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 박치기 축제 (4)
드워프들은 글리터의 외곽지역에 땅을 팠다.
원래 물을 끌어와 저수지를 만들기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굵직한 수맥이 발견되는 바람에 활용도가 애매해진 곳이었다.
그런 분지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니 단단한 땅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위에 네모난 판들을 깔고 벽을 다듬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바닥으로 이어지는 길을 계단으로 만들었다.
지상에서 분지 밑바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수십 개였다.
처음에는 계단들이 나선형을 그리면서 중심으로 이어지도록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분지 안에 있는 공간을 칸막이로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크들의 노동력이라면 굳이 계단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바깥쪽부터 아래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는 경사를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지금 분지 형태는 갑자기 움푹 들어간 구멍 같았고, 안쪽에서 바깥쪽을 보면 절벽들이 사방을 가두고 있었다.
위로 하늘만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의도는 막힌 공간이 거대한 울림통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둥그런 하늘만 보이는 곳의 땅바닥 중앙에는 공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심원을 그리듯이 주위에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섰다.
구획을 나누지 않고 통일성도 없는 집들이 지어졌다.
그리고 집의 근처에는 아름다운 식물들이 옮겨 심어졌다.
화룡석을 깎아 만든 보도블록이 바닥에 가득 깔렸고, 야광석을 달아놓은 장대들이 줄을 이었다.
설계도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드워프들은 머리를 맞대고 공간활용에 의견을 모았다.
“여기는 오페라를 위한 장소고. 저기는 연극을 위한 장소야.”
“그 둘의 차이점이 뭔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지금 하는 작업도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지만, 이곳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바로 천장이었다.
원형의 분지 위에 유리 천장을 씌우자는 의견은, 솔직히 많은 드워프를 두근거리게 했다.
유리 구조물이란 사치는, 남부 정도나 가야 볼 수 있는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드워프 들도 건축 계산을 하느라 골치가 아파서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느낌은 어느덧 그들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리고 세인이 구조물에 장인들의 이름을 새길 것이라고 말하자, 점점 드워프들의 자존심도 곁들어지게 되었다.
중구난방으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도 유리 구조물만큼은 통일성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왕 만드는 거 햇빛을 모으는 유리처럼 만드는 거야. 그렇게 해서 지하수가 아닌 물이라도 따듯하게 데울 수 있게 하는 거지. 그리고 수로를 따라가게 하는 거야. 그 빛의 방향을 조절하려면 천장 아래 조정실을 매달고 홈이 파인 유리구슬을 두는 거지.”
“수로를 지상으로 내놓는다면 물레방아들이 들어가도 좋은 거 같은데?”
“수로 자체를 유리관으로 가두는 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장마 때 물이 넘쳐서 바닥이 엉망이 되는 걸 방지할 수 있지.”
“멍청아. 여긴 천장이 있잖아. 장마랑 무슨 상관이냐.”
유리 돔을 설계하다 보니 구역 전체가 다시 리모델링 되었다.
그리고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된 다른 드워프들도 눈을 빛내며 참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조각에 일가견이 있는 드워프는, 처음으로 태어나는 유리 건물 안에 자신의 작품을 놓고 싶어 했다.
그렇게 완성된 장소에 세인은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세인을 위해 완성된 그 공간은 정작 브레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브레멘 거리에 의아함을 표시했지만, 세인은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주변인들은 ‘그가 마음 내키는 대로 정했나 보다.’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브레멘 거리가 완성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이기로 한 전날이었다.
축제가 열리기 바로 전날에 세인은 그곳을 방문했다.
아직 사람들이 채우지 않은 빈 공간은 너무나도 넓게 보였다.
세인은 그를 따라온 세리스에게 물어보았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말이다.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아?”
“배웠지만, 솜씨는 장담 못 해요. 제 음식 솜씨 수준이거든요.”
“….”
그러자 세인은 아예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어지간하면 그래도 한번 연주해 보라고 권유할 법도 한데 말이다.
