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 검은 새가 인도한 섭리 (4)
방 안으로 들어온 세리스는 세인을 지나쳐 창가 쪽으로 갔다.
그녀가 스쳐 지나갈 때 세인은 술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대담하게도 창틀에 올라가서 앉아 버렸다.
보통 그 자세는 만인이 쌍수를 들고 말리는 자세로, 취한 사람에게는 특히나 더욱 위험한 자세였다.
왜냐면 손을 놓은 상태에서 몸이 뒤로 뒤집히면, 그대로 바깥에 처박힐 것이기 때문이다.
세인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자, 세리스가 붉어진 얼굴로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떠나신다고요? 그렇게 마음먹으셨다면 충분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
“그런데 남겨지는 저는요?”
“오늘따라 유난히 집요한 구석이 있군.”
“하나만 물어볼게요. 혹시 사랑하는 분이 있나요?”
대답할 수 없던 세인은 손을 들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러자 세리스는 두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녀의 긴 눈썹을 보며 세인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먼 곳에서 너를 계속 생각할게. 곱씹어 볼게. 그러면 결국 나는 너를 마음에 품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이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야. 이럴 것까지는 없잖아. 네가 조금만 기다린다면 너는 오늘처럼 네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아도 돼.”
그러자 세리스가 눈을 떴다.
그 눈 안에 깃든 의도는 세인의 말에 전혀 수긍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인은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그녀의 의도대로 해줄 수가 없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엘라이저에게 마음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끝이 엘라이저의 거절이었다 해도, 여기에서 세리스의 마음을 덜컥 받는 것은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세리스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해 모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세리스는 사랑에 용기를 낸 좋은 사람일 뿐이다.
그녀는 엘라이저의 대용품이 아니었고, 되어서도 안 된다.
“네가 조금만 기다려 준다면, 지금 서두르지 않았음을 기뻐하게 될 거야. 내가 먼저 다가서는 게 좋잖아? 내가 먼저, 그러니 기다려 줄래? 내게는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
보통 때 같으면 세리스는 여기에서 수긍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게 바로 평소의 그녀였다.
하지만 가슴 안의 뭔가가 그녀를 과격하게 만들었다.
솔직함을 위해 스스럼없이 전진하게 했다.
세리스는 난간을 붙잡았던 양손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뒤로 기울였다.
그녀가 평소 얼마나 튼튼하냐를 떠나, 세인은 그녀의 몸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에서 세리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자신을 잡고 있는 세인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녀는 세인을 안쪽으로 끌어 당겼다.
세인과 세리스의 입술이 겹쳐졌다.
처음에는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며 끝났다.
그 후에 다시 부딪힌 입술은 서로를 열고 안으로 뜨거운 숨을 불어 넣었다.
세리스의 숨은 달콤했지만 동시에 뜨거웠다.
그리고 그녀의 붉고 부드러운 혀는 용암으로 이루어진 뱀 같았다.
그 뱀이 욕망을 안고 세인의 입안을 누볐다.
서로는 어느새 꼭 끌어안았고 뒤로 위태롭게 젖혀졌던 세리스의 몸은, 이제 세인의 몸에 안겨져 있었다.
남녀는 끊임없이 서로의 입술과 입안을 탐했다.
서로의 치아를 서로의 혀가 탐색하듯이 스쳐갔다.
가까스로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세리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내뱉었다.
“누가 먼저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제가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에요.”
떨어지려는 세인의 손을 잡은 세리스가 그 손을 심장 부근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이 뛰는 박자를 느끼게 해주는 데 성공했다.
야생마처럼 무섭게 뛰는 그 약동 속에서 세리스는 진실만을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목숨을 바칠 수도 있어요. 만약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것이라도 이용하세요. 기꺼이 허락할게요.”
세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한쪽 눈을 감은 그녀가 얼굴을 기울였다.
세인의 손바닥에 세리스는 자신의 볼과 턱을 비볐다.
세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그건 괜찮지 않아.”
세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리스가 대답했다.
“괜찮아요.”
결국, 둘의 입술은 다시 달라붙었다.
그리고 긴 밤의 빗장을 열었다.
* * *
아침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맹인 조차도 그 축복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새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세인은, 잠시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대 위에 있었고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세리스가 잠들어 있었다.
