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 광기의 전쟁 (3)
세리스가 탄 말이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에 따라 가벼운 그녀의 푸른 망토가 뒤로 들려졌다.
성벽 위는 거의 박살 났지만, 어찌어찌 살아남은 궁수들의 길 잃은 화살이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힘없이 날아온 화살들을 그녀는 검으로 가볍게 쳐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방패가 아닌 검으로 화살을 쳐낸다는 것이 대단했지만, 그것을 알아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곧 벌어질 전투에 흥분이 최고조였기 때문이다.
먼저, 거친 바람이 후각에 경고했다.
피 냄새를.
그다음은 성문 조각들이 만든 나무 무더기들이었다.
그 앞에서 말들은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세리스는 점점 확대되어 오는 가이더의 병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내의 목에 검을 휘두르자, 뒤에 있던 다음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상대는 키가 컸지만 어린 소년이었다.
순간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말 앞에서 서 있는 것은 소녀가 아닌 소년이었다.
하지만 세리스는 과거 세인에게 내뱉은 자신의 말을 지킬 수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소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검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그녀의 말은 달려나갔다.
그리고 전장 한복판에서 서서히 멈췄다.
세리스는 말에서 내리고 전장을 누비며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은 적들의 사각을 파고들었고 어김없이 죽음을 선사했다.
세리스에게 접근한 적의 기사가 도끼를 던졌지만, 그녀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그 모습은 마치 철옹성을 연상케 하는 위용이었다.
관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 수비와 검술에 찬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기에서 전황을 관전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신뿐이었다.
마치 모두가 죽음의 신이 짜놓은 각본에 홀린 듯, 그의 낫과 손이 되어 죽음을 추수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이고 돋보이는 것은 성벽에서 전투를 끝마친 세인이 아니라 세리스.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털썩 쓰려졌다.
강한 힘이 그녀를 습격해오면 그녀는 힘으로 맞서는 게 아니라, 현란한 기교로 흘리거나 피해냈다.
그리고 간결하고 짧은 움직임으로 적의 숨통을 찔렀다.
그런 동작은 발이 이끄는 동선을 따라 연속된 동작처럼 이어졌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인지하고 거기에 눈을 뜬 그녀는, 시시각각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쓰러트린 그녀는 홱 하고 뒤 돌았다.
그리고 찔러 오는 창을 피하며, 방패로 다가오는 상대의 얼굴을 가격했다.
“악!”
다시 한번 방패가 상대를 밀어내자, 얼굴을 맞은 상대는 쓰러지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세리스는 검을 수직으로 들어 올리며, 그런 병사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
그때 전방에서 글리터의 병사가 보였다.
그는 젊은 청년이었다.
난민 출신이었지만 재능이 뛰어난 소년이었다.
그는 혹독한 훈련을 받아, 인정받은 병사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 여정을 함께하게 된 것이었다.
시간이 느려진 착각이 들었고, 세리스는 그 안에서 그에게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벌렸다.
그리고 말하려 했다.
- 피해. 혹은 도망쳐.
하지만 그건 마음뿐이었다.
눈이 마주친 청년 뒤로 한 소년이 다가왔다.
키가 큰 소년은 손에 검을 들고 있었고, 그 검으로 청년의 뒤를 찔렀다.
청년의 실력을 떠나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전투란 건 원래 그런 것이다.
언제 어디서 날아오는 화살이나 공격에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게 전장이다.
목을 움켜잡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청년을 소년은 연거푸 찔렀다.
찌르고 다시 찔렀다.
글리터의 병사 하나를 그렇게 요절내놓고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멀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말 위에서 자신을 지나쳐 갔던 그 여자다.
‘인간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녀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마치 천사 같았다.
이미 한번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었던 적이 있는 여자의 손이 움직였다.
소년은 순간 생각했다.
인사를 하려는 건가?
그리고 빛이 다가온다.
아니 날아왔다.
사방은 난장판이었다.
고함과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귀를 먹어치울 듯이 요란했다.
그러나 거친 폭력의 난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잦아들었다.
