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69화 (169/307)

# 169

& 검은 새가 인도한 섭리 (7)

원래대로라면 세인은 번우드 지역으로 향했을 것이었다.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글리터에서 머무르기라도 했어야 했다.

떠나기 전에 처리할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세리스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쪽을 선택했다.

그건 짝이 된 세리스에 대한 배려였다.

인간, 사랑하는 사람, 새로운 관계를 존중하는 배려.

그리고 그걸 그녀도 알았다.

그녀의 이성은 세인이 주변 정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리스는 그런 자신의 이성을 무시해 버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요즘은 달콤함의 연속이었고 환희 그 자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책임을 외면하는, 영악함 정도는 그녀도 챙기고 싶었다.

자신에게 그 정도 권리는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이런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세리스와 세인은 늪지대 앞에 마차를 세우고 야영을 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이따금 세로로 꽂은 침처럼 박혀 있는 것을 제외하면 허허벌판이었다.

늪도 대부분 얼어붙어 있어, 그 위를 밟고 다녀도 될 정도다.

그래도 탁 트인 곳에서 불을 피우고 앉아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새벽에 먼저 눈을 뜬 것은 세리스였다.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잠들어 있는 세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뒤척이는 세인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동이 터왔을 때다.

세인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일어난 세리스는 모포를 둘러쓰고 마차 밖으로 나왔다.

문이 열렸다가 닫힐 때 얼어붙은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세인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늘씬한 맨다리를 드러내며 땅바닥으로 내려온 그녀는 불을 피웠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작은 냄비 하나를 들어 올렸다.

거기에 담기게 된 것은 하얗게 굳은 덩어리였다.

금발 머리가 흘러내려 한쪽 눈이 가려진 세리스가 눈을 반쯤 내리깔고 냄비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자 안의 내용물이 녹기 시작했다.

일단 다 녹자 부글거리며 거품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녹는 고체 안의 영양소가 다 파괴되어 버릴 것 같았지만, 요리에 관해서는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대범한 세리스였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그녀는 커피를 우려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작은 냄비 두 개를 양손에 잡고 불 위에서 돌리는 그녀의 목적은 명확했다.

커피와 하얀 액체를 합친 결과물을 가지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입맞춤과 함께 세인을 깨울 것이다.

배합에 신경 쓰던 그녀는 주변에서 나타난 물체를 보았다.

그것은 하얀 사슴이었다.

마차에서 나올 때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주위에 있었던 것일까?

전혀 기척을 못 느꼈다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사슴은 소리 없이 걸어와 세리스의 앞에 도달했다.

경계심을 느낀 세리스는 이미 냄비를 땅에 내려놓고, 마차 앞에 놓여 있던 검을 집어 든 상태였다.

“세리스.”

사슴이 그렇게 말하자 세리스의 두 눈이 약간 커졌다.

“검집이 얼어붙어서 검을 뽑을 수 없을 텐데?”

기척 없는 움직임.

능숙한 인간의 말투.

이 녀석은 몬스터인 걸까?

그녀의 머리가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는 검집 채로 사슴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너를 해치우는 건 몽둥이면 충분해.”

그러면서 그녀가 다가서는데, 사슴은 자신을 그녀의 편이라고 소개했다.

“네 말을 내가 왜 믿겠어. 그러니 어서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세리스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슴은 딴소리를 해댔다.

“억울하지 않아 세리스?”

“….”

“세인은 너를 이용하고 있는 거야. 글리터에서 자신의 공백을 채워줄 도구로써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왜 사랑하지도 않는 너와 살을 섞었겠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남자는 다 그래. 목적 때문에 여자를 안는 거지.”

다 떠나 독심술을 하는 사슴은 좋지 않았다.

정말 좋지 않았다.

커다란 불쾌감을 느낀 세리스는, 바닥에 놓인 냄비로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끔 움직여 사슴을 내쫓을 궁리를 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슴은 계속 이야기를 했다.

“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자기가 없는 동안 네가 혹사하도록 만든 거라고. 불쌍한 세리스. 왜 진실을 보지 못하지? 그의 면전에다 대고 너를 사랑하냐 묻는다면, 당연히 그는 거짓말을 할 거야. 그게 남자라는 족속이야. 하지만 행복하냐고 물어보려무나. 그가 머뭇거리지 않을까? 너도 그의 반응이 궁금하지 세리스?”

