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72화 (172/307)

# 172

&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온기 없는 사막의 밤.

나는 별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다.

나는 그와 마음을 나누었다.

그는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은 잊힐 어제가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내일도 당신을 기억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내일 다시 태어나 그를 잊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내 옆에 빈자리가 느껴졌지만 나는 그 이유를 모르고, 내 슬픔의 이유도 알지 못해 홀로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곁에 섰다.

나는 그와 함께 시간을 나누었다.

나는 이상한 충동이 들어 그에게 말해 주었다.

내일이 되면 오늘은 잊힐 어제가 될 거라고.

그러나 그는 나를 꼭 기억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와 그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문득,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별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만이, 우리에게.

단지 이 순간만이 우리에게.

그리고 다시 내일이 되어 다시 모든 걸 잊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는, 어제의 그에게.

같은 별빛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만이, 이미 우리에게.

그것으로서 충분하다고 말해주었는지를 모른다.

이미 우리에게.

*  *  *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직감적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발에 와 닿는 느낌이 급변한 상태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땅바닥에 내 허벅지가 닿을 때 검집이 지면에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만이 나에게 유일한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그래.

길을 잃었어도 난 혼자가 아니었다.

내 손바닥이 땅을 쓸었다.

그리고 흙 알갱이를 집어 두 손바닥 사이에서 굴렸다.

확실히 내가 걷던 곳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마경으로 끌려온 것일까?

하지만 난 당황하지 않았다.

크루세이더가 된 이후부터 내게는 한가지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 괴물들을 더 죽이기 위해 오늘 몸부림치는 일이었다.

나는 크루세이더다.

크루세이더는 보통의 성직자들보다 좀 더 고된 길을 걷는다.

어둠 속에서 빛이라는 미끼가 되어 악마들을 죽인다.

사실을 길을 잃었다는 것은 큰 틀에서 보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 목적지는 죽음이니까.

도중에 길을 잃었다 한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앞에 불을 피웠다.

그리고 정좌한 나는 무릎에 검을 뉘고 기다렸다.

여기가 마경이라면 나를 노리고 다가오는 녀석이 있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다른 발소리를 끌고 다니지 않았다.

‘한 놈이구나.’

좋지 않은 소식이다.

여러 마리가 떼 지어 다니는 것보다 저렇게 홀로 다니는 녀석일수록 강하기 마련이다.

나는 말라붙은 입술을 열어 기도문을 외웠다.

내가 살해당한다면 마지막 순간에 기도문을 외울 여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전투 전에 외우는 게 좋다.

그 기도문 소리를 들은 상대는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불의 앞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옷 냄새와 숨결이 내 머리 안에 들어왔다.

나는 그와의 거리를 쟀다.

튕겨나듯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얼음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그 앞에서 대답했다.

“나는 암야를 헤매는 자로서 오늘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

악마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온다.

소녀의 모습일 때도 있고 힘없는 노인의 모습일 때도 있었다.

가끔은 끈적한 창부로서 유혹적인 살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남자의 모습인 것 같다.

상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불길 속에 뭔가를 던져 넣었다.

그러자 잔가지가 부러지며 타오르는 소리가 내 귀에 울렸다.

그 사이에서 상대가 내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보이는 대로. 나는 크루세이더다.”

그러자 상대가 대답했다.

분명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크루세이더가 뭔지 몰라.”

“너희들을 살해하기 위해 성총을 벗고 어둠에 몸을 던졌다. 형제들을 등지고 홀로 해가 떠오르지 않는 광야.”

빛이 없는 지평선.

“내가 살해될 무덤. 내 형제들의 묘지”

악마들이 가득한 산야.

“나는 이 지옥을 맨발로 걷는 자다. 그러니 희롱 따위 집어치우고 오라 악이여. 우리 서로 검을 겨누어 보자.”

나는 무릎 위의 검을 뽑았다.

스스릉 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검집을 벗어난 검이 수직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상대는 쉽사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침묵을 고수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에게서 작은 날갯짓 소리가 들린 것은.

‘새인가?’

어깨에 새를 올려두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머리는 없고, 어깨에 올려놓은 새로 말하고 보는 놈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날갯짓 소리를 최우선으로 공격해야겠군.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는데 상대가 이상한 말을 해왔다.

“나는 너와 검을 섞을 생각이 없다.”

“….”

“다만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이다. 너는 왜 이 어두운 곳을 홀로 헤맬 생각을 했지? 누가 너를 이곳으로 떠밀었지? 뭐와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 거냐? 나는 그게 궁금하다.”

악마는 마음을 흔들려는 수작을 가해왔다.

하지만 너무 서툴렀다.

이 정도 수작에는 갓 신부가 된 자조차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화르륵 하고 불길이 움직이는 소리가,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우리 사이에는 분명 불티가 흩날렸을 것이다.

