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 박치기 축제 (3)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램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리스와 세인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책을 보기 시작했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것도 잠시.
문득 입을 연 것은 세리스였다.
“생각해보면 소설은 너무 비현실적인 거 같아요.”
“갑자기 왜?”
“소설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면 꼭 발단이나 인상적인 사건이 있잖아요. 하지만 현실에서 중요한 일이 이루어지는 전개는 순간이 아닐 때도 많고, 대개는 천천히 그리고 소리소문없이 이루어지잖아요.”
세인은 그녀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인데도 빛으로 가득 찬 도시가 거기에 있었다.
언제 저렇게 발전한 것일까?
저걸 보니 사람들은 방해만 없다면 언제든지 발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좋은 점 중 하나다.
언제나 의욕적이었고 능동적이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책에 주지 않고 앞에 앉아 있는 세리스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작고 하얀 얼굴에 보석처럼 빛나는 파란 눈은 충분히 남자들의 이상향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진 능력도 엄청나다.
흠이라고는 하나 없는 완전무결한 여자처럼 보였다.
그녀는 고대의 여왕을 존경하며 우러러보고 있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이 세상에서 또 다른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녀는 또 다른 라이트닝 블러드였다.
“교류가 시작되었으니 많은 물건이 이곳에 들어올 거야. 그중에는 네가 좋아하는 검제에 대한 책도 구할 수 있겠지.”
“….”
“세리스. 너에게는 내가 사적으로 소중한 사람인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지와 엄지로 자신의 미간을 잡았다.
“그런 이야기는 보통은 이렇게 갑자기 던지는 게 아니라, 적어도 화원 정도에서 물어봐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가 세인님에게 있어 중요한 일을 갑자기 지나가듯이 묻지 않듯이요.”
‘하얀 협죽도도 모자라, 검은 협죽도까지 들어준 남자에게 너무하는군.’
세인은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거참 미안하게 되었네.”
하지만 그는 곧 팔짱을 스스로 풀었다.
팔짱을 낀다는 게 방어적이고 거리감을 두는 자세로 보일까 봐 그만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세리스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최근만 봐도 그래요,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대체 제가 왜 불침번을 도맡아 하고 있겠어요? 덕분에 더이스 경은 불침번 단골 신세에서 벗어나 집에 충실할 수 있다고, 입이 귀에 걸렸어요.”
“….”
“전 더이스 경의 부인에게 담배까지 선물 받았다고요. 감사의 의미로.”
잠깐.
세인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배 피워?”
세리스는 정색을 했다.
“아뇨.”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평소 검을 잡는 손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 용기 앞에서 세인은 고민해야만 했다.
그 고민의 실체는 세리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힐까에 대한 것이었다.
세리스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능력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는 세리스를 그야말로 미친 듯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게 바로 그를 주저하게 했다.
여기서 그녀의 손을 잡는다면 세리스를 농락하는 게 될까?
차라리 처음부터 거절한다면 모를까.
나중에 그녀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상처를 받는 건 그녀일 것이다.
그 주저함을 느낀 세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름이 다 떨어져 가고 있어요.”
그 말에 세인은 램프로 시선을 옮겼다.
아닌 게 아니라 램프의 기름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세인은 램프가 꺼질 때까지 그녀의 손을 잡지 못했다.
어둠 속에 잠긴 방 안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둘은 그걸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세리스가 물었다.
“마음에 담아두신 다른 분이 있나요?”
세인은 그때 엘라이저를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녀는 세리스보다 만난 시간이 짧았다.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며, 어떤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용기 있는 고백 앞에서 엘라이저를 말한다면, 그건 성실하지 못한 변명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했다.
“아니.”
세리스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잘 정리해서 세인에게 전달했다.
“당신의 운명에 상대가 제가 아니라도 좋아요. 저를 아껴주시지 않는다 해도 좋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마음 안에 들어 있지 않다면, 제 손을 잡아줄 수 있잖아요. 왜 제가 무안함을 무릅쓰고 손을 내미는지 알아요?”
“모르겠어.”
“제 운명의 상대는 당신이라는 확신이 있거든요. 그래서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의 당신에게는 제가 꿈이 아니겠지만. 제 곁에 당신이 함께한다면 저는 꿈을 이루는 거예요. 이런 제가 너무 이기적인가요?”
“아까 협죽도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이기적이었어. 그런 여자야 넌.”
그러자 어두운 공간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진 웃음이다.
그리고 그 웃음이 점점 잦아들 때, 세인은 어둠 속에서 확신에 찬 그녀의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도 상대에게 고백할 때 거절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상처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건 여자도 똑같았다.
고통의 늪을 감수하고 마음을 내보이는 행동에, 그는 진지하게 임하고 싶었다.
‘그녀는 아름다워, 그리고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남자로서 나는 그녀를 품고 싶다. 남자로서는 그래.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녀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어쩌면 세리스에 대한 감정조차 그가 책임질 수 없는 수많은 것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누구나 책임지길 바라고 책임져야 한다며 말하겠지만.
