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48화 (148/307)

# 148

& 죄인의 길 (5)

빈센트와 세인은 맹렬히 부딪혔다.

검과 검이 맞붙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세인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는 동작을 크게 하며 열심히 움직였지만, 힘을 제대로 싣지 않았다.

그런데도 빈센트는 뒤로 밀렸다.

세인이 몰아붙인다기보다는 그의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었다.

이를 악문 빈센트가 찌르기를 해왔다.

그 찌르기가 어찌나 정직한지 마치 피해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그 직선을 피하지 않고 타고 들어간 세인은 빈센트의 어깻죽지를 잡았다.

그리고 들치기로 땅에 꽂아 버렸다.

세상이 도는 것을 느낀 빈센트는 바닥에 처박힌 상태에서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심하면 뇌진탕이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세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지금까지 치러진 기사전 중 가장 시간을 오래 끄는 기사전이었다.

하지만 가이더 측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글리터에서는 가장 높은 신분인 세인이 나갔기 때문에 응원조차 삼가는 분위기였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응원이나 환호성도 어느 정도의 인물이라야 보내는 것이었다.

왕이나 다름없는 세인에게 함부로 외치긴 힘들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세인의 말이 풀을 뜯을 때 둘은 오랫동안 싸우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빈센트는 이제 땀과 흙투성이가 되었다.

게다가 세인에게 걷어차이고 얻어맞느라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세인이 검의 손잡이 끝으로 빈센트의 관자놀이를 후려치자, 그는 비실대더니 쓰러져 버렸다.

바닥에서 헐떡대는 빈센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는 태양을 등진 채 빈센트에게 말했다.

“일어나지 마라.”

하지만 빈센트는 대답 대신 흙을 한 움큼 쥐어 세인에게 뿌렸다.

그 흙이 세인의 갑옷에 부딪혀 아래로 흘러내렸다.

결국,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빈센트였다.

이 정도면 불굴의 의지라 불러줄 만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빈센트를 상대 중인 세인은 그에게 이렇게까지 달려드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뛰어오르는 빈센트의 멱살을 잡았다.

빈센트의 갑옷은 세인의 공격으로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세인이 빈센트를 던져버리자, 그는 엉망이 되어 땅 위를 굴렀다.

그의 뺨이 땅에 긁혀 피를 흘릴 때 세인이 다가왔다.

그는 다시 말했다.

“일어나지 마라. 너는 최선을 다했다.”

“네가 일어나지 말라고 하면, 내가 일어나지 말아야 하냐?”

헐떡인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며 엎드렸다.

정말 일어나고 싶은데 힘이 없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기적적으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며 세인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빈센트가 뒤로 무너지는 것을 보며 등을 돌리는 세인이었다.

그런데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벌레처럼 기어온 빈센트가 세인의 한쪽 발을 잡고 매달렸다.

평소의 세인이라면 그런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혹은 조롱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소대로 빈센트를 대하지 못했다.

세인이 걸음을 멈추고 서 있을 때 빈센트가 중얼거렸다.

실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찢어지고 엉망이 된 입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턱 위까지 차오른 숨으로 씩씩대며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가이더여 만세.”

세인은 빈센트의 말을 들으며 가이더의 성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가 상처를 낸 가이더의 상징이 눈앞에 있었다.

세인은 가슴이 아팠다.

그때 빈센트가 세인의 발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대로 보내줄 수 없다는 의지를 담고서 말이다.

그 딴에는 외친다고 외쳤겠지만, 실은 속삭였다.

“가이더여 만세.”

그 말을 들으며 세인은 반대 발을 들어 빈센트의 머리를 내리 찼다.

그리고 그제야 빈센트의 의식이 뚝 하고 끊겼다.

“….”

그리고 빈센트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는 말 위였다.

말에 엎어져 있는 빈센트의 머리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인의 말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가 깨어난 것을 아는 세인은 투구 속에서 입을 열어 말했다.

“빈센트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빈센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는 몬스터였다.

욕설을 퍼부어도 모자랐다.

다만 지금 그러기 곤란한 문제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왜 말을 돌려보냈지?”

“뭐?”

“멀리에서 자네가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예상은 했지만, 말을 돌려보내는 것을 보고 확신했어. 왜 말을 돌려보냈지? 왜 돌아갈 길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지?”

빈센트는 침묵했다.

덩컨은 시골 귀족 중에 지원자를 받았다.

실력은 상관없었다.

