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 헌터 타워 (7)
“여기는 어쩐 일로?”
세인이 모습을 드러낸 크릭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그는 크릭이 여기까지 올 것이라고 알지 못한 듯했다.
“아비게일은 입이 가볍고 좋은 녀석이지.”
크릭의 기준으로는, 촉새같이 입이 싼 사람도 좋은 녀석이 될 수 있음이었다.
물론 아비게일이야 크릭이 하도 달달 볶아대니, 마지못해 세인의 행방을 말했을 것이다.
더욱이 다른 기사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므로 기밀은 아니었다.
크릭은 세인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코를 벌렁거렸다.
이번에는 피 냄새를 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인은 지금 밀봉된 용기의 위쪽을 뜯어내는 중이었다.
“뭐야 이 맵고 달콤한 냄새는?”
“맥그리거의 가게에서 가져온 특대 휴대용 포장 음식이야.”
“뭐야? 그 소문난 맛집 말인가? 거기에서 이런 서비스도 해줘? 거기 주인장은 포장 음식 같은 건 안 하는 줄 알았는데? 그 남자는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특권이지.”
“오 특권….”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특권이라는 말 한마디가 크릭으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특권이라는 녀석은 아비게일보다 좋은 녀석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
세인이 말을 아끼는데 크릭이 그의 눈치를 보면서 거리를 더욱 좁혔다.
“아니. 그런데 자네 신분으로 이렇게 혼자 있어도 되나? 호위도 없이?”
귀찮은 세인은 이번에도 가볍게 대답해 버렸다.
“이것 또한 특권이지.”
“아….”
이번에는 강한 자의 특권이었지만, 크릭은 감명받은 얼굴을 했다.
이런 특권 의식을 부디 장로 놈들이 좀 배워야 하는 건데 말이다.
평소 잘 배워서 크릭에게 대접 좀 해주면 좋으련만.
가끔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크게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고된 훈련 후에 먹는 밥이다.
둘째는 며칠 동안 굶고 먹는 밥이다.
셋째는 혈당이 떨어져서 눈앞이 오락가락할 때 먹는 밥이었다.
그때는 살기 위해서 온몸의 세포가 음식을 원했다.
그리고 마지막이 이렇게 야외에서 휴대용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그것도 산 정상이 식탁이라면 꽤 훌륭한 여건이었다.
세인의 손에서 용기의 위쪽이 열리자 가득 담긴 붉은 국물이 드러났다.
걸쭉한 국물 속에는 닭고기와 큼직한 감자가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양파와 파도 살짝살짝 모습을 보인다.
밀가루 덩어리 같은 것도 보이는 가운데, 크릭이 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침을 삼켰다.
“미안하지만 여기 오며 식량을 넉넉하게 가져오지 않아서.”
세인이 그렇게 말하자 크릭은 수통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개를 열자 아주 독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안에 든 것은 술이었다.
크릭이 어떠냐는 듯이 눈을 빛내자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술을 받고 음식을 나누어 준다는 건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다.
“술은 하지 않아.”
“이 좋은 걸 하지 않는다고?”
“취해 있으면 일이 터졌을 때 방비할 수가 없어. 내가 바로 글리터의 머리니까. 술을 가까이하는 건 곤란해.”
“그래? 나는 취해도 잘만 방비가 되던데.”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크릭 앞에서 세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음식을 덜어주었다.
그릇을 받아든 크릭은 국물을 쭉 들이켜더니 감탄을 토했다.
“미쳤어. 이건 안주로 최고야. 맵고 짜고 달고, 뒷맛이 상쾌하고 맛있어.”
결국, 크릭은 술판을 벌였고 세인은 배를 채웠다.
그들의 주변에는 몬스터에서 벗겨낸 가죽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그리고 중요 장기들을 담아 놓은 상자도 보였다.
그동안 세인이 여기 머물면서 모아놓은 것들이다.
엄청나게 강한 그에게는 과거라면 모를까, 이제 마법 생물 따위는 식후 운동 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조리 해치울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엄청 걸리는 일이기도 하고, 그걸 해내야 하는 쪽은 따로 있었다.
산 아래의 기사들이다.
“첫 훈련이니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가 없지. 그래서 여기에 앉아 감독할 생각이야.”
“나야 처음부터 알고 왔지만, 밑의 지휘 캠프에서는 자네가 여기 있는지 아는가?”
“모를걸. 저쪽에서 나라는 안전장치가 있다는 걸 몰라야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래?”
정말 그랬다.