세리스로서는 기분 나쁜 침묵이었다.
세리스는 근처에 놓여있는 피아노에 다가갔다.
그 피아노는 번우드에서 보내온 물건이었다.
커다란 피아노 앞에 앉은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건반을 놀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화려하게 시작되는 연주는 아니었다.
천천히 그리고 빈틈을 주며 다가오는 피아노의 소리는, 그 공백 마디마디에 생각을 끼워 넣기 수월하게 했다.
찬란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닌, 한 소녀가 아무도 없는 밤에 얼어붙은 호수 위를 조용히 걸어오는 듯한 소리였다. 그것이 가슴을 두드렸는데….
그 소녀는 형편없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전의 아레이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애달프고 그리운 예전의 모습이다.
약하지만 바쁘게 손가락이 움직이면, 그 소녀가 짧은 보폭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은 충분히 여유와 시간을 주며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와, 대상을 추억에 젖게끔 만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아름답게 모습을 감추면, 그 여운에 세인의 눈빛이 흐려졌다.
연주가 끝나자 둘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완전히 떠나온 집을 생각했고, 세인은 과거의 아레이즈를 회상했다.
시간이 흐르고 석양이 유리 건물 내부를 비추었을 때까지도 둘은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그동안 서로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밤이 내리고 별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다가 곧 쏟아질 듯이 하늘을 점령했을 때, 세리스는 다시 피아노를 쳤다.
그녀의 바이올린 솜씨가 음식 솜씨와 동급이라면, 피아노 치는 솜씨는 검술과 비견될 만했다.
혼자 듣기 아까운 연주였다.
귀 기울인 청자는 유성우처럼 가슴으로 쏟아지는 피아노 소리를 음미했다.
* * *
서로 겉모습이 다른 사람들을 중간에서 엮어준 역할을 하는 것은 어린 엘프들이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어른들이 무장을 해제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교 역할을 하는 어린 엘프들은 글리터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였다.
하지만 사고뭉치이기도 했다.
어린 엘프들은 축제가 시작된다고 하자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서 사흘 전부터 환희에 들떴다.
멀리에서 그런 어린 엘프들의 들뜸을 보고 있던 아비게일 같은 경우, 늦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저 대책 없이 날뛰는 애들에게 고삐를 채워 놓지 않으면 사방이 개판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이 맞았다 쳐도 현실적으로 대책이 없다.
그게 바로 현실의 벽이란 것이다.
축제 하루 전날이 되자, 아비게일의 눈에 어린 엘프들이 미쳐 날뛰는 것이 보였다.
흥분으로 발그레해진 얼굴을 하고 시가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저 아이들이 설마 몰래 약을 하는 건 아니겠지?”
창틀에 기댄 채 그런 소리를 내뱉는 아비게일을, 크릭이 뒤에서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비게일은 그 시선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물론 축제 때 사람들이 기쁘게 놀면 참 좋겠지만, 그래도 정도란 걸 지켰으면 했다.
그게 아비게일의 속마음이었다.
어린 엘프들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좌충우돌 치고받고 다녔다.
아무 곳이나 높은 곳이 눈에 띄면 올라가 춤을 추었으며 꽃가루를 사방에 뿌렸다.
그리고 행진을 하면서 춤을 추었는데 놀랍게도 무반주였다.
그런 걸 보면 엘프들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 안에 음악 몇 개는 저장하고 태어나나 보다.
글리터에 정착한 지 좀 되는 사람들이야 자주 보던 광경이었고 그러려니 했지만, 새로 온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들뜬 엘프들을 구경했다.
「우리들을 따라 해봐요. 북치기 박치기~.」
“북 치기 박치기~.”
「우리들을 따라 해봐요~. 북치기 박치기~.」
“북 치기 박치기!!”
북 치기라는 말이 나오면 엘프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신들의 통통한 뺨을 ‘짝!’하고 때렸다.
그때 눈을 질끈 감는데, 그게 좀 귀여웠다.
문제는 박치기였다.