이상했다.

사슴이 말하는 내용을 떠나, 사슴의 목소리에는 이상할 정도로 강력한 설득력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최면이나 마법처럼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사슴의 말에 따라 불신의 싹이 무럭무럭 솟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세리스는 세인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표정을 무겁게 굳히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넌 누구냐?”

그러자 사슴은 자신의 설득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혀를 찼다.

그리고 답했다.

“죽는 것을 겁내는 존재. 그리고 보시다시피 신이 선택한 사람 앞에 서 있는 존재지.”

“….”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개 앞에서, 세리스는 검을 고쳐 잡았다.

그때 머리를 땅 쪽으로 낮춘 사슴은 갑작스럽게 헛구역질을 했다.

그렇게 토해낸 것은 작은 광석이었다.

마력석의 일종에 가까운 그것을 천천히 세리스 쪽으로 굴려 보냈다.

“이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너는 귀족이잖아? 귀부인들이 쓰는 거야. 내 선물은 그보다 더 크지만 말이야.”

세리스는 사슴이 토해낸 광석을 내려다보았다.

파란색의 광석 중심부는 검은 선이 세로로 그어져 있었다.

작은 것은 묘안석으로 불리며, 귀족 여인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 사랑은 반지 형태로 손가락 위에 안착하는 게 보통이다.

이렇게나 큰 묘안석은 세리스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걸 내게 보여주는 의도가 뭐지?”

“세리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죽는 건 아프고 두렵거든. 누구나 다 그런 거야. 그것뿐이야. 그래서 나는 전력으로 도망치고 싶어 하지. 내 죽음이 누군가에게 좋은 결말을 안겨준다 해도, 나 자신은 내 죽음에 동의 안하거든. 같은 여자니까 알겠지? 과거 내 몸이 더럽혀졌다고 죽어야 하겠어? 더럽혀진 게 죽을죄야?”

세리스가 묘안석을 집어 들자 그것은 붉은색으로 돌변했다.

세리스는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 묘안석을 바라보며 시선을 잘게 떨었다.

그 떨림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고, 반주처럼 그 위에 사슴의 말이 얹어졌다.

“생각해봐. 그는 목적지 설명도 하지 않고, 이 중요한 시기에 떠나려 하고 있어. 그전에 너를 안은 것은 매우 무책임한 짓이야. 그가 정말 너를 사랑했다면, 그런 짓은 안 했을 거야.”

“….”

“이번에는 그럼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살펴볼까? 한창 다른 나라들과 연대를 만들어 가는 이 시점에서. 드레퓨스가 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딘가로 떠난다고? 그게 지도자가 할 일인가? 세리스. 기사로서도 너는 이것을 말려야 해. 그게 네 본분인 거야”

그리고 하얀 사슴은.

세계수인 그녀는, 그를 잡으라 부추겼다.

세계수는 세인이 멀리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세리스는 세상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자였다.

지금으로서는 더더욱 강제 할 수 있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아무리 세계수라도 그녀를 공략하는 것보다 세인을 공략하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이다.

세인을 통해 세리스를 망가뜨리는 건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세인이 멀리 떠나버린다면, 세계수로서는 손쓸 수가 없게 되어 버린다.

“….”

하지만 세리스는 상대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녀는 손안의 묘안석을 바라보다가 그걸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전력을 다해 내 행복을 위해 움직인 것처럼, 그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움직일 권리가 있는 거야. 어딘가로 떠나는 그의 행동을 내가 손가락질해야 한다면, 내 행동도 손가락질 받을 수밖에 없어. 정말로 네가 누구든지 간에, 그에게 개입할 수는 없어. 너와 나는 그런 권리가 없다고.”

사슴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세리스. 그것을 보여주면서 세인을 잡아. 네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어. 내게는 그럴 권리가 없지만, 네겐 그럴 권리가 있어. 그건 너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결국 모두를 위하는 길이야.”

“….”

