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45화 (145/307)

# 145

& 죄인의 길 (2)

세인이 가이더의 왕성을 점령하자 지하에서 나온 사람이 있었다.

남루한 차림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오랫동안 햇빛을 못 받은 듯 얼굴색이 하얗고 음침했다.

남자는 어깨를 움츠리고 복도를 걸었는데,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듯했다.

왕성의 홀로 통하는 문 앞에서 병사가 들어가라고 손짓하자, 눈치를 살피던 그는 안으로 발을 옮겼다.

지하에서는 그가 왕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상에서는 이렇게 쥐새끼처럼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게 현실이다.

홀의 안으로 들어선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의자에 앉아 그림을 들여다보는 청년이었다.

검은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청년은 그가 온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림에 빠져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청년에게 다가갔다가, 그림 근처에 이르러 무릎걸음으로 접근했다.

세인은 그런 남자의 행동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계속 그림에 시선을 주던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네 이름은?”

“풀문입니다.”

자신을 풀문이라 밝힌 남자는 고개를 땅으로 숙이며 재빨리 대답했다.

풀문은 여태까지 아주 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

더구나 그건 그의 직업에 꼭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현재 그런 눈으로도 앞의 세인에 대해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느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위엄과 무거운 공포뿐이다.

그때 세인이 남자의 이름을 듣고 소감을 말했다.

“지하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밝은 이름이군.”

그때 풀문은 이상하게도 근처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의 감각이 경고하건대, 근처에 누군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서서 둘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말이다.

그러나 그건 착각일 것이다.

풀문은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세인과 풀문의 근처에 있는 것은 꽁꽁 묶이고 안대와 재갈을 착용한 캐시오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풀문이 잠시나마 무언가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그의 육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과거 한센에게 일어났던 비현실적인 일이 오늘을 스쳐 지나갔다.

현재 캐시오는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다.

눈과 입이 다 막혔고 귓구멍만 뚫려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앞으로 세인과 풀문이 나눌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캐시오는 도마 위의 생선보다 더 비참한 신세였다.

도마 위의 생선은 적어도 요리사가 자신을 어떻게 다듬을지는 모를 테니까.

“풀문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외치며 풀문은 이마를 땅에 처박았다.

지하에서 고문자로서 평생을 보낸 그는 권력자에게 숙이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그건 당연하다.

원래 높은 분들이 다 그렇지만 아랫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여긴다.

지금 세인이 말하는 부탁은 말만 부탁이지, 풀문에게는 하늘이 무너져도 해내야 할 일이었다.

그는 파리처럼 죽고 싶지 않았다.

애국심이고 뭐고 지하에서 평생 살 타는 냄새만 맡은 그의 최고 욕구는 생존이었다.

풀문이 어떻게 하든 세인은 그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추억했다.

지금은 죽고 세상에 없는 한센이었다.

그는 바람 부는 광야에서 이 그림 앞에 앉아있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편 풀문은 세인이 캐시오의 입에서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기다렸다.

고문자를 부르는 이유는 딱 하나다.

고문당하는 제물의 입에서 진실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세인도 처음에는 캐시오에게 왜 글리터를 공격했는지 물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캐시오라는 보잘것없는 인물.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지하로 내빼는 꼴을 보고 나니, 왠지 캐시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바보 같은 놈을 보고 왜 바보짓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캐시오가 미친 짓을 하는 것에는 어떤 타당한 이유도 없었다.

그는 그냥 하고 싶으니까 그 일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결단력이 캐시오를 권력의 일인자 자리로 끌어올린 것이다.

지금은 거꾸로 진창에 처박히게 했지만 말이다.

“그에게서 궁금한 게 있어. 그걸 알아내 주었으면 해.”

“예! 말씀하십시오.”

“풀문. 바다에 가본 적이 있나?”

“….”

순간 풀문은 반사적으로 ‘바다요?’라고 되물을 뻔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높은 분께 의문을 던지는 것은 실례니까.

그리고 당연히 세인도 풀문이 바다에 가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지하에서 고문만 해대는 놈이 바다를 어떻게 가겠는가?

“나도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거든. 아마 캐시오는 그런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바다가 어떤 모습인지. 나는 그의 자세한 설명을 들었으면 해. 소라가 해변에 몇 개나 있는지. 거기 물고기들은 생김새가 어떤지.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알겠습니다.”

풀문은 금방 세인의 말을 이해했다.

세인이 원하는 건 기밀이 아니었다.