그의 임무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었다.

글리터의 기사들은 패배한 상대를 살려서 돌려보냈다.

그건 오히려 가이더의 기세를 무디게 만들었다.

덩컨은 그래서 승부를 조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가이더 쪽에서 어떻게든 달려들어 목숨을 산화시키면, 모두가 다시 불타오르는 분노의 지점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게 덩컨의 현재 위치였다.

이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면 아마 세인이라도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빈센트는 입을 열었다.

“캐시오님은 도저히 존경할 수 없는 분이었어. 나도 그분을 평소에 욕하곤 했어. 하지만 그런 분이라도 일국의 왕이다. 몬스터에게 돌아가셔야 할 분은 아니야. 가이더인의 자존심이자, 가이더의 상징이니까.”

세인은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캐시오에게 아첨을 일삼던 무리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도로 올라오지 않았다.

약삭빠르게 눈치나 살피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캐시오를 욕하고 분노하던 자들은 수도로 몰려와 이렇게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캐시오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이더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다.

“빈센트. 나는 몬스터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다. 나는 수많은 인간을 살해한 악마지만, 너 같은 인간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다면 가이더는 무너진다. 성이 불타면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된다.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다면 다독이며 끌어 안아주면 된다.”

점점 가이더의 진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인이 뿜어내는 기세에 주춤주춤 병사들이 물러섰다.

저 뒤의 덩컨은 지금 세인을 공격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세인이 적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면 당연히 공격을 명령했겠지만, 먼 거리에서 과연 세인을 알아보았을까?

그 와중에도 세인의 목소리는 투구 안에서 이어졌다.

“하지만 너 같은 귀족이 죽는다면 가이더는 허리를 잃는 거야. 아래로는 평민들의 고통을 안아줄 수 없고 그들의 한탄을 책임져줄 수 없다. 위로는 성심을 다해 왕에게 봉사할 수 없다. 나 같은 괴물에게 목숨을 잃는 게 그런 가치보다 우선될 수 있는가?”

그리고 세인은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자신의 말과 빈센트를 남겨둔 채였다.

덩컨은 세인의 정체를 모르는지 그의 뒤를 공격하라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 가이더의 사람들이 달려 나와 말안장 위에 축 늘어진 빈센트를 부축하고 끌어 내렸다. 빈센트는 고통에 다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  *  *

분기를 일으켜 그 기세를 타겠다는 덩컨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하지만 덩컨은 빈센트를 탓할 수 없었다.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일이 공교롭게 꼬였다.

더 공격 시기를 늦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그는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공격하기 바로 전날 이변이 일어났다.

“우측에서 무시할 수 없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뭐?”

지휘 천막 밖으로 뛰쳐나간 덩컨과 지휘관들은 산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보았다.

능선을 따라 뒤덮은 사람의 물결을 바라보며 덩컨이 신음했다.

“반란 세력이군…. 하필 이때 왜?”

그 후로 설마 하는 마음에 며칠을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산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어떤 전령도 덩컨에게 보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몬스터에 맞서 같이 싸워줄 용의 때문에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사람들을 끌고 온 토레스 입장에서는 전투를 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다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면서 세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의도는 보기 좋게 먹혀들어 갔다.

덩컨과 지휘관들은 당연히 혼란스러워했다.

앞의 적도 적이지만, 측면에 진을 친 놈들의 속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몇 명 보내봤지만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인간들은 몬스터 앞에서 뭉쳐야 하는 게 맞았다.

모습을 드러낸 이유도 그것일 것이었다.

하지만 접촉을 해오기는커녕, 오히려 저쪽에서 거부하고 있었다.

측면에 의중을 알 수 없는 집단을 두고, 앞에 총공격을 가한다는 것은 정말 멍청한 일이었다. 8살짜리 아이도 그건 알 것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식량은 점점 없어졌지만, 덩컨도 이렇게 된 바에야 차선책을 염두에 두는 듯했다.

그리고 드디어 가이더의 북쪽에서 특사가 도착했다.

주변국에서 보낸 특사가 도착했다고 했을 때 덩컨은 은근한 기대를 했다.

하지만 도착한 특사는 먼지를 털어내며 의외의 말을 전했다.

“당장 전투를 중단하시랍니다.”

“뭐?”

어이가 없어 존댓말도 잊은 덩컨에게 미스틸 테인은 서신을 꺼내 보였다.

덩컨은 그것을 받아들고 서둘러 뜯었다.

