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67화 (167/307)

# 167

& 검은 새가 인도한 섭리 (5)

세인과 영주는 멀리에서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애써 외면하며 걸었다.

알고 보니 영주는 틈도 많고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와의 대화가 길어지자, 그게 점점 드러난다.

“당신하고는 이상하게 대화가 잘 맞는군요. 그래서 그런데, 제집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동행인과 함께 오실 의향이 있으신지? 실례가 안 된다면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세인은 영주에 대한 평가를 약간 어설픈 사람에서, 바보로 정정하였다.

자신이라면 처음 본 타지인을 성에 초대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제 동행인이 낯을 많이 가려서요.”

“아…. 그렇습니까.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들었는데, 하긴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죠. 이해합니다.”

그 아름다운 여인과 영주가 전장에서 붙는다면, 영주가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걸 말할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영주는 결국 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말로 영지민의 시선을 가리고서 말이다.

“이 영지는 상태가 참 좋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를 경계하긴 해도, 대놓고 돌을 던지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거든요.”

그러자 세인을 향해 대놓고 측은하다는 표정을 내보이는 영주였다.

감정표현을 너무 솔직히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걸 본 세인은 혀를 찼다.

하긴 이런 곳에, 이런 영주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사람 좋은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가 나쁠 게 무엇이겠는가.

세인은 멀리 늘어선 과일나무 아래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냥…. 저런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강압적인 귀족이 아니라, 당신같이 가슴 따뜻한 귀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라.”

고급스런 말 한 마리 때문에 자신이 귀족임을 눈치 챈 거라고 생각한 영주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저희는 여기 정착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개척민 정신으로나마 생활을 잘 꾸려 가고 있는 거죠. 그러려면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귀족이랍시고 무조건 꾸짖고 강압적인 모습만 보여봐야 도움이 안 되죠.”

웃고 떠드는 아이들.

그리고 약간 거리를 둔 채 밭일을 하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얼굴.

그들의 표정에 서린 웃음을 보며,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맞는 이야기죠.”

무거운 수긍이었다.

나는 내 영지민에게 가슴 따듯한 귀족이었을까?

지금 생각하기에도 세인은 자신이 그런 귀족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빈센트입니다.”

빈센트의 대답에, 세인은 무례할 정도로 빈센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빈센트는 그런 세인의 행동에도 불과하고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왜냐면 세인의 무표정이, 정말 이상하게도 너무나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빈센트. 당신이 귀족임을 티 내지 않았으니, 나도 여행자로서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 대하듯 말하겠습니다. 귀족으로서 당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여기 사람들을 보듬어 주십시오. 그 따뜻한 가슴으로요.”

남자가 남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때와 장소에 따라 굉장히 닭살 돋게 들릴 수 있다.

그런데 빈센트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인의 목소리.

그리고 표정.

그 안에 있는 뭔가가 감정의 호소처럼 그의 진심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색함을 털어버리려 빈센트는 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그동안 글리터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을 보니 그런 편견이 좀 깨지는군요. 이곳 귀족으로서 말해주건대, 여행자로서 이 영지에서 편하게 쉬다 가도 좋습니다.”

세인은 빈센트의 손에 끼워진 영주의 반지를 바라보았다.

가이더가 인정한 영주의 상징.

그건 이제 세인의 손에 끼워질 수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저것을 손에 끼우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과거로 돌아가 따듯한 가슴으로 공포에 떨던 영지민을 끌어 안아주고, 과오를 수정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꾸 과거가 아쉬웠다.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을 호수라고 생각하면, 그런 시도가 좋은 결과를 낳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세인은 미소를 띠며 빈센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미약하게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빈센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영주인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저 지나가는 귀족 정도로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참… 허술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빈센트와 헤어지고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어둑해진 풍경 속에서 다시 까마귀가 날아왔다.

그 검은 새는 세인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인간은 정리해야 할 것도 많군.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가?”

그런 까마귀의 옆에서 세인은 딴소리를 했다.

“내가 없다면 세리스는 각성하게 되나?”

“뭐?”

“하나의 시대에 하나의 엘릭서가 깨어나는 거잖아. 내가 아주 멀리 떠나버린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자 까마귀가 답했다.

“그런 의미라면 그냥 멀리 갈 것도 없잖아. 네가 물에 빠져 일순간 심장이 정지되었다 치자. 그렇다고 그런 눈속임에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눈을 뜨거나 하진 않아. 더구나 세상은 호수니까. 네가 호수 안에서 죽음으로서 완전히 종결된다면 모르지만, 다른 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잔머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거군.”

까마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새 주제에 이런 짓을 잘했다.

“네가 뭘 어떻게 알고 있든…. 엘릭서는 인간에게 감동하거나, 인간을 인정한 천사 둘이 내려준 증표야. 사실 그 천사 둘은 세계 외적인 존재라, 정확히 말하자면 천사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만 말이야. 데스 크라운과 홀리 크라운. 두 초월자가 남겨준 상징이 바로 엘릭서인 거야.”

