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 헌터 타워 (3)
좋은 진지를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세인은 그 답을 잠깐 생각하고 있었다.
목적한 곳이 점점 가까워져 올수록 그의 수면 시간은 줄어들었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서일 것이다.
내일이 되면 가이더의 방벽 부근에 도착하게 된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타는 장작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려보니 세리스였다.
그녀는 수건과 물이 담긴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의 캠프는 여유로운 분위기에 접어들었고, 이따금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인이 머무르는 곳 주변은 다른 마차들로 벽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안쪽을 바라볼 수 없는 상태였다.
세리스는 마차들 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있어서, 그녀의 너풀거리는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렸다.
노을이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순간, 검푸르게 번져가는 하늘이 다가오는 여자의 배경이 되어 준다.
다가온 그녀는 양동이를 세인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세인의 한쪽 부츠를 잡았다.
“이봐, 세리스. 넌 하녀가 아니야. 아니, 난 하녀에게도 이런 일은 시키지 않아. 넌 나의 기사야.”
세리스가 신발을 벗기는 것을 보며 세인은 그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의 그런 소리 앞에서 세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사이기 이전에 저는 인간이에요.”
그리고 그 인간은 세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세리스는 음식을 해서 세인에게 많이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세인은 농담으로 어색한 상황을 타개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결국, 세인은 묵묵히 그녀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 첨언하자면, 그녀의 음식 솜씨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좀 절망적이긴 했다.
그녀는 자기감정에 솔직했고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세인의 신발을 벗기고 물로 씻겨 주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아름다운 손가락이 자신의 발을 잡았을 때, 그는 황홀함이 아니라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세인은 자신이었다면 아마도 남을 위해 이렇게나 용기를 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용기도 아무나 내는 게 아니다.
전에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절을 감수할 용기, 상처를 각오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니까 말이죠. 저는 죄를 씻을 수 없겠더라고요.”
세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다른 발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그 요구에 세인은 다른 쪽 신발을 스스로 벗었다.
그리고 양동이에 발을 넣었다.
“도중에 가이더로 돌아가서 회개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가끔 저야말로 악녀라는 생각이 들곤 해요. 정의나. 대의 같은 것은 한때 저를 포장하기 위한 위선이었을 뿐이에요. 어쩌면 할머니 말이 맞았고, 저는 할머니에게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세인의 양발을 씻겨 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세인은 말없이 그 이야기를 들었고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세인은 지금의 상황이 불편했다.
그녀는 너무 성급히 세인과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그렇게 느껴졌기 때문에 세인에게는 이런 접근 자체가 거북스럽다.
하지만 그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잠자코 있었다.
세리스가 그의 발에 수건을 대고 닦아주는 것도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의 행위가 끝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리스.”
“예.”
“사람은 누구나 악한 면과 선한 면이 있어. 뭔가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너무 책임을 느끼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너는 완벽하기 위해 태어난 뭔가가 아니야. 그냥 세리스지.”
세리스는 그런 말을 하는 세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세인이야말로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망한다면 그의 책임이 아니다.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세인의 책임은 아니었다.
세상이 망한다면 망하게 만든 놈들의 책임이다.
세리스는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는 그녀대로 상대를 배려 한 것이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아.”
“신전을 그렇게나 많이 세우고서요?”
이미 백성들을 위해 그런 것임을 알면서도 세리스가 말을 돌리려 했지만, 세인은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만약에 천국이 있다면 말이야. 네가 죽어서 거기에 도달한다면, 거기 있는 존재들은 너에게 왜 완벽하게 살지 못 했냐고 따져 묻지 않을 거야.”
“….”
“세리스. 그들이 네게 물을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어. 과연 세리스 답게 살았냐고 물을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대답은 이미 할 수 있는 거 같군. 넌 언제나 최선을 다했어. 그랬을 거야.”
그러면서 세인은 웃음을 보였다.
그 딴에는 완벽하게 꾸몄다고 생각했겠지만, 세리스는 그게 억지웃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상대가 거짓 행동을 할 때 그 이유가 기만이었다면, 그녀는 매우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인이 짓는 거짓 웃음은 그녀를 배려한 거짓말이었다.
