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40화 (140/307)

# 140

& 광기의 전쟁 (1)

첫 충돌은 빠르고 잔인하게 스쳐 지나갔다.

방어는 너무나도 쉽게 뚫리고 말았다.

일단 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는 것은 화살받이로 키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데다가 정예병으로 키운 사람들이 무장하고 떼로 몰려왔으니, 막아낸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었다.

말을 탄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며 내성 쪽으로 향했다.

역시나 그곳에 전 병력을 집중해 수비력을 굳혔는지 거기까진 무인지경이었다.

세인은 달리고 달려 경사진 다리 앞에 도착했다.

그러더니 말에 박차를 가하며 들려진 다리 위로 뛰어오르게 했다.

갑자기 속도감이 멎고, 시간이 정지한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체공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 짧은 순간은 말의 다리가 땅에 닿을 때 끝났다.

다시 새벽의 공기.

다리 주변으로 일어나 있는 불빛들과 사람들이 말을 채근하는 소리가 났다.

멀리에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광경이 시야를 채웠다.

말은 이제 다리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세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머리카락들이 말의 율동에 맞춰 눈앞에서 시야를 산란시키다가 뒤로 완전히 밀려난 것도 그즈음이었다.

세인은 말 위에서 속도감을 느꼈다.

바람의 저항을 덜 받고자 몸을 최대한 낮춘 그는, 말이 발로 두드리는 바닥의 울림을 느꼈다.

땅을 통해 다시 전달된 말의 힘이 가슴을 때리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런 일체감이 말과 동화되기 위해 노력한 승마자의 최고 성취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동화의 순간은 초원을 달릴 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전장 한복판에서 온 신경이 극대화된 순간에 생생한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일체감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세인이 탄 말은 거대한 망치에 맞아 머리가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말의 몸체는 뒤로 반 바퀴 돌며 반으로 접혔다.

세인은 말에서 뛰어내려 이미 땅에서 구르는 중이었다.

내성의 다리를 지탱한 사슬들이 미미하게 울릴 정도로 강한 일격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커다란 기둥 뒤에서 숨어 있다가 나타난 기사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거한이었다.

신장이 보통사람의 한배 반은 될법한 데다가 허리 두께도 아름드리나무만 했다.

“창을 앞으로 세우고 막아라! 목숨으로 이 불한당들을 막아!”

선두의 세인을 이미 해치웠다고 생각한 그는 검지로 전방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을 따라 수십 명의 부하가 좌우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때 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인이 벌떡 일어나자마자 쓰러져 경련하던 말을 힐끗 보며, 다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기사의 등을 보았다.

기사 입장에서는 그 정도 충격이면 죽었거니 해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그런데 세인을 발견한 한 병사가 소리를 지르자, 기사가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로 세인의 상이 맺히자마자, 그는 반사신경을 이용해 망치를 휘둘렀다.

발작적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세인은 검은 건틀렛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으로 망치를 받았는데, 바위가 충돌하는 소리가 다리 위에 울려 퍼졌다.

세인은 몸을 약간 뒤로 빼내 충격을 완화하며 앞을 보았다.

기사는 어깨가 빠졌는지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뒷걸음질 쳤다.

세인은 기사의 머리를 그대로 후려갈겼는데, 그 일격에 투구가 찌그러지며 기사는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아래로 낮춰진 그의 머리를 반기는 것은 위로 솟구치는 세인의 주먹이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사의 머리가 박살 났다.

그것도 모자라 세인은 그의 허리를 밟아 부러뜨렸다.

그리고 걷어차 몸이 접힌 채 쓰러져버린 자신의 말 쪽으로 보냈다.

평소에 한 실력 하던 기사가 순식간에 죽임을 당하자 병사들은 공포에 질렸다.

그리고 그 공포에 완전히 몸을 맡기기도 전에 세인이 날뛰는 것이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그의 공격에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창을 찌르면, 그것을 가볍게 피한 세인이 어느새 변화시킨 마검으로 상대를 찔렀다.

