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61화 (161/307)

# 161

& 헌터 타워 (6)

아비게일은 볕이 잘 드는 공원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마법사의 책’과 ‘칼엘의 기록’이라는 책을 즐겨 읽었다.

마법사의 책은 신에 대해서도 잘 다루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신에 대한 증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거지. 접근 방법이 색달라. 작가의 의도대로 추적하는 형식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단풍잎을 책에 끼워 넣었다.

지금까지 읽은 페이지에 표식을 남기려는 것이다.

그리고 칼엘의 기록이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그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이 붙은 건 당연하다.

아비게일은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비게일의 손에 들린 책에서, 하나둘씩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서 아비게일은 혼자 웃고 혼자 떠들어 댔다.

“여자는 내게 가야 할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남자는 나에게 신부에 대해서 말했는데, 왜 내게 신부라는….”

거기까지 읽었을 때였다.

바닥에 빗질하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신부님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신부님 파트를 읽고 있는데 신부님이 나타나 버렸다.

“안녕하세요. 날씨 좋은 오후입니다.”

“여기는 신전과 먼 곳인데, 빗질을 하시는 건가요?”

아비게일과 신부는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하였다.

공원에서 이루어진 마법사와 신부의 만남이었다.

“무슨 책입니까? 매우 크고 두꺼워 보이는데.”

“아, 고대에 쓰인 책입니다. 딱히 장르가 정해져 있진 않지만 거의 기행문 같은 거예요.”

“재미있겠군요.”

지나가듯 말하는 신부의 말에 아비게일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두꺼운 책을 지으려면 꽤 시간이 흘러야 했을 텐데 저자가 누구입니까?”

“아, 이 책을….”

책의 이름을 말하며, 칼엘이 저자라고 말하려던 아비게일은 노인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아스칼리온이었다.

화단을 넘어 그가 다가왔다.

아스칼리온도 신부처럼 빗자루를 든 상태였다.

이렇게 되니 아비게일은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괜스레 미안해졌다.

어째 남이 보면 자신만 책을 들고 편하게 앉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도와드릴까요? 라고 말해야 하나?’

애매했다.

매우 애매했다.

당장 빗질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과, 한가롭게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머리 안에서 난투를 벌였다.

일에 지친 아비게일에게 있어, 자신만의 편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상반된 두 개의 생각이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을 때, 아스칼리온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런데 자네, 왜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는가? 그거 설마 식은땀이야?”

그 목소리에 아비게일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말해 버렸다.

“제…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스칼리온은 아비게일이 쭉 뻗은 두 손을 보았다.

그리고 거절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세.”

“….”

아스칼리온은 예의상 한번 거절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한 번 정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비게일.

신부님.

그리고 아스칼리온은 그날 공원을 쓸고 또 쓸었다.

세 사람이 그렇게 바닥을 청소했는데, 결국 나중에는 어린 엘프들이 몰려와 뛰어놀며 다시 어지럽히고야 만다.

*  *  *

하얀 눈밭 위에 몰려든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뒤쪽에 세워놓은 말들이 하얀 입김을 뿜으며 저희끼리 뭉쳐 있었다.

서 있는 사람들은 병사들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이 기사였고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가이더와 번우드의 기사들이 하는 합동 훈련을 위해 모인 기사들이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하며 신발로 올라오는 냉기를 이겨내고 있었다.

기사 체면에 발을 구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때 앞쪽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힐다가 나타났다.

그녀는 긴장감 때문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오죽하면 연단 위에 오르는 그녀의 두꺼운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걸 잭과 질리언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긴장했으면 몽땅한 그녀의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일까?

“이봐 힐다. 좀 진정해. 그러다가 얼굴이 터지겠어! 왜 그렇게 긴장한 거야?”

가장 앞쪽에서 그렇게 말한 잭을 원망스러운 듯이 쏘아보는 힐다였다.

