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73화 (173/307)

# 173

& 다시 일어나.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일어나, 밤을 맞이하고.

아침이 오고.

별이 떨어지면, 오후 속에서 여행을 떠난다.

눈을 뜨기 위해.

긴 여행을 마치고.

나는 다시 일어선다.

달라진 하늘 아래.

여자는 드라이어드들에게 휩싸여 있었다.

요정들의 뿌리라고 불리는 드라이어드들은 빈틈없이 그녀를 휘감고 부드럽게 흔들렸다.

흔들리며 귓가로 비 내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휩쓸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드라이어들은 끊임없이 그녀의 귓가에 자신들의 숨을 불어댔고 유혹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그렇게, 유미리와 밀착되었다.

드라이어드의 줄기 속에서 그녀는 마치 수천 개의 혀가 자신을 달콤하게 애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좀 더 떨어져서 본다면 여자.

유미리의 영혼은 수천 개의 유리관에 감싸진 상태였다.

그 상태 그대로 유미리의 영혼은 명계에서 건져내어 어딘가로 끌려갔다.

달콤한 노림수는 결국 결실을 본 것이다.

드라이어드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가지와 나뭇잎 속에서 그녀는 황홀함을 느꼈다.

보통 망자들은 이승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기 싫어하는 편이지만, 드라이어드들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착실히 그녀를 땅 밑으로 끌고 들어왔다.

다음은 그녀의 영혼에 다시 육신을 입힐 차례였다.

하지만 유미리는 다시 무거운 육신을 입게 된다는 생각에, 드라이어드 속에서 반항을 시도했다.

“나를 이대로…. 이대로 내버려 둬.”

태아가 세상에 나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유미리도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다.

세상을 모르는 태아보다도 더욱 현실적인 부담감과 공포가 그녀를 반항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땅이 열리고, 이 세상 모든 나무의 주인이 유미리보고 일어서라 명령했다.

드라이어드들은 언제 다정하게 굴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를 거칠게 땅 위로 밀어내어 버렸다.

거대한 나무와 수풀이 절벽과 성을 이루는 곳.

태산이 잠길 정도로 깊은 물과 기기괴괴한 식물들이 뒤덮인 곳의 중심.

그곳의 땅이 갈라지며 괴물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뼈 모양을 보면 인간 같은데, 입으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며 팔다리를 휘저어 대기 바빴다.

인간의 형체는 끔찍한 촉수 같은 것에 휘감겨 있는 상태였다.

현실의 드라이어드는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고,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지도 않았다.

수천 년 묵은 나무뿌리들이 혈관을 휘감은 채 거머리처럼 빨판을 드러내고,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혐오 그 자체였다.

스르륵거리며 물러나는 뿌리가 놓아준 존재.

그 형체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이슬 머금은 바람들이 측면을 때렸다.

“으윽! 아악! 아아악!”

고통에 땅바닥을 긁으며 몸부림치던 존재는 헐떡이는 가운데 점점 인간의 모습을 찾아간다. 그렇게 완성된 것은 검은 머리카락을 수초처럼 늘어뜨린 알몸의 여자였다.

앙상하고 하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양쪽에서 움켜쥔 채 부들거리던 여인은 새우처럼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간헐적인 발작을 일으켰다.

그런 불쌍한 여자 앞으로 다가서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알몸 상태인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초록색 보석을 박아넣은 듯한 눈이 몸을 구부린 채 헐떡이는 여자를 담았다.

소년의 아름다운 입술이 움직여 그녀를 불렀다.

“유미리.”

덜덜 떠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소년을 노려보았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유미리.”

유미리는 상대의 신분을 깨달았다.

녹색의 왕.

나무의 군주.

세계수.

평소의 그녀라면 상대의 격에 머리를 숙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그가 저지른 엽기적인 짓에 전율하고야 만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가 세계수를 노려볼 때, 고고한 왕.

지고한 신분의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성큼 걸어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맨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풀들이 일어나며 허리 높이만큼 자라났다.

“유미리. 너는 선택해야 한다.”

“괴물들에게 누이를 빼앗기고 너조차도 괴물이 된 건가?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죽은 나를 이렇게 불러내면 안 되는 거야.”

“유미리. 내 눈을 봐라.”

유미리는 세계수의 시선을 받으며 분노를 잠재웠다.

그녀는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생물체 앞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겨 버린 지 오래인 소년은, 유미리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 눈을 통해 내 고통을 봐라. 그리고 그 너머 더욱 큰 고통에 휩싸여 있는 세상을 보아라. 유미리. 나와 함께 용서받지 못할 죄악의 길로 가자.”

