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 밤을 맞이하고 (1)
북부에서 거대한 악이 일어났다.
이노센트, 이 모든 악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 악은 세상 전체로 번져 나갔고, 인간에 대한 증오가 그들의 구심점이었다.
기형적인 괴물들은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잡아다 끔찍한 짓을 했다.
인간들은 서로 뭉쳤고 조직적으로 대항했지만, 악의 군단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하늘과 대지가 그들에게 오염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수많은 인간이 그들의 제물이 되어 음식으로, 제사용 물건으로, 쾌락의 도구로 스러져 갔다.
그 참담함에 인간들은 독기를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합군이 일어나고 중부에서 대승부를 걸게 된다.
하지만 그 전투는 연합군의 속임수였고, 진짜배기는 악의 근원지인 북부로 향하는 용사들이었다.
북부에는 세상을 떠받치는 두 존재 중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세계수라 불리는 존재로, 악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 고귀한 북부 숲을 지배하던 소녀는, 악에 오염되는 치욕을 겪게 된 것이다.
“그녀를 구해내야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런 판단 아래 인간들은, 용사들을 뒷받침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중부 평원에서 악의 이목을 흐리는 데 힘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은밀히 우회한 용사들이 세계수를 구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세계수를 구출하면 전환점이 생기고, 정령과 엘프를 인간의 군대로 회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오라비인 남쪽 세계수의 신용도 얻을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그의 핏줄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면 오빠인 세계수가 같은 편이 되지 않을 리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 명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어떻게든지 세계수를 구해내려 했던 인간들로서는 참으로 뼈 아픈 실패였다.
엄청난 희생과 사력을 다한 작전이 한 명으로 인해 철저히 망가지고 말았다.
그 배신자는 누구였을까?
지금 바닥에 드러누워 잠들어 있는 마법사, 유미리였다.
죽은 자가 다시 산자로 돌아서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거운 육체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만끽하다 보면, 다시 산다는 게 엄청난 형벌처럼 느껴진다.
다시 고깃덩어리의 감옥에 갇힌다는 것은 지독한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자처하게 된 유미리는 물 떨어지는 소리에 깨어났다.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잎은 흔들릴 때마다 음산한 소리와 무거운 분위기를 뿜어냈다.
대신 바람에 실려 오는 식물 냄새는 폐부까지 상쾌하게 만들었다.
이곳은 숲속이었다.
다만 세계수가 현신했던 곳과는 달리 산세 깊은 곳은 아니다.
그곳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유미리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별이 뿌려진 밤하늘도, 그녀의 눈꺼풀을 따라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한다.
낮에는 하늘이 지옥 같아 보였지만, 밤이 되면 아직도 저렇게 별빛들이 보였다.
그게 지금 이 시대에 남겨진 인간들의 커다란 위안거리였다.
“별들은 죽기 전과 다를 게 없네.”
그렇게 중얼거린 유미리의 귀에는 계속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그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차갑고 좁은 시냇물에 검을 씻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잘생긴 남자다.
세인은 지금 마검을 물에다 씻고 있었다.
“넌 누구지?”
유미리의 물음에 세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검은 머리카락의 미녀가 드러누워 있었다.
하얀 자갈들이 수북이 깔린 가운데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이 편해 보이진 않는다.
유미리는 달빛을 받은 자갈들과 함께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약간 마른 여자였고 훤칠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
눈은 길고 가늘었으며, 목소리는 탁하고 성숙미가 풍겼다.
오뚝한 코와 새하얀 피부, 붉고 도톰한 입술은 꽤 아름답다.
엘프의 피가 섞인 그녀는 죽음에서 돌아와서인지 유난히도 초췌하다.
마치 생기 없는 인형 같았다.
현재의 그녀는 그럭저럭 옷을 걸친 상태였다.
게다가 발에는 고동색의 부츠까지 신겨져 있었다.
세인은 마검의 물기를 털어내기 위해 사방으로 휘둘렀다.
밤하늘 아래에서 탁한 검광이 움직인다.
그러면서 세인은 망설이지 않고 자기 정체를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세인이라고 한다. 미래에서 왔다. 마검의 힘을 빌려 과거인 여기로 온 거야. 세계수가 널 부탁하더군. 북부까지 데려가 달라고 말이야. 그래서 그렇게 할 생각이다. 사정은 대충 알고 있다. 네가 뭘 하려다가 죽었는지. 그리고 되살아난 네 상태에 대해서도.”
유미리는 달빛 아래에서 잠시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잠시 굳어진 상태로 더듬거렸다.
억지로 웃으려고 하는데, 입이 따라가질 않아 기괴하게 비틀린다.
“어… 그, 그래.”
세인은 검을 옷자락으로 마저 닦아냈다.
거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말을 못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유미리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는 나지막이 욕을 내뱉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동행인을 붙여준다는 게 고작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믿는 미친놈이야?”
유미리는 마법사였고 보통 사람들보다 사고가 열려 있는 편이다.
