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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왕 마검의 주인-146화 (146/307)

# 146

& 죄인의 길 (3)

왕들 앞에 선 비비안은 번우드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변호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이더가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에 있어서, 주변국들의 협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꼬집지 않았다.

왕들의 아픈 점을 찌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덤덤히 대륙의 정세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대륙의 중앙에서는 드레퓨스가 무서운 기세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전처럼 원정이라는 핑계조차 대지 않으면서요. 명백한 정복 전쟁입니다.”

“….”

“드레퓨스의 폭주를 막아야 할 남부는 조용합니다. 자신들의 평화만 우선시하는 것이죠. 여러분은 위쪽의 저희가 문제라고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우리 밑에 드레퓨스라는 불판이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하게 느껴질 겁니다. 가시화될 것이고요.”

비비안은 왕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었다.

“물론 저마다 심중의 계획이 다르시고 심려가 깊으시겠죠. 그러나 지금 상황을 둘러보세요.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문서를 빌미로 여러분의 입지를 협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력으로 제 의지를 관철하지도 않을 거고요. 하지만 드레퓨스는 어떻겠습니까?”

드레퓨스의 의지는 명확했다.

정복이다.

남부는 그런 드레퓨스를 혐오하면서도 수수방관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평화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따뜻하고 풍요로운 대지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명확하고 현명했습니다. 서로가 손을 잡은 까닭은 미래를 고려해 몸집을 만든 것이겠죠? 저는 그걸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연대 안에 들어가고 싶은 거죠.”

그때 어떤 왕이 직접 손을 들어 말했다.

“이미 대답을 들었지만, 다시 한번 확실히 해두고 싶소. 가이더의 일은? 어떻게 되는 거요? 우리 중에는 분명 거기에 협조한 자들도 있을 거요. 물론 나는 그 협력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비비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발언을 한 왕의 얼굴을 유의 깊게 바라보았다.

미스틸 테인에게 귀띔을 받은 트리엔의 왕이었다.

연로한 그는 지팡이 위에 양손을 올려놓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지금 그의 발언은 ‘왜 우리가 몬스터인 너희와 손을 잡아야 하는가?’라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도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는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마음은 이상을 좇지만, 날개로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어요. 제 다리로 걸어갈 겁니다. 그런 분을 쉽게 찾아낼 수도 없겠지만 찾아서 무엇을 할까요? 나라를 대표하는 분의 위신을 깎아내려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요?”

그러자 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비비안은 그런 왕들 앞에서 세인이 말해준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앞으로 몬스터들이 다시 나타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 눈에는 자신이 그런 몬스터일 것이다.

자신의 말을 쉽게 믿어줄 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로 뭉치는 게 최선이다.’

뭉치게 되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도 노려봄직 했다.

난민 문제도, 가이더의 문제도 말이다.

그리고 북진 중인 드레퓨스가 훗날 여기에 도달했을 때, 최선의 상태로 맞이할 수 있었다.

결국, 그녀와 코다로 그리고 세인은 이번 기회에 연맹을 생각한 것이었다.

결속력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연맹 제안이지만 말이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때때로 왕들은 비비안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반대를 표현하기도 했다.

비비안은 그런 반응을 일일이 다 받아주면서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트리엔의 왕이 말했다.

“우리끼리 의논할 시간이 필요하오.”

그러자 비비안이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밝았을 때 시작한 회의였지만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열변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녀는 머리도 식힐 겸 땅 위를 걸었다.

탁 트인 초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이마와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때 코다로와 번우드의 기사들이 비비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코다로는 그녀의 치맛단을 손가락질했다.

“너무 더러워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드레스 자락은 풀밭에 끌려 검게 변하는 중이었다.

그걸 내려다본 비비안은 그렇다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려 발목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저들이 우리와 손을 잡을까요?”

어느덧 비비안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고 있는 코다로가 그렇게 물었다.

답을 알면서도 던지는 물음이었다.