캐시오의 숨겨진 재산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단지 고문에 대한 구실이었다.

세인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산도 될 수 있고 호수도 될 수 있었다.

어차피 완전한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라면 대상이 뭐가 되어도 좋다.

‘이상한 걸 물어보면서 피를 말려가며 닦달하란 소리군.’

캐시오로서는 아주 죽을 맛일 것이다.

고문을 가하면 사람은 결국 묻는 것에 답하게 되어있다.

그게 금고의 위치라면 캐시오는 머지않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라의 생김새나 물고기, 해변의 상태에 관해서 묻는다면 참 난감한 일이다.

그리고 그건 그 자체로 지독한 희롱이었다.

쇠집게와 뾰족 침이 오가는 이유가 바다 때문이라면 황당하기조차 하다.

그러면 ‘언제까지?’라고 풀문이 생각했을 때 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주문을 덧붙였다.

“기한은 없어. 그리고 고문을 가하면서 나는 그가 제정신을 온전히 지키길 바란다. 그가 인간 캐시오로서 계속 추궁을 당하길 바라고 있다.”

고문으로 그를 철저히 굴복시킨다면, 그래서 인간 이하의 정신 상태로 굴러떨어진다면, 그를 계속 부수는 맛이 없었다.

두고두고 지금 그대로의 캐시오로서 괴롭히는 일.

결국, 이건 고문 기술자만이 다룰 수 있는 일이었다.

옆에서 이런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는 캐시오의 육체가 파르르 떨렸다.

앞으로 펼쳐질 지옥을 예감한 것이다.

“네가 가진 기술로 최선을 다하고 내가 궁금해하는 점을 뽑아내라. 너는 내 상상을 이루게 해야 한다. 캐시오는 밤마다 울부짖을 것이며, 그의 부모를 찾고 신을 부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을 저주하고 쩔쩔매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거야. 여명이 오지 않는 나날 속에서 말이다.”

너는 내 상상을 완벽히 구현해야만 한다.

상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에 대해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뜻이 음성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때 세인이 처음으로 풀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풀문은 바짝 졸아들었다.

굳이 거기다 대고 세인이 캐시오가 자결이라도 하게 방치한다면 네놈을 박살 내겠다고 말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풀문은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꼈다.

이번에는 생존만 달린 일이 아니었다.

생존은 물론, 고통과도 직결된 일이다.

실수라도 해서 캐시오가 죽는 날에는, 어쩌면 그가 거꾸로 고문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세인은 그에게 채찍만 주지도 않았다.

당근도 제시했다.

“일을 잘 진행한다면 원할 때 햇볕을 받을 수 있게 선처해주마. 그 외의 기본적인 복지도 약속하겠다. 넌 분명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한낱 도구로서 살아왔을 테지.”

풀문은 말없이 이마를 땅에 부딪혀 보였다.

소리 나게 몇 번이나 그 동작을 계속했다.

그리고 세인이 손짓하자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캐시오는 병사들을 시켜 지하로 옮겨질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풀문을 만나게 될 거고 말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문당하고, 다시 당하면서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시달릴 것이다.

그런 캐시오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는 미지수였다.

당사자는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고통의 늪에 빠진 기분일 거다.

캐시오를 처리한 세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림에 다가갔다.

두 손으로 풍경화를 집어 든 그는 그것을 직접 벽에 걸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의 손에 들린 그림은 가이더의 끔찍한 역사였다.

그리고 더러운 치부였다.

이 오욕을 불태우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전시해서 교훈으로 삼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세인은 홀로 이것을 바라보던 한센의 그 모습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때 한센의 가슴 속에 담긴 마음을 상상했다.

그러니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복도 어딘가에 그 그림을 걸어놓고 싶어졌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불태워져도 좋으니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  *  *

왕성 밖, 캐시오가 만들었던 외부 지하감옥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이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오랜 감옥 생활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살아 있었다.

캐시오에게 반기를 들다가 미움을 받아 처형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군이다.

그의 이름은 덩컨.

덩컨은 부하들이 건네주는 허리띠와 단검을 허리에 찼다.

그리고 상황 설명을 들었다.

세인이 이끄는 병력이 관문들을 뚫으며 왕성 앞까지 도달한 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성을 함락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두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장군님의 결단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에게는 장군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연한 의지에 찬 말을 들은 덩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그는 과묵한 사나이였다.