세인이 잠자코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까마귀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두 전능한 존재는 과거 여기 인간들의 분투에 감명받았어. 그래서 인간들에게 선물을 내려준 거야. 둘은 자매이기도 해. 그러면서 서로를 존중하지. 그러니 그들이 내려준 상징도 서로 반목하지 않고 배려하는 거야. ‘하나의 시대에 하나만.’이라는 말에는 그런 뜻도 포함되어 있어. 잠깐 잔머리 굴린다고 그런 상징이 수작에 속아 넘어가 줄까?”

“어쨌든 하나가 ‘완전히’ 잠들어야, 다른 하나가 눈을 뜨는 건 변함이 없네.”

왜 엘릭서는 라이트닝 블러드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두 천사가 인간에게 선물을 내려준 이면에는 어떤 큰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까마귀였다.

그런 것까지 이야기하기에는 당장 세인이 해결해야 할 일이 지척이었다.

“이봐.”

까마귀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리자, 까마귀는 힘차게 날아올랐다.

이 말만을 남겨 놓으며.

“다음에 내가 네 곁으로 올 때가, 바로 네가 떠나는 순간이다.”

멀어져 가는 새를 바라보던 세인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짚 냄새와 천의 감촉을 느끼며 깊이 잠들었던 그가 깨어났을 때.

세리스는 그의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어요.”

그리고 섬세한 손놀림으로 그의 턱을 매만졌다.

“머리카락 이야기를 하면서 턱을 만지다니 반칙이야.”

세인의 손이 그녀의 배를 만지려 할 때, 그녀는 몸을 뒤로 빼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옆으로 돌려보니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 속에서 세리스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세인을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그리고 흔들의자를 두드리는데, 냉큼 와서 앉으라는 뜻이다.

세인은 아주 느릿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세리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세인의 의자에 앉자, 하얀 천이 아침 햇살 속에서 펄럭였다.

동시에 빛 속에서 먼지들이 가득 보인다.

“이럴 것까지는 없는데.”

“멀리 떠난 다면서요.”

세리스는 세인의 얼굴로 뜨거운 물에 적신 천을 가져다 댄 다음 의자를 뒤로 살짝 밀었다.

그러자 세인의 몸이 의자를 따라 뒤로 넘어간다.

40초 정도가 지났을까?

수건을 뗀 그녀는 세인의 얼굴에 하얀 크림을 꼼꼼히 발랐다.

역시나 뜨거운 크림이었는데, 그것보다도 세인을 걱정하게 한 것은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해본 적은 있는 거야?”

“하는 걸 많이 봐왔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잠깐,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봐왔다고?”

세인의 항의를 무시하고 면도칼을 드는 그녀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턱에 가져다 댄 후, 면도 크림과 함께 살살 밀기 시작했다.

멀리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방안에는 간간히 세리스가 면도칼을 물에 씻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시 세인의 턱에 칼을 가져다 댄 그녀는 칼날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세인이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뒤로 물러나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전 검사라고요. 왜 이리 긴장을 하는 거예요.”

“검사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니야. 그리고 지금 흔들 위자 위라고.”

그러나 세리스가 지그시 바라보자, 그 앞에서 세인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면도 다음은 이발이었다.

그녀는 가위를 들고 세인의 검은 머리를 깎아내렸다.

그런데 과감한 가위질이 아니라 살짝살짝 터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 졸린 아침이었기 때문에 세인은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양팔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가 앞뒤로 움직이자 화를 내려고 했던 세리스였지만, 가위질을 멈추고 잠든 세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정을 담고 유심히 관찰하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다시 가위질을 재개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리는 가운데, 세인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천 위에 떨어졌다.

떠오르는 태양의 위광이 창문을 점점 넘어와 세리스의 발꿈치를 하얗게 찍었다.

그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각선으로 올라왔다.

가위질을 끝난 세리스가 옆으로 물러나자, 빛이 세인의 무릎과 가슴에 하얀 자국을 찍는다.

*  *  *

얼마나 잠들었던 것일까?

세인은 옆에서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잠을 깨우는 그 소린 거칠고 기분 나쁜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장가처럼 옆에서 울렸지만, 결국 그를 깨어나게 한 것이다.

눈을 떠보니 따뜻한 햇볕이 그의 몸을 데우고 있었고, 어느덧 하얀 천은 사라진 채 모포가 몸에 덮여 있었다.

눈동자만 돌려 옆을 바라보자 바닥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는 세리스가 보였다.

사그락거리는 소리는 종이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반쯤 감긴 눈을 깜박인 세인은 턱을 가슴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모포 속에서 팔짱을 끼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햇볕은 따뜻했다.

모포 안쪽은 더욱 뜨듯했고 말이다.

