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 검은 새가 인도한 섭리 (3)
이름을 불러도 되겠냐는 말은 가까운 사람이 되어도 괜찮겠냐는 표현이었다.
엘라이저는 다른 미래에서 세인과 결혼했던 적이 있었다.
세인은 꼭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라, 묘하게 그녀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세리스가 예감이 있다면 세인에게는 육감이 있었다.
그는 운명의 상대로서 엘라이저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인 이유는 아니고 가슴이 시키는 것이었다.
세리스와 아직은 어떤 관계도 아니니 이런 고백을 한다고 해서 나무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진지한 물음 앞에서 엘라이저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당신의 마검으로 따뜻한 마법을 부릴 수 있다면 어떤 마법을 부리시겠어요?”
“제 검으로 부릴 수 있는 긍정적인 마법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어떤 한계도 없이 한가지 마법만 부릴 수 있게 해준다면 어떤 마법을 선택하겠어요?”
이상한 질문 앞에서 세인은 침묵했다.
그리고 엘라이저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바라만 보며 서 있었다.
그때 세인은 자신의 속을 들킨 느낌이 들었다.
엘라이저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지 않았던 이유는 엘라이저의 한쪽 눈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세인이 대답한다.
“기억을 지워주고 싶어요.”
그때 엘라이저가 손을 내밀었다.
세인은 그 손을 잡았다.
서로 손을 잡은 둘이 파란색 잎으로 가득한 하얀 나무속을 걷기 시작했다.
세인이 세워 놓았던 말은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고, 눈과 이끼 밟히는 소리만이 주변에 가득 찼다.
“누구의 기억을요?”
“아이들.”
“….”
“눈앞에서 아버지가 몬스터에게 찢기는 것을 본 아이들,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부모의 피를 뒤집어쓰고 구출된 아이들, 공포에 질려서 울지도 못하고 굳어 있던 아이들.”
그리고 세인은 수많은 아이의 이야기를 했다.
가난, 공포, 외면, 편견과 고통이 유린하고 지나간 아이들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였다.
엘라이저는 세인이 손을 잡고 걸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들의 눈 안에 있는 기억을 모두 지워주고 싶어요. 하루만이라도 내가 무제한의 마법을 부릴 수 있다면.”
세인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엘라이저는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그를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가슴이 눈물로 젖는 기분이다.
이런 엘라이저의 속을 알 리 없는 세인은 그녀와 걷고 걸었다.
둘의 산책은 오래도록 이루어졌다.
하얀 나무들이 오래되어 구부러지고 쓰러진 곳에 도달할 때까지 말이다.
파란 잎이 융단처럼 잔뜩 깔린 곳에서 멈춘 엘라이저는 이렇게 말했다.
“어딘가로 떠나시나요?”
다시 속을 들킨 듯 세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엘라이저가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횟수와 시간은 상관없어요. 우리가 다시 만난다는 게 중요하니까. 오로지 그것만이 당신과 나에게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다시 만날 때까지.”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
그리고 눈동자의 움직임.
반짝이는 눈빛이 세인에게 말했다.
“안녕.”
그리고 엘라이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이번에는 혼자서였다.
홀로 남겨진 세인은 그녀가 그에게서 멀어지다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결국, 바람맞았군.”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모든 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에게, 아닌 게 아니라 차가운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왔다.
* * *
세리스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이유가 꼭 이번에 휴가를 냈기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마차를 준비했다.
제법 근사한 마차였다.
글리터에서 세인의 측근인 그녀가 돈이 부족할 리 없는 것이었지만 척 봐도 꽤 비싸 보였다.
튼튼한 흑갈 나무로 만들어진 마차 앞에는 빅풋 품종의 말 두 마리가 매어져 있었다.
그런데 마부는 보이지 않는다.
“여자 몸으로 혼자서 여행을 가려는 거예요? 강한 기사이신 걸 알지만 걱정이 되네요.”
마플은 그녀에게 여행 도중 먹을 비스킷 뭉치를 선물했다.
뭐 이런 걸 보면 마플과 가까워진다는 전의 계획은 성공처럼 보였다.
선물을 받으면 그 앞에서 풀어보는 게 에티켓이었다.
세리스는 그 자리에서 비스킷 하나를 꺼내 깨물어 보았는데, 분하게도 비스킷은 매우 맛있었다.
세리스는 검은 개와 마플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를 몰았다.
그녀는 바람을 이마와 볼로 맞으며,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을 느꼈다.
마차는 오랜 시간을 달렸다.