목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쓰러지는 병사의 등에 다시 검을 꽂는 것은 기본이다.

방패를 들고 달려오던 병사들 두 명은 앞으로 솟구치는 세인의 신형을 멍하니 보았다.

세인은 다리 기둥 밑으로 늘어진 쇠사슬을 붙잡고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방패를 든 병사들을 밀어버렸다.

“어어!”

“어어어!”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버티려고 했지만, 곧 다리의 난간까지 밀려났다.

그리고 난간에 몸을 걸친 상태로 반 바퀴 돌아,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그다음은 온몸이 박살나는 참혹한 죽음이었다.

다리의 높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세인이 쉴 새 없이 검은 광풍처럼 몰아친 다음에는 병사들의 시체만 즐비할 뿐이었다.

비참한 죽음을 내린 세인의 근처로 말을 탄 병사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은 내려서 고삐를 권했지만,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해라.”

마검을 몇 번 휘둘러 피를 바닥에 덜어낸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여러 개의 다리가 연결된 곳이 지금 그가 있는 장소였고, 급경사가 이뤄지며 내성 근처로 이어지고 있었다.

걸어갈수록 고도가 점점 높아지며 황금빛 성이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저곳을 점령하는 게 세인의 목표였다.

달려간 글리터의 병사들은 내성 주변의 병사들을 물리쳤다.

내성 지역은 글리터처럼 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저택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 비워진 상태다.

세리스와 기사들은 곳곳에 매복해 있는 병사들을 처리하고, 몇몇 귀족의 저택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다.

내성으로 피신한 귀족들은 그 광경을 뻔히 눈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뒤늦게 세인이 도착했을 때, 세인의 병사들은 화살을 막기 위한 목책을 만드느라 한창이었다.

물론 그 재료는 귀족들의 저택에서 나온 것이었고 말이다.

적들이 화살 공격을 활발하게 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중요 귀족들과 측근들이야 당연히 내성 쪽으로 피신했겠지만, 모두가 안쪽으로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성 주변 지역에 서 있는 건물들의 수도 꽤 되었고, 한나라 수도에 몰려있는 귀족의 수야 말해 무엇하랴.

끌려 나온 사람들이 전면에서 방패가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글리터의 만행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세인이 손가락으로 지시를 내리자 그 내용을 들은 세리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건 미리 논의된 내용이 아니다.

“세인님. 그건 안 됩니다.”

세리스가 다가와 속삭이자 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세리스. 너에게 어린 소녀를 짓밟으라고 명령하지 않겠다. 어린 소녀가 앞에 보인다면 얼마든지 말을 멈추어도 좋아. 하지만 의무가 있는 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건 전쟁이야.”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세리스 앞에서 그는 다시 말했다.

“우리는 절대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상, 결착을 보는데 망설이지 않겠다. 전쟁은 더럽고 참혹하며 악마 같은 행위야.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지.”

세리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떻게 포장해도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역겨운 행위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벌어졌고,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언제나 네 검에 빛이 깃들기를 응원하겠다. 하지만 이건 그런 바람과는 전혀 다른 문제야.”

*  *  *

캐시오는 물론 성 밖의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국경에 경계를 세워놓은 건데, 그걸 뚫고 여기까지 침투한 것도 참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역시 선제공격을 한 것은 잘한 일이었어. 이런 게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미리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더러운 글리터 놈들.”

그는 즉각 다른 곳에 주둔 중인 군대를 부르도록 지시했다.

그다음은 수성전이었다.

관문이 뚫린 속도로 보아, 수도방위를 위해 준비된 병사들로 막아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냥 수비를 단단히 하고 시간만 끌면 압승일 것으로 생각했다.

캐시오는 아직까진 지하통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적당한 조치를 명령한 다음에 그가 한 일은 자신의 방에서 여자들과 뒹구는 일이었다.