“고맙다 세리스. 용기를 내어 내게 다가와 줘서, 고마워. 오늘도 너는 네 감정을 속이지 않고 너답게 살았구나. 넌 재능있고, 축복받았고, 용기도 있는 여성이야. 그런 네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세인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지 그녀가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남자의 욕구를 자극해서가 아니라.
같은 라이트닝 블러드라서 끌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본질 앞에서 자신의 진심은 결국 무릎을 꿇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대체 누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세인은 발을 씻겨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세리스가 밝게 웃었다.
“원한다면 매일 씻겨드릴게요. 그럼 밤에 잘 잘 수 있을 거예요.”
“….”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서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난감하다.
저 웃는 얼굴 앞에서 말이다.
지금 저 웃는 얼굴.
설마 이걸 노린 건가?
* * *
한편 더이스와 행크는 너무 늦은 나이에 묘한 재미를 깨달아 버렸다.
그것은 바로 당사자가 없는 데서 신랄하게 욕하기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더이스와 행크는 아비게일을 신나게 씹어댔다.
처음에는 장난 반, 시간 때우기 반이었다.
그런데 씹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바람에 둘은 걸신들린 듯 아비게일을 빻아댔다.
특히 지금과 같은 술자리라면 정도가 더했다.
“아비게일은 타락했어! 타락했다고! 권력의 단맛을 보더니 아주 흥청망청 지내는 거지!”
“맞아요! 더러운 아비게일! 흑마법사 아비게일! 이번에 와인 창고도 새로 지었더라고요!”
“뭐야? 술이 얼마나 많으면 창고를 지어?”
더이스와 행크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모닥불 앞 술판에서 아비게일을 안주로 삼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아비게일은 천하에 둘도 없는 사악한 권력자에 상종 못 할 사람이었다.
문제는 이 둘이 현실과 상당히 동떨어진 험담에 타인도 동참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둘은 괜히 고기를 굽고 있던 힐다에게 아비게일에 대해 불만을 말해보라고 채근했다.
물론 힐다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요즘 이 덩치 큰 소녀는 새로 배운 방패술을 복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힐다는 행크와 더이스의 말을 아예 무시했다.
질리언은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말을 아꼈고, 잭은 힐다와 같은 상태였다.
잭도 술에 잔뜩 취한 행크와 더이스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불을 피워놓고 기사들과 기사수습생들이 빙 둘러앉은 가운데, 둘만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가 더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어딜 가는 거야? 더이스?”
소변이 마려운 더이스는 손사래를 치더니 급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세인의 발을 세리스가 씻겨주는 장면이었다.
그걸 본 더이스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마플의 말에 반신반의했었는데 진짜였구나.
“하긴… 깊은 관계가 아니라면 음식을 챙겨 줄 리가 없지.”
작게 중얼거린 더이스는 살금살금 움직였다.
그러자 마차들 사이로 보인 세인과 세리스가 더 이상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원래 자리로 돌아온 더이스는 시종일관 어두운 표정이었다.
‘아니 그러면 아비게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해보니 아비게일이 좀 불쌍했다.
게다가 그가 생각하기로 원래 아비게일이 먼저지 않는가?
와. 그렇다면 아비게일은 눈앞에서 연인을 빼앗긴 거?
물론 아비게일이 더이스의 이런 생각을 알았다면 어이가 없어서 발작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여기엔 아비게일이 없다는 거다.
그때 행크가 더이스의 어깨를 치며 아비게일의 흉을 봤다.
그 말을 들으며 울컥한 더이스가 도리질을 쳤다.
“그만 좀 하세요. 좀!”
행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뜰 때 더이스는 말을 속사로 뱉어냈다.
“생각해 보면 아비게일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종일 일만 죽어라 하고서는, 그 정도 즐거움도 못 누려요? 아비게일은 대체… 생각해 보세요. 아비게일이 즐거운 게 뭐가 있겠어요? 여자도 없지…. 게다가 여자도 없는 데다가…. 여자도 없으면서…. 결국 여자도… 없잖아요!”
“야. 더이스… 너 갑자기 왜 그래?”
“진짜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여기 없다고 이렇게 흉을 보면 어떻게 합니까! 아비게일을 나중에 어떻게 보려 그러세요! 가뜩이나 마음의 상처도 깊은 사람을! 정말 이건 아니죠!”
