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 검은 새가 인도한 섭리 (8)
대 폭로를 당한 세인은 책에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는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얼굴이다.
한숨을 쉰 세인은 그 책을 내려놓고 다른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세리스가 이번에도 속삭였다.
“범인이 한 명인 줄 알았겠지만, 천만에요. 마차 안의 모두가 범인이에요. 다들 작당한 거라고요.”
결국, 세인은 그 책도 내려놓으며 짜증을 냈다.
“이봐 세리스. 숙녀답게 독서 예절을 지켜야지.”
빙그레 웃은 그녀는 세인을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좀 더 놀아주세요.”
그러면 세인은 그녀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아 헝클였다.
그리고 다시 금발을 뒤로 쓸어 넘겨주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렇게 귀찮게 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나가서 한 바퀴 뛰고 와.”
여기에서라면 둘은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서로 자유롭게 굴었다.
그 자유 안에서 세리스는 행복을 만끽했다.
물론 이 감정은 세리스 혼자만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세인이 자신과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게 바로 ‘이제 추리소설은 포기하겠어.’라고 말하고는 다른 소설책을 집어 든 세인의 옆에서 세리스가 짓궂게 웃는 이유였다.
이제 그녀는 아예 줄거리를 읊기 시작했다.
세인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 책에 집중하려 하다가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글씨를 보기 위해 돋보기를 들 손도 필요했고, 책장을 넘길 손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미친 여자야. 그만해.”
그리고서 팔로 세리스의 목을 감아 조르는데, 그녀의 손이 그의 팔을 탁탁 쳤다.
시비 걸 때는 언제고 이제 그만 하자는 소리였다.
결국, 독서 같은 사치스러운 일상은 포기하고 자리를 옮긴 둘의 이야기가 두런두런 이어졌다.
“사람들에게 뭘 해주고 싶으세요?”
“평범한 일상을 선물하는 일이지. 일을 끝마치면 가족들과 함께 쉬다가, 휴일이 되면 공을 차고 뛰어노는 일. 그들에게 그런 것을 선물로 주고 싶어.”
“공은 누구나 차고 놀 수 있지 않나요?”
“정말 넓은 곳에서 마음껏 공을 차게 해주고 싶어.”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세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세리스는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전보다 나은 삶이라면 이미 선물하셨잖아요.”
그녀는 공포에 떨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지에 생각이 미친 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직 멀었어. 그리고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몰라.”
그리고 세인은 얼굴을 아래쪽으로 숙였다.
세리스는 세인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그의 입술이 맞닿는 바람에 시도로만 그쳐야 했다.
서로의 팔이 상대방을 끌어당긴다.
그렇게 한동안 뜨거운 숨결을 교환하는 둘이었다.
이렇듯 세리스와 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세인은 틈이 날 때마다 마차 안에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정성스레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그가 아는 사람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것이다.
펜촉으로 쓰이는 글은 분명 그의 글씨체였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도 사인을 넣을 것이다.
하지만 여건상 여기에서 인장을 찍는다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즉 받는 사람이 그의 편지가 아니라고 의심하려 든다면, 충분히 골치가 아파질 여지가 존재했다.
그래도 이게 최선이려니 하고 열심히 끄적이는데, 열린 마차 창문을 통해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왔다.
세리스는 밖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기 때문에 세인은 혼자서 그를 맞이했다.
세인의 앞에 앉은 까마귀는 검고 둥근 눈으로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이제 곧이다 세인.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세인은 미간에 세로 주름을 만들었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조차 방해를 받는 현실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다들 에티켓을 너무 무시하는군.
“한 가지만 묻지.”
그렇게 말하는 세인은 까마귀가 예상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까마귀는 당연히 목적지를 물어볼 것으로 생각했었다.
“되돌아올 시기와 장소를 내가 선택할 수 있나?”
“아니.”
이미 만만하게 굴지 않는 세상을 충분히 겪어 본 몸이라 그런지, 세인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냥 알았다는 식으로 ‘그렇군.’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곤 다시 편지 쓰기에 집중할 뿐이었다.
까마귀는 떠나가지 않고 그런 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한곳을 응시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전에 세리스를 만나기 위해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던 자리였다.
