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 검은 새가 인도한 섭리 (2)
“…기분이 나쁘군.”
추위에 재채기를 마친 세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현재 얼어붙은 협곡의 위쪽에 서 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협곡 아래에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동안 벌였던 군사 훈련의 정점은 실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전투 중에 호흡을 맞춰봐야 실제 성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훈련의 결과를 확인받는 지금, 매길 수 있는 점수는 영점에 가깝다.
지하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낭떠러지 밑에서 몬스터들과 싸우는 병사들은 수적으로 열세가 아니었다.
조금만 힘낸다면 눈앞의 흡혈귀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적이 다른 자들 간의 공조가 문제다.
안심하고 서로 뒤를 맡겨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투지도 엉망이었다.
어둡고 좁은 일자형 공간에서 흡혈귀들이 안광을 좌우로 흔들며 날뛰면, 그들은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연합군 병사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글리터쪽 사람들이나 레인저들은 상황을 잘 이끌어나갔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병사들은 오히려 헌터만도 못했다.
세인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4번째로 시작된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의뢰를 받은 헌터들과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한쪽에서 치고 들어갔는데, 누가 봐도 헌터들이 더 많이 전진했다.
미스틸 테인 같은 기사가 고함을 지르며 앞장서고 있었지만, 트리엔의 병사들로는 흡혈귀들을 물리친다는 게 불가능했다.
벽에 뚫린 구멍에서 튀어나오는 흡혈귀를 막으려면, 옆이나 뒤에서 받쳐줘야 한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니 오히려 트리엔이 위태롭게 보이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세인은 병사들에게 깃발로 퇴각 신호를 보내게 했다.
북소리와 함께 위쪽에서 퇴각 신호가 들려오자, 그제야 지하 협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병력이 뒤로 물러났다.
기세가 한껏 오른 흡혈귀들은 그 뒤를 쫓았고 말이다.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모든 지역의 몬스터들을 없앨지 모르겠어.”
북부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몬스터들을 다 모아보면 수가 꽤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밀려서야 눈의 허리띠 전체를 안전지대로 확보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그가 손짓하자 맥이 근처로 다가왔다.
그런 맥에게 세인이 뭔가를 말했다.
맥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병사들에게로 바르게 다가가 신호를 보내게 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남겨지는 부대가 정해진 것이다.
사실 실전 훈련을 가만히 관찰하면 몇몇 부대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었다.
보급 부대의 지원을 맡아서 가장 늦게 식사를 해야 했으며, 전투 때는 빈번하게 선두에 섰다.
퇴각 때는 지금처럼 후방에서 교란 및 방어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아예 당해보란 식으로 굴리자, 당연히 전투가 끝난 후에 부대장들이 맥을 찾았다.
그들은 세인에게 차마 대놓고 말하지 못하여 맥에게 항의하기 바빴다.
“이게 무슨 짓이요? 지금 이런 취급은 우리보고 대놓고 죽으라는 소리잖아?”
그들의 성토에 맥은 오히려 부정하지 않고 상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항의하던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당신들은 고생길이 열린 겁니다.”
“뭐요?”
“저번에 소집했을 때 밖으로 나오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거죠.”
맥의 말에 기사들의 얼굴은 대춧빛이 되었다.
반발감이 든 것이다.
물론 수치심을 동반한 반발심이었다.
맥은 상황을 풀어서 설명했다.
“당신들은 평소 전투다운 전투를 치러보지 못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한 행동이었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신들은 세인님의 집합 명령에 정면으로 반발했습니다. 그걸 누가 보았을까요? 우리 모두입니다. 그러니 세인님의 체면을 구겨버린 당신들이 이런 대접을 받는 거죠.”
“이봐요.”
맥은 그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펼쳐질 앞날에 대해서 조곤조곤하게 설명해 주었다.
항명하면 당연히 사형이다.
탈영해도 사형. 그렇게 죽을 때까지 굴릴 것이었다.
정면으로 명령을 거스른 자들의 결말을 보고 나면, 이번 훈련에 참여한 사람들도 군기가 바짝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몬스터 토벌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런 살벌한 소리를 대놓고 하는 뻔뻔한 맥을 보며,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글리터 소속이 아니오. 그 당시 참여할 수 없었던 사정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어요. 설마 우리가 일부러 그랬겠소? 그보다 이 말을 고국으로 돌아가 왕실에 고발한다면, 차후 빚어질 외교적인 마찰을 어떻게 감당할 셈이요?”
맥은 고개를 저었다.
“이해를 못 하나 본데. 당신들은 상식 이하의 짓을 저질렀어요. 저희를 몬스터로 취급하든 세인님을 그 비슷하게 취급하든, 당신들이 저지른 짓은 용납될 수가 없는 일이에요. 이걸 굳이 제 입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조차 참 곤혹스럽습니다. 당신들은 민간인이 아니에요. 군인이라고요.”
