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51화 (151/307)

# 151

& 박치기 축제 (2)

아비게일은 세인이 귀환한다고 하자 고민이 많았다.

뭔가 나가서 환영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니 전처럼 세인이 싫어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자니 그들이 세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니질 않은가?

섬세한 그는 자주 체했고 설사를 했다.

보다 못한 크릭이 불러다 놓고 대체 왜 그러냐고 묻자 아비게일은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크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응? 그거? 오히려 그런 번잡한 건 싫어할걸.”

“그럴까요?”

“내가 보니까 그 사람은 쓸데없이 법석 떠는 거라든가. 요란하게 환영하고 이런 걸 싫어하는 사람이야. 게다가 환영식 하는 데엔 물자가 많이 들잖아.”

아비게일은 듣다 보니 설득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보니까 놀랄 정도로 검소하게 살더구먼. 이 추운 곳에서 대량으로 꽃을 구하기도 쉽진 않고 말이야. 차라리 그런 힘이 있으면, 전투 중에 다치거나 죽은 이들을 위한 보상으로 돌려봐. 그게 나을걸.”

울프크릭의 말은 세인이 생각하는 바와 다르지 않았다.

세인은 아주 소박하다 못해 존재감이 희미한 환영식을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데 그건 입 밖으로 내서 한 소리가 아니고 속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이렇게 적절하게 조치하느라 수고했다고 아비게일의 어깨를 쳐줄 것도 아니었다.

왜냐면 정작 수고한 쪽은 나가서 전투를 하고 온 세인이기 때문이다.

아비게일은 세인이 괜찮게 생각하고 지나갔나보다 했다. 그리고 안심했는데 정작 불평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열심히 싸우고 온 사람들을 환영하지도 않고, 게다가 글리터의 주인이 돌아왔는데 이런 취급은 대체 뭡니까?”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어. 권력의 단맛을 보더니 아주 방자해졌군. 그래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이거지.”

더이스와 행크가 옆에서 정신없이 쪼아대자 현기증을 느끼는 아비게일이었다.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권력의 단맛을 본 적도 없는 아비게일을 더이스와 행크가 돌려가며 갈궈댔다.

그 모습을 지나가면서 본 크릭은 혀를 찼다.

그리고 그는 누구의 조언이 이런 발단을 만들어 냈는지 잊은 채 세인을 찾아갔다.

글리터에 사는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대체로 만족했다.

난민이 아닌 아레이즈에서부터 세인을 따라온 주민이 사는 곳은 핵심지역이었다.

거긴 너무 정숙하고 고요한 그들 때문에 드워프들의 성향과는 맞지 않았다.

그런데 외부로 나오면 대낮에도 술에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틈만 나면 광산에 가서 땀을 뺄 수도 있었고, 광석 연구 때문에 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세인은 모든 걸 양보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 세인을 찾아간 크릭이 하려는 부탁은 들어주기 힘든 요구일 수도 있었다.

그날 세인과 만난 크릭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되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드워프 장로들이 세인을 찾아갔다.

“이번에 많은 수의 드워프들이 여기에 정착하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봐온 대로라면 서로 도우며 앞으로도 살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러면서 글리터 근처에 드워프들이 만들 보금자리 이야기를 꺼냈다.

누구라도 사는 곳 근처에 다른 세력의 집이 만들어진다고 하면 신경 쓰일 일이었지만 세인은 좋게 받아들였다.

“당신들은 이미 우리의 이웃이고, 좋은 집을 만들고 싶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았다.

작은 거래라고 해도 상대를 이용할 생각만 하지는 않았다.

상생을 지향했고, 그게 힘들다면 오히려 양보하는 쪽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은 고립된 사고방식과 영토가 긴 번영엔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같은 편이라면 많을수록 좋았다.

드워프들은 세인의 무리가 몬스터라서 멀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함께 해보니 서로의 신뢰가 쌓여 좀 더 긴밀한 교류를 원한다는 것이다.

세인이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한편 드워프들은 한때 같이 싸운 전우 입장에서만이 아닌, 평소 세인이 유지하는 그의 기본자세에 대해서 굉장한 호감을 품었다.