그런 그의 뒤로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안의 내용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렇게 된 마당에 체면이고 뭐고 챙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서신을 보는 덩컨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아주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걸 다른 지휘관들에게 넘겨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걸 내정간섭으로 간주하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요.”

“예, 압니다. 그럴 권리가 충분히 있으시겠죠.”

미스틸 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덩컨이 서신에 있는 왕들의 의견을 무시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연맹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서, 남의 나라 일에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신의 내용은 군대를 해산시키라는 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로, 적들이 스스로 해산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적어 놓았다.

덩컨은 가까스로 참고 있다가 불같이 화를 냈다.

미스틸 테인 앞에서 말이다.

미스틸 테인은 묵묵히 덩컨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다.

사실 덩컨의 입장에서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몬스터들이 왕을 시해하고 성을 점령했는데 군대를 해산시키라는 건 너무 상식 밖의 이야기였다.

덩컨은 목에 핏줄을 세우며 화를 내다가 잠잠해졌다.

미스틸 테인의 빤히 바라는 눈빛에 의구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를 왜 그런 눈빛으로 보시는 겁니까?”

“저는 장군의 심정을 정말 공감합니다.”

“그러시겠죠.”

“하지만 주변국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린 결론입니다. 가이더를 위한 것이기도 하죠. 장군. 주변의 상황을 보세요. 그리고 승리한다 칩시다.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덩컨은 입을 다물었다.

승리한 다음에는?

미스틸 테인은 계속 깊은 눈으로 알쏭달쏭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제게 선고한 마당에 대체 뭘 그렇게 보는 겁니까?”

그러자 미스틸 테인이 어조를 아주 무겁게 하면서 말을 꺼냈다.

어조도 어조지만 말의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제2의 캐시오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덩컨은 그제야 정신이 바싹 들었다.

그의 손이 덜덜덜 하고 떨렸다.

몸이 굳어진 것은 뒤의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침을 삼킨 덩컨은 모욕을 당한 듯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식까지 가져온 것으로도 모자라, 내게 수치를 줄 셈이요?”

“정말 그렇습니까? 제가 수치를 준 것입니까?”

덩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말했다.

“쓰인 대로만 된다면 군대는 당연히 해산하겠소. 나는 제2의 캐시오가 될 생각은 없소. 나야말로 캐시오를 증오하는 사람이오. 그는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가장 최악의 왕처럼 굴었지. 그런 폭군에 의해 감옥에 갇혔던 내가, 그의 전철을 밟을 것 같은가?”

“그렇군요.”

미스틸 테인은 다시 길을 떠나려는지, 두건을 양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씌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사의 방문 이후로 가이더를 둘러싼 상황이 기묘하게 굴러갔다.

일단 토레스와 그가 거느린 사람들은 산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가이더의 사람들은 몬스터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고 있는 판에,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말 그대로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다.

그게 정말로 이루어지는 것이냐고 웅성댈 때.

야만인들이 호위하는 마차가 나타났다.

아주 고급스러운 마차였는데 마차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것은 바로 무에타이였다.

수백 명의 야만인이 에워싸고 움직이는 마차였다.

과연 저런 마차를 습격할 미친놈이 있을까는 둘째 문제였다.

무기를 꺼내 들고 호위하는 무에타이의 기세만 봐도, 마차에 접근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접어야 할 것이다.

덩컨은 그런 마차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내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과 말을 나누었다.

마차에서 물러난 덩컨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상념에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온갖 가치관과 몬스터에 대한 증오, 그리고 책임감이 엉킨 실타래처럼 그의 머리 안을 굴러다녔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덩컨은 결국 이렇게 말을 했다.

“군을 해산시켜라. 이들이 다시 재집결할 때는 오로지 진정한 주인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산한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 소식들을 가지고 각자의 고향으로 귀환했다.

그 소식을 확인한 사람들은 기쁨이 두 배였다.

가족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과 진정한 가이더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동안 가이더는 너무 심한 고난을 겪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감정의 기복이 연극에서나 나오는 스토리 같았다.

좌절하고 지친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반전에 자신도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되었다.

무너져 내린 내성 앞의 시체들은 어느새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물론 핏자국들은 군데군데 그대로였다.

그곳까지 도착한 마차는 바퀴를 멈췄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마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세핀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 작은 아이와 함께였다.

어린아이는 걸음마를 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에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무에타이는 철통같이 경호를 했다.