그 짧은 순간 상대가 눈을 깜박였을까?

그렇다면 지금 공격하는 게….

“크루세이더. 내 이야기를 들어 보겠나?”

“….”

그는 말로서 내 행동을 제지했다.

그리고 내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는지 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외진 곳의 영주였다. 그곳에서 모자란 실력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생각해보면 내 존재는 사람들에게 있어 불행이었을 지도 몰라. 항상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난 노력했어. 내가 책임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야. 그래도 쉽지 않더군. 불쌍한 건 영지민이지.”

“….”

“영지민도 영지민이지만, 내 삶 자체도 순탄하진 않은 편이었지. 가끔 너무 힘들었어.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좋은 사람들 때문이야. 그중에서는 내가 자살하고 싶었을 때 나를 말려준 친구도 있었다.”

나는 상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진을 빼놓으려는 수작인가? 하지만 긴장을 유지하는 것에는 이골이 난 몸이다.

호흡의 평정을 유지했다.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예감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기습은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강한 녀석이라면 눈이 보이지 않는 내가 먼저 공격을 날려도,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가장 효과적인 전투를 치르려면 상대가 먼저 공격해오도록 유도해야만 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되면 흐름을 읽고 받아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도 여태껏 수많은 악마를 물리쳐왔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내 말에 상대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모자란 나는 결국 내 영지민을 죽게 했다. 그게 나의 첫 번째 과오였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두 번째 죄는 바로 그들을 되살렸다는 것이다.”

“….”

“알고 있나 크루세이더? 여기까지 오는 도중 내 어깨 위의 까마귀가 내게 알려주었다. 이 세상은 말이야. 죽은 사람들이 환생한다고 하더군. 그게 바로 세계관인 거야. 인간은 죽어도 결국 다시 태어나 기회를 가진다고 하는 거야. 그런데 결과적으로 내가 그런 그들을 붙잡았어. 나는 정말 몰랐지만, 내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끝까지 타락시킨 셈이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상대의 목소리는 우울함에 잠겨 있었다.

“나는 능력이 없어 내가 책임질 자들을 책임지지 못한 죄를 지었고. 내 무지가 두 번째 죄이다. 인간의 위치를 박탈당한 그들은 나와 함께 오욕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다시, 나는 그들과 떨어져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무책임의 극치 아닌가? 대답해 봐라. 크루세이더. 이런 내가…. 이런 죄인인 내가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슬퍼 보였다.

하지만 수작도 여기까지였다.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숨겨 두었던 이를 드러냈다.

“개수작은 집어치워라.”

그리고 내 칼이 공간을 찢으며 좌우로 움직였다.

바람 소리가 거치적거릴 정도로 빠른 검이었다.

그러나 검 끝에 걸리는 느낌은 없었다.

아마 상대는 상체를 뒤로 젖혀 피했을 것이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연이어 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땅을 밟는 소리가 옆으로 이어졌다.

오른쪽이다.

검과 함께 왼쪽으로 움직인 나는, 검집을 오른쪽으로 집어 던졌다.

역시나 상대는 연이어 방향을 틀지 못했다.

대신 검집을 튕겨냈다.

오른쪽이 틀림없었다.

내가 두 손으로 겁을 잡고 돌진하려는 순간 상대의 음성이 나를 향했다.

“잠깐! 난 너와 싸우려고 하는 게 아니야.”

격하게 움직였을 텐데도 고른 호흡과 함께 이어지는 목소리는 나를 긴장하게 했다.

과연 보자마자 달려드는 다른 놈들과 달리 여유가 있는 놈이었다.

나는 땅을 박찼다.

그때 상대가 옆으로 구르는 소리가 났다.

검을 휘두르려다가 멈춘 나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검을 날렸다.

내 코트가 휘둘러지는 소리 밑으로, 그의 검격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검과 그가 뽑은 검은 서로 맞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서로의 검은 달라붙기 무섭게 뒤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 서로 맞붙었다.

나는 허리띠에 숨겨둔 단검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상대의 검술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아마도 실력 있는 검사의 몸을 점령한 악마 같았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나는 과감하게 몸을 앞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검을 거칠게 휘둘러 공간을 확보했다.

그때 뭔가가 내 검날을 움켜잡는 것이 느껴졌다.

쇳소리와 함께 다섯 가닥의 힘이 바깥쪽으로 움직여, 내 검을 휘청하게 만들었다.

설마 건틀렛인가?

아니면 발톱?

내 선택은 두 갈래였다.

떨어지거나 붙는다.

당연히 나는 달라붙는 것을 선택했다.

그 순간에도 날갯짓 소리를 조심했다.

내게 숨겨둔 한 수가 있다면 상대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최후의 순간 뭐가 날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이상할 정도로 쉽게 품을 내주었다.