때론 책임지는 시늉을 하려 들겠지만.
결국, 그럴 수 없는 것 중 하나.
사람은 살면서 가정을 책임지려 하고, 주위 사람들을 책임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좌절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미 알 것이다.
정말 책임져주고 싶어도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에 본인 의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다.
운명이라는 태풍이 불어온다면, 그 안에서 그녀의 손을 잡는 게 올바른 행동인가?
이런 순간에도, 어둠 속에서 세리스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그녀가 문득, 엄청나게 긴 시간을 인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인은 자신이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 정작 조마조마하고 견디기 힘든 시간을 버티고 있는 그녀를 깨달았다.
‘지금 이렇게 망설이는 시간은 그녀에게 너무나 가혹해. 지금 그녀에게 있어 이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야.’
결국, 세인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보드라운 그녀의 손가락이 기다렸다는 듯이 깍지를 껴왔다.
드디어 세리스는 깃털 같은 꿈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한때 그녀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몰랐고, 대의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수많은 꿈과 가능성 중, 세인의 곁에 머무는 것을 선택해 버렸다.
세인과 세리스는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서로의 가슴이 밀착되지도 않았고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손만 내밀어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손을 잡음으로써 하나의 경계선을 넘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간은 그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갑자기 들려오는 발소리에 의해 깨졌다.
그리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뒤따라 온다.
“나도 늙었어. 깜박깜박한단 말이야. 기름 채우는 걸 잊다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마플이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타난 그녀는 독서실 쪽의 공기가 따듯한 것을 피부로 느끼고 의아해했다.
“어?”
그러면서 손에 든 램프를 들어 올리려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둠 속에서 두 인영이 앉아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꺅! 꺄아악! 뭐야! 뭐야! 유령이냐!? 꺄아악!”
기겁하며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지르는 마플에게 세인이 인상을 쓰며 외쳤다.
“나야! 나라고. 좀 진정해.”
“세… 세인님? 아니 왜 거기서 그러고 계세요! 십 년 감수했네!”
그제야 마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램프를 들어 올려 보였다.
그 불빛에 따라 독서실 안이 비쳤다.
마플의 눈에 보인 것은 탁자에 마주 앉아 손을 잡고 있는 세인과 세리스였다.
밤중에 불을 꺼놓고 앉아 있는 사람이 세인이란 것도 의외였지만, 누군가와 같이 있었다는 게 참 의미심장했다.
“뭐…. 뭐에요? 밀회? 그런데 옷은 다 걸치고 계시는데?”
“마플. 발언이 너무 세잖아.”
무안한 듯 고개를 돌리는 세리스 앞에서 일어난 세인이 바닥에 나뒹구는 기름통을 주우려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런 건 하녀들에게 시키지. 왜 직접 올라오는 거야. 좀 편하게 살라고.”
그러나 마플은 동그랗게 뜬 눈을 유지하며 세인과 세리스를 번갈아 보기 바빴다.
어쩌면 그녀는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인은 그것을 말릴 수 없었다.
상상은 자유니까.
세인은 기름통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돌아섰다.
그러면서 두 여자에게 말했다.
“난 이제 쉬어야겠어.”
* * *
“더이스. 이건 자네가 말해버려야 해. 자네라고.”
“너밖에 없다, 더이스. 그나마 우리 기사 중에서 말주변이 제일 좋은 게 너 아니냐. 이럴 때 실력을 발휘해 보라고.”
어느 날 더이스는 행크와 크릭의 부추김을 잔뜩 받았다.
그래서 정말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 긴 얼굴에 가득 수심을 담고 말이다.
“어떻게 하면 허락을 맡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허락 안 해주실 거 같은데.”
더이스는 계단 위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연신 발을 헛디디고 있었다.
마플이 그걸 보고 혀를 차기도 수십번.
드디어 용기를 낸 더이스는 세인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방 안의 세인은 한창 보고서와 씨름 중이었다.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깨에 잔뜩 힘을 준 더이스가 내세운 방법은 고해성사와도 같은 정공법이었다.
그는 잔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오히려 속마음을 털어놓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정말 이 자리에 크릭과 행크가 있었다면 한숨을 내쉬었을 정도로 멍청한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저희도 아비게일처럼 이름을 딴 거리를 가지고 싶은데, 그게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허락 안 해줄 것 같으니까요.”
세인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다시 대꾸했다.
“그래서?”
“왜 불가능할까? 허락을 맡기 힘들까를 제가 생각해보니, 일단 세인님의 이름을 딴 거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인 겁니다. 그래서 일단 세인님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야, 나중에 저희도 은근슬쩍 이름 넣기를 추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세인님의 이름을 딴 거리를 지정하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글리터 전체가 세인님의 것인데, 세인님이 지정한 거리조차 없다뇨! 아비게일조차 자기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데 말입니다.”