그러자 잭이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힐다는 주먹을 입에 가져다 대며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리고 허리를 구십도로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저희는 고된 훈련을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손을 겨드랑이에 낀 기사들은 어린 힐다를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더욱 빨개진 힐다는, 떨리는 음성을 진정시키며 앞으로의 행군 일정과 목적지를 말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우쿨레’라고 하는 얼음산이었다.

거기는 이미 레인저나 헌터들이 몰아넣은 몬스터들로 우글거리고 있었다.

“선배님들을 믿지만, 결코 경시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마법 생물도 있으니까요. 저희 목표는 유인해서 몰아넣은 그놈들을, 격멸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얻는 마법 재료는 글리터와 번우드에 공평하게 돌아갈 것이고요. 자, 그럼 준비된 선배님부터 출발하시면 되겠습니다. 도보 일정이므로 당분간 기마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의상 손뼉을 쳐준 기사들은 손짓으로 자신들의 종자를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짐을 건네받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질리언은 잘했다고 등을 쳐주기 위해 힐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잭은 울프 크릭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울프 크릭님은 왜 거기로 가세요?”

“신나지 않아?”

“뭐가요?”

“이제 우리가 거꾸로 그놈들을 사냥하는 입장이라고. 이 재미를 놓칠 수 없지. 사방팔방에서 긁어모은 놈들이라며? 이런 기회가 흔치 않아.”

잭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고된 일정인 훈련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놈들을 없애서 우리가 좀 더 안전해지는 거죠.”

“그래 없애버리자고. 피가 끓는군! 보이는 대로 족족 잡아서 해치워 버려야 해.”

“예, 그러니까. 죽이는 것보다는 그만큼 저희가 안전해지는 게 중요하다는….”

“그게 그거라고! 결국, 죽이자는 말이잖아! 젊은 사람이 이렇게 말귀가 어두워서야!”

“아. 예….”

어째 내용이 돌림노래 같았다.

깃발이 움직이고 선두 열을 만든 기사들이 눈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거운 짐과 무기를 주렁주렁 매단 채였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그들의 거친 턱 아래로, 하얀 숨이 뿜어져 나와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들은 숱한 전투를 치렀고 풋내기 기사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출발하는 표정에서도 여유가 엿보였다.

하지만 애송이나 다름없는 힐다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녀는 바위처럼 굳은 얼굴로 ‘내가 실수한 건 없겠지.’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휘 천막을 실은 마차가 출발하고, 힐다는 움직이는 수레 위에서 무거운 철제 방패를 집어 들었다.

그걸 본 질리언이 질린다는 표정을 해 보인다.

“설마 그걸 들고 갈 생각이야? 행군 내내?”

“자기 무기를 들고 행군하는 게 기본규칙이야. 하늘같은 선배들 앞에서 지금 나보고 규칙을 어기라는 소리야?”

힐다가 불퉁하게 대꾸하며 다른 무기들도 주워들자, 질리언은 좀 말려보라는 얼굴로 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잭은 오히려 손뼉을 치고 있었다.

“좋아 바로 그거야! 그 정신이라고! 이제야 왜 네가 지휘 캠프에 속하게 되었는지 알 거 같다! 표준의 힐다! 정량의 힐다! 가는 거다!”

“오! 나도 마음에 들어! 그렇지! 싹수없이 처음부터 요령이나 피우는 것들은 전사의 자격이 없어!”

크릭도 맞장구를 치며 자신의 도끼를 툭툭 쳐 보였다.

그렇게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행군을 시작했다.

그 주변으로 멀리 정찰을 위해 달리는 말 외엔, 바쁘게 움직이는 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 말들은 어슬렁거리면서 앞쪽으로 이동할 뿐이었다.

정찰대가 아주 멀리까지 운용되며, 드물게 몬스터를 발견하면 순번대로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가뿐하게 해치웠다.

당연히 얼마나 수월하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내기가 걸렸고, 각 조는 경쟁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번우드에서 내가 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지.”

“글리터에 있던 나는 논 줄 알아?”

사나이들은 주먹을 서로 부딪치며 기세를 피워 올렸고, 여기사들은 좀 더 실속있게 판돈을 걸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자유였지만 자기들의 몸은 스스로 챙겨야만 했다.