그러면서 더이스는 진짜 상종 못 하겠다는 듯이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잠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물론, 본인은 똑바로 달려간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지그재그 걸음이었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뎠는지 옆으로 껑충껑충 뛰기도 했다.
“….”
홀로 남겨진 행크는 뒤통수를 맞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시선을 피하는 가운데, 그는 얼떨떨한 얼굴을 유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뭐야? 이 분위기는? 여기서 지금 나만 쓰레기인 거야?”
“….”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
* * *
가이더의 방벽지대에 도착한 세인과 그의 일행은 여장을 풀었다.
방벽에 있는 주둔지는 안 그래도 노예나 다름없던 사람들의 수용시설을 늘린 상태였다.
이미 수천 명이 모여 북적거리는 마당에, 몇백 명이 늘어난다고 해서 머물 자리가 없을 리도 없었다.
높은 탑을 건설하고 있던 공사현장을 지난 세인이 방벽 안쪽으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외투조차 걸치지 않고 뛰어나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뚱뚱한 체구에 검은 피부를 가진 그는 거대한 흑돼지를 연상케 했다.
“오래간만입니다.”
머독.
그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
세인은 엄청나게 살이 쪄버린 머독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덕담을 건넸다.
“좋아 보이는군.”
“….”
레인저 부대의 총지휘관이었던 머독은, 세인이 글리터에 자리를 잡을 때 세계수 지역으로 돌아갔었다.
세인은 그걸 흔쾌히 승낙해 주었고 말이다.
번우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고, 그 눈부신 발전 속에는 레인저들이 쉴 수 있는 평화도 있었다.
하지만 늑대의 본성은 결국 그들을 바깥으로 나오게 했다.
머독과 레인저들이 가이더의 방벽지대에 머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한때 평화에 젖어 완전히 나태해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갑자기 주어진 평화와 자유는 결국 그들의 뜨거운 피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독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머독이 4층짜리 건물로 안내하자 세인은 기사들을 물리치고 혼자서만 움직였다.
세인은 화분과 그림들이 걸려 있는 정갈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주인이 권하지 않았는데도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술이나 담배를 하시겠습니까?”
“별로.”
“변하신 게 없으시군요.”
사람 좋게 웃어 보인 머독은 자신의 책상 위에서 서류뭉치를 빼내 왔다.
그리고 세인과 마주 앉아 그 계획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머독과 레인저들은 방벽에 계속 머물며 이곳의 관리를 맡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세인은 며칠 전에 그들에게 계획서를 보내놓았다.
머독은 그것을 들고 뭐가 진행 중이고 뭐가 아직 미흡한지 상세한 설명을 했다.
세인은 그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고 말이다.
순식간에 끝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가지며 둘은 차를 마셨다.
세인은 머독이 건네는 홍차를 거부하지 않았다.
“저는 제 상태를 보고 뭐라고 한마디 하실 줄 알았습니다.”
“뭐가 어때서? 전보다 좋아 보이는데.”
세인은 정말로 ‘뻥!’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은 머독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살쪘다고 해서 나태해졌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머독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연대감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잠시 쉬는 시간인데도 이야기는 어느덧 이곳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의 물음에 세인은 아까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강요하고픈 생각도 없고. 어차피 적 앞에서는 다 뭉치게 되어 있거든. 지금부터 모이는 사람들은 드레퓨스와 싸우기 위해 연대하는 줄 알겠지만, 실은 앞으로 나타날 강력한 몬스터와 싸우기 위해 모이고 있는 게 맞아.”
“….”
“고대에 나타났던 엄청난 괴물들이지. 그 앞에서 싸우기 위해 그들이 있는 거야.”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한다 해도, 저들의 눈에는 우리가 몬스터이기 때문에 믿어줄 리 없는 거고요?”
세인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수긍을 표시했다.
머독은 내려놓았던 계획서를 집어 들고 다시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앞으로 세인이 이곳을 어떻게 운영할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여기는 번우드 지역을 지키는 두 번째 방패이자. 북부의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한 훈련장이기도 하지. 그리고 몬스터들과 싸우기 위한 진지.’
좋은 진지를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질 좋은 무기나 고지라는 조건 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다.
그건 바로 진지를 지키는 병사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었다.
그게 애국심이든, 동지라는 연대감이든, 강압적인 방법이든지 간에….