“….”

“나는 이 제의를 하기 위해 너를 여기로 소환했다. 너는 이미 한번 패배했지만, 두 번째는 다르리라 믿는다. 나는 너의 힘과 의지를 믿는다. 나와 함께 대죄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세계의 섭리에 침을 뱉자.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너도 알 것이라 믿는다. 이 지옥을 외면하고 영면에 드는 것도 비겁한 짓이다.”

그러면서 세계수는 파란색의 사과를 내밀었다.

인간도 세계수조차도 손대서는 안 되는 금단의 사과.

유미리는 그 사과 앞에서 침묵했다.

저 사과를 받아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그녀도 알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사과를 받아들 리가 만무하다.

금기를 어겨서는 안 되었다.

“….”

유미리는 눈을 감았다가 가늘게 떴다.

그리고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때 우거진 나무의 위에, 불길한 색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 옆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언제까지 인간은 저 하늘 아래에서 살아야 할까?’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래전의 약속도 생각났다.

저 하늘은 인간들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생명체들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아무리 잊고 외면하려 해도, 매일 마주쳐야 하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시 세계수 쪽으로 돌렸다.

소년은 침착하게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마 소년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자괴감이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리가 없으니까.

유미리의 시선을 받는 세계수가 입을 열었다.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는 유미리가 사과를 받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유미리. 너의 동생 유고는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땅에 묻힌 것은 네 동생의 시체가 아니라, 그의 유품뿐이었다. 그리고 내 누이는 지금 네 동생과 같은 순서를 밟고 있다. 괴물들의 품에 안겨 철저히 고문당하고 있지.”

그때 유미리의 손이 움직였다.

그걸 보며 세계수는 더욱 종용했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 진심을 다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너를 태어나게 해준 세상을 봐라. 넌 뭘 할 수 있지? 나와 함께 죄를 짓자. 선과 악을 떠나 이 세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죄악을 저지르자. 오로지 그것만이 우리를 우리로서 살게 한다.”

결국, 덜덜 떨리는 유미리의 손이 자신의 부서진 심장을 대신할 사과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세계수는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며 유미리가 사과를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한 하늘 아래 다시 불길한 밤.

또다시 그 아래에서 두 존재가 타락하고 있었다.

유미리를 여기로 불러 사과를 선물한 세계수도, 사과를 선택한 유미리도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사과를 먹어치운 유미리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연소하는 순리와 운명을 느꼈다.

그것이 타고 남은 재가 있다면 바로 ‘원죄’일 것이다.

인간이었던 자로서의 마지막 죄의식이었을까?

그녀는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현기증을 느끼는 머리를 가로젓다가 옆으로 쓰러지는 그녀였다.

헐떡이는 그녀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고고하게 서 있는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벌거벗은 소년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수는 위풍당당해 보였다.

하지만 이 순간 최고로 불쌍한 존재는 바로 그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좌처럼 빛나던 자리를 박탈당하고, 진창에 처박힌 것이나 진배없었다.

눈물에 흠뻑 젖은 유미리의 시선이 점점 흐려졌다.

그리고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 그녀는 날갯짓 소리를 들었다.

착각이었을까?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의 남자였는데 혼자는 아니었고, 어깨에 까마귀 한 마리를 얹고 있었다.

유미리는 눈을 깜박이며 다가오는 세인을 보았다.

세계수가 준비한 자인가?

정신이 흐려지는 가운데 세인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각인되었다.

유미리의 앞에 있던 세계수의 시선은, 걸어 나온 세인보다 까마귀에게 먼저 닿아 머물렀다.

그 시선을 받은 까마귀도 상대를 쳐다보았다.

세인의 발걸음이 둘 사이를 점점 좁히는 순간에도, 까마귀와 세계수의 시선은 의미 모를 빛으로 충만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세계수였다.

그는 여전히 세인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으며 까마귀에게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너는 어디를 통해서 여기로 왔지? 이런 일이 가능한가?”

“산자가 다닐 수 없는 어두운 숲을 통해서 왔다. 숨이 소멸한 통로.”

세인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지만, 아직 까마귀와 소년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남과 대화를 하고 싶다면, 남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는 법도 알아야만 했다.

“이 상황은 두 천사, 자매의 선물인가? 결국, 그녀 둘은 세상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구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었어.”

소년의 말을 들은 까마귀가 대답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결국, 네 계획은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 호수 전체를 바꾸기 위해 검은 왕이 여기로 왔다.”

“검은 왕”

소년은 잠시 위엄을 잊고 비틀거렸다.

