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71화 (171/307)

# 171

& 섭리를 인도한 검은 새는 언젠가 경배를 바친다.

까마귀는 세인에게 목적지를 말해주었다.

“너는 과거로 가고 있다.”

땅 위를 걷고 있었지만 바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검은 숲이었다.

잔뜩 가지를 드리운 나무들이 잎사귀를 무겁게 드리운 채 서 있었다.

바람도 없었고 나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자연스러운 숲이란 느낌이 강하다.

사위가 정적에 휩싸여 있다.

새나 벌레가 우는 소리조차 없었다.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어두웠다.

땅도 그렇고 하늘도 위아래로 침묵의 압력을 가하는 듯이 느껴진다.

그 적막의 입술이 닫힌 사이를 세인이 걸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생각해보면 빛이 들어올 구석은 없는데 모든 사물이 구별된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세인은 마검을 손에 쥔 채로 이동 중이었다.

이 숲에 들어서기 전에 까마귀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아가 되기 싫으면 오버 더 데스를 손에서 놓지 말아라.”

“어느 방향으로 이동해야 하지?”

“걷다 보면 자연스레 빠져나가게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해. 실상은 걷고 있는 게 아니라 견디고 있는 거지만.”

한참을 걷던 세인은 어깨 위에 앉아있는 까마귀를 향해 질문을 던져보았다.

“여긴 어디냐.”

“참 빨리도 물어보는군. ‘시간’이다.”

“….”

그리고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거인처럼 웅크린 그림자가 길을 막았을 때, 세인은 그 뒤엉킨 덤불 속을 통과하려 하지 않고 옆으로 돌아갔다.

까마귀는 여기가 시간이라고 답했지만, 세인이 느끼기에는 악몽과도 비슷했다.

아까부터 숨을 쉬고 있다기보다는 물속을 걷는 느낌이다.

‘어쩌면 여긴 공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일지도 모르겠어.’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세인은 잠시 멈칫했다.

하늘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형형색색의 별들이 모여 구름 같은 것을 이루고 있었다.

소리 없이 존재감을 드러낸 무수한 별들의 모임은 매우 아름다웠다.

오렌지색에서 붉은빛, 검붉은 색으로 번져나가는 별들은 초록색이나 파란빛으로 화해 가장자리를 물들였다.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까마귀가 말을 걸어온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고대의 역사는 진실이 아니다. 마왕 유고가 악과 결탁해 무슨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느니, 그의 누이인 유미리와 살을 섞었다느니 하는 말은 다 허구에 불과하다. 마왕 유고야말로 세상을 구한 존재이고. 네가 사는 세상은 그가 이룩한 승리의 대가이다.”

고대에 거대한 악이 일어났다.

그 악은 세상은 집어삼키기 위해 대 전쟁을 일으켰고 말이다.

어쩌면 세상은 그때 멸망하거나, 악마의 승리 안에서 안착했어야 할지도 모를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에서 돌아온 유고가 악을 격퇴하고야 만다.

그리고 패퇴한 악마들은 북쪽으로 쫓겨나고야 말았다.

인간들이 아는 역사 속 불멸의 영웅은 여제였다.

여제가 양지에서 드러난 최고의 영웅이라면, 음지에서 세상을 구원으로 끌어 올린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기억되는 것을 허락받지 않은 자, ‘마왕 유고’였다.

“유고가 용사였다?”

“그는 우리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지만, 용사라기보다는 죄인에 가깝지. 그가 죄인인 이유는 세계관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세계관.”

“질그릇 하나가 만들어져도 이유와 목적이 있겠지? 쓰임새가 있을 테고 말이야. 하물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떻겠나? 자신을 유지하는 규정이 있어. 그걸 거스른다는 건 세상에 정면으로 대항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현재 룰을 만든 신은 없지만, 아직 그가 만든 질서와 목적이 남아 있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

“….”

“당연한 말이지만 죽은 자는 마음대로 부활하면 안 돼. 깨어나 걸어도 문제가 되는 판에, 유고는 죽음에서 일어나 세상의 운명을 바꿔 버렸어. 세계의 규칙에 치명타를 날린 거야.”

