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 밤을 맞이하고 (4)
괴물들은 늘 인간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인간에게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상단이 움직이는 지역은 외곽 쪽이었다.
많은 인간을 끌고 가서 괜히 괴물들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쪽 상행은 늘 하던 행사였다.
용병단도 많이 고용해봐야 서로 마찰만 일어나고, 상인들이 기죽을 염려도 있었다.
그래서 관성처럼 움직였다.
그게 바로 뼈아픈 실수였다.
평소처럼 굴었다는 게 바로 문제가 돼서 이번 상행이 박살 났다.
그렇다고 해서 상단주를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평소 최선이라고 생각한 행동을 이번에도 행했을 뿐이다.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보다 더 손해를 본 사람은 망자들뿐이다.
목숨을 잃었으니까.
파리 떼가 왱왱거리는 소리로 온 공간이 가득 찼다.
다 떠나 그런 소리가 들리는 곳을 피해야 한다는 건 확실했다.
세인, 유미리, 제이. 그리고 힐다와 상단주는 상단이 있던 자리를 떠나 한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내일 아침이 되면 상단이 움직이려고 했던 쪽이었다.
습격 지점에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갑자기 등 뒤가 밝아왔다.
사람들은 뒤를 돌아 불타오르고 있는 장소를 보았다.
저 불길이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여긴 강바닥 위니까.
타오르는 빛이 상단주의 은가면 표면에서 붉게 번들거렸다.
그는 실로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나 고개를 돌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시련 속에서 자포자기하거나 불필요한 미련에 못 박히지 않았다.
과연 우두머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모두는 주변을 경계하느라 말이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에서 비명이 길게 들려왔다.
그리고 빗방울 소리에 묻혀 탁해졌다.
하지만 아무도 거기로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상인이 죽는소리일 수도 있었고, 미끼일 수도 있었다.
지금은 자신들의 코가 석 자였다.
“안녕 난 힐다라고 해. 아까는 도와줘서 고마웠다. 용병 중에 마족이 있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힐다가 내민 손을 세인이 마주 잡았다.
자유 용병으로 겉돌았던 힐다는, 용병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녀가 행렬에 합류했다고 욕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난 용병이 아니야.”
힐다는 유미리에게도 말을 걸며 악수를 나누었다.
상단주가 마족이라는 소리에 세인을 힐끗 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걱정의 대상은 바로 목적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습격은 없었다.
습격자 입장에서는 뿔뿔이 흩어진 사냥감들을 일일이 찾아 사냥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상단주 일행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가장 맛있는 부위를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두는 것일 수도 있겠지.’
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도움을 주었던 상단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자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미에 선 그는 선두에서 절뚝이며 걷고 있는 상단주를 보았다.
지팡이라도 들려주고 싶었지만, 그는 남의 도움을 원하는 것 같지 않다.
꽤 시간이 지나, 원래 상단이 도달했어야 할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넓은 강 가운데에 떠 있는 섬 같은 곳이었다.
수심이 발목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아래쪽의 한기를 막을 장소는 아주 소중했다.
바위로 이루어진 지대가 큰 원을 그리고 있는 곳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전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다 먹혀 버렸군.”
상단주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세상 각지를 떠돌며 온갖 것을 다 보았다.
그래서 지금 상황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가슴이 아프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까지 그의 어깨를 팽팽하게 만들고 있던 것이,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 것 같았다.
원래 여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상단은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국외 도피를 했지만 알고 보면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일행은 바위섬 위로 올랐고 중심부로 향했다.
성한 집은 없었지만 부서진 건물들이 바람을 막아주었다.
중심부까지 간다면 불빛도 막아줄 수 있을지 몰랐다.
세인과 힐다는 주변에서 커다란 목재들을 가지고 와 근처에 쌓아 놓았다.
그렇게 벽을 만들고 중심에서 불을 피웠다.
따뜻한 불길을 두고 다들 자리에 주저앉았다.
“쫓아올 거야. 어쩌면 여긴 통발일지도 몰라. 우린 물고기 신세고 말이야.”
힐다는 그렇게 말한 후 내용을 덧붙였다.
“그런데 뭐 먹을 거 없어?”
통발 속의 물고기를 생각하니 배가 고파진 모양이다.
“….”
상단주는 마을 회관이 있던 자리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몸을 일으켰다.
위험하다고 말리자 상단주는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켜 보였다.
바로 코앞이다.
눈에도 보인다.
“그럼 저는 주변에 위험한 게 있나 보고 올게요.”
제이가 그렇게 말하자 힐다가 말렸다.
