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 죄인의 길 (4)
창이 날아들고 비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성벽 아래로 남김없이 던져졌다.
겁에 질린 귀족들이 저항하려 했지만 무자비한 병사들은 세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줄줄이 끌려 나온 귀족들이 아래로 사라져 간다.
성벽 아래에는 추락한 시체들이 모여 피바다였다.
이 끔찍한 광경도 한두 번이지.
꼬리에 꼬리를 물자 가이더의 병사들은 뒤쪽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덩컨은 이를 악물며 계속 전진을 명령했다.
그런 가이더의 기색을 살피던 세인은 귀족들을 성벽 위에 일렬로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뒤에서 발로 등을 걷어차게 시켰다.
어떤 귀족은 필사적으로 성벽 끝에 매달리려 했다.
하지만 밑으로 떨어지는 사람의 몸무게에 끌려가듯 줄줄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 갔다.
목불인견의 참상은 계속되었다.
이제 귀족의 체면이고 뭐고, 울며 빌며 살려달라고 말하는 자도 나왔다.
반면 호통을 치는 자도 있기 마련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세인은 묶인 채 노한 기색을 보이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세인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몸서리 처지게 아름다웠다.
캐시오가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에게 있어 행운이었다.
하얀 피부, 풍만한 가슴 그리고 가느다란 허리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미녀 앞에서 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책임을 져라.”
“무슨 책임!”
서리 같은 목소리로 덤벼드는 여인 앞에서 세인은 계속 대꾸했다.
“백성들이 다리 밑으로 떨어질 때, 쓰레기처럼 외곽에 버려지던 책임.”
그리고 세인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다.
“네가 그런 얼굴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귀족이기 때문이야. 네 옷, 교육이 만들어낸 네 어투, 네 위장을 채웠을 기름진 음식은 모두 귀족이기 때문이다. 너는 부정할 수 없는 가이더의 귀족이고 그 수혜 안에 서 있다. 지금 이 상황이 괴롭다면 애초에 귀족으로 태어나질 말았어야지.”
그리고 여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가락을 옆으로 그었다.
그러자 그 신호를 받아든 병사가 뒤에서 그녀의 목을 검으로 그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피가 그녀의 옷을 적셨다.
목을 잃은 그녀의 몸을 병사들이 잡았다.
그리고 질질 끌어 성벽 밖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머리는 세인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세인은 그것을 발로 걷어차서 날려버렸다.
포물선을 그린 여인의 머리가 공처럼 날아간다.
세인은 찬바람을 맞으며 공포에 떨고 있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이더의 병력을 바라보았다.
가이더의 군대는 아직도 접근 중이었다.
다시 귀족들에게로 얼굴을 돌린 세인은 바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때 백성들 곁에서 하지 못한 일을 지금 하는 거야. 귀족의 책임을 져라.”
그리고 창에 밀려 수많은 귀족이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끔찍했다.
그 끔찍한 과정이 계속 이어졌고, 저항하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무기에 찔려 숨졌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말이다.
일부러 잔인하게 한 까닭은, 성벽 위가 피투성이가 되면 미끄러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귀족들을 바깥쪽으로 밀어내기도 편했다.
어떤 귀족은 끌려가면서 무슨 권리로 이런 짓을 하느냐고 외쳤지만, 세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세리스가 세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이들이 없어지면 장차 누가 가이더의 축이 될 수 있겠어요? 이들은 문서를 볼 줄 알고 행정에 특화된 사람들이에요. 굴러가는 수레바퀴의 바큇살이 모이는 중심이에요. 이런 인재들이 사라진다면 가이더에 폐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세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한번 의무를 저버렸던 자들이다. 그들을 그런 핑계로 남겨두면 그 머리를 이용해 오히려 나라를 썩어들게 할 것이다. 청산해야 할 것들은 이참에 모조리 쳐낸다.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해. 방관을 했든 도왔든, 그들이 책임지지 않으면 가이더에 책임질 자들은 결국 아무도 없어.”