여기에서 농담이라도 낙오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밤에 텐트 안에 들어간 기사들은 시끄럽게 먹고 마시며 놀았지만,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침낭을 둘둘 말았다.

그리고 눈 위를 밟으며 다시 행군을 했다.

오히려 편하게 수레 위에 올라타 이동하는 종자들이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본디 기사들의 훈련이었다.

종자들은 그들을 보조하는 것만 몸에 익히면 되는 것이다.

힐다가 속한 그룹이 수백 명이었다.

이따금 아주 멀리에서 한데 뭉쳐, 돌아다니는 무리도 볼 수 있었다.

거기는 따로 운용되는 기사들이었다.

헌터들은 몬스터를 죽이려고 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보수를 받고 레인저들과 함께 얼음산으로 몬스터들을 몰아넣었다.

그리고 사람이 하는 일이 언제나 그렇듯이 완벽할 수만은 없었다.

레인저와 헌터들의 몰이망에서 벗어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조심해!”

땅이 울리고, 머리 두 개 달린 소가 돌진해 왔다.

소가 휘저어 대는 뿔 앞에는 등이 노출된 여기사가 서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이미 흩어진 지 오래다.

습격을 받은 여기사는 그림처럼 돌아서며 소의 등을 베었다.

그녀의 무기에 의해 소의 몸체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그 아픔도 돌진하는 소를 막진 못한다.

몸을 회전시킨 여기사를 지나친 소가 계속 앞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질리언과 잭을 맞닥뜨렸다.

질리언은 방패로 소의 돌진을 막아냈다.

다시 태어난 몸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이런 것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질리언이 소를 막아내면서 소가 벌러덩 자빠지자 잭의 무기가 날아들었다.

뜨겁고 붉은 피가 잭의 얼굴에 사선으로 튄다.

그리고 피의 주인인 소의 울음소리가 주위를 메웠다.

그러나 이를 꽉 문 질리언은 난도질하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소는 곧 뜨거운 내장을 드러내며 죽음을 맞이했다.

이건 다른 쪽도 마찬가지였다.

쾅!

눈이 튀기는 가운데 믿을 수 없게도 소가 제 자리에서 반 바퀴를 돌았다.

힐다의 강철 방패 앞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엉덩방아를 찍고 앞발이 들린 채 뒤로 쓰러지는 소를 크릭의 도끼가 쫓아갔다.

두꺼운 가죽을 파고든 날 선 도끼는, 근육을 절개하고 옆으로 빠져나왔다.

거기에 얹어지는 구슬픈 소의 울음소리는 덤이다.

병사들이라면 모를까.

기사들이 잔뜩 모여 있는 마당에 소들의 습격이 부담될 리가 없었다.

소들은 처음에는 기세 좋게 달려들었지만 한 마리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오늘 저녁은 내장탕이군.”

더운 김을 뿜어내는 소의 장기들을 바라보며 크릭이 한 말이었다.

물론 몬스터의 고기를 먹지 않으니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곁에서 한숨 돌리던 힐다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자신도 모르게 상상했나 보다.

헌터와 레인저들은 넓은 야지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면서 몬스터들을 우쿨레 산으로 몰았다.

저인망으로 강바닥을 훑듯이 몰아대자 얼음산은 몬스터들로 득실거리게 되었다.

그건 그만큼 주위가 안전해졌다는 뜻이다.

다만 우쿨레 산에 도착한 기사들은 머리를 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얼음산에는 도넛이 떠 있는 건가?”

우쿨레 산 위에는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형태의 구름이 떠 있었다.

가운데가 뚫린 검은 구름은, 이따금 번쩍이며 번개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다들 눈썹 위로 두 손을 올리며 산을 구경하는 가운데, 구름 밑으로 날아다니는 검은 물체들이 보였다.

그걸 본 질리언이 혀를 찼다.

“재주도 좋아. 하늘을 나는 것들을 어떻게 몰아넣은 거지?”