“그는 작은 계약을 할 때조차 정말로 왕답다고. 장사치같이 굴지 않아.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면서, 항상 작은 이익이라도 챙기려고 하는 놈들은 정말 밥맛이야. 화통함을 잃지 않는 자가 훗날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거야.”

드워프들은 그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다크 엘프의 뒷담화를 하는 드워프가 있었고 말이다.

그렇다고 세인이 언제나 대하기 쉬운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꼭 필요하다 싶어서 찾아간 문제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가 많았다.

아비게일은 어느 날 세인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당연히 동상이었다.

“거리 곳곳마다 거룩하고 거대한 동상을 만드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곳의 주인이 누군지는 알아야죠. 얼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동상뿐만 아니라 초상화도 좋으니 당장 조각가와 화가를 동원해서 일을 벌이겠습니다!”

아비게일은 이번에야말로 칭찬받겠다는 욕심에 거룩함과 대단함, 그리고 크기를 재차 강조했다.

턱을 괴고 있던 세인은 인상을 쓰며 이렇게 말했고 말이다.

“이봐 아비게일.”

“예?”

“난 거룩하지 않아.”

“….”

“요즘 신전 다니나?”

“예? 아니 그게, 그러니까.”

“됐어. 그들도 그리거나 만들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우선순위 밖의 일에 힘쓰지 마. 내 동상을 세운다고 해서 그들이 뭔가 행복해질 일은 없어.”

그렇게 대답하고 서류를 뒤적이는 세인 앞에서 아비게일은 잠시 석고상이 되었다.

전투를 마치고 글리터로 돌아온 세인은 내치에 신경을 썼다.

오크들을 부려서 성을 더 개조하고 증축하게 하는 한편, 채석장의 일도 더 넓게 추진했다.

“엘프들을 더 지원해야겠다.”

“그들에게는 이미 과할 정도로 많은 인력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탑 가지고는 부족해. 물심양면으로 더 도와줘야겠어.”

외성 밖으로 화룡석들이 쌓이고, 엘프들이 가져다준 식물 외에도 열을 발산하는 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리고 천이나 유리로 구역을 뒤집어씌웠다.

점점 밀밭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트라이얼 워커, 즉 법관들이 이동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정표 역할의 탑도 대폭 늘렸다.

그리고 마을들을 돌아다닌 후 지친 엘프들이 쉴 수 있는 휴식처도 평야 곳곳에 세우게 했다.

정찰자들이 돌아다니는 망루에선 기본적으로 트라이얼 워커인 엘프들에게 협조하게끔 지침을 내렸다.

과거 세인은 글리터에서 간단한 법을 내세우고, 그걸 지키라 명령한 바가 있었다.

아무리 간단한 법이라고 해도 막상 실생활에 적용되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날 수 있었다. 그래서 공표 후 추이를 지켜보는 상태였다.

수정을 거친 법안은 다시 사람들에게 내려갔고, 거기에 익숙해지자 그는 형벌을 늘렸다.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속한 사회가 정의롭게 돌아가고 있다는 믿음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

진실을 판단하는 엘프들의 능력을 더 신뢰하여, 엄히 죄인을 다스리려 한 것이다.

법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사각지대가 있었다.

그래서 진실을 판가름한다고 해서 모든 판결이 좋은 방향으로 끝난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법은 도덕과 철학, 인간의 존엄과 가치관, 이성과 감성의 문제다.

인간의 삶에서 비롯되어지는 게 분쟁이었고, 그걸 수습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분쟁의 해결을 통해 지향점을 제시하는 최종형태가 바로 법이었다

안락사 문제, 선의의 도움을 어디까지 규정할지에 대한 문제, 하다못해 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 등등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세인은 여러 가지 조치를 하면서도 자신이 완벽한 제도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열심히 만든 규칙에도 분명 문제가 있을 테고, 그 문제점을 자각하고 수정되기도 전에 인간들의 일생이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해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실수를 줄이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최소한의 잣대를 만들고 엘프들이 그 잣대를 휘두르게 했다.

글리터의 주변을 정리한 그는 북부에 있는 나라들과 외교를 시작했다.