비비안은 던져진 질문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들은 위기 시에 나 몰라라 하고 도피하는 종류의 사람들이죠. 전의 왕들이라면 몬스터로 보이는 우리들과 대화 자체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저들은 왕족의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니까요. 우리가 뭐로 보이든지 결국 수락할 거라고 봅니다. 한번 헐값에 영혼을 팔아넘긴 자들은 계속 싸구려로 굴기 마련이에요. 게다가 우리가 몬스터라도 상관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죠. 저들은 캐시오라는 몬스터만도 못한 인간과 손을 잡았잖아요. 이미 필요에 의해서 말이에요.”

결론은 이미 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비비안은 이제 반대로 코다로에게 물었다.

“그러는 코다로님은 저들을 어디까지 믿으실 수 있겠어요?”

일초도 안 돼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저들은 친구가 아닙니다. 될 수도 없고요.”

비비안도 코다로도 저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앞날에 닥쳐올 불행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게 달갑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상종하기 싫다고 해서 상대와 어울리지 않겠다는 것은 무책임한 생각이었다.

세인도 저들과 동맹을 맺는다 해서 세계수 지역까지 발을 들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세인에게 있어 번우드란 의미는, 글리터에서 실패해도 돌아갈 수 있는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번우드만 건재하다면 그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땅 위의 하늘은 이제 검푸른 빛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밤하늘에는 총총히 박힌 별빛들이 나타나 존재감을 부각했다.

그 별빛들 아래에서 비비안은 코다로에게 친구의 의미를 물었다.

“전에는 친구가 없는 것을 떠나, 친구라는 의미를 창문으로 생각했습니다.”

“창문이요?”

“창문이 없다면 세상과 소통할 수 없을 겁니다. 창문 없는 방은 발전도 없고, 심심하고 외롭죠. 그래서 친구가 필요하긴 하지만, 친구가 많은 건 좋지 않다고도 생각했어요. 방에 창문이 많아서 좋아질 게 없거든요. 햇볕만 많이 들어오고 심란하니까. 그런데 뭡니까 그 눈빛은?”

“아, 아뇨.”

“뭔가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할 줄 알아? 라는 눈빛 같은데요.”

비비안은 부정하지 않고, 그냥 손짓으로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재촉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창문은 있으면 좋지만, 창문일 뿐이에요. 창문이 소중하다 해도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릴 수야 없지 않습니까? 내 방이 있으니까요. 내 인생이 최우선이죠.”

“….”

“집사가 죽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이자 유일한 창문이 닫혔다고 말이죠.”

비비안과 코다로는 한참을 걸었다.

크게 원을 그리면서 말이다.

뒤에서 거리를 두고 걷는 기사들은 작은 목소리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간혹 그들이 웃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다시 입을 연 건 코다로였다.

“그게 사라지고 나자 문득 깨달았습니다. 생각 외로 창문이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고 말이죠.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창문이 없는 방에 홀로 남겨지고 나서야. 비로소.”

비비안은 별빛 아래 천천히 걷고 있는 코다로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 질문의 내용은 창문도 없는 방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의 창문은 몇 개인가요?”

코다로는 이번에도 즉시 대답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과거 집사라는 창문을 잃고 위기에 처했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와 대신 창문이 되어 주었던 세인처럼 말이다.

“두 개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뭡니까 또? 그 표정은?”

“아까부터 계속, 제가 뭐가요?”

“너 따위 인간에게 별로 그런 창문은 되고 싶지 않은걸? 이라는 표정 말입니다. 예, 바로 지금 그 표정.”

비비안은 무슨 말이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애써 입을 열어 부정하진 않았다.

여기에서 다시 중요한 것은, 굳이 입으로 부정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둘이 그렇게 걷고 있는데 멀리에서 시종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비비안과 코다로는 그 시종을 따라 다시 주변국들의 왕이 모인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연대를 하자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  *  *

세인은 성벽 위로 올라가는 경사진 계단 위에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그의 몸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그늘 속에서 그의 흰자위가 깜박였다.