순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까마귀는 세계수가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만의 대화를 이어 나간다.

세계수는 까마귀의 말을 통해 모든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인은 유미리를 보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의 망토를 덮어준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물어보았다.

“이 여자는?”

“이 세상을 구원할 자.”

까마귀의 말을 들은 세계수는 이제야 세인에게 볼일이 있다는 듯 굴었다.

그는 세인의 말에 대답하며 상대를 구석구석 관찰했다.

“이 세계는 악마들과 싸움으로 비탄에 빠졌다. 인간들과 괴물들이 뒤엉켜 서로 몸부림치는 중이다. 네가 사는 시대는 어떤지 모르지만, 이곳은 그러하다. 그야말로 지옥이 강림한 것이나 다름없지. 모두가 목숨을 거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세계수는 말하는 도중에 쓰러져 있는 유미리를 가리켰다.

“그녀가 북부에 도착해야, 이 참혹한 전쟁이 끝난다. 나는 조금 전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너희들이 내 믿음에 마침표를 찍어 주는군. 그녀를 부탁한다. 네가 도와줘야 이 시련이 끝날 수 있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한 흐름 안에 있다.”

세계수는 세인이 잘 듣고 있나 한번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내가 방금 죽은 그녀를 살려냈다. 그녀의 힘과 의지가 아직 이 세상에 필요했기 때문이야. 나는 머지않아 죽은 자를 살려내고 세상의 운명을 비튼 벌을 받게 된다. 그전에 할 일이 많다. 검은 왕.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네 어깨 위의 존재가 설명해줄 것이다.”

소년은 천천히 세인에게로 다가갔다.

비록 세인보다 작았지만, 그에게서는 엄청난 위엄이 느껴졌다.

그리고 맑고 톡 쏘는 향기가 났다.

숲이 가장 싱그러울 때 맡을 수 있는 향기였다.

극도로 상반된 느낌이 공존하고 있다.

소년이 발을 디딘 곳에서 풀이 자라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상대는 세계수니까, 당연히 신화적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세계수는 세인에게 물었다.

“검은 왕. 너는 정녕 너의 길을 가고 싶으냐? 세상은 구원받을 수 있겠지만, 여기 있는 유미리처럼 많은 것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소년의 물음에 세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어. 이제 와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자 소년은 마지막으로 검은 까마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까마귀의 검고 둥근 눈을 바라보던 소년은 탄식했다.

“그렇지. 모두가 여기까지 와버렸지. 우린 호수의 가장 차가운 밑바닥에 몸을 던진 거야. 호수 바닥의 차가운 진흙을 움켜쥐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손안에서 가득 느껴진다.”

그리고 소년의 몸은 산산이 부서졌다.

수천 개의 반딧불이 흩어지는 것처럼 빛으로 화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죽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이동한 것이다.

동시에 향기와 위압감도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까마귀는 유미리에게 손을 뻗는 세인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은 마구잡이로 힘을 사용해왔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만큼이나 오버 더 데스는 강력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강적 앞에서는 네 모든 힘이 필요할 것이다. 개미들 앞에서는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러도 되지만, 네 진정한 적은 개미가 아니야. 천지를 뒤흔드는 힘도 제대로 활용해야 진가가 발휘되는 거다. 마검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네 시대는….”

멸살된다.

그게 바로 결론이었다.

그리고 까마귀는 세리스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강해졌듯이 세인도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결정짓기를 바랐다.

그가 여기에 온 이상 검은 왕은 기필코 그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세인은 정신을 잃은 유미리 옆에서 이어지는 까마귀의 설명을 들었다.

“생명체들에게 벌어지는 선의 순환을 질투하고 악으로 돌아선 자들을 이노센트라고 부른다. 그들은 나름대로 계급과 체계를 가지고 있어. 그 최정상에 도달해 있는 게 테러 로드다. 테러 로드는 원래 셋이었는데, 둘은 이미 후대의 부름을 받아 네 시대로 떠난 상태다.”

“테러 로드.”

“지금 이 세계는 고작 테러 로드 한 개체가 남아 철저히 망가뜨리고 있는 거야. 그 한 녀석이 저지른 패악을 봐라.”

고개를 든 세인이 하늘을 보았다.

진흙과 물감을 섞어 흩트려 놓은 듯 엉망진창이었다.

“그놈을 지금의 너는 감당하지 못한다. 유미리가 그 녀석을 처지 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자연히 네 시대도 붕괴하는 거야.”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유미리의 곁에 앉은 세인이 묵묵히 까마귀의 말을 들었다.

유미리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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