알듯 모를 듯 난해한 논리였지만, 어쨌든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
거절이 떨어질 줄 알았던 더이스는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거리 이름은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 정했으면 좋겠어. 아 참 더이스.”
“예? 예!”
“축제에 대해서도 생각이 있나?”
“축제요?”
더이스는 얼빠진 얼굴을 수습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 * *
그날 오후 마플은 하얀 천과 가위를 가지고 방문했다.
그리고 발코니로 나가 세인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그러면서도 투덜거림을 잊지 않았다.
“이제 주변에 믿을 사람도 많지 않아요?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면도와 이발을 해야겠어요? 장시간 서 있는 것도 허리가 아프다고요.”
“그래도 마플만한 사람이 없어.”
마플은 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좋으면서도 계속 투덜거렸다.
세인의 이발과 면도가 끝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턱을 쓰다듬던 세인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마플 차례야.”
“예?”
“내가 깎아주고 싶어서. 이젠 그래도 되잖아. 여기는 아레이즈가 아니고,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까.”
“하지만….”
당황하는 그녀 앞에서 세인의 손이 의자를 두드렸다.
어서 앉으라는 표시였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거야. 죽은 다음에 장례식을 호화롭게 치러도 의미 없잖아. 소중한 사람에게는 살아있을 때 뭔가 해주고 싶어.”
“아니 갑자기 죽는다는 이야기를 왜 해요?”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야. 입에 익숙해져서 그래.”
“뭐 좋아요. 겸사겸사 밤에 밀회를 나누는 금발의 여기사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보자고요.”
“….”
새파란 하늘이 선물처럼 내놓는 따뜻한 햇볕 아래, 세인은 조심스럽게 마플의 머리에 가위를 가져다 댔다.
처음에는 제대로 깎는 게 아니라, 가져다 대며 조금씩 정돈한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조심스러움조차 결국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그의 행동이 끝나고 자신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댄 마플은, 풋 하고 웃어 보였다.
“그동안 전혀 보지 못한 머리를 만들어 놓은 거 같은데요?”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그래도 이런 호사를 누려보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세인은 지금 분위기가 괜찮으니 마플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플. 선물이 있어.”
“선물요?”
“드레스야. 축제날 당신이 그걸 입어주었으면 좋겠어.”
세인은 ‘새로운 땅에서 이제야 비로소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그 여유를 만끽하는 것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어떤 제도를 만들어도, 보통은 그 제도가 완성되기 전에 그것을 누릴 사람들의 일생은 끝나 버린다.
그리고 제도가 완벽해지면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다.
그러면 다시 새 시대에 맞춰 제도를 바꿔야 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안에 정작 중요한 자기 것은 드물었다.
가난 속에서 논과 밭을 일구다가, 몬스터의 위협에 노출된다.
그러다가 겨우 숨통이 트이는가 싶으면 다시 지배계층에게 곤욕을 당한다.
그리고 그들의 명령에 전장으로 내몰려 싸우다 죽는 일생.
가족을 잃는 삶.
사람들은 북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바쁜지 글자를 배울 시간도 없었고, 음악을 즐길 여유도 없었다.
모두의 시간은 짧다.
그 안에서 추구하던 완성은, 정작 당사자들이 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완성된 것을 누려야 할 후대는, 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완성을 찾겠지.
지금 드레퓨스의 정복 전쟁이 의미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정복욕 때문에 피를 흘리는 자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얼마나 큰 괴로움이 강산을 뒤덮을까.
설령 정복이 성공한다 해도, 바이칼과 반은 그것을 다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대륙은 넓어서 작정하고 여행하고자 해도 전부를 보고 맛볼 수는 없을 테니까.
그가 세상을 정복했다는 쾌감은, 결국 실체에서 벗어난 착각이었다.
그가 어떤 대제국을 세운들 그건 다른 약소국의 혈채로 받아낸 결과였다.
전쟁을 일삼는 드레퓨스보다 남쪽의 나라들, 자리보전하며 국민들과 함께 행복을 누리는 바이테스 등이 더 현명한 이유다.
깃발을 든 자는 산의 정상을 가리키면서 저기를 정복하자고 외치지만, 거기는 비좁아서 여러 사람이 들어설 수 없었다.
정복했다는 쾌감은 있었지만, 그 과정은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지 못했다.
깃발을 들고 외치기 전에 한 번만 주변을 돌아보면, 거긴 이미 많은 사람이 앉아 쉴 수 있는 평야였다.
차라리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멀리 구름을 뚫고 서 있는 산을 보며 소풍을 즐기면 된다.
그런 것만 해도, 인생이란 소풍은 짧아서 금방 끝나곤 하는 것이다.
“우리도 가끔은 남부처럼 즐겨 보자고.”
세인이 그렇게 말하며 앉아 있는 마플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