여기서 세인은 의외의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인이 까마귀에 물음을 던졌다.

“넌 마검 옆에 있는 존재이면서도 신을 인정하지 않나?”

“인정? 인정을 떠나 현실은 이거야.”

그러자 까마귀가 머리를 돌려 말했다.

“네가 있었던 곳, 지금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도 신은 없어. 그게 바로 문제인 거야. 신의 부재 말이야. 그 망할 놈이 없으니까 문제인 거다.”

그 눈빛과 마주친 세인이 입을 열려고 할 때, 까마귀의 말이 다시 쏟아졌다.

그는 세계의 실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설명하려 들었다.

“죽은 자여 영원히 잠들라. 어떤 미련이 있어도 다시 일어나 나의 뜻을 거역하지 말지어다. 이걸 정면으로 어기고 호수 밑바닥을 휘저어 놓은 유고의 형벌은 역사 속에서 잊히는 거야. 사람들은 상대에게 기억되며 정체성을 찾지? 유고는 그 정체성을 정면으로 반박당한 거지.”

“….”

“그의 업적이 잊히는 것은 세상에서 삭제되는 것과 똑같아. 그나마 정령들이 유고의 존재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폭로는 굴절되어서 치욕적인 유고의 상을 만들어 내는 데 그쳤지. 지금의 유고는 극소수에게 기억되지만, 이미 본질은 왜곡되어 오욕의 화신이나 다름없지. 어디에도 그의 진실은 없는 거야.”

그렇다면 왜 부활이 죄가 되는 것일까?

부활은 왜 세계관에 반하는 것일까?

무엇을 거스르는 일일까?

“더구나 그는 환생도 못 하는 존재가 되었어. 그런 지독한 형벌을 받은 거야.”

“환생?”

물질계의 세계관은 환생에 맞춰져 있었다.

“하나의 주체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서 같은 이름을 가져. 그리고 어지간하면 전생과 같은 몸을 가지게 되어 있어. 그게 하나의 생명이 갖는 연속성이야.”

태초에 신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세상 어디에도 신을 찾아볼 수 없지만, 한때 선명히 존재했던 그는 분명히 세계의 법칙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환생이다.

하나의 생명은 죽음으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며 격을 높일 기회를 가진다.

결국, 이 세상의 세계관 중 하나는 더 높은 격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환생하며 거듭나는 것이었다.

같은 이름으로 최소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말이다.

지금은 없는 신이 정한 선순환 안에서 인간도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

하지만 유고는 그걸 정면으로 어겨버렸다.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태어나 걸었다. 그 정도까지만 했다면 적절한 벌로 끝났을 것이다.

부활이 장려되진 않아도 관용을 베풀자면 용서받을 수도 있는 벌이었다.

그런데 부활에서 더 나아가 세상의 운명을 아예 변화시켜 버렸다.

그러니 그는 형벌을 받고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으며, 강제력으로 인해 잊혀졌다.

그리고 소수에게 기억되긴 하나 본질이 흐려지고 치욕의 이름뿐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옥행이 결정되었다.

“세인. 네 시대의 악은 너무 오래되어 자신들이 누구인지조차 몰랐어. 하지만 그들 이전의 악은 어땠을까?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본디 그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세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켜도 까마귀가 알아서 대답해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가 환생하는 것은 아니야. 거듭 태어나며 기회를 얻는 존재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 존재도 있어.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두 패로 갈렸어. 첫 번째는 데스 크라운이나 홀리 크라운처럼, 애초에 격이 완성되어 있으니 선순환 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야. 둘은 그대로 남아 고고한 별로서의 위엄을 지켰지.”

그리고 문제가 된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자들이다.

왜 우리는 선순환 안에서 더 나은 존재가 될 자격을 가지지 못하는 건가?

이 생각이 깊은 적의를 품은 악을 탄생시켰고, 세상을 흔들리게 했다.

‘보다 나아지고 싶다.’ 혹은 ‘불공평하다.’ 이게 바로 악마들이 탄생해 대전쟁을 일으킨 이유다.