세인은 엎드려서 잠들어 있는 세리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상체를 움직였다.
상대가 계속 잠들어 있기를 바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그 배려는 난관에 부딪혔다.
팔꿈치가 침대를 누르며 상반신을 약간 일으켰지만, 다리가 문제였다.
그의 한쪽 다리는 세리스의 부드럽고 긴 다리와 얽혀 있었다.
그는 느리게 빼내는 것보다 차라리 빨리 빼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래쪽으로 다리를 빼냈고, 그 바람에 세리스가 눈을 떠버렸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 반을 파묻은 상태에서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이불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움직인 손은 다정하게도 세인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위로 넘겨주었다.
“깼어요?”
“응.”
“배고프진 않아요?”
“아니. 너는?”
그녀는 얼굴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의 금발 머리가 찰랑거리며, 그녀의 머리를 옆에서 덮어 버렸다.
세인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줬다.
하지만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안겼기 때문에, 그 행동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불 속에서 그녀의 굴국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다리는 다시 겹쳐지고 말았다.
부드러운 다리로 세인의 다리를 옭아맨 그녀는 상대의 발을 자신의 발 위에 올려놓아 주었다.
“이러면 피로가 좀 풀려요. 다리 끝으로 피가 쏠려 있으면 안 좋잖아요.”
“그래.”
세인은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주었다.
세리스는 그걸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세인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은 그녀는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피부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때까지 세인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점점 심화되더니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나와버렸다.
사실 거기까지 전개되는 시간도 결코 짧진 않았는데, 그 와중에 세인은 요의를 느꼈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남자는 아침이 되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다.
여자도 그럴까?
그건 여자가 아니니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말이죠. 저는 어렸을 때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가정교사가 하루는….”
그녀는 이따금 세인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게 자신의 말에 동의해달라는 제스처이든 아니든지 간에, 사랑스러운 것만은 틀림없었다.
여기서 문제는 요의가 점점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세인은 자신의 턱 밑에서 머리를 댄 채 계속 말하는 세리스 에게 차마 일어나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여자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봐도.
그녀가 자신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도중에 자리를 뜬다면 존중받는 느낌은 받지 못할 것이다.
세리스와 세인은 간밤에 하나가 되었다.
그건 둘의 관계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세인은 이제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대해도, 그녀가 모든 것을 수용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떠나, 그녀를 자기 내키는 대로 대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꾹 참고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세리스 입장에서는 물리적으로 조금 더 가까워졌으니, 이제는 정신적으로 좀 더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나무랄 데 없이 정상적이었지만, 그녀라고 독심술을 익힌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세인의 속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계속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 댔다.
그 도중에 세인이 느낀 것은 듣는 자신도 이렇게 목이 마른데, 세리스가 계속 떠들어 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중반까지 그녀의 말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후반에 가서는 그 집중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무엇보다, 세인은 그녀가 기대 있는 팔이 저렸다.
너무 오랫동안 한 자세로 짓눌렸으니까 말이다.
팔베개도 평소 해 버릇 해주던 사람이 잘 해주는 것이었다.
평생 혼자서 뒹굴며 잤는데 오늘은 유난히 힘들었다.
인내하고 있는 세인은 그 후로도 세리스의 수다가 세시간 정도 더 이어진다는 것을 정말 몰랐다.
* * *
둘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이 있는 영지의 주인은 특이한 손님들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있었다.
귀족으로 보인다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뜬 영주는 인상착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자 턱을 쓰다듬었다.
턱수염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말했다.
“흥미가 생기는군.”
“사람을 보내서 초대하겠습니다.”
그러나 젊은 남자인 영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내 흥미가 동한다고 사람을 시켜 그들을 초대할 수는 없어. 심부름꾼은 그렇게 쓰라고 있는 게 아니고, 손님에게도 부담이 될 테니까. 나중에 내 사적인 시간에 지금 생긴 흥미를 충족시키겠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 * *
세리스와 세인은 결국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씻는 일이었다.
그다음이 식사였다.
돼지고기를 곁들인 밥을 먹으면서도 세리스는 쉴새 없이 떠들었다.
세인은 그런 그녀에게 귀를 기울여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중간에 추임새도 넣어 주면서 박자를 맞춰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직 그에게는 무리였다.