마치 목적지를 아는 것처럼 한 방향을 향해서 말이다.
그리고 결국 도착한 곳은 하얀 설원 한복판이었다.
고삐를 당겨 천천히 달리던 말을 세운 그녀는 천천히 마부석에서 내렸다.
그러자 발목까지 눈이 올라왔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전방에 보이는 검은 물체에 다가갔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세인이었다.
그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시선을 전방으로 던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간 그녀는 말을 거는 게 아니라 뒷짐을 지고 나란히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같이, 눈으로 하나의 풍경을 동시에 담아두고 있을 때 세인의 입이 열렸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처음에는 감이었어요. 그보다 눈밭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세인의 등을 어루만져 보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의 몸은 차갑지 않았다.
발자국이 그의 주변에 없는 것을 보면 꽤 오래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뭐 어때?”
“청승맞잖아요.”
그 말에 세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소 띤 얼굴로 심각한 이야기를 했다.
“당분간 멀리 떠나 있으려고 해.”
그녀는 어디로, 왜 떠나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세리스가 생각한 그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책임감이 병적이어서 문제인 사람이니, 지금의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드레퓨스를 언급하는 대신 그녀는 엉뚱한 것을 물었다.
“그럼 저는요?”
그 말에 비로소 세인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금발 머리를 뒤로 묶고 있는 세리스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정점은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그 아름다운 눈은 세인을 깊이 담고 있었다.
“당신은 거기 못가.”
“제가 생각하기에 남탕만 빼고 제가 못 가는 곳은 없을 거 같은데요.”
그녀가 농담을 던지며 손을 내밀자, 세인이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시선을 나눈 둘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강이에 닿는 눈을 헤치며 얼마나 앞으로 갔을까?
세리스가 검지와 중지를 입에 대고 크게 휘파람을 불자 멀리 떨어져 있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이 따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곁에 있던 세리스가 팔짱을 끼자 세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리스. 당분간 혼자 있고 싶어.”
그녀는 세인이 내린 명령이 아닌, 부탁 앞에서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럼 저는요?”
“….”
영지의 초입구에 다다르자 경계병들이 목책 위에서 나타났다.
세인이 반사적으로 두건을 뒤집어쓰려고 하자 이번에는 세리스가 그를 말렸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당당해지세요.”
“세리스. 너, 오늘따라 이상하군.”
“왜 얼굴을 숨겨야 해요? 죄지은 것도 없잖아요. 원해서 그 모습이 된 것도 아니잖아요.”
“세리스.”
세인의 음성이 딱딱해지려 하자 그녀가 다시 받아쳤다.
“멀리 떠난다면서요? 정말 멀리 떠난다면 여기의 이목이 그렇게 중요해요?”
의지가 담긴 그녀의 음성이 다시 두건에 닿으려는 세인의 손을 잡았다.
결국, 세인은 맨 얼굴로 영지 초입구에 들어서게 되었다.
경계병들은 약간 놀랐지만, 세인에게 위협을 한다든가 하는 짓은 삼갔다.
그건 당연했다.
세인의 복장이 평민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 옆의 세리스는 더더욱 그러했다.
비싸 보이는 망토며 햇살에 반짝이는 검집까지, ‘나 귀족이요.’ 하며 광고하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 가이더는 조세핀의 치세 아래에서 글리터를 적대하고 있지 않았다.
그거야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의 생각이야 제각각이겠지만, 현실적으론 국가들끼리 연합 훈련까지 하는 사이다.
세인은 거리를 걸어가며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꼬질꼬질해 보이는 애들은 세인과 눈이 마주치자 ‘왁!’하고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
그러면서 신나게 도망갔다.
저 때는 별것이 다 박진감 넘칠 때이기는 하다.
마차와 그들은 여관 앞에 섰다.
용병들이 주로 머무는 곳인데 일종의 비수기라 방은 텅텅 비어 있었다.
손님을 발견한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방은 몇 개로 하시겠습니까?”
턱수염을 길게 기른 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세리스가 돈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선불이라는 위력은 세인의 모습마저 상쇄하게 만들었다.
“두 개. 식사는 가능한가?”
마차에서 안 잔다는 소리에 아주 기뻐한 주인은 당연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부름꾼 청년에게 마차를 구석에 대라고 말하고는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저런 급한 성격이 손님에게는 아주 좋다.