‘모든 건 복합적이지. 정체성조차 말이야. 때로는 그 복합적인 정체성이 자신 안에서 다투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한 까마귀는 세인이 오늘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뭔가를 명쾌하게 설명한다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세인. 마검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 멀리멀리 떠나는 건 어떠냐?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네 여생을 즐기는 건?”
수초도 지나지 않아 세인의 답변이 나왔다.
“이 세상은? 그럼 어떻게 되지?”
“네가 꼭 책임져야 할까? 반면 달아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어.”
펜대를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세인은 진심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나를 시험하는 너를 볼 때면, 나는 네 정체가 궁금해져. 이번에는 모든 걸 외면하고 떠나라 말할 차례야? 가끔 너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너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야. 네가 말한 나의 사명은? 지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나?”
“….”
“내가 작금의 책임을 뒤로 미루고 떠나는 이유는, 그 길 끝에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뭔가가 느껴지기 때문이야. 그리고 너도 이미 비슷한 말을 했지. 그런데 이번에는 또 나를 흔들어 보는군. 이런 너를 어디에서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검은 새는 조용히 세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세상 모든 게 이따금 너무 복합적이라 때론 상반되며 서로를 공격하듯이, 그렇게 모순이듯이, 우린 끊임없이 흔들리고 방황하지. 나라고 다르진 않아. 너도 네 감정 앞에서 흔들리잖아. 주관이란 게 알고 보면 다 그렇지.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끊임없는 방황을 막아주진 않아.”
까마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시 날아가 버렸다.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맘대로 가는 녀석이었다.
* * *
그다음 날.
세인은 세리스가 해주는 음식 대신 자신이 직접 음식을 했다.
맛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음식이었다.
그것을 먹은 세리스는 혹평을 했다.
“이건 딱 제 수준이네요.”
그러자 세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냐.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런 폭언은 삼가해 줘.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라고.”
“….”
그날따라 세인은 굉장히 자상하게 굴었다.
세리스의 어깨를 주물러 주는 한편 신발도 벗겼다.
“잠깐! 잠시만요!”
세리스가 기겁을 했지만, 세인은 떠온 물로 그녀의 발을 씻겨 주었다.
여기에 이 광경을 지켜볼 남이 없는 게 참 다행이었다.
물론 그래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꼭 이렇게 주고받지 않아도 돼요. 전에 제가 한 건, 제가 원해서였어요.”
“괜찮아. 나도 그렇거든.”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잠시였다.
세인의 단호한 손놀림에 그녀도 결국 응할 수밖에 없었다.
세인의 손가락이 그녀의 발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발의 아래를 지나 발꿈치를 정성스럽게 매만졌다.
가끔 발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기도 했는데, 그녀는 굉장한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참기에는 너무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세인은 씻은 그녀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릎이 젖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러면 세리스는 그윽한 눈길로 그런 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수건으로 닦은 발을 내려놓고 다른 발을 들어 올리자, 세리스는 어느새 노곤해지는 발의 감각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동시에 몸의 힘을 완전히 풀었다.
그렇게 느슨해진 상태로 자신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사실 식사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가시는 건가요?”
세인은, 지나가듯 물어온 말에 지나가듯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서 세리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실 그게 꼬치꼬치 따져 묻는 것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세인이 먼저 입을 열고야 만다.
“어디 가느냐고 안 물어봐?”
“제가 무슨 자격으로요?”
“너에게는 누구보다도 그럴 자격이 있잖아.”
그러자 세인의 손에 자신의 발을 맡긴 세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먼저 다가간 것은 그녀 자신이었고,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행동이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날 그녀가 그에게 한 짓은 강제성을 띠고 있었다.
분명 상대가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자신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고집한 것이다.
술 마시고 행패를 부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다만 그녀는 세인이 좋았다.
그 이유를 대자면, 그건 좋아하는 진실에 대한 뒤늦은 합리화일 뿐이었다.
이 간절한 마음 앞에서 그런 합리화는 이미 본질에서 비켜나갔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때론 너무 복잡한 감정이 얽혀있었다.