아래쪽의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세인의 존재를 정말 몰랐다.
밑의 지휘 캠프에서는 마주치는 모든 몬스터들을 죽일 것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에 깃발을 꽂아야 훈련이 종료된다고 모두에게 전달된 상태였다.
기상 상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쪽도 있었지만,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예측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조를 이룬 기사들은 산에 올랐다.
멀리 나가는 팀이 있었고, 근처의 산등성이를 확보하는 팀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몬스터와 숱한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는 것이다.
매복하고 있던 몬스터가 뛰쳐나오면 기사들은 진형을 갖추고 상대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냥당하는 처지가 아니라 사냥하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잔당 처치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동안 잔뜩 힘을 기르고 최고급 장비를 가진 기사들인 데다가, 밑에는 그들을 받쳐주는 베이스캠프가 있었다.
결국, 몬스터들은 기사들의 무기 앞에 쓰러졌다.
그리고 내용물을 바쳤다.
그러면 그 내용물은 철저히 분류되어, 당장 쓸 수 있는 것은 기사들에게 주어졌다.
가죽, 발톱, 눈알, 뼈, 털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무두질하는 종자들은 특수 약품을 써서 손질하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였다.
그렇게 마법 생물의 털들은 기사들의 코트가 되었다.
이빨과 뼈는 단검이나 무기 장식이 되었다.
이런 순환이 이루어지고 숙련도가 붙자, 기사들은 무서운 속도로 주변을 정리해 나갔다.
세인은 가장 높은 곳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장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관조하는 것처럼, 여유 넘치는 분위기로 아래를 구경했다.
크릭은 이따금 정상을 습격해 오는 몬스터와 싸웠다.
그러면서 세인과 여러 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크릭에게 있어서 여기는 정상회담 장소나 다름없었다.
거느린 녀석들 눈치도 보지 않고, 흉중의 말을 다 토해내는 크릭을 세인도 거부하지 않았다.
어차피 글리터의 이웃이다.
피 냄새가 강한 바람에 씻겨 내려가는 정상에서, 그들만의 협약도 몇 차례나 거론되었다.
대지 위에서는 전투가 한창인데, 며칠이 지나도 회색 구름은 사라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원형의 구름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튀기는 지상에선 이제 하늘의 상태를 완전히 잊었지만, 하늘은 그게 아니었던가 보다.
어느 날 우박이 땅 위를 휩쓸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알갱이였지만, 점점 커지자 기사들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거의 다 왔는데.”
다른 조에 비해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와 있던 기사들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몇 시간만 더 걸으면 가장 높은 봉우리의 정상이 손에 잡힐 듯했는데, 지금은 등반이 무리였다.
결국, 그들은 등을 돌리고야 만다.
하늘의 먹구름이 회색빛에서 검은색으로 물들었고, 바람은 점점 거세어져 칼바람이 되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기사들은 한 줄을 유지하고,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중이었다.
눈이 뒤섞인 우박의 씨알은 점점 굵어졌고 하산하는 그들의 등을 때렸다.
어서 내려가라고 재촉하듯 말이다.
그 재촉의 이유는 돌아가는 길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뭔가가 내리꽂힌 것이다.
“휴렐!”
여기사가 크게 외치며 앞으로 뛰어가려 하자, 다른 기사들이 그녀를 붙잡고 막았다.
여기사의 연인인 휴렐은 가고일의 앞발에 붙잡힌 상태였다.
마귀 얼굴을 한 가고일은 철 비늘에 뒤덮여 있어서 휴렐이 휘두르는 무기가 통하지 않았다. 목과 가슴 쪽에 불똥만 몇 번 먹였을 뿐이다.
“이거 놔!”
“엘리스! 진정해! 일단 뒤로 물러서야 해! 한 놈이 아니라고!”
동료들의 말대로였다.
하늘에서 나타난 가고일들이 날개를 접고 일제히 내리꽂힌 것이다.
그중에서 위력적인 녀석은 주둥이가 뾰족한 녀석이었다.
터프하게도 주둥아리를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고, 그대로 낙하하는 짓을 저질렀다.
기사들은 이리저리 구르며 가고일들을 피해냈다.
가고일의 날개가 펄럭일 때, 눈덩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날개에 달린 피막은, 기사들의 모습을 가렸다가 보여주길 반복했다.
위에서 이 광경을 내려보던 크릭은 도끼를 세워 들었다.
그런 크릭을 세인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지금 보시다시피 하늘이 온통 찌푸린 상태였다.
간혹 구름 사이를 누비는 전광도 보인다.