그리고 되살아난 이상 당장 아쉬운 게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비상식적인 내용을 저렇게 정색하며 말하는 놈이 반가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미친놈이라도 일단 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검을 손질하니, 휘두를 줄도 알겠지.’
더구나 지금의 그녀는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이런 놈이 있어야 정작 위험할 때, 칼받이라도 되어줄 게 아니겠는가?
그녀는 시원하게 그걸 인정했다.
어느 날 그가 홱 돌아 저 검으로 자신을 찌르지 않는다면야, 미친놈이란 것도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와서 이런저런 조건을 붙인다는 게 이상한 거지. 이게 무슨 시집가는 문제도 아니고 말이야.’
물론, 이런 결론을 내리고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유미리는 너무 많은 쌍욕을 내뱉었다.
세인은 그걸 고스란히 들었고 말이다.
‘자유분방한 여자군.’
몸을 일으켜 세운 그녀는 세인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세인은 검을 허리에 차고 나뭇가지를 꺾고 있었다.
지팡이로 쓰려는 것일까?
아직 몸이 성치 않은 유미리가 길을 걷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필수품이다.
하지만 그런 용도로 만든 지팡이가 아니었다.
지팡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느다란 그 나뭇가지는 마치 꼬챙이처럼 보였다.
그걸 들고 세인은 시냇물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는 머리와 등으로 달빛을 받으며 숨을 골랐다.
유미리는 저 미친놈이 달밤에 꼬챙이를 들고 뭐 하려는 것인가 하며 바라보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발광이라도 하면 세계수가 그녀에게 짐을 떠맡긴 꼴이다.
하지만 세인은 발광하는 대신 나뭇가지를 물 아래로 푹 하고 찍었다.
처음에는 실패였다.
하지만 두 번째에는 성공했다.
팔뚝만 한 물고기가 퍼덕이며 나무꼬챙이에 찔려 나왔다.
흔들거리는 지느러미의 물고기를 손으로 잡자, 생동감 넘치는 동체가 손아귀 가득 느껴졌다.
그 상태로 세인은 물가를 훑어보았다.
물은 투명하고 맑았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돌들은 이끼가 낀 것이 아니라 오색빛깔이었다.
솔직히 말해 아름다웠다.
흘러가는 물결 위에 얹어진 달빛이 넘실거리며, 물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끊임없이, 어딘가로 말이다.
여기는 인간들이 경험한 시대 중 가장 참혹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큰 긴장감은 없었다.
세인은 이곳에 와서 위화감보다는 안정감을 받았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느낌처럼 말이다.
참 기묘한 일이다.
유미리는 세인이 그 후에도 몇 마리 물고기를 더 잡는 것을 보았다.
펄떡이는 물고기가 날아와 그녀의 발치에 떨어졌다.
분명 물방울이겠지만, 유미리의 눈에는 물에 젖은 물고기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거 생으로는 먹지 못해. 기생충이 있거든. 부싯돌이라도 있어?”
세인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하게?”
세인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유미리는 검은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작은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없으면 빌려야지.”
* * *
한 남자가 깊은 산속에서 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홀로 그런다는 게 위험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불 없이 밤을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커다란 책을 들고 뭔가를 써 내려 가고 있다.
그러다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리고 안력을 돋우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 누구?”
그렇게 물으며 그의 한 손이 무기를 집어가는데, 무기가 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검은 머리의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머리가 긴 여자였다.
앉아 있던 여행자에게는 그들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온통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착각이었을까?
여인의 눈에 스쳐 지나가듯이 초록빛이 번뜩였다.
그걸 본 사내는 경계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불을 빌릴 수 있을까?”
세인이 말을 걸어왔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통성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이 아니라면 손님이라는 소리다.
“제게 적의가 없다면 어려울 것도 없겠죠.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칼엘입니다. 당신들의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나의 이름은 세인. 그리고 이쪽은….”
세인은 잠시 멈칫했다.
가명을 댈까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유미리.”
칼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손짓을 하며 세인과 유미리를 불러들였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했는데, 유미리의 고동색 부츠가 찍어가는 발자국까지 눈에 담았다.
세인은 불가 쪽으로 다가가 부츠를 벗고는 발을 말렸다.
그리고 물고기들을 꼬치에 꿰어 구웠다.
그런 그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어서, 곁의 유미리가 다 무안해질 정도였다.
마치 세인이 불을 피운 사람 같았다.
세인이야 물고기를 나눠 먹을 생각이니 이렇게 거침없이 구는 것이다.
사내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다시 책에 얼굴을 처박고 글을 썼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러갔다.
그걸 참지 못한 것은 유미리였다.
“뭘 쓰고 계세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든 칼엘은 방해를 받아서 기분 나쁘다는 표정보단, 뭔가 궁금한 얼굴을 했다.
“실례지만 마족이십니까?”
마족이란 단어에 손을 움찔한 것은 오히려 세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지 못한 둘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제가 안색이 파리하긴 하지만 괴물의 씨로 보이세요?”
따지자면 그렇다.
둘 다 괴물의 자식으로 보였다.
