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 헌터 타워 (5)
목책을 세우는 일.
상인들의 지역에서 하루나 반나절 경비를 서는 일.
도랑을 파는 일.
제설작업.
하다못해 소를 잡는 일이나 밭일에 거쳐서 온갖 자질구레한 일까지 의뢰가 밀려들고 있었다. 꼭 힘센 장정이 아니라 해도, 소년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
물론, 보수도 후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인은 훗날 그들이 조를 이루어 몬스터들을 사냥하길 원했지만, 무리하게 밀어붙이진 않았다.
수순에 따라 단계를 나누어 소속감을 심어 주었다.
지역이나 특정 인물에 대한 소속감이 아니라, 헌터라는 개념에 대한 소속감이었다.
신용도와 기여도가 오르면 잠자리가 달라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때론 검술서도 보상으로 올라왔고, 질 좋은 방어구와 무기도 할인해서 팔아댔다.
머독이나 세인이 원하거나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걸 대놓고 명령 내릴 필요가 없었다.
임무 형식으로 벽에 가져다 붙이면 그만이었다.
온갖 자질구레한 일까지 내밀 수 있는 금력과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말은, 그만큼 세밀하게 대상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에 헌터들을 흥분시킨 게 바로 헌터 타워에 대한 존재였다.
“헌터 타워는 방벽에 있는 탑들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 안에서 싸우거나 이기면 대전료를 받아요.”
“잠깐. 이겨야 받는 게 아니라 싸우기만 해도?”
잠자코 듣고 있던 헌터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 앞에서 헌터 사무소 안내인은 ‘굳이 손을 들것까진 없는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예. 싸우기만 해도요. 일단 사흘에 걸쳐서 참가자를 받을 거예요. 그리고 이건 헌터들끼리만 싸우고 관전하는 형식이 아니에요. 누구라도 얼굴을 가리고 참가할 수 있어요. 단 얼굴을 가리고 신분을 숨기면 당연히 헌터 패에 기록 적립이 안 됩니다.”
그러면서 꼭 개인끼리 싸우는 게 있는 게 아니라, 팀 전투도 있다고 설명하는 안내인이었다. 그 밖에도 부연 설명을 잔뜩 하는데, 설명을 듣는 헌터들은 ‘아, 투기장 비슷한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보수가 후하다는 것에 만족했다.
“다만 왜 이런 것을 기획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당사자도 의도에 대해 깊게 신경 쓰진 않았다.
보수가 있다는데 참가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개방된 헌터 타워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했다.
상당한 강자들이 신분을 숨기고 나타난 것이다.
보수를 단지 도박에 의한 승패로 정하진 않았다.
평가라는 이름의 세밀화 된 판정이 이루어진 것인데, 가시화된 이 평가는 용병들에게 꽤 도전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돈과 강해지려는 의지는 예상보다 많은 헌터들을 타워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일반인도 구경할 수 있게 만든 타워는 인기 절정의 명소가 되었다.
용병 중에서도 돈에 구애받지 않는, 평소 한자리하던 사람들도 다른 욕망에 이끌려 이곳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호승심이었다.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도 헌터 타워에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소위 용병들끼리 말하는 ‘무거운 엉덩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투기장이란 것은 각국의 수도 정도나 가야 경험할 수 있는 활동이었다.
사실 그것조차도 도박적인 성격이 강했다.
나라마다 혈투를 싫어하는 왕의 성향에 따라 금지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헌터 타워에서는 목숨이 오가지 않았다.
생명을 빼앗았다고 점수를 높게 주는 일은 없다.
오히려 여러 장치를 설치해서 목숨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줬다.
골 때리게도 상대에게 재기불능의 치명타를 입히거나, 죽게 만들면 오히려 벌점을 줄 때도 있었다.
이런 헌터 타워의 상품 중에서는 꽤 고급 무기도 있었고, 편의성이 극대화된 물품도 있다.
마정석 램프가 나왔을 때는 모든 사람의 눈이 뒤집어졌다.
물속에서도 켜지고, 호우 속에서도 작동하는 것이다.
불에 강하고 세심히 신경 써주지 않아도 거의 반영구적으로 빛을 내는 램프의 중요성은 모험가들이 더 잘 알았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남부나 다른 지역에도 마정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공에 어려움이 많았고 매장량이 적었다.
평소 이름만 들어볼 뿐, 일반인 처지에서는 평생 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그런 걸 떡하니 주는 것이다.
더구나 이건 맛보기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 더욱 물량을 많이 풀 생각이었다.
세리스의 우려에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만에 하나 이곳으로 엘프들을 파견해달라면 내 대답은 거절이야. 우리가 아끼는 것들을 내달라고 하면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마정석 램프 정도는 괜찮아. 마정석을 빼낸다 해도 하급이고. 제대로 쓸 놈들도 없어. 게다가 무엇보다도.”