외교관들은 처음으로 글리터에 도착한 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난민 반환요구를 먼저 하기보다는 광물의 채석권 경쟁에 열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 큰 자괴감으로 생각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사는 자국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최악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괴감을 덜 수 있었다.

외교적인 첫 관계라는 것은 댄스처럼 첫 스텝을 잘 밟아나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인은 맥을 대리자로 내세워 교섭하게 했다.

마중 나온 맥을 통해 세인의 의도를 짐작한 외교관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그걸 원하신다고요? 다른 요구를 하실 줄 알았는데요?”

드레퓨스를 대비하는 오늘날의 자세로서 당장 군사훈련을 같이할 수는 없다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요구였다.

그동안 인간의 손길이 지하에 미치지 못했던 광대한 지역에는 엄청난 자원이 매장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금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일단 국가적인 차원에서 거래를 걸고, 다른 거래 루트는 상인들이 알아서 뚫을 것이다.

그런데 첫 포석치고는 세인이 이상한 것을 요구해 왔다.

그에게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말이다.

돌아간 외교관들을 통해 세인의 요구사항을 들은 왕들은 좀 곤혹스러워했다.

듣자 하니 골탕을 먹이려고 이러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의도를 알 수 없음이었다.

난감해하는 사람 중에는 트리엔의 왕도 섞여 있었다.

“이 자가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의도를 알 수 없군그래.”

왕좌에 앉아 중얼거리는 그의 근처에는 미스틸 테인이 서 있었다.

이 기사는 이제 왕의 인정을 받아 트리엔의 실세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왕이 왕국의 대소사를 그와 의논했다.

그리고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래서 글리터에 대한 선입견을 많이 희석할 수 있었다.

“미스틸 테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소한 그분이 캐시오처럼 실험을 위해서 이러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니겠지요.”

미스틸 테인은 나라의 중대사에 깊게 관여하는 것이 꺼려져 아주 짧은 조언을 했다.

사실 이런 대답은 그가 아닌 외교관이 해줘야 하는 게 맞았다.

어쨌든 미스틸 테인의 조언을 받은 왕은 장고에 들어갔다.

세인이 첫 교류로 요구한 것은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보통 사람도 살기 힘든 게 이 세상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가 더 힘들었는데, 거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였다.

인간애가 남아 있는 땅이라 해도, 급박한 순간에 무기를 들 수 없는 사람들이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몬스터들이 설칠 때에도 그랬지만, 사라진 다음에도 그들을 짐짝처럼 여기는 세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세인이 그들의 이주를 요구한 것이다.

“그들만 괜찮다면 보내달라니….”

트리엔의 왕은 주름진 노안을 찌푸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일부는 그들을 짐처럼 여기지만, 결국 나라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 일이다.

트리엔의 왕이 노망나지 않았다면 결코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냉정히 생각하기로 했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병력으로 써먹기도 힘들었다.

그런 사람들이 사라져 준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강제적으로 억류하겠다는 것도 아니니까. 허락한다.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인솔하겠는가?”

그러자 미스틸 테인이 앞으로 나섰다.

왕은 기꺼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말이다.

트리엔의 신하들은 글리터에 대해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미스틸 테인을 시기해 그가 없을 때 험담도 꺼냈지만, 왕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스틸 테인은 어려운 일에 적극적이었고, 귀족으로서 솔선수범하고 있었다.

백 마디 말로만 떠드는 신하들보다도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그가 왕의 믿음을 사는 것은 당연했다.

*  *  *

세인은 어느 날 밤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어두운 자신의 방에서 눈을 깜박이던 그는 창문이 열려 있고, 커튼이 나부끼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들더니 갑자기 뺨을 후려갈겼다.

짝!

얼얼함을 느끼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꿈은 아니군.”

이따금 예고도 없이 찾아와 이상한 꿈으로 인도하는 존재들 때문에 이런 방법도 꽤 괜찮았다.

문제는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 물병을 찾았지만, 물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방문을 열고 복도를 걸었다.

마플을 찾는다면 물은 물론이고 야식까지 금방 받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야밤에 그녀의 단잠을 깨우긴 싫었다.