그가 내 가죽 허리띠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빠져나오는 단검의 소리를 들었을까?

그 단검은 몇 달 전 악귀에 씌워 죽어가기 직전인 성직자가, 자신의 피로 축성을 해준 단검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 하루라도 더 살아남아 괴물들을 해치우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 그의 목을 벤 것은 바로 나였다.

내 단검이 상대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손목에 힘을 주어 비틀려고 하는 순간, 상대의 손이 단검 쥔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른 팔이 내 목 옆을 지나 등을 끌어안았는데 느껴지는 무게가 묵직한 것이, 역시 건틀렛이 맞는 것 같았다.

상대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가까워진 상대의 숨결이 내 귓가에 울렸다.

이상하게도 거친 숨은 아니었다.

단조로웠다.

‘머리가 달라붙어 있구나. 게다가 새의 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형태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상대의 복부 위쪽으로 검을 움직이려고 해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상대의 목소리가 내 귓전에 울렸다.

“위험한 시대에서 등을 돌리고 멀어져갈 생각은 안 하는 거냐? 너도 참 바보 같구나. 항상 너는 바보 같아.”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귀를 깨물려고 했다.

하지만 시도에 그쳤다.

상대가 잽싸게 고개를 옆으로 빼내며 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달라붙은 채 힘겨루기를 했다.

나는 상대를 죽이려고 용을 썼고, 상대는 수비를 굳혔다.

훗날이 되어서야 그때 상대가 나를 봐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 이유는 끝까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악마의 변덕이었을지도 모르지.

당장 나는 기세에서 지지 않기 위해 으르렁거렸다.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인간이 아닌 자야. 절구에 인간의 머리를 넣고 찧는 자. 인간 앞에서 인간을 먹는 자. 신의 섭리를 배반한 이 배덕자들아. 아무리 너희가 우리를 희롱하고 짓밟아도, 우리는 기필코 승리한다. 너희들의 적의에 맞서 나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이 자살은 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뒤에는 나와 같은 형제들.”

그리고 그 뒤에는.

“그 형제들과 같은 더 많은 인간.”

그 인간들 모두가.

“너희들을 기필코 끝낼 것이다. 그러니 기고만장하지 말라. 오늘의 내가 죽어도 또 다른 내가 나타나 너희들을 멸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희망 없는 세상에서 괴물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나는, 그리고 내 형제들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지옥에 떨어질 수 있을 텐데.

끝없이 펼쳐진 지옥 속에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어떤 거대한 수레바퀴 그리고 살과 뼈를 짓이기는 강철의 처형 아래에 기꺼이 내 머리와 손을 밀어 넣을 수 있을 텐데.

인간들을 위해서라면.

불쌍하고 나약한 인간들을 위해서라면.

그때 상대의 팔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는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으레 그렇듯 나는 그게 비웃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검을 앞으로 밀어붙이려는 순간.

그 순간, 그가 별안간 힘을 풀더니 뒤로 물러섰다.

나는 앞으로 몰아붙이는 힘을 거두지 못하고, 앞으로 약간 휘청였다.

‘단검은? 내 단검은 어디로 갔지?’

상대의 피로 젖어있는 내 손가락만 느껴질 뿐이다.

손가락들이 움직여 서로 마찰할 때마다 미끈거렸다.

단검을 찾아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쓰는 나에게서 먼 곳.

그곳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뜻을 존중한다.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것으로나마 감사해야겠지.”

그때 상대가 뭔가를 나에게 던졌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낚아챘다.

장검이었다.

그리고 발치에 내 단검이 떨어져 챙그랑 소리를 냈다.

“그래. 그렇게 살아라. 네가 선택한 길을 꿋꿋이 걸어가라. 생각해보면 넌 언제나 그런 녀석이었어. 밤 속에서 등불이 되어주는 사람. 이 시대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 내내 기도하마. 너라는 등불이 꺼지지 않기를.”

내가 묵묵히 검을 집어 들고 다시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겨누었을 때, 쓸쓸한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나의 소중한 친구. 아델.”

*  *  *

그리고 끝이었다.

바람의 불어오기 시작한 공간 안에서 나는 홀로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홀로 서 있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오늘의 목숨을 지켰다.

언제나 적을 물리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정도로 만족하자.

나쁘지 않다.

“….”

나쁘지 않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나는 머뭇거리면서도 피에 젖은 손을 움직여 허리춤에 검을 갈무리했다.

사라질 줄 모르는 아픔이 점점 번져, 가슴 전체를 점령하고는 울렁거리게 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어디선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렇게 경직된 내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안녕, 세인.”

원인 모를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돌아설 때, 내 입이 무심코.

무심코 움직였지만, 돌아서는 나는 정작 그 내용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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