인되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될 인장은 찍혀 있지 않았다.
세인이 사용하던 ‘글리터 룸’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밖에서 어떤 구설에 오르내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딱 부러지게 자신이 할 일을 해나갔다.
그러자 혼란도 점점 거짓말처럼 가라앉고, 글리터의 안주인으로서 세리스가 급부상했다.
그녀는 글리터의 체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했다.
그동안 세리스의 배는 점점 불러왔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글리터를 돌봤다.
주변의 나라들은 잠시 글리터에게 불안한 시선을 던졌었지만, 변한 게 없자 안도했다.
연합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세리스가 낳은 자식도 튼튼하게 자라고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예상 못 한 일이 있었으니….
오히려 연합은 더욱 글리터와 밀착되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번우드 지역은 세리스와 거리를 두려 했다.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는 것은 아니나, 전에 비해 확실히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안타깝군요.”
넓고 아름다운 홀에 앉아 있는 세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낳은 몸이지만 그녀는 전과 변한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아름다워진 듯했다.
현재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있는 건, 번우드의 기사인 윌이었다.
윌은 침착한 어조로 세리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번우드가 글리터에 보내던 지지는 여전합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우리는 글리터와 함께 할 것입니다. 군사 훈련만 해도 전과 다름없이 같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리스는 윌의 말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제가 연 파티에 번우드의 두 주인이 합석하셨으면 했습니다.”
“….”
윌은 어색한 얼굴로 말을 아꼈다.
번우드는 여전히 글리터의 아군이었다.
그리고 그건 끝까지 변함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비안과 코다로는 글리터에 발길을 뚝 끊어 버리고 말았다.
세인의 부재 때문이다.
비비안과 코다로는 글리터의 핵심 지역에 사는 아레이즈 출신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인이 없는 지금, 글리터에 전적인 확신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들의 모든 호의와 애정은 세인에게 시작돼서, 글리터를 뒤덮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인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편지뿐이다.
그리고 세리스가 나타나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세리스의 주장은 코다로와 비비안에게는 일방적인 주장으로만 여겨졌다.
그래서 현재 글리터에 대한 동맹은 유지하지만, 전과 달리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번우드 쪽에서 세계수 지역으로 진입 가능한 관문을 철저히 단속하는 것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세리스를 신용하지 않는 것이다.
코다로와 비비안은 군주로서 글리터에 전략적인 동맹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에 세인에게 말한, ‘세리스 같은 기사에게 글리터를 맡기고 뒤로 물러나 쉬어라.’라는 건 어쨌건 세인이 건재하다는 의미가 전제되어서 하는 말이었다.
비비안과 코다로가 세인에게 보내는 믿음과 우정은 언제나 변치 않았다.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충분히 숙고해 볼 수도 있었다.
그만큼이나 서로의 관계에 대해 견고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비비안이나 코다로에게 있어 세리스의 무게감을 묻는다면, 당연히 세인만큼은 아니었다.
그들은 세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외다.
그리고 이런 연대감은 과거 그들이 보여줬던 바와 같이, 레인저 부대보다도 우선시 되는 측면이 강했다.
세 군주는 타인이 보기에 불가사의할 정도로 서로를 아끼고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비비안은 세인에게 성을 선물 받았다.
거기에 어떤 대가가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성이란 것은 지배자에게 있어 집과 요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코다로의 경우에는 집사가 죽은 후 홀로 세상에 남겨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달려온 세인을 보았다.
친척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세인은 그때 신용에 대한 증명 외에도,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렇듯 두 사람의 마음에 세인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그 후에도 그들은 그가 자진해서 모든 일에 나서고 희생하는 것을 목격했다.
심지어 그는 힘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도 아끼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이다.
더군다나 트리엔 같은 나라를 헤맬 때, 세인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는 비비안과 코다로에게 수치를 같이 감당하자고 요구하지 않았다.
수치스러운 상황 앞에 홀로 섰고, 자신을 굽힐 뿐이었다.
이러니 비비안과 코다로는 세인을 철저한 자신들의 편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세인은 가족이란 경계선 안쪽에 있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었다.
이런 관계를 세리스도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다.
그들이 전략적으로 보내는 지지와 동맹은, 지금의 세리스를 마음 깊이 인정해서가 아니었다.
전략상의 공적인 결정이었고, 훗날 나타날 세인을 고려해서 한 결정이었다.
실상 그들 입장에서는 당장 달려와 세리스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것도 많겠지만, 체면상 참고 있는 것이겠지.
아니, 어쩌면 세인을 그만큼 믿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타나 모든 설명을 해줄 거라고 말이다.
확실한 건 그들의 관계에 세리스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세리스의 한숨 앞에서 윌은 난처한 표정을 숨기려고 애썼다.
하긴 윌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는 사신의 자격으로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그분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윌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세리스는 손짓으로 그가 물러나도 좋다고 허락했다.
지금의 그녀는 여왕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훗날 세인이 글리터로 돌아와서 그녀의 위치를 재확인시켜 준다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세리스는 세인이 없는 동안 그의 자리를 잘 지키고, 더 크게 만들어 가고 싶었다.
세인이 글리터로 돌아왔을 때,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불철주야 노력했다.
번우드가 저렇게 나와도 어쨌든 외교적으로는 글리터에게 가장 친화적이었다.
윌을 통해 그걸 다시 확인한 세리스의 시선은 남쪽으로 향했다.
* * *
어둡고 축축한 방에서 망토 자락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남자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남자는 다가오는 사람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다.
안대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캐시오는 귀를 쫑긋했지만, 귀로도 그가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다만 코를 킁킁거리니 고급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그는 지독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상대가 누구냐 보다도, 관전인이 있다는 게 그를 미치게 만든다.
왜냐면 그건 곧 고문이 시작될 거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캐시오도 언젠가는 여기, 고문실에서 나갈 수 있을 줄 알고 뻣뻣하게 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폭력은 그를 철저히 굴종시켰다.
그리고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게 했다.
문제는 이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고급 치료까지 받으며 고문당하는 인생이었다.
발소리는 캐시오에게서 이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발소리의 주인은 캐시오를 유심히 관찰했다.
뒷짐을 지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