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 박치기 축제 (1)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그리고 행군 속도도 더뎠다.
세인과 다른 사람들은 병사들을 독촉하지 않았다.
동상에 유의하며 천천히 이동할 뿐이었다.
야영하는 시간에 비비안과 코다로는 세인과 카드도 치고 잡담도 하면서 함께했다.
가끔 코다로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전시회를 할 생각입니다.”
“전시회요?”
세인은 근처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비비안을 보았다.
눈을 내리깐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코다로가 보여준 것은 손바닥만 하게 짠 나무 틀 안의 그림들이었다.
이동 중에도 그릴 수 있게 하려고 작게 만든 것이다.
코다로는 천막 입구를 들추고 밖에 펄펄 내리는 눈을 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에 감흥이 벅차오르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 그림의 주제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세인은 코다로가 열어젖힌 천막 입구 밖을 바라보았다.
코다로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니, 당연히 눈이 내리는 게 그의 시야에도 들어왔다.
세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요? 지금 당장요?”
그러자 코다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안달 난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 눈 내리는 풍경 안의 사나이. 아주 좋은 제목이지 않습니까?”
아니 지금 제목 가지고 뭐라 하는 게 아니었다.
밖을 보라. 눈이 펄펄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때 비비안이 컵을 찻잔에 소리 내 내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 악취미를 꼭 여기까지 와서 해야만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어허. 악취미라뇨.”
“번우드에 자자한 소문이 있습니다. 밤이 되면 전망대에 올라, 나체로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있다는 소문요. 게다가 세인님은 누가 자신의 모습을 본뜨는 것을 싫어하세요. 그래서 동상도 안 세우시잖아요.”
“잠깐. 지금 제가 밤에 나체로 그림을 그린다고 몰아가시는 겁니까? 제가요?”
둘이 오히려 말싸움을 벌이자, 세인은 코다로의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세상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병사들은 동그랗게 군영지를 만들고 불을 피우는 중이다.
밥 짓는 냄새가 약간 떨어진 여기까지 풍겨왔다.
결국, 코다로는 세인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렸다.
연신 감탄성을 흘리면서 말이다.
흑연으로 대충 스케치를 끝낸 그는 붓을 들고 쓱쓱 세인을 그려나갔다.
폭설 한가운데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그림 안에 태어났다.
비비안은 흔들의자를 밖으로 옮겨서는 차를 마시며 그 광경을 감상했다.
아름다운 그녀가 걸친 숄 위로 눈송이들이 떨어질 때, 세인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멀리에서 누가 본다면, 남녀들이 그렇게 있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코다로는 붓에 물감을 찍어가며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세인은 자세를 유지하느라 고역이었지만 말이다.
“완성되면 황금 액자에 넣어두겠습니다. 그리고 전시회의 메인으로 가는 겁니다.”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디테일까지 모두 완료한다는 건 무리였다.
특히 얼굴이 그러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형태를 뜬 코다로는 매우 만족한 얼굴로 그림을 들어 올렸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한 건 세인 특유의 느낌을 화폭 안에 잘 담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와 그림을 구경한 비비안은 꼭 토를 달았다.
“얼굴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잖아요.”
그걸 무시하며 코다로는 웃었다.
벌써 떠들썩한 전시회의 광경이 눈에 그려지나 보다.
이제는 비비안만 꼬드겨서 화폭 안에 넣으면 완성이었다.
“그림이란 게 하루 이틀 만에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제 원대한 계획을 어찌 아시겠습니까. 이 계획은 몇 년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진행되는 겁니다. 이름하여 거장 코다로 전시전. 그때 펑펑 흘릴 감동의 눈물이나 준비하십시오.”
꿈꾸는 듯한 코다로의 눈동자 앞에서,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비비안은 굳이 대화를 길게 섞고 싶지 않아 말을 아꼈다.
* * *
섭정의 자리에 앉은 조세핀은 야만인들의 나라와 변치 않는 우정을 약속하고 주변을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냉정히 말하면, 그녀는 정무 감각도 없었고 나라 운영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가 왕이라 치고 일신의 능력만 본다면 무능력한 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후에는 야만족들의 힘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 밑의 신하들이 보기에 글리터는 어째서인지, 쳐들어올 때는 언제고 가이더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원조를 아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즉 세인도 등에 업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가이더와 글리터를 연결할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외적으로 보면 글리터는 오히려 가이더를 침략하고 모욕을 준 곳이다.