세인은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까마귀가 밝힌 세상의 규칙에 놀라는 게 아니라, 뜬금없게도 조세핀 같은 왕족들을 생각했다.

왕족들의 이름은 평민들이 쓰지 못한다.

아주 깊은 산속에서 속세를 완전히 끊고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조세핀 같은 사람은 다시 태어나도 귀족으로 태어나는 것인가?

인간의 기준으로는 불공평한 규칙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기억을 잃고 다시 태어나 살아간다는 게 과연 행복한 일일까?’라는 판단도 든다.

낯선 환경에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을, 과거와 연결된 자신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세인?”

“다시 태어난다는 건 오히려 형벌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다른 환경에서 다시 모자란 내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다시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고,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간다는 게 괜찮은 걸까? 분명 ‘나’이긴 하지만, 내가 아니잖아. 내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다른 내가 있다면, 지금의 내가 그를 인정하기 쉽지 않을 거 같아.”

“….”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건 고문 같기도 하군. 그리고 이름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는데….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타인이 그걸 알아보면? 드문 일이라고 해도 전혀 없을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결국, 깨끗한 재시작도 아닌 것 같아. 원한이 계속 따라다닐 수도 있는 거겠지.”

“삶의 재생이 성립하는 이유는 영혼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인 거야. 선순환 안에서 고조시키듯 영혼의 질을 높여가는 길이 환생인 거다. 같은 이름과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배려한 건, 본인이 그걸 인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정체성의 연속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때문이야.”

“글쎄. 내 생각으로는 차라리 하나의 생명이 오래 가는 것이 나은 것 같아. 엘프처럼 말이야.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삶 속에서 성숙할 수 있잖아. 내가 죽고 다른 무언가로 태어나야 한다면, 그게 강제된 것이라면 과연 기뻐해야 하는 일인가? 나는 누구에게도 내 품격을 높여 달라고 애원한 적이 없는데.”

“환생을 질투하는 악마들이 들으면, 약이 오를 말을 하는군.”

“너는 선순환이라고 말했지. 하지만 좀 더 나아지는 것이라서 선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라면, 지금 형편없는 자들은? 악에 가까운 건가? 게다가 내가 그런 순환에서 내리고 싶다 해도 불가능한 거잖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도 나는 다시 태어나야 하잖아.”

세인은 항의한다기보다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숲을 지나가며 잡담하는 식으로 까마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이제 도착할 곳은 유고의 시대이다. 끔찍한 악들이 범람했던 혼돈의 시대. 공포와 피로 점철된 시대 말이다. 홀리 크라운. 데스 크라운의 선물인 엘릭서가 주어진 건 그 이후다. 그러니 거기에서 제힘을 발휘한다는 건 무리한 요구야. 모순이니까.”

그때 세인은 자신도 모르게 우뚝 멈춰섰다.

대머리 괴물이 그의 시대로 소환하는 것은 고대의 괴물들이었다.

즉 지금 그가 가고 있는 곳이라는 소리가 된다.

만약 그가 유고를 도와 괴물들을 다 격퇴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가 돌아가는 시대는 끔찍한 악의 위협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적들이 과거에서 미래로 오기 전에,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친다.’

그게 일차적으로 와닿지 않는 환생이고 나발이고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세계관이든 뭐든, 그에게는 당장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안녕이 중요했다.

괴물들이 현세에 도래하기 전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소환되기 직전인 그들을 막을 수 있다면, 그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환생이고 뭐고 다 상관없어. 그런 건 내가 깊게 생각할 영역이 아니야. 중요한 건 이거다. 과거로 돌아가 그들이 현실에 닿기 전에 죽여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건 내 시대에게 있어 무혈의 승리야. 그 과정에서 내가 죽어도 좋아. 그들을 기필코 막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면 사전에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잖아.

그럼 왜?

“무슨 말이야? 그러면 내가 왜 그 시대로 가는 건데? 왜 내가 거기로 가야 하지? 나는 목전에 둔 중요한 일에서 등을 돌리고 너를 따라가고 있는 거야. 그런데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면 가는 의미가 없잖아.”

까마귀가 작게 웃었다.