박치기라는 노래가 나오면 엘프들은 둥근 이마를 아무 데나 들이박았다.
행인의 엉덩이일 때도 있었고, 엘프들끼리 서로 부딪혀 뒤로 넘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아이들이 깔깔거리면서 박장대소했다.
그 귀여운 짱구 이마가 더 큰 불상사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길을 가득 메운 엘프들이 그러고 다니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어떤 노새는 질겅질겅 풀을 씹다가 등에 올라탄 엘프 때문에 기겁하고, 사방으로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 등에 탄 엘프는 자지러질 듯이 웃었고 말이다.
처음에는 무반주였지만 악사들이 거리로 흘러나와 악기를 켜기 시작했다.
엘프들은 난간 위에 올라갔고, 분수대를 점령했다.
작게 만든 운하 속으로 뛰어들어 물보라를 일으켰으며, 행인에게 물을 끼얹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글리터에 이제 정착한 사람들은 ‘저 어린 엘프들이 술에 취했거니.’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었다.
「북치기 박치기 북치기 박치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콤함에 춤을 춰요~.
쇼퐁 쇼퐁 쇼퐁 크림~.
북치가 박치기
맛나는 쇼퐁 크림~.
단맛에 춤을 춰요~.」
해맑은 표정으로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리던 엘프들이, 기어코 집 안에 있는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들의 손을 잡고 달려간 엘프들은 아이들을 행진에 합류시켰다.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지고 노랫소리가 거리를 휘감았다.
말을 할 수 없는 엘프들은 동무의 노래에 ‘야야!’를 외치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오늘이 마치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듯 변해갈 때, 아비게일은 내일이라며 소리를 쳤다.
“이러지 마! 내일이라고! 내일이란 말이야! 벌써 이러면 안 돼!”
하지만 분위기상으로는 오늘부터가 축제였다.
집마다 창문을 열고 악기를 연주했다.
내일 창밖에 걸릴 예정이었던 램프들이 집 밖을 여러 가지 색깔로 밝혔다.
‘날짜를 내일로 착각했나?’라고 생각한 노점상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한 엘프는 야외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의 테이블 위에 뛰어 올라가더니 막춤을 추었다.
작은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가 가슴으로 모으며 어깨를 덩실거리는 경쾌한 춤이었다.
그걸 말리려고 손을 뻗는데, 엘프가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박치기!”
그리고 머리로 남자의 이마를 들이박아 버렸다.
남자가 품에 뛰어든 엘프를 안고서 의자째 뒤로 넘어가는데, 그 광경을 본 엘프들이 주먹을 쥔 양팔을 위로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박치기!!”
깔깔거리는 소리와 함께 엘프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마구 뛰어들었다.
이게 어떻게 보자면 굉장히 유쾌한 장면이었고, 또 어떻게 보자면 산만함이 극에 다른 장면이었다.
물론 아비게일은 후자로 받아들였다.
아비게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엘프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연신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정신 사나워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정신없는 녀석들이 자신이 만든 거리의 수혜자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뒤에서 맥주를 마시던 크릭은, ‘그것 봐 내가 산만하기 그지없는 놈들이라고 그랬잖아.’를 연발했다.
그리고 위로랍시고 몇 마디를 덧붙인다.
“그래도 계속 살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완전히는 아니지만 좀 익숙해진다고.”
“그게 더 무섭네요.”
떠들썩한 무리에서 벗어난 엘프 한 명이 눈을 감고 마구 뛰다가 한 남자와 부딪혔다.
그 남자는 자신의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은 엘프를 떼어냈다.
황금빛 곱슬머리를 가진 엘프는 ‘헤헤헤’하고 웃었다.
티 없는 그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세인이었다. 그리고 엘프를 살짝 밀치면서도, 어깨를 잡아주며 상대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했다.
“야야!”
엘프가 동글동글한 얼굴로 세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친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어린 엘프는 알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야야!”
그리고 부리나케 뛰어가 버렸다.
“언제봐도 참 활기찬 녀석들이군요.”