그러자 잭이 대답했다.

“미끼를 썼든지 했겠지. 해치우는 게 힘들 뿐. 그런 기술은 헌터나 레인저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기사들이 제대로 도착한 것을 확인하자, 우쿨레 산의 외곽을 경계하던 레인저와 헌터들이 포위망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넓게 거리를 벌리더니, 결국 멀리 떠나 버렸다.

자신들만의 합동 훈련을 소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기사들은 비정상적인 구름 형태에 의문을 표시하면서도, 산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산의 뒤쪽에서는 검게 물들어 가는 하늘이 있었으므로, 곧 눈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전에 숙영지를 조성해야만 했다.

산의 아래쪽에 자리 잡은 그들은 땅을 파고 말뚝을 박아 넣었다.

텐트가 하나둘씩 세워지고, 그 위로 방수 천들이 뒤덮였다.

말들이 머물 임시 마구간도 자리를 잡았고 취사 텐트도 넓게 세워졌다.

일단 천막들이 벽을 만들고 주위를 차단하자 난로와 램프가 빛을 발했다.

어느 순간 바람이 사라지고 안쪽의 공기는 따뜻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더 기온이 떨어지기 전에, 타이밍 좋게 주둔지를 완성하자 하늘에서 눈발이 날렸다.

이제 얼음산 위쪽은 회색 구름의 차지였다.

기사 몇 명은 소변을 보러 멀리 나와 얼음산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혀를 찼다.

“높군. 엄청 높아 보여.”

“저길 올라가야 한단 말이지.”

“그것도 몬스터와 싸우면서 말이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볼일을 보는 남자들이었다.

울프 크릭은 엄밀히 말하자면 지휘 캠프의 통제를 받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건 당연하다.

이번에 크릭이 멋대로 따라온 것이니, 드워프에 대한 훈련 예정이 없다.

그래서 그가 어딜 가거나, 사라져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이제 벌어질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점검하고 챙기는 것만으로도 바쁜 상태였다.

당장 쇠줄로 엮어 만든 망을 세우느라 바쁜 사람들이다.

그래서 수통 하나를 허리에 차고 산길로 들어서는 크릭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발견했다 해도 제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릭은 휘파람을 불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측면이 낭떠러지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얼음산은 높을 뿐만 아니라, 영역도 매우 넓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몬스터를 몰았어도 녀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밀착된 상태는 아니었다.

몬스터들은 자기들끼리도 눈치를 보며 거리를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크릭은 그 틈을 이용해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방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 하얀 곰이 습격해 왔다.

여긴 그들의 영역인가 보다.

엉겨 붙는 놈들을 해치우고 나니 다음에는 거미였다.

“난 거미가 싫어.”

그렇게 중얼거린 크릭은 양손에 도끼를 들고 거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보라색 액체를 튀기며 거미 다리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어떠냐! 이 몸이 바로 드워프 서열 일위다!”

드워프 장로들도 모르는 서열을 읊으며 거미들을 난도질하는 크릭이었다.

괜히 그가 왕으로 추대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통했으며 사교성도 좋았다. 그리고 강했다.

피에 젖은 수염을 장난처럼 비비 꼬던 그가 정상에 올랐다.

꽤 넓은 편인 정상에 발을 딛기 전부터 피바람이 불어왔다.

코를 킁킁거리던 크릭은, 정상에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괴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법 생물인 괴물들은 한결같이 가장 가치 있는 부위를 강탈당하고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나뒹굴고 있는 찢긴 팔이 드워프의 발에 채였다.

죽은 놈들도 마법 생물이니까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었을 텐데, 지금은 장난감처럼 찢겨서 바닥을 장식하는 꼴이다.

“여어~.”

크릭은 손을 들어 올리며 정상의 중앙에 앉아 있는 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두껍고 질긴 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두꺼운 장갑을 낀 손이 후드 위쪽을 덥석 붙잡고 뒤로 내린다.

회색 털이 달린 후드가 미끄러지며 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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