좋은 지휘관은 병사들이 절대 도망갈 수 없는 구실을 많이 만들어 준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삶을 갈구하고,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진지를 지킬 이유를 만들어 줘야 했고, 그것과 관련된 계획이 종이에 적혀 있었다.
그걸 바라보며 머독은 전에도 만만찮은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높아진 세인의 위치를 느꼈다.
그는 지금 북부라는 태풍의 핵이 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가 머무는 곳이 곧 태풍의 눈이다.
그래서 머독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를 다시 받아줄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세인은 당연한 걸 물어왔다.
“뭐? 레인저들?”
“예.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받아주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 우린 같은 편인데? 같은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같이 앉아 있잖아. 게다가 여긴 좋은 보금자리야.”
머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사람들을 많이 거느린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한때 판단 착오를 했다.
풍요로운 환경에 처박힐 때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범한 나날들이 고문처럼 다가왔다.
시간이 느려지다가 아예 정지된 느낌이었다.
게다가 코다로와 비비안은 머독과 레인저들을 존중하면서도, 자신들의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진 않았다.
그들의 처지에서 보면, 머독은 세인에게 붙었다가 그가 추운 곳에 남겠다고 하니 이젠 지긋지긋하다며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온 존재들이었다.
머독과 레인저들이 얼마나 전력에 보탬이 되는지. 한때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든지 간에, 비비안과 코다로는 세인이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인이야 그때 레인저들을 진심으로 놓아주고 행복을 빌었지만 말이다.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이니까.
결국, 번우드에서 레인저들은 비비안과 코다로의 권력 중추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재칼이나 윌은 이미 기사단 몇 개 규모를 능가하는 정예병력을 거느렸고 충분히 대우를 받는데도 말이다.
그들이 거느리는 병사만 해도 적지 않았으며, 다크 엘프들도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합류했다.
그에 비하면 레인저와 머독은 따돌림당한다기보다는 은근히 겉도는 경향이 있었다.
이종족들은 머독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신용하지도 않았다.
그들이라고 귀가 없을 리 없었다.
레인저들의 의리에 대해 소문이 쫙 퍼진 것이다.
결국, 여기로 나온 마당에 세인에게 염치불구하고 다시 의탁하고자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절이었다.
세인 입장에서야 어차피 몬스터가 나타나면 레인저들이 안 싸울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머무르며 제 역할을 할 텐데, 굳이 자기 책임으로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거두면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세인이 개인적으로 머독을 좋아하고 존경할지는 몰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인 것이었다.
세인은 개인의 감정으로 중대사를 정하지 않았다.
그냥 놔둬도 도움이 되는 마당에 왜 굳이 품으려 하겠는가?
물론 세인 정도나 되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레인저들은 북부의 어느 나라로 가든지 간에 탐나는 전력이 될 수도 있었다.
몬스터 취급을 받지만 말이다.
‘몬스터… 취급, 그게 문제지.’
머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이더의 레인저로 복귀하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결국, 한때의 착오가 이런 미래를 만들어 냈다.
그때 글리터에 남겠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와서는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실상 북부의 절대 군주는 코다로, 비비안, 세인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엄청난 결속력은 누가 실수를 하더라도 무마해주고, 뒤에서 받쳐주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세인이 마음 놓고 앞으로 질주할 수 있는 이유도 배후가 든든하기 때문이다.
방벽이 무너지고 글리터가 위험해지면, 그는 얼마든지 번우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거기에 있는 두 군주는 그를 두 팔 벌려 환영할 테고 말이다.
그런 본진이 있다는 건 엄청난 저력이 된다.
머독과 레인저들은 이제 그들의 단단한 결속력 사이에 포함되지 못한다.
은근히 겉도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독자 노선을 고집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전투부대가 정체성이었다.
전투부대는 지원을 받아야 원활히 움직일 수 있다.
과거에야 열악한 환경에서 자급자족했다지만, 이미 든든한 집이 받쳐주는 경험을 한 상태다.
결국, 머독은 한때의 결정으로 인해 코뚜레를 한 소 신세가 되었다.
이건 그뿐만이 아니라 레인저들 모두에게 해당한다.
그들이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겠으나, 몬스터로 취급받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투신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운명은 같은 집단으로서… 세인, 비비안, 코다로라는 큰 괄호 안에 묶여 있는 것이다.
머독과 레인저들은 그런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