“희생도 말이야. 상대가 알아줘야 희생인 거야. 더구나 네 일방적인 희생이 가치가 있을까? 결국, 그는 권력의 누수를 막기 위한 도구로 너를 사용한 거야. 네 사랑을 빌미 삼아 저지른 짓은 아주 사악한 의도를 품고 있어. 남의 진심을 농락한 거잖아. 그런 사람을 보통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사슴은 선과 악이 뒤죽박죽된 존재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모순에 빠진 것이, 지금 사라져가는 세계수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사라지기 직전 세리스에게 마지막 단어를 내뱉었다.

“괴물.”

그 말에 반박하려 세리스의 눈이 사슴을 쫓았을 때, 더 이상 사슴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서 지워진 듯이 녹아 없어졌다.

설마 잠깐 꿈을 꾸었던 것일까?

하지만 가슴팍에 느껴지는 이물감이 그 생각을 다잡아 주었다.

*  *  *

한편 세인은 마차 안에서 잠이 깨어있었다.

누운 상태로 눈을 깜박이던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세리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세계수의 목소리는 귓가로 와닿지 못했기 때문에 세리스의 음성만 들린 것이다.

마차 내부에 있어서 세계수를 볼 수 없었던 그는, 그녀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나 싶었다.

‘이 여자 나날이 이상해지네.’

상체를 일으키는데 세리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몰고 온 찬바람도 그렇지만, 모포 안으로 안겨 오는 그녀의 몸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육감적인 그녀의 몸을 느끼던 세인은 손을 올려 그녀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세리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세인은 이제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때 세리스가 별안간 기습 질문을 해왔다.

“행복하세요?”

“뭐?”

“들었잖아요.”

“….”

아니 이 여자가?

세인은 마차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아침 댓바람부터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져오는 세리스를 이해해보려 애썼다.

이게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람에게 던질 말이던가?

머리가 멍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답을 주기란 어려운 질문이었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간단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진실하게 답하려면 들이는 생각이 짧지 않을 터였다.

이게 다 솔직해지려고 하는 바람에 들어가는 뜸이다.

“됐어요. 망설이는 거로 이미 답변이 되었어요.”

“이봐.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 답변하지 않았어. 먼저 질문을 던지고선 상대 말을 듣지 않고 행동으로 답을 유추하는 것은, 아주 몹쓸 짓이야. 이 악랄한 여자야.”

그러자 세인의 농담에 피식 웃은 세리스가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고 발뺌했다.

그리고서는 일어나 벌꿀차를 끓여 왔다.

아까의 냄비 두 개는 돌덩이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기 때문에 대상을 바꾼 것이다.

달디 단 차를 받아든 세인은 차가 식기까지 좀 기다리려 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세리스가 그의 손 쪽으로 얼굴을 기울이고 대신 후후 불어 주었다.

그렇게 식힌 차를 마신 후에, 세인은 그녀에게 마차를 이동시킬까 물어보았다.

세리스는 그러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가 좀 안쓰러웠다.

“여기 있으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느낌이 들잖아요.”

밤이 되면, 하늘에 별들이 몰려와서 뿌려진 은가루처럼 총총히 빛났다.

그러면 세인은 세리스와 손을 잡고 얼어붙은 늪지대를 산책하곤 했다.

가끔 말라붙은 나무 위에서 새 소리도 들려왔다.

둥지 안에 있는 새들은 꾀꼬리 같은 울음을 이슬비처럼 뿌리며 침묵을 몰아냈다.

밤 속을 걷는 연인을 위한 세례였다.

한 쌍의 연인은 멈춰 서서 그 소리를 즐기기도 했고, 침묵을 공유하며 계속 걷기도 했다.

둘은 이미 대화로 어색함을 메우는 시기를 지나 보냈다. 때론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적도 있었다.

손에서 손으로 느껴지는 온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며, 이따금 하늘에 오로라가 뜨면 감탄사를 흘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세인은 세리스와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읽었다.

손바닥만 한 추리소설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걸 돋보기로 읽느라 정신없이 빠져들 때면, 품에 안겨 오는 세리스가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거 해밀튼이 범인이에요.”

“….”

아니 이 여자가?

지금 추리소설 초입부를 읽는 사람 앞에서 결말에 나올 범인을 지목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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