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 검은 새가 인도한 섭리 (6)
드레퓨스의 바이칼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작은 전투라고 여겼던 곳에서 대패하자, 병까지 앓게 된 것이다.
왕치고는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기세가 완전히 꺾인 탓이 컸다.
왕이 왕으로서 서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면, 존재 자체에 심대한 타격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드레퓨스는 이득을 얻었고, 지금도 착실히 이득을 챙기는 중이다.
나날이 국력이 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바이칼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오늘내일하는 실정이었다.
그는 이미 제 정상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바이칼 앞에서는 여전히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는 신하들이었지만, 바이칼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기둥 뒤에 삼삼오오 모여 ‘바이칼은 끝났다.’고 수군거렸다.
“아무리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셨다고 해도 저렇게나 망가지시다니 걱정입니다.”
“이미 틀렸습니다. 눈에 초점이 없을 때가 너무 많아요. 가끔 말씀하실 때 알맹이 없는 허수아비와 대화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니 드레퓨스의 눈들은 자연스럽게 바이칼의 후계자인 반으로 옮겨졌다.
반.
이 인물을 어떻게 백성들에게 설명해야 할까.
이는 드레퓨스의 문신들이 계속 고민하는 주제였다.
우상화를 해야 할 텐데 이 후계자는 장막 뒤에 깊숙이 숨어 있었다.
베일에 둘러싸인 그는, 정체 숨기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보통 드레퓨스의 차기 주인이 될 자 같으면 과시욕도 남달라야 할 텐데, 수도 거리에는 그의 동상이나 초상화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반이 겸손한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었다.
지독하게 꼬여 있고 괴기스러운 짓도 태연히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행동도 논리적이지 않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신하들은 그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한 장군이 반이 머무는 별장에 방문했다.
은과 금으로 장식된 건물은 위풍당당했다.
그리고 호화스럽기로 따지자면 바이칼이 머무는 거처 다음일 정도였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잘 닦인 바닥과 벽의 거울, 그리고 표면이 반질반질한 천장에 장군의 모습이 나누어져 비쳤다.
반이 있는 방 앞에 도착한 그는 옥으로 만든 문고리를 잡고 양쪽으로 당겨 열었다.
그러자 당장 시선을 끄는 것은 고급스럽고 넓은 방이 아니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이었다.
어림잡아도 수십 구는 될법한 시체들이 잠든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걸 보고도 장군이 당황하지 않는 까닭은 이게 바로 반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왔나?”
반은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장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반에게 용건을 말했다.
“바이칼님이 곧 영면에 드실 거 같습니다.”
“알았다.”
짧게 대답한 반은 책을 ‘탁.’하고 닫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걸쳤다.
주변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은 모두 독약에 당했다.
반은 점령국에서 미녀들을 요구해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모조리 죽였다.
사람들은 그가 여러 식민지에서 매일 미녀들을 요구하는 것이, 드레퓨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길을 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만 여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은 상당히 괴팍한 행동이었다.
점령지들은 분노에 떨었지만, 드레퓨스에 비해 약소국이라 저항할 힘이 없었다.
고약한 것은 드레퓨스 내부에서는 이걸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이 절륜한 정력을 가지고 있다고 대외로 선전한다는 것이다.
“맞춰보게.”
“무엇을요?”
반이 발을 내밀자, 가까이 다가와 신을 신겨주는 장군이었다.
그는 장군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이 중에 몇 명이나 처녀였을까?”
잠시 말문이 막힌 장군은 몇 초 정도 입을 닫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다 처녀겠죠. 누가 감히 처녀가 아닌 자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반이 키득거리며 허리띠를 몸에 감았다.
핏빛처럼 붉은 허리띠였다.
무심한 것도 아니고, 장난스러운 그의 중얼거림이 시체들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나야 같이 뒹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지.”
반은 사람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의 세계에서 넘쳐나는 게 바로 사람이었다.
여기 있는 여자들은 그의 판단하나 때문에 모조리 죽은 것이다.
매일매일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합치면,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딸을 잃은 부모들의 울음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가치 없는 사람들을 챙겨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 한 명을 위해 거침없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반 자신이다.
반은 바이칼이 누워있는 곳으로 가면서도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쾌활해 보이는 몸짓으로 넓은 복도를 걸어갔다.
신하들은 아주 멀리에서부터 그를 발견하고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이미 드레퓨스는 반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드레퓨스가 지배하게 될 땅은 그의 것이 될 것이었다.