세리스가 다음 말을 기다리자 세인이 마저 대답했다.
“일반인들도 더욱 편리한 빛을 가져야지.”
시간이 약간 지나자, 타워 내부에서만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게 바뀌었다.
방벽 위나 아래에서도 격투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눈을 반짝이며 몰려들었다.
인간은 강해지고자 하는 본능이 있었고 싸움 구경은 일반인들에게는 사치였다.
그리고 그걸 유희로 삼는 것은 금기적인 성격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걸 바꾸었다.
이 모든 장치가 사람들의 무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촉발제로 사용되고 있었다.
헌터들은 싸우면서 다른 시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에 고무됨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 놓고 싸웠다.
때론 죽음의 리스크 없이 강해지는 것에 만족을 표시했다.
헌터 타워에 레인저들이 합세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안면 마스크를 쓴 상태로 난입한 사람 중에는 행크나 더이스도 있었다.
그들은 엄청나게 날뛰었고 헌터들 사이에서 곧 유명해졌다.
얼굴을 몰라도 싸우는 폼에서 서로 알아보게 된 것이다.
보상은 그들 사이에서 돌고 돌았고, 서로가 연마되며 강해지는 상호승리 게임이었다.
헌터들 입장에서는 노력만 하면 여러모로 대우를 해주는 데다가, 세금도 적은 이곳이 싫을 리 없었다.
헌터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지만, 머독은 털끝만치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을 제어하는 것에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방벽 밖에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여기에서 사고를 치는 헌터가 있다면 어차피 그 헌터는 오래 못 살 것이다.
간이 몸통보다 크면 오래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헌터들은 둘째 치고 병사들은 잘 관리되고 있을까?
유난히 비협조적인 곳이 있긴 했다.
대개 고개를 뻣뻣이 세운 기사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집합 장소에 늦게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론 항명 같은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곧잘 말하는 게 몬스터와 연합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였는데, 머독 생각으로는 그냥 여기에서 통제를 받는다는 게 아니 꼬아서인 거 같았다.
따지고 보면 저런 놈들이 과거, 몬스터 군단의 진격 속에서 꼬랑지 빠지게 숨은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몬스터 운운하는 것도 좀 그랬다.
“한때 같은 인간이었다고 말해봤자 믿을 리도 없고, 저건 제 무덤 파는 짓일 텐데.”
그렇게 말한 머독은 그래도 많은 사람을 통제하는데 익숙한 인물이라 어찌어찌 잘 제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 * *
오셀로는 약초꾼이었다.
약초꾼은 딱 두 개랑만 싸우면 된다.
하나는 자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쟁자들인 다른 약초꾼들이었다.
그래서 오셀로는 필연적으로 멀리 나가서 생활하는 일이 잦았다.
험한 지형일수록 경쟁자들이 줄어드니까 말이다.
방벽 너머로 나와 한참을 걸은 오셀로는 산에 올랐다.
그리고 정신없이 약초를 캐고 있었다.
만약 몬스터를 만나면 죽은 목숨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운을 믿었다.
그의 운은, 그의 생존을 책임졌고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의 운만 여느 때와 같이 작동한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눈보라가 다가왔고 그는 망태기를 들고 걸었다.
눈보라가 그치자 그는 깨달았다.
허리에 매어놓은 긴 줄이 끊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줄 끝에는 그의 딸인 데모나가 있었을 것이다.
“….”
오셀로.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하얀 산을 바라보았다.
이 산은 그다지 높지 않다.
대신 구불구불하고 들쭉날쭉한 지형의 연속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도 많았다.
언제부터 딸과 떨어진 걸까?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시끄럽고 거친 눈보라 어디에서 데모나를 잃어버렸는지 몰랐다.
오셀로는 일자무식의 약초꾼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식수준이 높지 않았지만, 대신 현명했다.
둘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 현명하다는 기준에는 침착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딸이 있는 쪽으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뛰어가지 않았다.
‘내 감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어. 하지만 이번에 처음, 딱 한 번만 배신하더라도 내 딸은 죽는 거야.’
그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망태기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딸을 잃어버린 방향의 반대쪽으로 뛰었다.
그가 향한 곳은 방벽 근처의 병사들이 훈련하고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울부짖으며 전서구를 날려달라고 빌었다.
평소 몬스터라고 여겨서 은근히 외면했던 레인저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오셀로의 두 눈은 그걸 똑똑히 확인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새를 날려도 그게 받아들여져서 그의 딸이 구출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산속 생존에 대해서 기본적인 걸 가르쳤어도 데모나는 어려. 길도 못 찾는다고. 하루 정도는 어떻게든 버틴다 쳐도 이틀은 무리다. 하루. 단 하루!’
오셀로는 미친 듯이 방벽을 향해 뛰었다.