하지만 유미리가 웃으며 대놓고 그런 질문을 던지자 칼엘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호기심 때문에 그만….”
괴물이 인간 여자를 범하고, 그 배에서 나온 인간형의 생명에게 공통으로 붙는 이름이 ‘마족’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간 여자에게서 완전한 괴물의 형체가 태어나면, 발견하는 즉시 여자와 괴물의 형체를 죽였다.
어느 정도 인간의 모습과 가까운 경우에는 배척과 수모를 당하며 살아가기 일쑤였다.
물론 마족이라고 해도, 오히려 동정 어린 시선으로 친절히 대해주는 곳도 존재하긴 한다.
어떻게 보면 폭력의 피해자니까 말이다.
인간이 아닌듯한 용모의 둘을 보자, 칼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바로 마족이란 단어였다.
그는 사과하면서도 유미리의 질문에 대해 대답했다.
“그냥 내키는 대로 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을 위해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 본래는 백과사전을 만들려고 했는데 말이죠. 병석에 누워있는 아들에게 이것저것 말해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기행문 형식이랄까? 그렇게 되어 가고 있네요.”
그러면서 칼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한 부정과 아쉬움이 혼재한 한숨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 그리고 분위기에서 유미리는 왠지 답을 알 것 같았지만, 아들에 관해 물어보았다.
“아드님은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
“나중에 책이 완성되면 아들의 무덤에 바치고 싶어요. 제가 죽기 전에 어서 완성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러려면 경험을 빨리 쌓아야 하므로, 당신들 같은 손님을 맞이하는 것에 경계심을 두어서도 안 된답니다.”
유미리가 ‘글을 쓰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군요.’라고 말하자 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맞장구 속에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시간 낭비만 하는 대화는 아니었다.
유미리는 칼엘의 대화 속에서 자신이 죽은 뒤의 세상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세인은 물고기가 구워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발을 만져 보았다.
체온 때문에 말랐지만, 불의 온도 때문에 보송보송하게 마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한밤중의 깊은 숲에서 홀로 불을 피우고 있는 남자라니. 이상하긴 하지. 아무 생각 없이 이곳으로 온 내 판단이 틀렸군.’
그는 앞으로 내밀었던 물고기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팔꿈치로 유미리의 옆구리를 ‘쿡’하고 찔렀다.
“이봐.”
유미리가 고개를 돌리자 세인이 속삭였다.
“저 사람….”
“알아. 죽었어.”
그러자 세인은 입을 다물었다.
유미리는 측은한 표정으로 칼엘을 바라보았다.
칼엘은 이제 고개를 들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는 언제 죽었던 것일까?
아들이 죽었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두운 숲속에서 이렇게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죽은 자도 글을 쓸 수 있나?”
“강한 염원이 있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어.”
가까운 거리에서 세인과 유미리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을 나누고 있음에도, 칼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세인은 손을 뻗어 불길 위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역시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책의 제목은 정했나요? 칼엘?”
“아아.”
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엘의 기록입니다.”
“칼엘. 당신은 미련을 버리고, 당신이 갈 곳으로 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 거에요. 이건 당신에게 좋지 않아요.”
유미리가 기껏 충고했지만, 이번에는 칼엘이 대답하지 않았다.
세인은 글에 몰두한 칼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져보면 먼저 찾아온 것은 자신들이었다.
굳이 망자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유미리는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떠나게?”
“유령과 함께 밤을 보낼 수는 없잖아.”
유미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거 듣기에 따라 좀 이상하게 들린다.”
떠나기 전 세인은 마지막으로 칼엘의 옆얼굴을 보았다.
온기 없는 불빛에 그의 창백한 피부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어두운 숲속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게 될까?
과연, 그는 책을 완성 시킬 수 있을까?
지금의 세인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건 그가 태어나기도 전,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생각해보면 기묘했다.
인간의 인연이라는 것은 말이다.
“안녕 칼엘. 나는 이제야 당신의 이름을 알아버렸군.”
유미리는 세인의 얼굴과 칼엘의 뒤통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당신은 언젠가 다시 태어나 신부로서 살아가게 돼. 신부니까, 이름을 버리고서 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얼굴이 비슷하니 나는 당신을 알아보겠어.”
이렇게 세인이 옆에서 이상한 개소리를 할 때, 유미리는 지금 책을 쓰고 있는 유령이 섬뜩한 건지.
아니면 세인이 더 섬뜩한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도 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칼엘이 앞으로 수많은 윤회를 통해 미래에서 신부와 영주로서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칼엘. 마지막으로 당신 아들 이름을 알 수 있을까?”
그러자 칼엘은 아들이라는 단어에 잠시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시를 풀고 짧게나마 대답했다.
“아스칼리온.”
“그래.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유미리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칼엘은 계속 책을 써 내려갔다.
아주 먼 훗날 썩지 않은 그 책은 모험가에게 발견되어 필사되었다.
그리고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아득한 시간 끝에, 아비게일은 칼엘이 쓴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