“이미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그걸 고려하지 않더라도 여기서 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왜냐면 넌 이미 갔다 왔어. 세인. 다시 살아난 유고의 곁에서 그를 지키며 북쪽으로 올라간 검은 존재가 있었어. 그게 누구일 거 같아?”

“….”

“그건 바로 너야.”

“무슨….”

“너는 이미 유고의 곁에 있었어. 그 진실을 재완성하러 지금 가고 있는 거야. 너는 거기에서 진정한 적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완성된 존재로 거듭날 거야. 그건 곧 검은 왕의 완성이야.”

바람이 없는 곳.

그림자와 나뭇잎이 무성한 검은 숲에서 세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바닥에 앉았다.

그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의 향연을 감상했다.

여기는 세상의 그 어디도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평생 바다를 볼 수 없으리라 여겼지만, 언젠가 바다와 마주쳤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머물지 못했다.

그는 종종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되고 싶어 했고,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공간과 마주쳤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여기에 머물 수가 없었다.

‘바다 앞에 섰을 때처럼.’

그는 여기에서 잠시 자유로웠다.

이곳에서의 그는 혼자나 다름없으니까.

이 수다스러운 까마귀만 빼면 말이다.

“세인. 난 너에게 주어진 그 순환이 부럽다. 왜냐면 내겐 엄연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 이 갇힌 격 안에서 나도 흔들린다. 나도 괴롭다. 그래서 나는 너를 유혹했다.”

새는 오랜 시간을 버티며 자신의 본질이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그 고행은 끝이 없었다.

그의 정신은 모루 위에 힘없이 누워 망치질을 기다리는 쇳조각 신세가 되었다.

내리쳐지는 망치는 받아들이기 나름이었다.

시간이 될 때도 있었고,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고뇌일 수도 있었다.

혹은 이제 자리를 비우고 영원히 잊혀 버린 신의 눈총일 수도 있음이다.

까마귀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번쯤 추론해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거듭된 선순환을 거쳐 높아진 격으로 거듭난 생명체들은 태초의 신에게 도달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신이 짜놓은 계획인가? 자리를 비우고 잊힌 그 무책임한 신이 그걸 고집했을까? 수많은 생명이 그와 만나게 된다면 어떤 해답을 들을까?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무엇일까?’

무가치.

‘단순히 망치질 소리인가. 생명체들이 진화의 길을 걸어갈 때 멀리에서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 순환이라는 긴 여행을 마치고, 신이 마련한 집으로 돌아가는 생명이 듣는 소리. 멀리 대장간에서 들려오는 의미 없는 망치질 소리. 내 절규를 그들은 노래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

까마귀는 이미 지옥 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네게 권유했다. 마검의 힘으로 세상을 가지라고 말이다. 그건 완벽하진 않지만, 훨씬 짧은 여정이었고, 모두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극소수에게는 해결책이 될 수도 있었어. 하지만 너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 세상은 호수였다.

그리고 매 순간이 끊임없는 연장선이었으며, 이면을 한몸에 품고 있는 모순적 정의가 호수 안에 난립했다.

여기 있는 까마귀조차 그 안에서 절망했으며, 타락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끔찍한 자신의 삶 속에서 악마로 돌변하고도 싶을 때가 있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단순명료하지도 않으며, 한가지 성질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단지….

“너는 검은 왕이다. 너는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선택했다.”

까마귀가 생각하기에 세인이 검은 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세인이 검은 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한곳을 향해서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까마귀는 그렇게 생각한다.

“라이트닝 블러드. 너는 엘릭서가 정해준 규격조차 거부했다. 한 시대에 국한된 구원이 아니라, 호수 전체를 구원할 의지를 품었다. 네가 선택한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끝에서 나는 기꺼이 너에게 경배를 바치마.”

너에게 언젠가 나의 경배를 바치겠다.

이런 알쏭달쏭한 말이 끝나고, 숲도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낯선 영역이 성큼성큼 세인을 향해 다가온다.

다른 시대의 문.

그 앞에서 세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다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길이었다.

그는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시대에 진입한다.

마왕 유고가 다시 살아나 걷고, 악을 물리친 세계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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