“….”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전투도 왕의 친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놀이가 아닙니다. 여기서 반발을 하든, 심지어 거꾸로 검을 고쳐 쥐든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그러면 좋은 것은 오히려 이쪽이죠. 당신들을 저기로 떨어뜨릴 확실한 빌미가 생기니까요.”
그러면서 맥은 협곡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담담히 사람들을 보는데 그건 이미 산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그 시선을 받는 사람들은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고 우릴 대놓고 죽이겠다는 거야.”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본보기가 되어줘서 고맙다는 생각은 합니다. 당신들 사례는 계속 남아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할 겁니다. 그래도 대놓고 괘씸죄로 죽이지 않는 것만도 신사적인 겁니다. 여기는 놀이터가 아니라 군대에요. 지금 제가 군대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군요.”
결국, 화를 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등을 보며 맥은 손에 든 과일을 깨물었다.
엄포가 아니었다.
저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다가 죽을 것이다.
기강을 세우기 위한 희생물이다.
외교적 마찰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저들은 어차피 쭉정이니까 여기로 보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주변국들이 이것을 빌미로 글리터에게 시비를 걸기도 힘들었다.
힘의 격차를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의 소집 명령을 어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그들이 여기 주둔할 때부터, 이곳의 명령체계에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사과를 다 먹고 씨앗을 뱉어낸 맥의 말이 허공을 맴돈다.
“살인 집단을 각성시키는 것에는 살인만큼 좋은 게 없지.”
그 시간 세인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의 잔광이 아직 남아서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서서히 검붉은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늘에서 달려온 검푸른 빛이 검붉은 빛을 내리눌렀다.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 앞에서 검은 점이 보였고, 그 검은 점은 날아와 세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나?”
검은 까마귀가 물어보자 세인이 태연하게 응수했다.
“너를 전서구로 쓰면 괜찮겠다고 생각했어. 암호로 된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보다 직접 말을 하는 새는 편리하잖아.”
까마귀는 세인의 얼굴 옆에서, 나란히 다가오는 밤을 보았다.
그리고 부리를 움직였다.
“이런 취급은 처음이다. 내 격이 이 정도까지 진흙탕에 떨어졌다니, 신선하기까지 하군.”
세인은 모습을 드러낸 까마귀를 채근하지 않았다.
어련히 기다리면 스스로 용건을 말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까마귀는 날개를 몇 번 퍼덕이며 균형을 다시 잡더니 말을 시작했다.
세인은 자신의 볼을 스친 날개의 감촉을 느끼며 상대의 말을 들었고 말이다.
“세인. 너는 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검을 들고 세상을 무릎 꿇리는 것보다 검은 왕이 되는 걸 선택했어.”
잠시지만 세인은 세상에 무릎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의인화가 대단하군.
“그렇다면 이제 떠나야지.”
“어디로?”
그의 물음에 까마귀는 눈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머나먼 곳을 마음에 그렸다.
그 상태로 답변을 하려 하는데 세인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드레퓨스가 오고 있다. 전투를 준비해야 해.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 같아? 이 모든 게 그걸 위해서야.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더니 떠나야 한다고? 거기가 어디든지 내가 응할 것 같나? 이봐. 까마귀로 사는 것도 편하진 않겠지만,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고충이 있어. 사람 쪽도 사람으로서의 책임이 있다고.”
까마귀는 눈을 깜박였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지. 세인, 오버 더 데스와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비교는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동시대에 존재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홀리 디스트로이어야 말로 절대적인 존재다. 그녀야말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홀리 디스트로이어야 말로 최강이다.”
하지만 정작 성검의 라이트닝 블러드인 세리스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가 무너지면 성검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든 소용이 없었다.
제대로 쓰일 수가 없으니까.
아무리 큰 저수지가 있더라도 수문이 고장 나버리면 그 저수지는 무용지물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세인의 물음에 까마귀가 답했다.
“생각해 봐라. 왜, 이 시대가 너를 택했는지. 왜, 너여야만 하고 마검이 눈을 떴는지 생각해 보라고. 왜 전능에 가까운 성검이 눈을 감고 있지? 그건 이 세상이 호수이기 때문이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것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바로 너이기 때문이야. 네가 해답이라는 거다.”
“….”
“세인. 장차 도래할 너의 적은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적이다. 그런 괴물과 싸워야 한다. 드레퓨스는 그 괴물들 앞에서 모래성에 불과할 따름이다. 눈을 떠라. 그리고 소름 끼치게 강하며 섬뜩할 정도로 원시적인 적의를 가지고 있는 악을 보라.”
세인이 앞으로 손을 뻗자 까마귀는 그의 손등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세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검은 새의 눈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피를 빠는 검은 안개처럼 똬리를 튼 기억이었다.
광기의 소용돌이처럼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그 안에 있었다.
“아까 넌 책임을 말했지. 이제 네가 가야 할 곳이 네 진정한 책임이다. 그 책임의 범주 안에는 모든 인간과 세상이 들어 있다. 드레퓨스? 드레퓨스는 작은 집에 난 작은 불에 불과해. 넌 세상을 송두리째 태울 화재를 준비해야지.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 말이다.”