나른함을 만끽하고 있는데, 그가 깨어난 걸 알아차렸는지 옆에서 책장 덮는 소리가 들렸다.

세인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상태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에게 두서없는 질문을 던졌다.

“신을 믿는 건 어때?”

“예?”

“신을 믿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지?”

잠에서 깬 건 세인이었는데 오히려 세리스가 기지개를 켜며 발끝을 쭉 뻗었다.

웅크리고 책을 읽느라 좀이 쑤셨었나 보다.

기지개를 켜느라 벌벌 떨리는 그녀의 몸 울림이 의자를 통해 전해져 왔다.

“바다가 있고 조각배에 몸을 맡기고 있어요.”

“바다. 바다 좋지.”

햇빛을 받으며 세인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가운데 세리스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배는 그리 크지 않아요. 주위는 온통 물의 사막이고요. 해도도 없고 어딘가 섬이 있다고 해도 거기로 가는 방법은 몰라요.”

세인은 완전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 상태로 혼자 누워 있는 거예요. 바람과 파도가 어디로 데려다줄지도 모르는 채 말이에요. 어쩌면 같은 자리를 빙빙 돌지도 모르죠. 그것조차 확인할 수가 없어요. 그 좁은 배 안에 있으면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그리고 외롭다고 생각하게 돼요. 또 그게 정상인 거겠죠.”

“….”

“그런데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 불편한 생각을 멈추고 파란 하늘을 보는 거예요.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하늘 말이죠.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시원하다고 생각해 버려요. 파도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다줄지 모르고, 실은 파도가 아무 곳도 데려다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당신은 불안해하지 않아요.”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세인은 졸면서 드문드문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리스도 그에게 자장가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 같았다.

“신을 믿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신은 갑자기 나타나 조각배를 움직이지 않아요. 삶의 지침서가 없는 우리 인생은 조난이고 그 방황의 끝은 누구나 알고 있죠. 그 죽음에 유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누구나 죽기 싫어하니까.”

세인의 손이 모포 속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침대에 등을 기댄 세리스는 자신의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하지만 불안해하지 않아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믿음으로 그 순간순간을 즐겨요. 견디기보다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조각배 안은 너무 좁아서 아무도 들어올 수는 없지만, 그걸 알고 있지만, 곁에 다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말 그대로 불가사의한 믿음이죠.”

세리스는 잠든 세인의 손을 모포 안에 다시 넣어 주었다.

“그때, 곁에 있는 그 누군가가 바로 신이에요.”

다시 세인의 낮게 코 고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가 이렇게 깊은 휴식을 취하는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인지도 몰랐다.

*  *  *

실컷 자고 난 세인은 세리스의 손에 이끌려 침대로 움직이게 되었다.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대를 더욱 가깝게 느끼려고 노력했다.

그러려고 안간힘을 쓰는 시간이다.

그다음에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대화를 나누었다.

세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는 가운데, 세리스는 계속 떠들어 댔다.

그리고 세인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가 가끔 그녀가 말을 아예 멈추면, 그건 서로가 다시 깊게 키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서로 닿지 못하는 거 같아요.”

막 입술을 떼어낸 그녀가 반쯤 눈을 감고 감미로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할 때면, 세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세리스. 완전한 결합보다는 적당한 거리가 좋지 않을까.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서로의 단점마저 잘 보이잖아.’

하지만 그것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지금까지 하는 것을 보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봄도 끝이 있듯이 아무리 좋고 달콤한 시간도 끝이 있다.

짐을 풀어놓을 때와 달리, 이제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짐을 챙겼다.

그리고 새벽에 여관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매어진 말들은 인간이 가까이 다가오자 경계심을 느끼는 듯 제자리걸음을 했다.

하지만 세리스가 볼에 손을 가져다 대자 곧 흥분을 가라앉혔다.

여관 주인에게는 이미 계산을 끝낸 후였다.

이제는 홀가분하게 떠날 일만 남았다.

하지만 마차에 오른 세리스는 세인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겠어요?”

“뭘?”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세인은 세리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해도 듣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런 상태로 이곳을 떠나긴 싫어.”

세리스는 여기로 들어올 때라면 몰라도, 떠나는 세인의 마음이 걱정되었다.

새벽녘의 길 위는 당연히 텅텅 비어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담 위로, 말 두 마리의 머리가 휙 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 뒤를 말이 이끄는 마차가 뒤따랐고 말이다.

세리스가 계속 곁눈질을 하자 세인은 결국 쓰게 웃어 보였다.

“여기 영주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우린 이곳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어떻게든 잘할 거야.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사람들은 새 영주가 다스리는 것이지. 그러니 앞이나 신경 쓰라고 세리스.”

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삐를 움직여 말을 재촉했다.

무심하게 주변의 풍경이 뒤로 흘러간다.

세인도 세리스도 이제 말이 없었지만, 덤덤하게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 아레이즈가 점점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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