다만 그녀는 까마귀처럼 여러 감정 안에서 마모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물어봐서 대답을 해주신다면 뭐가 변하는 걸까요?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대답하기 껄끄러우니까, 먼저 이야기 안 해주시는 거겠죠? 그렇다면 상관없어요. 어떤 이야기를 듣든지 간에, 제 기다림은 변하지 않으니까. 세인님이 있는 장소를 알게 되면 더욱 힘들죠. 더욱 구체적으로 괴로워해야 하니까요.”
세인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실은 자신도 목적지를 모른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행여나 거짓말처럼 들릴까 봐서였다.
게다가 세리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인님에게 그걸 물어볼 자격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만큼 모두를 위해서 충분히 노력하셨잖아요.”
“….”
“이럴 때 잠시 자리를 비우려는 세인님을 의심하고, 탓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격이 없는 자에요. 세인님의 곁에 있을 자격이요.”
세인은 세리스의 발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세리스.”
“예.”
“둘만 있을 때는 나를 편하게 불러. 우린 이제 남이 아니야.”
그러자 세리스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냥 그 말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뜻의 웃음이었다.
저녁이 되자 세인이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을 세리스가 말렸다.
그러더니 자신이 하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며, 직접 식사 준비를 했다.
세인은 요리하는 세리스의 곁에서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왜 정작 요리를 할 사람인 아비게일은 안 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음식을 다듬는 걸까? 적재적소에서 재능이 빛나야 하는데 말이야.”
“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세리스는 정말 열심히 한다고 노력했지만, 역시나 처참한 결과물을 내놓고 말았다.
게다가 양 조절도 실패해서, 엄청난 양의 감자 덮밥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을 꾸역꾸역 먹는 세인은 정말 속으론 죽을 맛이었겠지만, 엄지를 세워 보였다.
“맛있다. 세리스. 정말 맛있어.”
“….”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다만 진실도 아닐 뿐이다.
둘은 그날 밤 별을 바라보며 마차 밖에서 잠을 청했다.
쌀쌀한 날씨지만 두꺼운 모포와 침낭.
모닥불이 그걸 상쇄해 주었다.
두껍고 겹겹이 채워진 모포 위에 커다란 침낭이 있었다.
그 침낭 안에 들어가 나란히 누워 있는 연인은, 말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밤하늘을 감상했다.
대화가 없는 시간을 세인의 가슴 위에 올려진 세리스의 손이 채워나갔다.
둘의 손은 뜨겁게 서로의 마디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 꼼지락거리는 움직임 속에서 자신이 아닌 상대의 움직임을 느꼈다.
이따금 손톱이 손바닥에 스칠 때면, 단단한 그것이 낯선 상대의 느낌을 더욱 잘 전달해 주곤 했다.
그러다 세리스의 다른 손이 움직였고, 그녀의 입을 가렸다.
가린 손의 안쪽에서 작은 하품이 빠져나온다.
“졸리면 자. 굉장한 양의 저녁을 먹었잖아. 졸린 게 당연한 일이야.”
“감자에 수면 효과가 있나 봐요.”
“글쎄. 감자의 의견도 한번 들어 봐야지. 정작 감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
그와 그녀는 서로를 쓰다듬으며, 별 아래에서 드문드문 이어지는 대화를 지속했다.
세리스는 잠이 몰려오는 가운데에서도 그걸 참아내려 열심이었다.
하지만 무정한 눈꺼풀은 결국 무겁게 감기고야 만다.
사랑하는 이의 안락한 품속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세인은 잠이 든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대고 고른 숨소리를 냈다.
그의 숨소리는 세리스의 숨과 어울리며 점점 더 깊은 밤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그는 그녀를 더듬는 것보다는 따뜻하게 안아주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뒤척이며 더 파고들 때, 세인이 속삭였다.
“미안하다. 세리스. 미안해.”
그리고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내가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까마귀의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훌쩍 떠날 수 있을 때가 바로 지금인지도 몰랐다.
그라고 종종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 않았겠는가?
곧 떠나게 될 미지의 목적지가 아니라 원하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그를 모르는 곳으로 말이다.
그는 이제 혼자도 아니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을 가졌다.