사람들을 붙잡으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는 가난한 약초꾼의 딸 때문에 제대로 된 수색대를 보낼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가서 어떻게든 빌어봐야 한다. 땅에 머리를 박던지 칼로 팔을 그어서 피력하던지, 높은 분의 눈에 띄어야 내 딸이 살 가능성이 커진다.’
그는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약초꾼의 딸.
평민 소녀 하나를 위해 수색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정말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방벽을 통과했다.
하지만 하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려나 보다.
“무슨 일이요! 무슨 일인데 이 난리인 거요?”
집합 종이 마구 울리고, 이어지는 발소리에 주둔지가 끓어오르는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팔 소리도 사방에서 쏟아지는데 전체가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난리가 났다.
달려가는 헌터 중 하나를 붙잡고 오셀로가 캐묻자, 귀찮은 듯이 팔을 뿌리치려던 헌터는 잠시 흠칫했다.
극도로 절망한 오셀로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집합해봐야 알겠지만, 전쟁이 난 거 같아요. 글리터의 주인이 총집합 명령을 내렸어요. 병사고 기사고 헌터들조차 남김없이 집합하라는 엄명이에요. 이게 전쟁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러면서 주먹으로 자신의 방패를 쳐 보인 헌터는 오셀로를 뿌리치고 달려갔다.
“아… 안 돼! 하필이면 지금! 왜 하필 지금!”
남겨진 오셀로는 망연자실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전투 때문에 전원을 집합하는데, 수색대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사람을 방벽 밖으로 내주기는커녕 이곳을 봉쇄할 가능성이 높았다.
오셀로는 오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이미 늦은 것 같다.
* * *
엄청난 인파가 연설대 밑을 가득 메운 가운데, 세인이 앞으로 나섰다.
사람들로서는 처음 보는 세인의 모습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그에게서는 무서울 정도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과연 왕좌에서 모두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존재감이었다.
항명 따위는 한치도 용납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 모였나?”
그런 말을 내뱉은 세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머독이 일부 기사들과 병사가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뒷감당은 그들이 해야겠지.”
세인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 * *
데모나는 밤이 깔린 산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식사할 때 바닥에 깔기 마련인 얇은 모포였다.
게다가 위급 시에 뒤집어쓰라고 흰색이었다.
눈이 내린 산에서 보호색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
데모나는 자신이 조난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어야 구출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려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까?
구하러 온 사람과 얽히면 둘 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까?
안다 해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위급상황에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엄청나게 많이 떠 있었다.
데모나가 입을 벌리자 입김이 그 별에 닿을락 말락 하다가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체감했다.
기온이 극도로 내려가는 새벽에 얼어 죽을 것이었다.
데모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무작정 걸었다.
몸에 덮인 천의 끄트머리가 바닥에 질질 끌려, 희미한 자국을 만들었다.
얼어붙은 신발 때문에 발이 아팠다.
정말 두려운 순간은 발의 감각이 없어질 때이다.
이 상황에서 데모나는 아버지가 걱정이었다.
어머니도 없는 마당에 자신마저 잃고 나면 아버지는 얼마나 상심하실 것인가?
그녀는 다시 별을 올려다보았다.
별자리를 볼 줄 모르는 그녀에겐 소용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아니 안다 해도, 그녀의 다리로 집까지 걸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항상 아버지의 보호를 받던 그녀는 방향을 잡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별의 아름다움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저 빛들은 다 부질없는 존재들이었다.
“아아….”
죽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데모나는 절망했다.
소녀의 눈가가 붉어질 때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경사를 따라 산의 등성이에 발을 디딘 그녀는 그만 자리에서 멈춰섰다.
“아.”
같은 단어였지만 이번에는 의미가 다르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손등으로 눈가를 비벼 본다.
그러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별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빛들이 지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멀리 어딘가에 있을 방벽부터 그녀의 발아래, 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별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하늘의 별보다 인간의 별이 더 아름답다.
잠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때였다.
주위에서 뽀드득하고 눈을 밟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라는 데모나가 뒤로 물러서자, 큰 그림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데모나?”
세상을 가득 뒤덮고 있는 인간의 불들 사이로 나타난 것은 바로 힐다였다.
데모나의 인상착의를 확인한 힐다는 환하게 웃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원통 같은 것이었는데, 안에는 뜨거운 물이 들어 있었다.
“찾아서 다행이에요. 데모나. 이걸 마셔요. 몸이 따듯해질 거예요.”
데모나는 힐다가 건네주는 물을 조심스럽게 받아 마셨다.
그 모습을 힐다가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소녀를 살렸다.
자신이 소녀를 발견하고 그녀를 구출했다.
힐다는 보람을 느꼈다.
뜨거운 물을 마시게 한 뒤 힐다는 데모나의 곁에 붙었다.