그런데 세인처럼 검을 검집 안에 수납하고 있다면 괜찮겠지만, 저렇게 산봉우리에서 쇳덩어리를 치켜세우는 행동은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번개를 유도하는 행동이니까.
그러나 크릭은 세인의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얼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뭘? 지켜만 보지 말고 나서서 도와줘야 할 것 아냐? 저렇게 난장판인데.”
가고일들은 기사들을 물어뜯으려고 긴 목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바람 소리가 나면서 난리를 쳐대는 통에, 그들의 목이 서로 뒤엉키기도 했다.
오리처럼 뒤뚱뒤뚱하며 달려드는 놈들을 피해 기사들이 방패를 내세웠다.
그런데 중심이 되어야 할 엘리스라는 여자의 대응이 조금 늦었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그녀의 연인은 지금 산채로 가고일에게 삼켜지고 있었다.
남자의 발이 입안으로 사라지는데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었다.
아무리 단련된 기사라고 해도 눈앞에서 연인이 죽는 마당이다.
“엘리스! 정신 차려! 온다! 온다고!”
“크윽!”
잠깐 시선을 뺏긴 대가로 엘리스의 몸이 뒤로 날았다.
방패를 제대로 지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의 몸은 데굴데굴 구르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지만, 그때는 이미 진형에서 멀어진 후였다.
파괴된 진형으로 파고든 것은 가고일이었다.
쇳소리를 내뱉으며 가고일들이 파닥이자, 흙더미가 눈과 함께 날았다.
쇳소리와 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뒤쪽, 엘리스의 연인을 통째로 집어삼킨 가고일은 목을 길게 위로 뽑았다.
바로 위장으로 먹이를 보내기 위함이다.
가고일의 철로 된 위장에는 산성 용액이 가득했다.
거기 들어갔다간 남자는 바로 끝이었다.
그때 검은빛이 하늘에서 일직선을 이루었다.
꽝!
돌벼락이 떨어진 듯 땅이 파이고 엄청난 양의 흙이 위로 떠 올랐다.
그 충격으로 눈이 녹는 바람에, 하얀 수증기 같은 것이 펄펄 끓어오른다.
동시에 남자를 삼키던 가고일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놈의 몸체가 휘청일 때, 검은 갑옷으로 둘러싸인 세인이 가고일의 목을 잡고 당겼다.
쩌적이는 소리와 함께, 가고일의 빗장뼈에서 구렁이 같은 회색 목이 뜯겨 나간다.
이윽고 땅바닥을 뒹구는 목 속엔, 휴렐이라는 남자가 들어 있었다.
머리와 목을 잃은 가고일의 몸뚱이가 발길질 한 번에 박살 나자, 다른 가고일들은 행동을 멈추고 세인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검은 연기, 붉은빛 그리고 살을 에는 공포가 한꺼번에 소용돌이쳤다.
그제야 한숨 돌린 기사들이 방패를 들고 다시 진을 짠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적인 가고일은, 이미 세인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인이 천천히 주먹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앞으로 도움닫기를 하면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검은 망토가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며, 그런 그를 폭발적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공중에서 잠시 머물러 있던 그의 몸이, 다시 벼락처럼 가고일을 향해 떨어졌다.
폭발음과 함께 가고일의 몸이 박살 났다.
철 비늘로 뒤덮인 단단한 몸뚱이도 세인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세인 입장에서는 인간도 아닌 녀석들을 봐줄 리가 만무하다.
그런 그의 움직임에서는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다.
순식간에 세 번째 가고일의 몸이 터져 나간다.
박살 나는 가고일의 몸을 뚫고 나온 세인은, 두꺼운 갈비뼈를 집어 던졌다.
직선으로 날아간 뼈는 한 가고일의 눈을 맞췄다.
녀석이 바보처럼 눈을 끔벅일 때였다.
어느샌가 다가온 세인이 주먹을 날렸다.
엉겁결에 그것을 앞발로 막으려던 가고일의 몸이 옆에서부터 짜부라졌다.
주름지며 비늘과 살이 밀려나더니 끝에 가서는 출렁이는 모습을 보인다.
세인이 주먹을 뻗은 반대쪽에서 가고일의 신체가 박살 나며 피와 살을 게워냈다.
“역시 언제 봐도 대단하군.”
경사를 타고 아래로 미끄러질 작정이었던 크릭은, 손에 든 자루를 슬며시 땅에 도로 내려놓았다.
그걸로 굳이 썰매를 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그는 방관자가 되었다.