결국, 세인은 복도를 걷다가 불이 켜져 있는 곳을 발견했다.

불이 켜진 곳은 도서실이었고 텅 빈 책꽂이가 육각형의 벽으로 버티고 서있는 곳이었다.

그 중앙에는 누군가가 책상에 앉아 램프 불빛에 의지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왜소한 어깨를 가진 그녀는 바로 세리스였다.

세리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곤 세인을 발견했다.

“여기는 웬일이세요?”

“그게 내 집에서 내게 할 말이야?”

그녀는 별장 비슷한 곳에서 산다.

성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불침번인 것 같았다.

병사들은 성의 일 층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고.

세리스는 가까이 다가와 물병을 집어 드는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물병을 들고 꿀꺽꿀꺽 소리가 나도록 물을 마셨다.

해갈과 함께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낀 세인은 그녀가 읽고 있던 책에 시선을 주었다.

여기가 독서실이지만 책은 거의 없었으므로, 그녀의 별장에서 가져온 책임이 분명했다.

작고 회색인 표지에 하얀 꽃이 그려진 책이었다.

“제목이 뭐야?”

“하얀 협죽도요.”

“그 살벌한 꽃이 왜?”

잠도 달아났겠다.

세인은 그녀 앞에 있던 의자를 움직여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밤을 새우기 위해 가져온 책들을 뒤적여 보았다.

전부가 휴대가 쉬운 소책자였다.

세리스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하얀 귀 뒤로 넘기면서 다시 책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줄거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 남자가 저주를 받아서 영원히 살게 돼요. 그래서 피도 하얀색의 독성 물질로 바뀌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사는 이야기에요.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 때문에 시비에 휘말리게 돼요.”

“음….”

“이게 쓰인 당시에는 귀족의 피가 파랗다고 믿었거든요. 귀족이 직접 피 흘릴 일도 없었고, 하얀 피부에 보이는 혈관의 색을 그대로 믿을 때라서요. 주인공이 귀족 신분 행세를 하는데, 정체를 증명하려면 피를 보이라고 거기에서 말해요. 그래서….”

세인은 감명 깊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충 그녀의 말을 걸러서 들었다.

하얀 협죽도는 결국 비극적인 결말이었는데, 그런 건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귀족이 아닌 게 탄로 나면 여인에게도 피해가 가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독약을 마시고 피를 검은색으로 변하게 해서 보여준 거예요. 그걸 본 사람들은 독에 변색하였다고 믿었으니, 끝까지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하게 되죠.”

“음.”

“연인은 숨져가는 그를 안고 슬퍼하고요. 참 묘하지 않아요? 그는 영원히 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결국 상황에 의해 자살한 거예요. 그리고 몸 전체의 혈관에 독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독이 위장과 내부를 불태워 죽인 거예요.”

그의 입장에서는 독으로 이루어진 남자가 다른 독에 당할 수 있다는 게 좀 이상했지만, 그런 건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군. 재미있는 이야기네. 이런 야심한 밤에 듣기 좋은 이야기야.”

대강 하고 멈추라는 의미였지만 세리스는 자신의 감상까지 말했다.

“그를 죽인 건 그의 속에 넘치던 독이 아니라 외부의 독이었어요. 아이러니하죠? 그리고 더 크게 보자면 그를 죽음으로 이끈 건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희생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그래 참 좋은 이야기야.”

하지만 세리스는 작작 하라는 세인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호응에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결국, 남자의 연인은 슬퍼하며 하얀 꽃을 남자 무덤 주변에 잔뜩 심어요. 그녀는 그의 피가 하얗다는 것을 끝내 몰랐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를 제대로 기리게 되는 거죠.”

결국, 운명이란 놈이 또 난장을 쳐서 잘 될 뻔한 연인 하나를 박살 내놨다는 이야기였다.

세인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난 배드엔딩이 싫어.”

그리고 귀족행세를 하는 건 귀족 모독죄라고.

세인이 ‘드디어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을 때 세리스가 말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로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다.

“그럼 이번에는 검은 협죽도 이야기도 해드릴게요.”

“….”

검은 협죽도도 있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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