그렇게 몇 번 깜박거린 그는 눈을 감고 멀리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들었다.

가이더의 사람들이 용기를 북돋기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

듣고 있는 세인의 가슴이 어떨지,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었다.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 가이더의 병사들이 그의 감은 눈 속에 그려졌다.

듣기 좋은 노래였지만 그건 그거고, 그의 입장에서는 저 기세를 꺾어놓아야만 했다.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세인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성벽 위로 부는 거센 바람이 그를 맞아 준다.

주변에 서 있는 글리터의 병사들 그리고 끌려 나와 무릎을 꿇고 있는 귀족들에게 가볍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성벽 끝으로 가서 섰다.

흐린 하늘 아래 멀리 가이더의 병사들이 진을 친 게 보였다.

가장 선두에서 활을 든 병사들이, 줄을 만들며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세인은 이쪽도 화살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하는 대신 짧게 말했다.

“수기를.”

*  *  *

덩컨은 곧 화살 공격을 명령할 작정이었다.

그 후에는 저돌적인 공격이다.

그 돌진에 사상자가 많이 나겠지만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성을 공략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포위한 채 피를 말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식량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공성전은 장기전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탐욕스러운 캐시오로 인해 비축해 놓은 성안의 물자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공격하는 이쪽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들은 애국심 하나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불철주야 여기까지 달려왔다.

그런 의지는 높이 사지만, 그렇다고 몰려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식량이 조달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성을 점거한 놈들이 관문을 뚫으며 보인 파괴력을 고려할 때, 장기전으로 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가 성문 안에 있다고 수비만 하란 법도 없었다.

놈들이 왕성에 올 때 쓴 방법이 기마대를 이용한 빠른 이동이었으니까.

“일단 저돌적으로 찔러 본다.”

그렇게 말한 덩컨은 사람들을 앞으로 전진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옆의 지휘관이 덩컨에게 말했다.

“성벽 위쪽에서 신호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간 얼빠진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저건 가이더의 방식인데요?”

그래서 덩컨은 이렇게 대꾸했다.

“나도 눈이 있네.”

덩컨과 지휘관뿐만 아니라 많은 병사가 성벽 위에서 휘두르고 있는 두 개의 깃발을 보았다.

병사 대다수가 그 정확한 뜻을 해석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내성을 점령한 놈들이 이쪽의 수뇌부에 뭔가 의사를 건네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싶어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 뒤쪽에 있는 덩컨과 지휘관들은 다가오지 말라는 수기의 내용을 무시했고 말이다.

“내성 사람들을 고문해서 수기를 휘두르게 했나 보지.”

그렇게 일축한 덩컨은 앞으로 계속 전진하게 했다.

그러니까 싸움이 벌어진 판국에 저쪽에서 ‘싸우지 말자.’라든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한다면, 이쪽에서 그걸 들어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걸 멀리에서 보고 있는 세인도 인정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 바다.

그리고 그 끄덕임을 본 병사들이 묶여 있는 귀족들을 일으켜 세웠다.

줄에 칭칭 묶인 사람들이 일제히 일으켜지며 끌려갔다.

끌려가는 사람들은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면 성벽 위와 바로 아래에는 엄청난 수의 귀족들이 끌려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설마 이 많은 사람을 다 죽이기라도 하겠는가?’라는 것이 그들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끌려 나온 귀족들이 성벽 위에서 밀쳐져 아래로 추락했을 때, 그 설마가 현실이 되었다.

비명이 꼬리를 이으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땅에 뭔가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이제야 상황파악이 된 그들은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쳤다.

뒤늦게 시작된 아우성을 들으며 세인은 전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계속 전진해 오고 있었다.

하긴 고작 이 정도로 병사들을 뒤로 물릴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이라도 저렇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밧줄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병사들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다.

물론 그들은 일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창대에 맞아 얼굴이 피범벅이 되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귀족들이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가운데 세인이 차갑게 말했다.

“저항한다면 이 자리에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고 시체를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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