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41화 (141/307)

# 141

& 광기의 전쟁 (2)

그다음은 모두가 예상하는 순서였다.

세인이 지시하자, 무릎을 꿇린 귀족들의 뒤에서 창과 검이 움직였다.

그리고 바람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몸을 관통했다.

그 참혹함에 눈가를 찡그리는 것은 비단 성벽 위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명령에 따라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들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사람 목숨이라는 것이 참 질겨서 다시 무기가 위로 들려졌다.

물론 그 무기들은 피를 머금은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밑으로 움직인다.

비명과 저주가 길게 꼬리를 잇다가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병사들이 세인에게 눈을 돌리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이 끌려 나오고 살해를 당했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이 중에는 분명 죽음이 억울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인은 계속 처형을 명령했다. 그리고 성벽 위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뿐이었다.

그때 포박당해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 중 한 귀족이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 괴물들아! 우린 너희를 몰아냈다 여겼건만,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 우릴 공격하는구나!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 끔찍한 악의 종자들아! 저주받아라! 이 끝은 인간의 승리일 것이다!”

그러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나 세인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다가 피에 젖은 바닥에서 미끄러져 옆으로 굴렀다.

그의 얼굴 반쪽과 옷은 피범벅이 되었고, 이제 주위에서는 살아남은 귀족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병사 한 명이 다가가 쓰러진 귀족의 목덜미를 잡고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검을 높게 들었을 때였다.

세인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고, 피 칠갑이 된 귀족은 고개를 발딱 세웠다.

그리고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세인은 그런 귀족의 시선을 마주하며 차갑게 말했다.

“눈빛이 좋구나.”

“인간의 모습을 한 더러운 몬스터들아. 저주받아라. 가이더가 승리할 것이다. 너희들의 죽는 모습을 보지 못해 원통할 따름이다.”

“뭐가 그리 원통하냐?”

세인의 물음에 귀족이 헛웃음을 흘렸다.

마치 말해주면 네가 이해라도 할 수 있겠냐는 얼굴이었다.

세인은 옆을 보며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다시 무기들이 휘둘러지고 처참한 비명들이 꼬리를 이었다.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에, 세인 앞의 그 귀족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도 분해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때였다.

세인의 입이 열린 것은.

“무덤은 다 어디에 있지?”

“뭐?”

“저 다리가 건설되려면 많은 시체가 생겨났을 것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봐도 다리 밑에 무덤은 없더군. 무덤은 어디 있나?”

그러자 귀족이 세인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땅에 묻는 것조차 번거로워 소각해 버렸나? 아니면 들판에다가 가져다 버렸나? 장례는 치러줬나? 아니겠지? 가족들이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도 허락하지 않았겠지?”

귀족은 말없이 세인을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세인은 아직 목숨이 붙은 채 묶여 있는 귀족들을 보았다.

“너희 중에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 이건 전투도 아니니까.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원래 이렇게 구는 거야. 몬스터라면 이 정도도 부드럽게 대해주는 축에 속하는 거다.”

“….”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너희는 죽어야 한다.”

이들을 살해한 이유는 캐시오가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걸 지금 여기에서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이 더러운 놈아! 우리가 왜 죽어야 하는지 그 터진 입으로 나불거려 봐라! 왜 우리가 이렇게 개처럼 죽어야 한단 말이냐?”

그렇게 말한 남자는 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숨이 멎는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 세인의 눈은 조금 전의 차가운 눈이 아니었다.

거기에 엄청난 위엄과 혐오가 깃들어진 눈이었다.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했다.

눈빛에 서린 경멸이 찍어 누르는 듯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책임을 지기 위해 태어난 피니까 죽어야지. 그 혈관을 채운 피는 평민과 다르다. 책임질 수 없는 것도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자리야. 너희는 억울할 일도 변명할 일도 없다. 귀족 노릇을 못 할 거면 귀족으로 태어나질 말았어야지.”

세인이 상대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고깃덩어리를 취급하는 것처럼 흔들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위압감이 세인의 주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래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머리를 잡힌 채 모욕을 당하는 귀족조차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세인이 옆으로 손을 내밀자 병사가 단검을 건네주었다.