이미 전세는 글리터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세리스는 시체들이 어지럽게 얽힌 한복판에서 소년이 목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그녀가 날린 단검에 맞아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방금 자신이 죽인 글리터 병사의 시체 위로 말이다.
세리스는 뒤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달려오는 병사의 외침을 들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방패를 움직여 상대의 머리를 가격했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듯 비틀거린 그를 검으로 찌른 후 발로 걷어차 밀어냈다.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 걸어간다.
세리스가 포개져 있는 소년의 몸을 발로 밀어내자, 소년의 몸이 벌러덩 뒤집혔다.
그리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소년의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피거품을 입에서 흘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하다.
가이더의 소년에서 글리터의 청년으로 시선을 옮겨간 세리스는, 이미 싸늘하게 굳어 있는 청년의 두 눈을 보았다.
죽은 자의 두 눈이었다.
세리스가 말 위에서 가이더의 소년병을 스쳐 가지 않았더라면, 그는 살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은 앞으로 평생 그녀가 안고 살아가야 할 화두였다.
나라를 저버린 죄책감처럼 말이다.
달갑지는 않지만, 평생 함께해야 할 고통이다.
전투는 이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비명도 잦아질 무렵 세리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성벽 위의 세인을 향해서였다.
죽기 직전인 가이더의 소년은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눈을 감았다.
성벽 위에서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앉아 있던 세인은 세리스가 올라오자 시선을 주었다.
굳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보고 있던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성벽으로 겹겹이 싸인 내성이었다.
양파 껍질 속의 솟아오른 순처럼 생긴 건물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병사들을 안쪽으로 더 진입시킬까요?”
세리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거리를 충분히 붙였으니 됐어. 성문을 부수고 방어 한 겹을 벗겨냈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목전의 위협으로 느꼈을 거다. 단검을 들이댄 느낌이겠지. 그걸 못 느낄 정도로 둔한 놈이라면 충분히 쉬고 난 다음 다시 친다.”
그러자 세리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인이 바라보는 방향을 같이 바라보았다.
어느덧 완전히 전투가 끝난 밑에는, 글리터의 병사들이 정리에 한창이었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그들의 밑에는 돌과 흙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돌과 흙 밑에는 당연히 다시 흙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그 밑의 밑에는….
더이스와 행크가 나란히 통로를 걸었는데, 둘의 앞에는 뚱뚱한 호치가 앞장섰다.
그는 손에 강철 막대기를 들었으며 다른 한 손에는 램프를 들었다.
그들은 한참 전부터 어두운 통로를 걸어왔다.
입구는 아주 멀리 강 쪽에 있었다.
그들이 진입한 입구에 나룻배가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타고 강을 통해 도피하려던 것 같았다.
더이스와 행크는 통로에 들어오자마자 규모와 상태에 놀랐다.
길이도 길이지만 그냥 토굴이 아니었다.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 모두 돌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기둥도 돌로 만든 것이었고, 마감처리까지 되어 있었다.
둘은 서로 눈짓을 했다.
‘이거 한두 명 죽어 나간 정도가 아니겠군.’
‘캐시오는 미친 걸까요? 대체 왜?’
더이스가 생각하기로 전혀 이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위기 때 몸을 빼낼 통로에, 이런 정성을 들인다는 것 자체가 이해 안 될 일이다.
편집증이라고 해야 할지.
악취미라고 해야 할지.
그는 앞장서서 걷고 있는 호치의 등을 안쓰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이 정도 규모라면 그가 아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다 떼죽음 당했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 후로 얼마나 걸었을까?
단조로운 통로 안을 걷고 또 걷던 그들은 슬슬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이 특히 더 말이다.
그들은 반복되는 단조로운 통로에서 길을 찾아가는 호치가 대단해 보였다.
결국, 지루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더이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지상에는 전투가 한창이겠죠?”
“….”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더이스는 농담까지 꺼내려고 했다.