세인은 죽어 나가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책임을 져라. 단단한 성벽 안에서 따뜻했던 책임. 뜨거운 차와 음식을 먹으면서 잡담을 나누었던 책임. 술에 젖었던 책임. 다리 밑으로 떨어지며 죽어간 사람들 곁에 함께 하지 못했던 책임. 울부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던 책임. 가이더가 지옥이 되어갈 때 죄책감에 자살하지 않았던 책임. 귀족으로 태어난 책임을 져라. 다가오는 저 가이더의 깃발이 그런 채무를 너희들에게 묻고 있다.”
덩컨은 처음 기세를 꺾이지 않기 위해 계속 병사들을 전진시켰다.
그것을 바라보는 세인은 울부짖는 귀족들 사이에서 짧게 명령했다.
“수기.”
그러자 성벽 위에서 수기가 펄럭였다.
가이더의 군대에 보내는 신호였다.
정지하라.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느새 가이더의 궁수들은 점점 유효 거리에 다가와 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좋아.”
해보자는 듯이 웃은 세인이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귀족들은 이제 머리채나 발을 잡혀서 질질 끌려갔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일정한 속도를 유지해가며 죽임을 당했다면, 이젠 숫제 짐승 취급이었다.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자들이 빠른 속도로 끌려나가고 그대로 던져졌다.
전보다 배는 빨라진 속도다.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아예 발광하듯이 귀족들을 성벽 위에서 밀어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가이더의 지휘관들은 안색이 핼쑥해졌다.
성벽 아래 엄청나게 쌓이는 시체를 본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정말 저들을 모두 죽일 작정인 것 같습니다. 가이더의 허리가 절단 납니다.”
“바보 같은 소리! 저들은 몬스터다. 우리가 멈춘다고 그만둘 것 같은가? 어차피 이건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야. 저 기세에 밀려 첫 공격의 예봉이 꺾이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덩컨은 호통을 쳤지만 다른 지휘관들은 필사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이대로 뼈아픈 승리를 거둔다 쳐도, 덩컨의 결정은 나중에 문제가 될 여지가 아주 많았다.
몬스터들은 수기를 흔들었고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가이더 군대가 다가오자 아주 발악적으로 귀족들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럴 때는 일단 진군을 멈추는 게 우선이었다.
지휘관들이 생각하기에 덩컨은 무리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저 중 몇 명이 살아남아 오늘을 증언한다면, 덩컨은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귀족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자 지휘관들은 점점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가 한사람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덩컨에게 말했다.
“멈추셔야 합니다. 이미 귀족들이 엄청나게 죽어 나갔습니다.”
이런 시간에도 귀족들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적의 우두머리는 분명 미친놈이었다.
인질로도 활용할 수 있는데 악에 받친 듯 사람들을 추락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수기조차 흔들지 않겠다는 듯이 깃발들을 아래로 버려버렸다.
그다음부터는 광란의 연속이었다.
썩은 귀족들을 정리하겠다는 세인의 내심을 알 리 없는 지휘관들은 덩컨을 말렸다.
그러자 덩컨도 결국 정지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가 군을 통솔한다 해도, 독단은 좋은 결과를 낳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자 세인도 일단 처형을 멈추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귀족 중 절반 이상이 성벽 아래 고혼이 된 후였다.
그런 죽음 앞에서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많이 줄였군. 장기적으로 보면 다행이다.”
그러자 파랗게 질려 있던 귀족들은 악마를 바라보듯이 세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면 오산이다.
그날 밤 덩컨은 야습을 해왔다.
‘낮에 진격의 초전이었는데 설마 그날 밤 습격을 하겠는가?’라는 의표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방비를 하고 있던 글리터의 병사들은 그 습격을 잘 막아냈다.