문밖의 근위병은 방으로 들어가는 반을 검색하지도 않았다.
최고 권력 앞에서 알아서 기는 것이다.
병상 앞에 선 반의 눈으로, 삐쩍 말라서 오늘내일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의 아버지다.
하지만 반의 얼굴에는 그다지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바이칼의 곁으로 가서 그의 손을 잡은 반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셔야죠.”
“….”
바이칼은 가물가물한 시선으로 머리맡의 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문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이칼은 그의 자식을 향해 무겁게 말을 꺼냈다.
“드레퓨스는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
이번에는 반의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여기까지로도 충분하다. 지금 점령한 땅들도 다 감당이 안 될 정도야. 법령을 발포하는 일만 제대로 해도, 네 평생이 소모될 수도 있음이다.”
반은 두 손으로 바이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아버님. 죽음이 가까워져 오니 마음이 약해지신 것은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
“아버지와 저는 전쟁을 하는 것 외엔 관심이 없고, 재능이 없으니까요. 저희는 치세에 능력이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그저 백성들을 쥐어짜고, 다시 쥐어짜는 순환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제 와서 그 물레방아를 멈출 수 있을까요?”
바이칼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백성들이 원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그들을 채근하고 미치게 한 건 바로 저희입니다. 그들의 뇌 안에 광기를 심어 놓은 게 우리라고요. 그들은 수레바퀴가 멈추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희생했으니, 수레 위에 자신들이 타 있다고 믿으며 어딘가로 데려다주길 원하죠. 그 착각을 수정하는 것은 더 이상 우리 몫이 아닌 겁니다.”
반과 바이칼은 외줄 타기를 하는 방법밖에 몰랐다.
보통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반과 바이칼을 보며 대단하다며 손뼉을 치고 우러러볼 것이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도 저런데 지상에 내려오면 더 훌륭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평화를 유지하고 나라를 행복하게 만드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반은 폭군으로서 드레퓨스를 잘 이끌어나갈 자신은 있었다.
거기에 한해서라면 그는 정말 재능이 넘친다.
아무 죄 없는 여자들을 떼 몰살시킬 수 있었고, 정신 나간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반이었다.
“그런 기질은 아버님을 닮았죠.”
신하들을 감시하며, 칼날 위에 선 기분으로 살게 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천성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지독하게 몰아세우는데 재능이 있는 반.
하지만 선정을 펼치는 재능은 없었다.
그런 건 하늘이 나라를 위해 내려주는 것이다.
그가 바이칼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릴 때, 바이칼은 이를 악물고 자식의 손을 잡았다.
“네가 나를 독살하는 건 이해한다. 넌 내 핏줄이니까. 내가 한 방법을 너도 쓰는 거겠지. 하지만 여기에서 멈춰라. 여기에서 멈추는 게 드레퓨스를 위하는 방법이야! 정 내 충고가 듣기 싫다면 네 어머니를 생각 보아라. 무덤 안에 있는 네 어머니 말이다.”
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목이 쉰 소리를 내는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바이칼은 왕의 재목이 아니었으므로 후계자 서열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사악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고, 이제는 반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아버지를 독살시킨 것이다.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반도 왕의 자리에 오르기 힘들었다.
바이칼은 병석에 누워 반이 형제들을 하나둘씩 처리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한숨을 내쉰 반은 별안간 바이칼의 멱살을 잡았다.
이 넓은 방 안에 그와 바이칼밖에 없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이래서 방에 들어오기 전, 독대하겠다고 주위의 신하들을 물리친 것이다.
그리고 아주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바이칼에게 또박또박 자신의 마음을 들려주었다.
“이봐, 미치광이. 끝까지 예의를 지킬 주제도 안 되는군.”
“….”
돌변한 반은 눈을 부릅뜬 바이칼 앞에서 그를 조롱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따지고 보면 네가 이 난장판을 만들었잖아. 그런데 왜 내 어머니를 들먹여? 전쟁을 일으킨 건 너야. 그리고 패배한 개가 되어 도망 나왔지. 지금은 빌빌대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말이야. 그런데 뭐? 여기에서 멈춰? 네가 내게 충고할 자격이나 돼? 네가 강도질을 시작해 놓고 나보고 회개하라고?”
반은 지금의 바이칼이 너무나 한심했다.