그가 팔꿈치로 행크를 쿡쿡 찌르자, 행크는 왜 그러냐는 듯 인상을 쓰며 더이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행크는 가이더의 왕을 습격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판국에, 이런 유치한 짓을 하는 더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캐시오가 죽일 놈이라고 해도 지금은 가이더의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상대하러 간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그러는 거야 더이스? 자네답게 말이야.”
“이럴 땐 자네 답지 않다고 말하는 게 정상 아니에요?”
“말 돌리지 마! 그리고 좀 가만히 좀 있어!”
그러면서 행크는 손가락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해골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호치의 등을 가리켰다.
저걸 보는 호치의 심정이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이스는 다시 한 시간을 참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나 긴 도주로를 판 캐시오는 미친놈이란 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왕이 된 몸으로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는 것도 엽기였다.
그런데 이런 통로까지 판 것이다.
점점 높아지는 경사를 걸으며 더이스는 덩달아 미쳐버릴 것만 같은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농담을 쳐봤다.
“들어보세요. 어느 날 물가에서 친구랑 애인이 같이 빠져있는 걸 발견했어요. 그렇다면 누굴 먼저 구할 겁니까?”
“음?”
침묵을 뚫고 질문이 날아오자 행크는 흠칫했다.
그리고 머리를 굴렸다.
지상과 격리된 이곳의 분위기는 이런 여유조차 만들어 주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고민하는 행크를 보며 더이스는 회심의 준비를 했다.
‘친구를 구하러 간다.’고 해도 준비된 농담이 있었고, ‘애인을 구하러 간다.’고 해도 준비된 농담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둘 다 안 구하러 간다.’고 해도 칠 농담이 있었다.
이래서야 너무 완벽하다.
사실 ‘둘 다 안 구하러 간다.’고 했을 때 대답할 농담은 여기 와서 지루한 시간에 만들어낸 것이다.
심지어 앞서가고 있는 호치마저 더이스의 농담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기 때문이다.
‘자! 어서 대답을! 하세요!’
더이스가 속으로 그렇게 외칠 때 드디어 행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 친구가 왜 내 애인과 함께 있는데?”
“….”
그거참 수상하네.
왜 하필 같이?
그 후로 다시 드리워진 침묵은 꽤 오래갔다.
지금 이렇게 걷는 그들도 캐시오와 당장 마주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호치의 말대로라면 여러 겹의 철문이 그들을 막고 있을 것이다.
그건 특수한 열쇠가 아니라면 해제하는데 꽤 시간이 걸릴법한 문이었다.
문 해제에 심혈을 기울여도 반나절 정도는 소요되겠지.
문 너머에는 빈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에서 쉬며 추가 병력을 기다릴 생각도 가져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캐시오쪽에서 빨리 움직일 리는 만무했다.
그가 움직일 정도의 위협이 있어도, 도주 결정은 심사숙고가 필요한 중대사안이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캐시오를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
셋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동상처럼 얼어붙었다.
통로 반대편에서 희미한 불빛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더이스와 행크는 서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려 앞에 있는 호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당황한 것은 바로 호치였다.
앞에 누구지?
여긴 비밀유지를 위해 통로 공사에 투입된 모든 사람을 죽여 입막음한 장소이다.
병사들을 배치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병사라 하더라도 입이 많아지면 기밀유지가 어려우니까.
“몸을 숨길 곳은?”
행크가 빨리 정신을 차리고 호치에서 속삭였다.
그 와중에도 멀리 보이던 불씨는 점점 일행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호치는 벽 쪽을 가리켰다.
겉보기에 평평한 벽이었지만, 안쪽에 환기를 위해 숨겨진 공간이 있었다.
허둥지둥하며 벽 뒤로 숨은 세 명은 동시에 한가지 생각을 했다.
‘이쪽 불빛을 보았을까?’
일부러 환한 램프를 들고 오진 않았지만 어쩌면 발각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우려를 종식 시키려는 듯이 행크가 속삭였다.
“발견 못 했을 거야. 저쪽에서 먼저 봤다면 불을 끄고 다가왔겠지. 못 본 게 틀림없어.”
그러자 더이스가 대답했다.
“쉿.”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고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걸어왔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중에는 캐시오의 말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 인간은 벌써 도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