“그만둬. 그런 건, 무기를 든 사람이 가야지. 도끼날을 좀 살펴보고 내가 움직일게.”
하지만 제이는 괜찮다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여태껏 신세만 진 게 미안한가 보다.
유미리는 불길에 손을 쬐며 앉아 있었고, 세인은 앉아 있는 힐다와 유미리를 바라보다가 검을 들고 움직였다.
제이처럼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한 번 정도 전체적인 지형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세인이 바위섬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보니 별다른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드문드문 불탄 자리가 보였는데, 인간을 불태웠는지 가축을 불태웠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그는 다시 불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회관으로 발을 돌렸다.
회관 안에는 상단주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는 숯 더미 같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다.
그중에서 사람의 손 모양 같은 것도 심심찮게 보였다.
돌로 만든 회관이라 할지라도 불길이 일어나면 무너질 수 있었다.
지금처럼 건물이 무너지지 않은 것을 보면, 밖에서 불에 태운 후 여기에다가 모아둔 모양이다.
“마족이라고 하셨습니까?”
상단주는 세인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에서 아니라고 하기도 난감하다.
마족이 아니라면 다른 핑계를 대야 하는데, 지어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세인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자, 상단주는 의미 모를 탄식을 터트렸다.
“당신은 그래도 인간의 모습을 완벽히 유지하고 있군요.”
‘당신은?’
세인이 의문을 가졌을 때 상단주는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의미 모를 탄식의 이유가 밝혀진다.
상단주의 가면 뒤로 아주 흉측한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파충류와 인간을 뒤섞어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진면목을 보인 상단주는 다시 가면을 고쳐 썼다.
그리고 세인은 깨달았다.
눈앞의 사람은 자신의 시대에서 바이테스의 황제가 될 사람이 분명했다.
부분적으로 보이는 얼굴로서 상대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역순으로 시공을 넘어 황제와 재회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대는 그걸 모를 테지만 말이다.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더구나 동족 같은 느낌이 드니 기분이 이상하군요. 이 참상 앞에 있어서 더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세인은 그런 상단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상단주는 세인의 겉모습에서 확연히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이, 자신과 같은 처지라 그런 것이라고 착각했다.
마족이라고 해서 상태가 다 같은 것은 아니니까, 그의 생각이 꼭 비약적인 것은 아니었다.
세인은 갑자기 스친 생각이 있어서 말을 꺼냈다.
“설마 이 마을은?”
그의 물음을 눈치챈 상단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여긴 마족들의 피난처입니다. 전염병에 걸렸다고 외부인을 속이며 천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말이죠. 그래도 당신처럼 완벽히 인간에 가까운 마족은 처음 봅니다. 동행인도 그렇더군요. 그 여자도 마족이죠?”
“뭐….”
세인이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상단주는 마치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에서 돌아온 유미리의 이질적인 분위기가 상단주로 하여금 잘못된 확신을 주는 것 같았다.
상단주는 이제 자신의 심경을 말했다.
“생각해 보면 참 지독한 일이에요. 괴물들은 혼혈아인 존재들을 죽인 겁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들의 자식이나 다름없는데 말이죠. 하긴 그런 감상적인 것을 괴물들에게 요구한다는 건 무리겠죠. 그래도 생각할수록 지독한 놈들입니다. 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상단주는 탄식했다.
그는 그걸 세인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마음을 정리하고 불을 지펴둔 자리로 돌아간다.
세인도 뒤따르려 했을 때, 부서진 창문을 통해 까마귀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너는 잘도 돌아다니는군.”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무슨 낙으로 살겠나. 네가 내 처지가 되면 너도 이럴걸.”
자조적인 말을 한 까마귀를 보고 있는데, 상대는 계속 말했다.
“놈들이 곧 여기를 찾아낼 거야.”
“알아.”
“마족들의 시체로군.”
머리를 돌린 까마귀가 숯 더미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인이 입술을 움직여 그에게 말을 다시 건네려 했지만, 검은 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으로 사악한 놈들이야. 하지만 본인들만 그걸 모르지. 윤회할 수 없는 이노센트들은 윤회 안에 있는 생명체들을 증오했어. 부당하다고 느낀 거지. 그래서 시도를 해본 거야.”
“뭘?”
세인이 말하자 까마귀는 빛나는 눈을 다시 그에게로 돌렸다.
“인간의 윤회에 자신들이 올라탈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본 거야. 라이프 베슬 연구의 연장선이지.”
세인은 자기 생각을 말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태어나면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잖아. 그건 농락당하는 것과 같아.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어느 날 다시 태어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채 같은 실수, 같은 아픔을 되풀이하겠지. 그런데 이노센트들은 그게 그렇게나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한 법칙인가?”