“내가 너를 죽이는 걸 끝까지 모른 체했어야지. 그게 바로 왕좌의 예의야. 그런 상식을 지금 너에게 기대할 수 없는 건가? 꼭 끝까지 이렇게 기분 더럽게 만들어야겠어? 패했으면 그냥 모른 척하고 눈을 감으란 말이야. 왜 끝까지 지저분하게 구냐고. 대체 마음속으로 승복해야 할 시간에 뭘 한 거야?”
이 정도면 평범한 사람에게 보내는 조롱과 모독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바이칼의 목에서 거칠게 손을 떼어낸 반은 혐오스럽다는 듯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작게 중얼거린 소리를 바이칼의 귀는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자기가 못나서 당한 일을 가지고, 나만 패륜아로 만드는 군….”
그리고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지금의 바이칼은 종이호랑이나 마찬가지였다.
권력은 냉정한 것이고.
이미 반에게 이동한 지 오래다.
권력을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바이칼에게 끝까지 지조를 지킬 충신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게 바로 바이칼 자신이다.
문이 쾅 하고 닫혔을 때, 그 종이호랑이의 눈에서 분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 * *
성큼성큼 걸어간 반이 도착한 곳은 왕좌가 있는 곳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바이칼이야 어차피 얼마 못 살고 죽을 목숨이다.
지금 강력한 실권을 가진 반은 거리낄 게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왕좌에 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그려져 있는 세계 전도를 보았다.
지도가 그려진 바닥에는 초상화가 몇십 점 깔려 있었는데, 거기 그려진 것은 세인의 얼굴이었다.
“세인.”
반은 깍지낀 양손을 무릎 위에 단정히 올려놓은 채 중얼거렸다.
세인이라는 존재를 어둠 속에 묻어버린 공작을 한 것이 드레퓨스였다.
그래서 대중들은 세인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여기 있는 반은 아니었다.
“세인. 이놈이 장애물이야.”
그때였다.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블랙 라이어드 상단의 주인인 슈나이더였다.
슈나이더가 천천히 걸어와 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기꺼워하는 반이었다.
“손을 잡자는 내 제의를 수락하는 건가?”
반의 말에 슈나이더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답했다.
“제의라뇨? 명령이죠. 다만 제가 시간을 끌었던 것은 결정하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복종심을 가다듬기 위해서였습니다.”
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을 텐데도 철저히 굽히는 슈나이더를 보며, 반이 씨익 하고 웃었다.
딸의 복수를 위해 혈안이 된 슈나이더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군대도 배가 고프면 싸움을 할 수가 없었다.
반이 생각하기로 드레퓨스가 지상 위의 제왕이라면, 슈나이더는 음지 속의 왕이었다.
게다가 목표도 같은 상황이다.
그 어디에도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세인.”
슈나이더와 반의 손을 잡게 만든 주적이, 알현실에서 몇 번이나 거론되었다.
“이놈은 말도 안 되게 강하다. 불가사의할 정도야.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놈을 이길 존재는 없어 보인다. 분하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자네도 나와 손을 잡은 것이겠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네조차도 불가능한 거야. 홀로 이놈을 제거하는 것이 말이야.”
슈나이더는 무릎을 꿇은 채로 묵묵히 반의 말을 들었다.
“일인 군단이나 마찬가지인 이놈이 바로 대업의 장애물이다.”
“그는 사람들 주변에서 힘을 함부로 쓰지 않을 것입니다.”
슈나이더가 그렇게 대답해도 반은 고개를 저었다.
“급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건 누구나 똑같아. 이놈도 급하면 전력을 다할 것이다. 사람이 죽어 나가건, 말건 말이야. 그런 녀석을 막을 방법이 없어. 하지만 적에게 약점이 없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지. 약점이 없다면 만들어야겠지. 무려 세상이 달린 승부니까 말이다. 슈나이더? 자네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슈나이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 세인을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 그놈을 기필코 죽일 거야. 그걸 위해서 어떤 인내라도 감수하겠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내 목숨을 걸겠다. 어때? 이 정도면 만족하나? 검사로서, 대상단의 주인으로서 자존심을 굽힌 네가 보기에 말이야.”
그러면서 반이 팔짱을 끼었다.
슈나이더는 그런 반을 올려다보았고 말이다.
슈나이더가 반과 손을 잡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세인은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힘을 휘두르는 괴물이다.
하지만 그걸 떠나 반은 기필코 세인을 죽일 것이다.
그는 미치광이니까, 지금 말한 것처럼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슈나이더가 그와 손을 잡은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