그러나 조세핀은 국민들 앞에서 복수 운운을 하지 않았다.
불길과도 같은 증오로 사람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능력했지만, 결정적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살아가는 지혜를 알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주위의 조언과 아첨, 부추김을 구별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자신의 명예나 부유함을 고려하지 않았다.
“저는 무지하고 눈앞의 사물밖에 보지 못하는 아녀자라, 여러분이 작정하고 저를 속이려 한다면 감쪽같이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한때에 불과하고,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제 자식입니다. 때가 와서 정당한 주인이 왕위에 오르면 제 행적조차 그에게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것만 알아두세요.”
귀족들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어미마저도 나중에 평가받는 자리를 만들 거라고 공언한 까닭은, 어머니도 그럴진대 피붙이도 아닌 너희들은 그때 가면 어떻게 되겠냐는 뜻이었다.
지금 당장 조세핀은 속일 수 있다 쳐도 후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능력이 없는 자라도, 나라를 위하는 열정을 가지고 책임을 진다면 나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물론 군주가 능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모자란 능력은 국가의 구성원들이 대신 채워주면 된다.
조세핀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귀족들이 반대해도 자신의 소신을 내세웠다.
“덩컨 경.”
“예. 말씀하십시오.”
“저에게는 여러분들에게 압력을 넣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사안은 그만큼이나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말하는 건 야만인들의 힘이었다.
덩컨은 바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쓰지 않겠습니다. 왜냐면 외세의 힘을 빌려 가이더의 국정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은 틀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 나름대로 이 사안이 절실하다고 생각해도 그건 잘못된 방법입니다. 게다가 이분들은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겠죠.”
그러자 왕좌 뒤에 서 있던 무에타이와 다른 남자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덩컨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된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좌 옆의 조세핀이 아니라, 왕좌에 앉아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아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만 깜박였다.
“덩컨 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뜻에 따르겠습니다.”
덩컨이 고개를 숙이자 다른 귀족들이 씩씩거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덩컨은 군사력까지 쥐고 있는 인물이었다.
한번 해산했지만, 다시 모인 군대는 그의 지휘 아래 수도를 철통같이 방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허락한 게 바로 조세핀이다.
조세핀은 글리터와 교류하며 그들의 원조를 받아들이는데 더 박차를 가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다른 나라들과 글리터가 교류를 시작한 이후로,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광석이나 물건을 들여오게 된 것이다.
가이더를 습격한 나라에서 도움을 받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양국의 교류는 결국, 이루어졌다.
처음에 국민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워했다.
그거야 다른 나라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과 몬스터 사이에 놓인 강은 넓고 깊었다.
난민들이야 살기 위해서 그 강을 건넜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이 글리터를 향해 흘러가자, 개개인이 그런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글리터와 주변국들의 공조가 시작된 가운데 조세핀은 나라를 안정시켰다.
피폐해진 사람들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캐시오와 한편이 되었던 귀족들을 청산하는 데 힘썼다.
그녀가 세인에 대해 믿음을 가지게 된 큰 계기는 바로 캐시오가 저지른 짓이었다.
안 그래도 세인은 그녀와 자식의 은인이었다.
거기에다가 캐시오와 관련된 문건을 보고 나니 캐시오에 대해 치가 떨렸다.
그리고 새삼 세인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국의 왕들은 이런 사건을 알면서도 당연히 눈감아줄 것이었다.
통치자가 국민을 실험했다는 일을, 통치자 입장인 그들이 밝힐 리가 없다.
세인은 이 문건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았다.
공표하는 것을 조세핀의 권리로 돌려주었다.
캐시오의 만행을 샅샅이 살펴본 그녀는 며칠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덩컨을 불러 상의했다.
둘은 결국 공표를 할 것이냐 마느냐를, 장차 왕위에 오를 조세핀의 자식에게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너무 심각한 사안이었다.
통치의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자식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미래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다.
어느 날 덩컨은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가끔 지하로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기겁했다.
그리고 왕성으로 달려와 그녀와 만나 뵙기를 청했다.
마주친 조세핀 앞에서 덩컨은 평정을 잃고 소리를 높였다.
“무슨 짓이십니까? 캐시오가 고문받는 광경을 보여주신다니요? 아직 어리신 분입니다. 그런 광경은 성장하신 후에도 그 자체로 두고두고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따져 묻는 덩컨 앞에서 조세핀은 이렇게 말했다.