세인의 뒤를 따라오던 맥이 양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했다.
맥 외에도 더이스, 힐다, 행크 같은 기사들이 세인의 뒤에 포진하고 있었다.
엘프가 달려와서 세인의 몸에 부딪힐 때, 어린 엘프를 저지하지 않았다.
세인이 손을 들어 올려서 엘프를 놔두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병사들까지 포함해서 평상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를 걷고 있던 중이다.
다른 사람들은 세인을 호위하느라 주위를 끊임없이 두리번거렸다.
기사들은 세인이 엘프를 기꺼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만 봐도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 녀석들이 있으니, 도시에 활기가 도는군.”
그런 해석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차마 정신없어 죽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냥 헛기침하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행크가 눈짓을 하자 힐다가 앞장서면서 길을 텄다.
그런데 힐다에게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쪽이 아니야.”
“예?”
힐다는 반문하면서 무심코 물음을 던진 자신의 잘못을 탓했다.
하지만 세인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검지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야 해.”
사람들은 세인이 아무렇게나 걷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걸 알고 좀 당황했다.
몇몇은 세인이 도서관 쪽으로 갈 줄 알고 있었다.
물론 힐다도 그중 하나였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간 세인은, 선두에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길 위에는 꽃향기들이 가득했다.
내일 축제의 아침을 위해 미리 걸어놓은 꽃들이었다.
낮에 햇볕을 잔뜩 쬐게 해서 빛을 뿜어내는 꽃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목에 두른 머플러로 코 밑까지 가린 세인은 천천히 걸으며 거리를 감상했다.
아비게일의 거리에 이르자 기사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힐다만 빼놓고 다들 기분이 안 좋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한 지 오래되지도 않은 녀석이, 버젓이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니.
평소 목숨 걸고 싸운 쪽은 이쪽인데 말이다.
물론 이 도시에 아비게일의 정성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을 딴 거리를 보고 있자니 배알이 뒤틀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더이스가 볼멘소리를 했다.
“아비게일이 열심히 일하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세인이 짧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믿지 않아.”
아비게일은 이 도시에 정성을 다해 몰입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는 끝까지 배신할 인물이 아니었다.
질투심에 농담처럼 말을 내뱉은 더이스도, 사실은 그가 딴마음을 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대화도 기사가 주군에게 하는 진지한 조언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외출에서 일어난 잡담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세인은 완전히 아비게일을 믿진 않았다.
그에게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면서 어떤 억압을 가하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믿지도 않는 것이 세인의 마음이다.
“더이스 역시나 사악하군. 이런 외출에도 뒤에서 험담이라니. 역시나 음흉한 더이스.”
행크는 같이 아비게일을 질투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흉을 보았다.
더이스는 보통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흉보는 게 정석 아니냐고 짜증을 냈고, 행크는 그건 비겁하다고 투덜거렸다.
비겁 이전에 흉을 보는 게 문제라는 생각은 서로 귀찮아서 안 하는가 보다.
작은 아치형의 다리 위에서, 세인은 아래에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었다.
돌난간에 손을 얹고 밑을 내려다보니 초승달이 검은 수면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난간에 허리를 댄 세인은 다리 위에서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동행인들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약간 떨어져 있었고 말이다.
세인의 눈앞에 보이는 다리의 난간 너머.
길게 이어지는 검은 물 위에서, 도시의 불빛들이 수면 위에 앉아 잘게 부서졌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세인의 검은 머리카락을 실컷 흩어 놓았다.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의 여유를 즐겼다.
멀리에서는 엘프들과 어울리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마차 바퀴가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흥정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전투의 긴장감이 아니라 삶의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같은 긴장감이라도 목적이 다르며 머금은 여유가 다르다.
눈을 깜박이며 내키는 대로 시간을 보낸 그는 손짓으로 맥을 불렀다.
근처에 서 있던 맥이 다가오자 세인이 말했다.
“배가 출출하군. 이 근처에서 끼니를 해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