그리고 아침이 다가오자 가이더 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엄청난 수의 귀족 시체가 성벽 아래에 버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귀족들을 다 제거할 생각이었던 세인의 생각을 알 리 없으니, 가이더 군대가 보기엔 야습에 대한 보복으로만 여겨졌다.
시체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성안의 귀족들을 다 죽여 없앴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런 덩컨과 지휘관들은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죽은 시체의 수를 보니 책임회피는 어려울 듯싶었다.
생기를 잃은 수많은 눈동자가 덩컨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듯했다.
심리적인 위축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후로 몇 번의 공방이 있었지만, 모두 변변찮은 결과만 가져왔다.
그래서 가이더 군은 글리터가 기사 전을 걸어 왔을 때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사전은 사기를 끌어 올리고 변수를 만들거나 기세를 역전 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몬스터가 기사 전을 걸어온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덩컨 입장에서는 반겨야 할 처지였다.
그렇게 가이더의 기사가 몇 번을 출진했지만, 번번이 행크와 더이스에게 패배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결정적인 쐐기 역할을 한 게 바로 세리스였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또 다른 미래에서처럼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실력이 일류였던 그녀는 이제 초일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녀가 깔끔하게 가이더의 기사를 물리치는 모습은, 적진인 가이더에서도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덩컨은 멀리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좀처럼 잘 풀리지 않는구나. 시간을 끌면 이쪽도 불리한데.”
연전연승을 거두고 돌아가는 세리스의 뒷모습을 본 덩컨이 그날 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꽉 막힌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
화공 이야기도 나왔지만 단박에 거절되었다.
일단 바람의 방향도 문제였고, 가이더의 상징인 내성을 불태운다는 것은 정말 최후의 방법이었다.
머리를 쥐어짠 그들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낸다.
몬스터와 인간의 싸움에서 승리에만 초점을 맞춘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글리터가 아닌 가이더에서 기사전을 걸어왔다.
중립지대까지 걸어 나오는 인영을 본 세인은 잠시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에 주위 사람들은 세인이 뭘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그러다가 말을 찾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기사 전에 나가시려고요?”
“그래.”
그러자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떠밀기가 시작된 것이다.
결국, 대표로 나선 것은 세리스였다.
“경우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그러자 세인은 딱 잘라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상 누굴 내보느냐 하는 건 오로지 나만이 결정한다. 그건 당신도 그렇고 다른 자의 권리가 아니야.”
딱딱한 어조에 결국 세리스는 뒤로 물러났다.
행크나 더이스도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세인은 강하기 때문에 질 염려는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다만 기사전에 최고 책임자가 나서는 경우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주위에서는 말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세인은 말을 타고 작게 열린 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주걱턱을 가진 청년은 바람 부는 땅 위에서 상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눈도 째지고 광대뼈도 툭 튀어나온 남자였다.
좋은 갑옷을 걸친 청년은 말의 등을 쳐서 가이더 쪽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혼자가 된 그는 멀리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세인을 보았다.
그리고 긴장감을 풀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세인은 말에서 내린 후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현재 검은 갑옷을 장착한 상태였다.
태양광이 갑옷의 표면 위에서 굴절되었고, 그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붉은 눈빛이 위압적으로 청년을 훑었다.
그 눈빛 앞에서 당당한 청년을 바라보며 세인이 물었다.
“네 이름은?”
“빈센트.”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며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을 몇 번 까딱거려 보였다.
빈센트는 세인처럼 상대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몬스터의 이름 따위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다만, 형식상 시작해도 되겠냐 정도를 검짓으로 물은 것이다.
검을 뽑는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맞붙었을 때 왜인지 가이더의 진영은 조용했다.
그리고 그건 글리터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기사라면 응원을 해줄 수 있겠지만, 세인은 그런 응원을 보내기 조심스러운 위치에 앉아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글리터의 사람들은 안색을 굳힌 채 세인의 모습을 멀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행여나 세인이 진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