그리고 언제나 가이더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한때 가이더 재건을 위한 비밀 결사대의 일원이었으며 변함없이 캐시오의 미움을 받는 인물이었다.

말에 올라탄 그는 오랜만에 햇볕을 받으며 가이더의 왕성 앞으로 이동했다.

몰려든 사람들은 화살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지휘부에 도착한 그는 임시 사령관에게 지휘봉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가이더 성의 공략을 위해 부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가이더를 구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은 당연히 신경이 온통 성으로만 쏠려 있었다.

내성에서 하늘로 날아오른 전서구는 물론이고 뒤까지 걱정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몬스터들에게서 가이더의 심장인 곳을 탈환하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으니까.

그런 그들의 뒤에서는 커다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이더의 국경에서 회의가 열린 것이다.

무려 주변국의 왕들이 다 참여하는 회의였다.

이 미팅에는 코다로와 비비안도 참여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이 만남을 주선한 건 바로 그들이다.

“집을 비워두시고 있는 분들의 사정을 고려해, 회의를 속행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글리터와 번우드의 첫 대변자로 코다로의 오른팔이 된 재칼이 나섰다.

그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가며 이번 회의를 열게 된 이유와 목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더 추가할 것이 없냐는 말과 함께 각국 대변자들을 살폈다.

하지만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적대적인 시선들 앞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비비안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이렇게 회의가 성사된 것 자체가, 이미 목적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렇게 한 테이블에서 각국 대표가 모이는 일이었다.

몬스터와 자리를 함께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번우드와 글리터의 군사력 앞에서 많은 이들이 위축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사신을 계속 보내고, 기사들로 하여금 무력시위를 하자.

그들은 울며 감자 먹기로 이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회동을 하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지금 비비안의 대리자인 윌의 손에 들린 종이였다.

정확히는 그 안의 내용이었다.

“가이더의 캐시오는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했습니다. 나라를 탈출하려 했던 수많은 난민과 그의 반대파들이 생체 실험에 쓰였습니다.”

윌은 담담한 기색으로 이야기했지만, 왕들의 얼굴은 썩은 빛이었다.

윌이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가이더와 동맹 관계에 들어가고 이런 군사 행동까지 보인 마당이다.

결코, 연대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캐시오의 망상에 의해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질병 실험을 위해 글리터에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현재 가이더의 캐시오는 신병이 구속된 상태입니다. 모든 비극의 시발점은 캐시오의 비인도적인 행위였고, 승부는 이미 끝났습니다. 인과응보로서 말이죠.”

윌이 연설문을 읽는 동안 주변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요했다.

“지금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가이더를 위한 군사 행동을 지속한다면, 이미 결론이 난 일에 한팔 거드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윌은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 북쪽의 왕위에 오른 자들은, 과거의 왕들처럼 품격있고 자격 있는 왕들이 아니었다.

정통성을 가지고 있어도 위기 때 몸을 빼낸 자들이다.

게다가 저마다 품 안에 불온 세력을 안고 있었다.

이런 때에 이 문서가 공개되면 정통성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 반대 세력에게 있어 훌륭한 공격 구실이 된다.

그 외에도 여러 문제가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예를 들면 무섭게 성장한 글리터와 번우드의 군사력이었다.

그때 트리엔 왕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나선 미스틸 테인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윌은 연설문 읽기를 멈추었다.

“제 군주께서는 연설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충분히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굳이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해한 요지를 사신을 통해 전달하고 이견을 조율해도 충분할 텐데 말이죠.”

트리엔의 왕의 물음을 대신한 미스틸 테인의 질문 앞에 나선 것은 윌이 아니었다.

윌은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짜인 각본처럼 비비안이 나섰다.

각국 정상이 만나는 회담자리는 이견을 조율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이견조율은 사전에 충분히 한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는 게 바로 만남의 자리였다.

하지만 몬스터와 인간이라는 벽이 그런 조율 자체를 가로막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군사력과 비밀문서 그리고 거듭된 기사전이 필요 했다.

결투에서 승리한 재칼이나 윌은 상대를 살려서 진영에 돌려보내 주었고 말이다.

관용을 베풀며 다가선 것이다.

몬스터들에게는 절대 볼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런 수많은 작업이 모여 오늘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비비안이 강력한 발언권을 쓸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다.

“그건 대변인 없이 제가 직접 설명하겠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왕들은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들이 바라보는 비비안은 더 이상 작은 소녀가 아니었다.

경시할 수 없는 힘을 휘두르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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