“제겐 제 아이가 정말 소중해요. 이 아이가 왕가의 핏줄임을 떠나서 말이에요. 그래서 가이더로 돌아오지 않았던 겁니다. 왕위를 위해 목숨을 건 도박은 하기 싫었으니까요. 경보다 아이를 아끼는 건 어머니인 접니다.”
“예, 하지만….”
덩컨은 결연한 표정의 조세핀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제 자식이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로서 제 자식이 좋은 것만 보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진심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가이더의 지금 상태는 좋지 못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의 어깨로 가이더가 찾아갈 것입니다. 그게 운명이고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
“아이 곁에서 캐시오가 어떤 자인지 말해 주었어요. 그리고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왜 저런 벌을 받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주었어요.”
덩컨은 너무 답답했다.
물론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조세핀은 정말 존경할 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광경을 보여준들 어린아이가 당장 뭘 깨닫겠는가?
“그분은 너무 어리셔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도 알아듣지 못한단 말입니다.”
조세핀은 침착한 눈빛을 유지하며 덩컨을 계속 바라보았다.
“언젠가 알아들을 때까지 찾아갈 것입니다. 캐시오가 지르는 비명과 고통에 아이는 악몽을 꾸고 괴로워하겠죠. 하지만 그게 훗날 아이가 왕좌에 앉았을 때. 그 애에게도 찾아갈 수 있는 미래라는 것을, 지금부터 각인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그는 왕이 될 자입니다. 왕의 책임은 일반인과 격이 다르고 훨씬 더 무겁습니다. 그런 면에서 캐시오는 저보다 훨씬 훌륭한 교사입니다. 그는 정말 지옥 속에서 몸부림치며 제 자식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죄악으로 얼룩진 실패의 길을.”
결국, 덩컨은 납득했다.
그리고 조세핀의 앞에서 진심을 내보였다.
무릎을 꿇은 것이다.
“당신 앞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미래의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제 눈과 귀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감시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한때는 어린 왕을 꼭두각시 삼아 사리사욕을 채울 분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습니다.”
“….”
“하지만 이제 진심을 보았으니 저는 제 두 손으로 화답하겠습니다. 제 두 손으로 잡은 방패와 검은 국왕을 위해 맹목적으로 휘둘러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맹세는 제 아들과 다시 그의 아들, 또 다른 아들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조세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많이 모자란 여인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가이더를 걱정했고, 믿을 만한 사람을 발견하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믿어주었다.
그게 바로 조세핀의 장점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치세 아래에서 의문을 보인 사람들도, 가이더가 가시적으로 안정되자 점점 믿음을 주기 시작했다.
캐시오에게 광적인 지지를 보내던 자들도 종종 투덜거리긴 했지만 새로운 물결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분수령이 된 게 바로 가이더 내부의 화근이 사라진 일이었다.
골치를 썩이던 토레스의 무리가 적대적인 태도를 포기한 것이다.
주변인들의 조언을 들은 조세핀은 토레스와 그의 무리에게 해산을 명령한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레인저가 되도록 권유했던 것이다.
“당신들의 진심을 인정합니다. 불의에 맞서면서도 상처받은 백성들을 보듬어 안아주었어요. 작게 보면 왕조에 반기를 든 괘씸한 행동이나, 큰 틀로 보면 나라를 위해 헌신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념은 레인저에 어울려요. 이제 왕조가 인정하는 이름으로 초심을 유지해 주세요.”
그리고 집단을 유지하고 싶었던 토레스는 당연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건 가이더 내부의 비판론자나 회색분자들도 조세핀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사건이다.
캐시오가 탄압했을 때도 꿈쩍하지 않고 반기를 들던 집단이 가이더의 편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가이더는 너무 황폐해져 있었다.
그게 단시간 내에 해결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병상에서 쾌유할 조짐이 보이자 슬슬 다른 나라들도 자극을 받게 되었다.
일부는 글리터에 침략당한 수치를 잊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받은 조세핀을 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얻은 실리를 부러워하는 건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드레퓨스와 손을 잡고 몬스터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사람이 많았다.
같은 인간의 편이니까.
그러나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드레퓨스는 항복을 선언하는 나라마저도 굴욕을 안겨주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었다.
그중 백미는 사신의 목을 베었던 사건이다.
그런 엽기적인 짓을 저지르는 드레퓨스에 신의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리를 제공하는 글리터는 가까웠고, 멀리에서 부는 태풍이나 마찬가지인 드레퓨스는 야욕을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