아래쪽에서는 여전히 세인이 무자비한 살육을 벌이는 중이다.
달려들던 가고일의 머리를 잡은 그가 그걸 찢어냈다.
그리고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녀석을 들어 올려 뒤로 팽개쳐 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간 몸체가 구겨지며 처박힐 때, 세인은 얼어붙어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도망쳐라.”
“예?”
연인을 구출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 했던 여기사는 물론이고, 다른 기사들도 어리둥절해졌다.
세인은 가고일의 부속물을 챙기라는 말 대신 다시 말했다.
“명령이다. 도망쳐라.”
그의 음성에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개를 깊게 숙여 보인 기사들이 몸을 돌렸다.
전투 상황에서 가장 해선 안 되는 행동이 바로 망설이는 것이었다.
싸우든지, 도망가든지.
상황을 타개하려 머리를 굴리든지 해야지, 고민하고 어리버리한 건 정말 최악이다.
기사들이 세인의 명령 때문에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 가고일이 나름 습격이랍시고 세인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이빨이 세인의 가슴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세인은 약간 비틀거렸을 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고일을 바라보자.
가고일의 눈에 처음으로 공포가 서렸다.
세인의 손가락이 녀석의 눈가를 찔렀다.
그러자 터지는 비명.
손가락으로 상대를 헤집는 세인이 위를 올려다본다.
하늘 위에는 몰려든 가고일이 구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하늘을 메운 가고일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세인이 다시 날뛰기 시작하자 그들은 종이로 만든 인형과 다름없었다.
엉망진창으로 뭉개지고 잘려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퍼덕이며 찢겨나가는 시체 속에서 몇몇 가고일이 공포에 질렸고, 허둥대며 도망갈 때였다.
세인의 건틀렛이 그들의 뒤통수를 꿰뚫었다.
비명 그리고 폭발.
붉은 선이 이리저리 그려질 때, 갑자기 하늘의 원형 구름이 꿈틀거리더니 낙뢰를 쏟아냈다.
난데없는 벼락 속에서 가고일들이 새까맣게 타들어 갈 때, 세인은 보았다.
초록색의 불길이 땅 위로 번져 나가며, 모습을 드러낸 물체 말이다.
비틀거리며 그 속을 빠져나오는 괴물의 눈이, 세인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둘의 시선이 교차한 것은 아주 찰나였다.
순간 상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세인은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놈의 흉측한 몸을 보니 몬스터가 틀림없었다.
몬스터는 죽인다.
아주 간단한 거다.
세인의 몸이 검은 선을 이루었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놈을 들이박았다.
상대는 엄청난 힘을 가진 괴물이었다.
어쩌면 그야말로 북의 허리띠 지역에서 끝까지 모습을 숨기며, 최후의 반전을 노리던 녀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체가 어떻든 간에 지금은 세인의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과거 세인은 드래곤마저도 해치웠다.
이젠 군대가 몰려와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다.
지금 세상에서 그가 겁낼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투적으로만 본다면 말이다.
“이 하찮은 것이!”
몬스터가 그렇게 외쳤지만, 세인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갈겨 버렸다.
순간 피가 허공에 확산되고 녀석의 머리가 돌아갔다.
엄청난 충격에 비틀거리는 상대의 목덜미를 잡은 세인이 살기를 터트렸다.
그 기합에 괴물의 몸에 머물러 있던 초록색의 불꽃이 뒤로 밀려나며 흩어져 버렸다.
눈 섞인 흙들이 터져 나갈 때, 세인이 녀석을 들어 올렸다.
그때 놈의 발이 세인의 허리를 때렸다.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세인은 그걸 견뎌냈다.
“간지럽구나.”
그렇게 말한 세인은 진짜 발차기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손을 놓은 상태에서 제대로 발차기가 들어가자, 상대의 몸이 공중에서 일직선을 그렸다.
폭발이 일어나고 얼음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흔들거렸다.
얼음 조각들이 쏟아질 때, 세인은 반쯤 몸이 파묻힌 몬스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피를 게워내는 녀석을 유린했다.
놈도 저항을 해왔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재미없어, 약하군. 네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지 않아졌다. 하찮은 미물아. 죽어라.”
세인의 말에, 상대의 눈에는 치욕감과 무력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세인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 그 눈은 헤어날 수 없는 공포로 뒤덮였다.
어떤 힘을 가지고 있든 마검의 힘을 가진 세인 앞에서는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그걸 깨달은 것이다.
결국, 부서져 나가는 몬스터의 비명이 사방에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