그 단검에 반사된 햇빛이 귀족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너희는 이해받는 사람들이 아니야. 그 반대지.”

캐시오와 그 주변의 귀족들은 멀리에서 세인이 한 귀족의 목을 연거푸 찌르는 걸 보았다.

그 행동에서 미래에 대한 잔인한 암시를 받을 수 있었다.

귀족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 모습을 보았다.

이미 반쯤 쓰러져있는 사람을 계속 단검으로 찌르는 세인을 말이다.

그 시체를 밀쳐내 땅에 넘어뜨린 세인이 명령하자, 병사들은 나머지 귀족도 모조리 죽였다.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의 강이 흘렀고 그 영역은 점점 성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 강 위에서 세인은 검을 뽑아 들고 말했다.

“공격!”

캐시오는 함성과 함께 내성 쪽으로 달려오는 세인의 병사들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가 간 곳은 환락을 즐기던 방이 아니라 깊은 곳에 있는 밀실이었다.

세인의 흔들기가 어느 정도 통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캐시오가 푹신한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했다.

그의 심복 중 하나인 멕베드였다.

“전하. 아무래도 최후의 방법까지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대뜸 멕베드가 한 이야기는, 바로 지하통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뭐? 물론 저놈들 기세가 만만치 않지만, 그 정도야?”

펄쩍 뛰는 캐시오를 향해 멕베드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 진짜 전쟁입니다. 배후 지원도 없이 달려온 놈들이고요. 세상에서 제일 경시 못 할 놈이 바로 목숨을 건 놈들입니다. 게다가 아까 보셨죠? 악에 받친 상태입니다. 최악도 대비해야죠.”

“으음.”

그렇다. 따지고 보면 내성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전쟁을 피했던 비겁자들이었다.

어떤 집단이든 단결력이 우선시 돼야만 했다.

그래야 위기의 상황도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캐시오가 상황을 잘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구슬리는데 소질도 있었고 피의 결단도 내릴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유능한 인물은 아니다.

그의 통솔 기질은 작은 집단에 국한된 것이었다.

필요하면 멋진 척도 할 수 있었고, 변덕스러운 모습으로 남을 밀고 당길 수 있었다.

그리고 과감한 모습으로 존경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깡패들과 같은 집단에서나 통하는 지휘력이었다.

작은 전투는 앞장서서 수하들을 다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짜 전쟁에는 쓸 수 없는 위인이 바로 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짜 전쟁이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까닭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그 전쟁에 걸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시오는 세상에서 자신의 목숨이 가장 중요했다.

그가 종종 카리스마를 보인다면 그건 자신의 쾌락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것도 사람들을 경탄시킬 수 있고, 집결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깡패 집단의 집결이다.

멕베드는 그런 캐시오의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럴 때 캐시오님이 자리에 버티고 앉아 옥쇄를 각오하면, 오히려 일은 잘 풀릴 수도 있다. 그런 중심이 잡히면 다른 사람들도 결사 항전의 의지를 갖출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그렇게 생각한 멕베드는 이렇게 캐시오를 설득했다.

“곤경에 몰리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십시오. 그리고 외부의 군대와 만나 그들을 통솔하면 됩니다. 어차피 지금쯤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리면 안 되나? 그 정도도 못 버틴단 말이야?”

밑바닥까지 썩어빠진 나라에 유능한 기사가 몇이나 버티고 있을 것인가?

그런 사람들은 다 반란군에 붙은 지 오래였다.

멕베드가 설득을 계속하자, 캐시오는 마지못해 동의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캐시오의 입장에서는 체면 챙기느라 본인이 먼저 그런 말을 꺼내기도 껄끄러웠다. 그런데 멕베드가 이렇게 알아서 챙겨주니 만족스러울 따름이었다.

물론 멕베드는 캐시오가 비밀통로를 통해 빠져나갈 때, 자신도 동행하기 위해 이렇게 챙겨주는 것이었고 말이다.

*  *  *

말을 타고 몰려가는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 머리 위를 가렸다.

그 위로 쏟아지는 화살들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중 몇 개는 말들에게 박혀 구슬픈 울음을 흘리게 했다.