세인의 생각을 들은 까마귀는 본의 아니게 이노센트의 입장도 말해주게 되었다.
“인간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언질을 받고 있어. 종교적으로든 본능적으로든 법칙을 느끼고 있어. 그들도 깊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들이 환생할 것을 알아. 그걸 이성의 수면 위로 떠올리진 못해도, 본능적으로는 충분히 전제하고 움직여.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노센트의 처지는 당사자가 되지 않으면 모른다고.”
“….”
“세인. 그들은 죽으면 완전한 끝인 거야. 보다 나아질 수도 없어. 내가 죽은 후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 죽기 전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이었나? 이런 개념도 부질없어. 죽으면 무생물이거든. 모든 의미가 파멸하거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만 흡족해하고 완전무결하며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신이야. 신이 아닌 우리들은 상대가 있고 대상이 있어야 자신을 인식하고 정의할 수 있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 기대기도 하고 말이야.”
완전한 죽음이 다가오면 어떻게 될까?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돌과 같이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야말로 끝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멈추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게 끝난다.
그 의미와 느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칠듯한 공포에 시달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노센트다.
“이노센트가 보기엔 너희야말로 임모탈인 거야. 불멸의 순환 안에 있는 거지. 그게 그들의 상실감을 더 부채질해. 갈망과 증오를 일으켜. 그렇게 노여움이 극대화된 그들은 뿌리까지 미쳤어.”
고작 ‘티끌 하나의 죽음일 뿐이다.’라는 말도 크기라는 비교 대상이 전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죽음은 그런 비교 대상조차 의미 없이 침몰시킨다.
모든 것이 가치를 잃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아무것도 라는 말조차, 말 속에 비교하는 것이 들어 있었다.
비교조차 파멸하는 죽음.
죽음은 언어로는 표시할 수 없는 극한의 지점이었다.
그 순수한 좌절과 공포가 이노센트들을 미치게 했다.
“어떤 이는 인간을 증오하고. 어떤 이는 인간을 실험하고 싶어 했어. 어떤 이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동족에 휩쓸려 집단행동을 하게 되지. 어쨌든 그들은 세상에 치명적이야. 지금은 그렇게 되었어. 공포에 질리고 극한의 증오에 휩쓸린 집단에, 도덕이나 이성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야.”
그래서 까마귀는 그들이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멸이 아닌 이노센트들은 죽음을 인간보다 더 가까이 느끼고 있어. 그리고 그걸 인간에게 제대로 안겨주고 싶어 하지.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질투를 인간에게 투사하길 원해.”
“그럼 인간에게 그러지 말고 그 피조물을 만든 신에게 가서 따져야지.”
“신은 아직, 혹은 이제 없어. 전에 없다고 말했잖아. 그게 이노센트들을 더 미치게 하는 거야.”
불을 지펴둔 곳으로 돌아온 세인은 앉아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의 굳은 얼굴을 본 유미리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뭘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던 세인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상대는 마법사니까 지식이 얕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라이프 베슬에 대해서 알아?”
그러자 유미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너랑 같이 다니는 나는 시체 학자지. 나만큼 라이프 베슬에 대해서 잘 아는 마법사는 드물걸?”
그러면서 설마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냐는 눈치를 주었다.
“네가 누구냐 보다 지금은 라이프 베슬에 대해 듣고 싶은데.”
“라이프 베슬이,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둘이 그렇게 속닥이고 있을 때, 힐다와 상단주는 멀리에서 제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깜깜한 밤.
그의 목소리가 모두의 발치에 맴돌았다.
제이의 목소리에 세인과 유미리도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멀리에서 누군가가 다가온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의 얼굴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그 하얀 얼굴은 입술을 움직여 다시 사람들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힐다가 대답한다.
그런 힐다의 얼굴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제이. 무슨 일이야?”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오늘 밤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좋겠어요.”
“그래 그렇군…. 정말로 주변에 아무도 없었어?”
“예. 그렇습니다.”
상단주는 유미리와 함께 불길의 뒤로 약간 물러섰다.
그리고 세인은 방패를 잡았다.
힐다도 도끼자루를 고쳐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제이… 높이가 틀렸어.”
“예?”
어둠 속에서 반문하는 제이의 하얀 얼굴은 성인 남성의 머리 높이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마치 장대에 매달린 것처럼 말이다.
힐다가 그 부자연스러운 높이를 지적하자 제이의 눈과 입에서 피가 주르륵하고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