세리스도 세인이 열심히 들으려 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식사를 마쳤을 때, 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좀 걸어야겠어. 따라오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래도 따라오겠다는 그녀를 간신히 말렸다.
모든 것을 준 상대가 머지않아 떠난다니 같이 있으면서 교감하고픈 그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세인도 이제 좀 자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문밖으로 나선 세인은 옷깃을 여몄다.
그리고 영지를 돌아다녔다.
멀리에서 그런 세인을 본 사람들은 수군거리거나 손가락질을 했다.
확실히 귀족처럼 보이는 세리스와 함께 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와 시비를 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질한다 해도 대놓고 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게 위로가 될까?
어차피 두건을 눌러 쓰지 않기로 한 세인은 남이 보면 뻔뻔하다고 할 정도로 잘 돌아다녔다. 무너진 담벼락을 구경하기도 하고 새로 세워진 건물을 위아래로 살펴보기도 했다.
길을 걷다가 이따금 팔을 옆으로 내밀면, 길게 자란 코스모스 꽃들이 그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얼마나 그런 감촉을 즐겼을까?
세인의 옆으로 말이 나타났다.
말에 올라탄 사람은 세인을 추월하지 않고 속도를 조절했다.
그러면서 말을 건다.
“어떠세요? 이 영지를 본 소감은?”
세인은 고개를 돌려 말에 탄 사람을 올려다보았는데, 남자는 바로 이 영지의 주인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세인을 향해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이 영주는 매우 특이한 성격의 사람처럼 보인다.
“저와 말을 섞어도 됩니까?”
상대가 존댓말을 하니 여행객 입장인 세인도 비슷하게 대꾸해 준다.
그러자 말 위에 올라탄 사람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젊은이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괜찮습니다. 여기가 수도라면 트집거리가 돼서 입방아에 올랐겠지만, 여기는 변방이니까요.”
“….”
“섭정께서는 글리터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계시죠. 그 때문에 지금 곤란을 겪고 있지만, 저도 생각은 그분과 비슷합니다.”
그러면서 말에 탄 영주는 이것저것 세인에게 물어왔다.
대부분 헌터 타워가 있는 방벽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런 그를 보면, 그리 멀지 않은 방벽 지역에 관해 관심이 많나 보다.
영주로서 관심이 가는 지역의 정보를 챙기려고 하는 모습은 아주 바람직하다 하겠다.
하지만 세인은 그의 말 중에 섭정이 곤혹스러워졌다는 것에 주의했다.
“가이더의 섭정분이 곤란에 빠졌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
‘흐음… 질문 교환인가.’
영주는 그런 질문을 던진 세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로서는 세인이 살기 넘치는 전장에서 한번 마주쳤던 상대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투구를 눌러쓴 모습과 다른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지금 세인의 목소리는 위압적인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안 될 것도 없겠지. 가이더인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덩컨이라는 귀족이 있는데 경솔하게 가이더의 기밀을 반대파의 인물에게 넘겨버렸습니다. 빅쏜이라는 인물은 모두에게 그 기밀을 공개했고, 당연히 섭정이 궁지에 몰렸죠. 그래서 지금 백성들은 오락가락하는 상태입니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말이죠. 섭정이 글리터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 것이 대놓고 드러났으니 무리도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의 편입니까?”
세인의 질문에서 ‘당신’이라는 호칭에 몸을 움찔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영주였다.
그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당연히 섭정의 편이죠. 지금만 봐도 당신을 기피하지 않고 있잖아요? 우리 정서야 어떻든, 글리터는 지금 가이더의 시국에 큰 도움이 됩니다. 게다가 방벽에는 이미 글리터의 세력이 똬리를 틀었어요. 우리 영주님도 같은 생각이니까 당신을 쫓아내지 않는 것이고요.”
그러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의 속셈은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세인을 향한 것이다.
‘정체를 숨기고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재미있군.’
하지만 세인은 이미 안장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가락을 곁눈질한 후였다.
거기 끼워져있는 영주의 반지를 일별한 세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 전장에서는 안 그러더니 평소에는 좀 어설프네.’
그래도 뭐 마음이 열린 좋은 영주임은 틀림이 없었다.
이런 사람 밑에 있는 영지민은 행복하겠지.
영지 상태를 보니 영주가 영지민에게 가혹히 굴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영주의 탄압 아래 수심 깊은 영지민의 얼굴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