말을 타고 성으로 돌격하는 기세는 대단했고 그 자체로 충분히 장관이었다.

하지만 성곽에서 화살을 날리는 궁수들은 의아해했다.

벽을 향해 말을 몰고 질주하는 짓이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옆에서 보면 방패를 들고 바쁘게 달리는 말머리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솟구치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검붉은 빛을 띠고 앞으로 쏘아지듯 달리고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성문에 충돌하자 마치 지진이 일어난 착각이 들었다.

“뭐야 저건? 미쳤어? 저게 뭔데?”

“빨리! 기름물!”

허겁지겁 사람들이 몰려들어 커다란 솥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뜨거운 액체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펄펄 끓는 기름에 맞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칠 때, 세인은 검은 갑옷 안에서 붉은 눈을 빛냈다.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 발로 다시 땅을 디딜 때.

뜨거운 기름이 지글거리며 갑옷 위에서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린다.

그는 그 연기를 헤치며 앞으로 돌진했다.

쾅!

콰앙!

성문이 흔들리며 표면이 부서져 나갈 때 세인은 양손을 뻗어 두꺼운 나무판을 잡고 쥐어짰다.

그러자 나무 표면에 발라 굳어버린 기름칠이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그리고 점점 바깥쪽으로 번져 나갔다.

바둑판처럼 일어나는 균열 밑에는 찢겨 나가는 나무 속살이 있었다.

쇠로 두른 테들이 휘어지자, 세인이 앞으로 돌진했다.

세인은 자신의 주변으로 휘어진 쇠줄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성으로 진입했다.

그 모습에 가이더의 병사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인이 그중 한 명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챘다.

“아아악!”

성문을 찢으며 통과했더라도 뜨거운 기름을 두른 갑옷이 쉽게 식을 리가 없었다.

얼굴에 달아오른 쇳조각을 가져다 댄 것이나 마찬가지인 병사가 비명을 지를 때였다.

땅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이더 병사들 쪽에서 말머리가 나타났다.

금속 랜스를 수평으로 든 기사가 그대로 돌진해온 것이다.

그 창은 세인이 병사로 앞을 막은 바람에 빗나갔다.

대신 말머리가 세인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말과 함께 뒤로 고꾸라진 세인의 근처에서 성문이 한번 크게 울었다.

그리고 세인의 망토가 난리를 치며 움직이자, 성문이 무너지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연기와 튀어 오르는 돌조각 사이에서 달려 나온 것은 세인이 아니라 글리터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창대를 앞으로 세우고 가이더의 병사들에게 뛰어들었다.

그다음은 난전이었다.

성벽 위에서 활을 쏘던 궁수들은 아군과 뒤섞인 적들을 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은 사실 성문이 뚫릴 때부터 다리 힘이 풀린 상태였다.

그때 한 여기사가 뛰쳐나오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활을 내리고 검을 들어라! 아군을 도와야 한다! 어서!”

그때 무너진 성문 쪽에서 뭔가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부서진 랜스 조각이었는데, 여기사의 배에 틀어박혔다.

입에서 피를 흘린 여기사는 비틀거리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옆은 난간이 없는 아래였다.

아래로 떨어지는 여기사의 몸을 그대로 걷어찬 세인은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의 몸에서 갑옷이 사라지고 손에 검이 들렸다.

검은색의 마검이 계단 위에서 몰려나오는 병사들의 검과 뒤엉켰다.

내성의 앞마당은 이제 뒤엉켜 싸우는 사람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일단 어이없게 침입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가이더가 위기를 맞은 듯했다.

생각해 보면 몬스터들도 아무렇지 않게 조각내던 마검의 힘이었다.

드래곤조차 박살 내는 마검의 힘이 인간들을 향해 휘둘러졌을 때 그것을 막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성문을 부수고 진격로를 연 세인이 성벽 위를 정리할 때, 후방의 세리스는 화살 공격이 약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곧바로 그녀는 투구를 눌러쓰며 말 위에 올라탔다.

세리스의 좌우에는 이미 말에 타고 만반의 준비를 한 병사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녀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올리고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가자!”

그녀의 명령에 수많은 기병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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