빨리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영지에 특이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은 금방 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그냥 적적한데 안줏감으로 입방아의 제물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으나, 그게 물리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방이 아니라 홀에서 식사하는 세인과 세리스의 앞으로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놓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여기 스테이크는 용병들도 줄 서서 먹는 메뉴입니다. 성수기 때는 이걸 먹으려고 여기가 미어터지죠. 제가 겸손해 빠져서 그렇지, 이 스테이크는 수도에 가도 먹어줄 겁니다.”
“….”
대놓고 완전 자랑질이었다.
겸손함은 증발한 지 오래다.
하지만 호언장담대로 스테이크의 맛은 정말 좋았다.
철판 위에 올려진 상태로 운반된 스테이크는 나무 탁자의 홈에 안착하였다.
철판을 홈에 끼운 후 집게를 빼낸 주인은 또 시킬 게 있으면 종을 흔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방을 치우러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세인이 칼로 두꺼운 고기를 썰 때, 세리스는 나무 벽에 새겨져 있는 낙서들을 보았다.
용병들이 자주 애용하는 곳이라 그런지 야한 낙서가 많았다.
정신이 팔린 그녀를 앞에 두고, 세인은 고기 한 덩어리를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달콤한 맛이 느껴지더니 맵고 후끈한 자극이 혀에 전해졌다.
고기 자체는 소스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칠맛이 돌고 혀에 착착 감겼다.
“이거 괜찮군. 한번 먹어봐.”
“그냥 평범한데요, 뭘. 평소 너무 검소하게 드셔서 입이 음식을 가리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세리스의 평은 달랐다.
그녀는 상태가 좋지 않은 고기를 속이기 위한 과한 향신료와 기름에 녹이다시피 한 부위를 비판했다.
그것을 들으며 세인은 저렇게 남의 요리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서야, 그녀가 요리의 지평선중 어느 한 평이라도 찾아가거나 넓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오물오물하고 있는데, 차를 찾으니 아직도 너무 뜨겁다.
“덮개를 미리 열어 놓을 걸 그랬어.”
“줘 보세요.”
세리스는 그의 손에서 차를 빼앗아가 양손에 들고 후후하고 불었다.
그리고 충분히 식혀서 다시 건네주었다.
이 층 계단에서 빗자루를 들고 내려오는 주인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물론, 자신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금단의 사랑이군.’
주인은 어느덧 인간이 아닌 자를 사랑하게 되어 변방으로 도피하게 된 귀족 여자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둘은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세인은 짚을 채운 침대를 힐끔 보고는 바깥으로 연결된 창문에 다가섰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커튼 사이로 거리의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닭을 쫓는 아이들과 수레를 끌고 움직이는 어른들의 모습까지,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르르하는 소리가 나서 시선을 옆으로 옮기니, 무너진 돌담을 수리하기 위해 실어온 돌을 땅에 쏟아붓는 소리였다.
세인은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작은 의자를 끌어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를 하염없이 구경했다.
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찾아오도록 말이다.
여독에 지친 세인과 세리스가 방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관의 주인이 동네 노인들과 떠는 수다도 본의 아니게 주워들을 수 있었다.
여관 앞에서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여관주인이 각색한 사랑의 도피를 귀로 듣는 세인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그는 한쪽 손을 창틀에 올린 그 상태로 중얼거렸다.
“아니 독약은 지참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높은 곳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세인의 말 따위, 밑에 들릴 리가 없었다.
노인들은 가는 귀가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지나가면서 중얼거렸어도 못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여관 주인은 입에 침을 튀기며 열심이었다.
상상의 나래를 실체화하는 작업에 말이다.
노인들과 여관 주인은 가문의 추적자들을 피하고자 최후의 대책으로 ‘독약을 준비했다.’라는 것과 ‘아니다.’라는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 이야기를 듣던 세인은 알 수 없는 책임감에 사로잡혔다.
왠지 그들을 위해서라도, 시간이 나면 독약을 꼭 사서 지참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이 왔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밤은 세인이 연 창문 안으로도 훌쩍 넘어와 있었다.
찬 밤공기를 맞으며 그는 검은 산과 정적에 잠긴 거리, 이따금 개가 짖는 소리와 가끔 보이는 행인들의 잡담을 음미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뒤로 고개를 돌린 세인은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잘못 듣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자 문으로 다가간 그는 천천히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바깥에는 세리스가 서 있었다.
“갑자기 왜?”
“잠이 안 와서요.”
“잠이 안 오면 운동 겸 밖에서 한 바퀴를 돌아. 밤공기가 아주 좋아.”
그러면서 세인이 문을 닫으려 하는데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그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세리스의 발이 문틈을 넘어와 있었던 것이다.
“밖은 눈밭이에요.”
결국, 세인은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