그녀와 함께 훌쩍 떠나버린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아찔한 별빛 아래, 어쩌면 오늘날의 그는 왕관보다도 더욱 지독한 것에 지배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몰랐다.
책임감이란 놈이 내부에서 그를 갉아 먹는 소리를,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 세리스가 작은 기침을 했다.
그 바람에 세인은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
그리고 낮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세리스.”
두 번째로 하는 사과다.
‘나는 세리스에게 책임지지 못 할 짓을 저지른 걸까?’
세인은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답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세리스가 내는 고른 숨소리가, 따뜻한 숨결이 그의 얼굴에 와서 닿았다.
세인의 손이 움직여 두꺼운 모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와 자신의 얼굴 위를 덮는다.
* * *
다음 날 아침.
아침에 그녀는 혼자였다.
아직도 그의 여운이 남아 있는 따뜻한 침낭 안에서 세리스는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간밤에 세인이 머리 위까지 덮었던 두꺼운 모포는 흘러내려 그녀의 목 어림에서 놀고 있었다.
희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때 그녀가 느끼는 허전함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나마 지금은 다행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그 상실감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구멍이 되어 마음을 관통할 것이다.
그 구멍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구멍이었다.
“괜찮아.”
세리스는 누운 상태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돌아올 것이었다.
그리고 세인이 돌아올 곳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기력감에 한참을 누워 있던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종일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침구를 정리하고 마차 안으로 이동한 그녀는, 뒤늦게 자신에게 남겨진 세인의 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자 눈물과 함께 서러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떨리는 두 손으로 그 편지를 잡았는데, 도저히 펴볼 수가 없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 펴보았다간 편지가 금방 눈물 투성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편지가 젖을까 봐 펴볼 수는 없어도, 지금 여기서 울 수는 있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결국, 편지를 품에 안은 그녀는 펑펑 울었다.
한참을 크게 소리 내서 울었다.
한창 그러다 보니 자신이 우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리고, 그게 지금의 현실을 더욱 부각하고 부추겨서 더욱더 크게 울게끔 만들었다.
그렇게 세리스는 세인과의 이별을 삭히며 받아들였던 셈이다.
세인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그녀는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검을 휘두르며 수련을 하는 모습을 보였던 세리스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제야 마차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글리터로 돌아가 그녀가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이제 세인이 없는 빈자리를 그녀가 채워야만 했다.
세인과 하나가 되었고, 이제 그의 짐을 나누어지려는 세리스였다.
“….”
그가 떠난 후 일주일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세리스는, 마차를 몰며 출발하는 순간까지도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말들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할 때, 그녀는 외투의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만지작거리다가 쑥하고 꺼냈다.
그렇게 주머니에서 빼낸 그녀의 손에는 붉은 묘안석이 들려져 있었다.
만약 이것을 세인의 앞에 내밀었다면, 세계수의 바람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세인은 결코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을 숨겼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울 정도라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닐 테니까.’
그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던 세리스다.
그를 눌러 앉히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세인의 뜻을 꺾는 게 되니까 말이다.
그녀는 마차 위에서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묘안석을 휙 하고 집어 던져 버렸다.
그 보석은 결코 그렇게 버려질 만한 가치의 물건이 아니었다.
묘안석은 돌멩이처럼 구르고 굴러 땅바닥 위로 엎어졌다.
그런 묘안석의 뒤로 점점 멀어지는 마차가 보였다.
오늘 이후로 세리스는 세인의 몫까지 책임지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
그녀의 몸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말이다.
묘안석이 귀족 여자들에게 환영받는 까닭은 단 하나였다.
묘안석은 아이가 깃든 여성의 몸에 닿으면 그 색깔이 붉게 변해 버린다.
임신한 지 얼마나 되었든지 간에 아이가 깃든 사실을 당사자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여성들에게 환영받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소중하게 다루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묘안석이었다.
그런 묘안석이 버려지고, 근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연인에게 일어난 하나의 이별.
그리고 두 개의 다른 시작이 일어났다.
각자의 여행을 떠나는 둘은 분명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황량한 땅 위에는 붉은 묘안석만이 천천히 본래의 색깔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렇다.
세리스는 임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