문제는 그가 경계하는 대상에 덩컨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세핀을 향해 다가오던 덩컨과 다른 사람들은 창에 가로막히는 무안을 당해야만 했다.

얼굴이 붉어진 채 헛기침을 하는데, 조세핀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한 얼굴로 내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 입장에서는 아직 누구를 믿어야 할지 판단이 안서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믿음에 따라 자식의 생명도 함께 걸려 있었으므로 함부로 믿음을 남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글리터의 사람들은 내성의 뒤쪽에 몰려 있었다.

거기에서 떠날 채비를 하는 참이다.

그래서 성안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융단이 없는 복도 위를 걸어가는데 굽이 부딪히는 발소리가 통로에 울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홀로 이어지는 복도에 다다르기 전, 조세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을 물리려 했다.

그것을 말리려고 한 것은 무에타이였다.

하지만 조세핀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와 레드님이 믿는 사람입니다. 따로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무에타이는 굉장한 고민에 빠진 기색이었지만 이내 두 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결국, 아이를 품에 안은 조세핀은 그녀의 바람대로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그녀는 약간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멀리에서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세인이 눈에 들어왔다.

조세핀은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녀의 인기척에 세인은 고개를 돌렸고, 서로의 눈이 잠깐이지만 마주쳤다.

조세핀은 은혜를 모르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순간을 자주 상상해 왔다.

그리고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도 수없이 연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가슴이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에메랄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보석의 감촉에 에메랄드 반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몸을 돌리는 세인 앞에서 그녀는 격동에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 에메랄드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 세인의 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세인은 갑자기 반지가 다가오자 잠깐 놀랐다.

순간 복잡한 감정이 그의 눈가에 스쳤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첫 말을 꺼냈다.

“제 소유가 아닙니다.”

“하지만….”

조세핀은 레드에게 세인의 정체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진정한 반지의 주인은 당신이라고 꼭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세인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중에 진정한 주인을 찾아서 전해 주십시오. 그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세핀은 다시 반지를 세인에게 전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세인의 시선이 그녀의 자식에게서 떠나가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반지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 듯싶었다.

“세인님 덕분입니다. 그때 도와주셔서 제가 살 수 있었고, 제 아이도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레드님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어요.”

조세핀은 가이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해 레드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가이더가 안전하다면, 당연히 조세핀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의 미래를 먼저 고려하기 마련이다.

세인은 조세핀의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이목이 온통 아이에게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세핀이야 오래전에 봐서 그녀가 얼마나 현명하고 순한 여인인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왕위 계승자였다.

정통 계승자.

가이더의 왕위에 오를 인물이 그의 앞에 있었다.

반갑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가던 조세핀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도 그럴 것이 세인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세인의 눈은 아이에게로 쏠려 있었다.

물론, 무슨 말과 행동을 하건 어차피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오늘을 기억하기란 아이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다.

“세인님?”

“전하.”

조세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는 떨리는 세인의 음성에 서린 비탄을 알아차렸다.

듣는 사람의 가슴을 저미는 말이 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저는 가이더의 은혜를 입고 태어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의 선대가 제게 빌려주신 권위로 밑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고, 그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용서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복도에 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들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이런 몸이 되어 이제 가이더에 발을 들일 수 없는 신세입니다. 괴물이 된 저는 가이더와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인가 봅니다. 이런 저를 용납하지 마시고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중간중간 잠겨서 흘러나왔다.

“가이더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굶주렸고 비탄에 잠겨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 불충한 자가 감히 바라건대, 이 가엾고 슬픈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 주십시오, 부디 그들의 의지가 되어 주십시오.”

미래의 가이더 왕 앞에서 세인은 기원했다.

“인간의 이름으로 서서 가장 고귀하신 자. 가장 무거운 책임을 뒤집어쓴 분. 언제나 앞길에 영광이 함께하시길.”

세인은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몬스터인 그는 가이더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가이더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가이더의 수치였다.

장차 가이더의 왕이 될 존재 앞에서 세인은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전에 온 힘을 다해 말했던 빈센트를 닮아 있었다.

“나의 가이더여 만세. 나의 왕이여 만세.”

마지막 세인의 속삭임이 바닥에 부딪혀 작게 울렸다.

그리고 일어서는데 그의 눈시울은 붉어질 대로 붉어져 있었다.

조세핀은 그런 그의 앞에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세인의 행동에 놀란 아이는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마음 깊이 담아두려는 듯,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세인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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