그리고 자신의 망토로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아예 소녀를 업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한 손으로 램프를 들고 업은 상태에서 내리막길을 걸어간다는 건 위험한 짓이었다.
“가요, 데모나. 당신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어요.”
“아….”
힐다는 그녀를 부축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도중에 데모나가 입을 열어 소리를 뱉어내자, 소녀의 의문을 알아차렸다.
사방에 가득 찬 불빛에 대해 궁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힐다는 웃으며 소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물론 상대가 내용을 들을 수 없겠지만, 힐다는 대답해주고 싶었다.
“산책하러 나왔어요. 그뿐이에요. 이 모든 사람은 그냥 산책하러 나온 거예요.”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인 당신을 위해.’
그렇게 여기사와 소녀는 다시 인간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바깥으로 나와 그런 둘을 맞이했다.
밤하늘 속의 별은 잔뜩 몰려나와 이런 지상을 구경했다.
어두운 대지 위에 뜬 인간들의 별빛은, 그런 밤하늘에 뒤지지 않았고 말이다.
때로는 하늘의 별보다 인간의 별이 더 아름답다.
그 이유는 더 연약한 만큼, 더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 *
결과적으로 오셀로의 비탄은 착각이었다.
세인은 전투 때문에 총동원령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조난한 소녀의 소식을 가지고 새가 방벽을 넘었을 때, 머독은 세인에게 바로 보고했다.
그는 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세인은 머독의 예상대로 망설이지 않았다.
일초의 고민도 없이,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명령했다.
“움직일 수 있는 병력 모두를 집합시켜.”
병사들이나 헌터들은 총동원령에 당연히 전투이겠거니 하고 무기를 들고 뛰어나왔지만, 그들 앞에 공식적으로 나타난 세인은 모두를 향해 짧게 내뱉었다.
“조난당한 소녀를 찾아.”
거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글리터의 왕은, 평소에 그들에게 무리한 것을 하나도 요구하지 않았다.
무거운 세금을 매기지 않았고, 복종하는 자세를 보여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그 흔한 통행세도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공기처럼 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그는, 내린 명령에 토를 단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기색이었다.
그의 분위기가 무리한 명령에 절대적인 당위성을 부여해버렸다.
거부나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 힘이, 여태껏 웅크리며 모습을 감추다가 정체를 드러낸 지배자에게서 느껴졌다.
모두가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서슬 푸른 위엄 앞에선 복종밖에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광야로 나선 것이다.
단 한 명을 찾기 위하여.
지나가는 사람 누구라도 붙잡고 지금 일을 이야기해 보라.
소녀 하나를 찾기 위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벌판으로 내모는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도 한번 물어보자.
병사들을 훈련하고 먹이고 재우는 데에, 하루하루 들어가는 돈이 적지 않았다.
동원된 헌터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게 보수를 줘야만 한다.
게다가 돈도 돈이지만, 많은 인력을 동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단 한 명을 찾기 위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평야를 헤매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누구나 그걸 알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아무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뒤돌아서서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없었다.
램프와 횃불을 들고 벌판에 나섰던 그들은 결국 소녀의 구출 소식을 들었다.
소녀와 아버지는 서로 만나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고 들었다.
부녀는 모두가 바라보는 시선도 잊고, 눈물범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더욱 오늘 일에 불만을 표시한다는 게 염치없이 느껴졌다.
적어도 혈관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오늘 일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투덜거려서는 안 된다.
어느 순간 모두 그걸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펍을 열고 들어온 헌터 한 명이 외쳤다.
“다들 몸 좀 녹이게 술잔 돌려! 돈은 내가 내지”
그러자 펍의 주인이 대꾸했다.
“오늘 밤은 모든 가게가 공짜에요. 저기에서 미리 다 냈거든요.”
탑 쪽을 가리키는 주인을 보며 헌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리고 하나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헌터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술잔이 몇 번 돌고 몸이 훈훈해지자, 헌터 한 명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옛날에는 우리 모두가 그랬는데.”
그러자 주변의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옛날에는, 아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최우선이었다.
몬스터 앞에서 이를 악물고 싸우며, 같은 사람을 위해 이익 같은 것을 따지지 않았다.
이웃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졌고 괴물의 이빨 앞에서 웃었다.
그렇게 서로를 지키며 견뎌낸 것이다.
이웃들을 말이다.
지금 한 소녀를 위해 엄청난 수의 사람이 몰려나간 것이, 전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칼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뭐가 소중하고 뭐가 가치 있는지를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인생이 그렇듯이 종종 당연한 것조차 잊고 살 뿐이다.
신기루 같은 뭔가에 익숙해져서, 바보처럼 정작 소중한 것을 망각하고 살 뿐이다.
그러나 오늘 밤, 많은 사람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해버렸다.
“우린… 언제나 그랬었는데….”
그래, 생각해보면 우린 늘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