“….”
“나는 네 결정을 재촉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야. 결정은 이미 내려졌어. 다만 출발하는 시기를 논의하기 위해서 온 거야. 그 정도 친절은 베풀어야지. 주변을 정리해. 사람들에게 미리 인사 정도는 해두라고.”
“멋대로 일방적인 말을 지껄이는군. 불은 크고 작고를 떠나 그냥 불이야. 사방으로 퍼지면 다 위험하다고.”
“어차피 네가 떠나는 건 정해져 있어.”
까마귀는 날개를 힘차게 움직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검은 왕이 되었을 때부터.”
지금 이 상황이 황당무계하게 받아들여져도 상관없었다.
방금 날아오른 새는, 말했듯이 세인이 여행을 떠날 것을 이미 안다.
어차피 설득력으로 이루어지는 여행이 아니었다.
이건 세인의 운명이다.
운명 앞에서는 상식이나 지성이 무소용이다.
어차피 그도 깨달을 것이다.
머리가 아닌 다른 부분으로.
* * *
그 후 몇 달이 흘러 첫 번째 군사 훈련이 끝났다.
맥의 말대로 몇몇 부대가 완전히 소멸한 훈련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훈련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단결력을 다지겠지.
훈련이 끝난 후 세인은 글리터로 돌아가지 않고 갑작스러운 칩거에 들어갔다.
탑에 틀어박힌 그는 뭘 고민하는지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기사들은 묵묵히 그의 방문 앞을 지켰고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모습을 드러낸 까마귀 앞에서 세인은 담담히 말했다.
이제 준비가 되었냐는 새의 질문에, 아니라고 답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도와주는 김에 전서구 역할 좀 해줘.”
“….”
까마귀는 거절하려 했지만, 세인이 찾는 상대를 알고는 마음을 바꾸었다.
“좋아 도와주지.”
검은 새가 날아간 뒤, 세인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검을 등에 매단 그는 준마를 골라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동행하겠다는 기사들을 물리쳤다.
기사들은 당황해했지만, 세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세인은 지나치게 단호해 보였다.
“사적인 일이다. 뒤따라 온다면 용서치 않겠어.”
만류하는 맥의 앞에서 세인은 말에 올라타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다.
그리고 말을 출발시켰다.
이 말만을 남긴 채.
‘한 번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잖아.’
사람들은 말과 함께 사라지는 세인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 *
세계수 지역의 부근에.
하얀 나무들이 서 있는 지역이 있었다.
침엽수 특유의 날카로운 잎을 가진 나무는 그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그들의 잎들은 사파이어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났으며, 햇살 아래에서 정말로 보석처럼 반짝거리곤 했다.
나무들의 바닥에는 초록색의 푹신한 이끼들이 깔려 있었고, 이따금 하얀색 다람쥐들이 쪼르르 지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아름다운 장소이긴 하나 외진 지역이라 방문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곳에 세인이 나타났다.
말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그는 담요를 안장에서 꺼내 말의 몸 위에 덮었다.
그리고 먹이를 말머리 아래에 뿌려두었다.
말을 스쳐 지나가 앞으로 걷는데 눈이 잔뜩 쌓인 나무 그림자가 그를 반겼다.
세인은 팔짱을 낀 채 산책하듯이 앞으로 걸었다.
그의 검은 망토가 눈 쌓인 이끼들을 덮었다가 끌려지면서 희미한 자국을 남겼다.
나무 그림자들이 서늘하게 그의 정수리와 목덜미 등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세인은 고개를 들어 파랗고 날카로운 잎들이 모여 지붕을 이룬 것을 보았다.
파란 잎사귀들 사이에서 태양의 동그라미가 하얗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태양의 위치를 보고 있는데, 바람에 가시 같은 잎사귀들이 흔들려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사그락거리는 그 소리 끝에는 눈을 밟는 발소리가 있었다.
시선을 내린 세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하얀 나무의 몸뚱어리 사이, 그림자 속에서 몸을 드러낸 엘라이저가 있었다.
다크 엘프가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자, 그녀가 토해낸 하얀 입김이 세인의 눈에 잡혔다.
그녀는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일까?
세인은 까마귀를 통해 그녀를 불러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안에 있는 육감이 나침반처럼 그녀를 가리켰다.
이성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엘라이저를 만나야 한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먼 곳으로 떠나기 전에 그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어쩌면….
‘아직은 돌이킬 수 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리스와 세인은 아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관계는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 상처를 감수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이라면 세리스와 멀어질 수 있었다.
적어도 그런 여지가 존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세리스와 선을 넘어, 하나가 되면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세인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세인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던 엘라이저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건 세인이 장갑을 벗고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인이 손가락이 그녀의 볼과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엘라이저는 그런 세인을 바라보며 눈 한번 깜짝이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눈 안에 담아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 강렬한 눈빛 안에서 세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여기에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엘라이저가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벌렸다.
그녀의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고 입김이 새어 나와 허공으로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