긴장도 풀 겸, 배짱 있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술은 사람이 의지하기 좋은 소모품이었다.

캐시오가 언제는 안 그랬느냐마는 고급술도 실컷 즐겼다.

“나라 운영은 정말 힘들구나. 믿을 만한 놈들을 국경에 보냈지만,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저놈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한탄하는 캐시오였다.

그리고 그는 국내의 불온 세력들에 대해서도 이를 갈았다.

입으로는 ‘나라를 위한다 어쩐다.’라고 하지만, 이렇게 몬스터가 쳐들어올 때 한팔 거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래도 ‘기본적인 지시도 해놨으니 나머지는 밑의 놈들이 다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에 균열이 생겨났다.

“전하! 전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나체로 침대 아래쪽에 앉아 있던 캐시오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달려온 사람이 한 말을 듣고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뭐? 진짜야?”

캐시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리고 대충 옷을 걸치곤 밖으로 향했다.

가이더의 수뇌부는 부패했지만 완전한 쓰레기 집단은 아니었다.

글리터가 몬스터 집단이라는 생각을 하며 공존할 수 없다 여기고 증오를 불태우긴 했지만, 그들이 취하는 스탠스를 냉철하게 보았다.

그렇게 보자면 글리터가 가이더에 완전히 위협적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마찰이 빚어지는 것도 그들의 영역에 침입했을 때였다.

북의 허리띠 지역 말이다.

난민 문제로 충돌이 있었지만, 적어도 글리터 쪽에서 먼저 국경을 넘어 공격해 오진 않았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생긴 심리적 기준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가이더의 수뇌부는 글리터가 몬스터들처럼 막 나가는 존재는 아니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이다.

캐시오는 글리터를 선제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평소 상대가 악질적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모순적이지만 글리터가 보인 평소 모습이 캐시오의 인식에 썩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연 몬스터 놈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캐시오는 친위대와 함께 성벽 쪽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이미 수많은 귀족이 나와서 우글거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시오는 성곽에 손을 짚으려 하려다 옆 사람이 손바닥을 잽싸게 내미는 것을 보고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무게를 실어 지지대처럼 이용했다.

그런 상태로 눈을 가늘게 뜨며 멀리 좌우로 늘어선 병력을 보았다.

역시나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문을 열고 리스크를 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놈들이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캐시오의 질문에 아무도 답하는 자가 없었다.

불경해서 그렇다기보단 앞으로 벌어질 일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캐시오의 전방으로, 한 명이 연단에 오르는 게 보였다.

그는 세인이었다.

세인은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바람 속에서 드러났다.

약간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은 눈 주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세인은 투구를 한 손에 든 채 크게 외쳤다.

“나는 몬스터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때 캐시오는 속으로 ‘누가 그걸 몰라?’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입으로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화살이 저기까진 무리겠지?”

“곡사로 쏘면 가능합니다만, 분명 포로도 맞습니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신음성을 흘린 캐시오와 귀족들은 세인이 있는 곳을 보았다.

연단 앞에는 내성으로 피신하지 못한 귀족들이 포박당해 세워져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숫자다.

혈연관계로 맺어진 준 귀족조차 모조리 끌고 나온 것이다.

세인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가이더의 상징이여. 너를 무너뜨리겠다. 악착같이 공격해서 마지막 한 놈까지 잡아내겠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죽음을 선사하겠다. 항복 선언도, 휴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축처럼 너희를 도륙하겠다!”

왜냐면 세인은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린 적에게는 광기에 차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아군에게는 한이 서린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돌아와서는 안 되는 땅.

과거에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으나 무산되고, 좌절한 자의 비탄이 서려 있었다.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나 영화를 누리길 바랐건만, 결국 이런 재회를 하고야 말았다.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너희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을 것이다.”

세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 눈빛을 가까이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면 캐시오와 다른 귀족들은 분명 오한이 들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죽기 직전까지 공포에 떨어라. 그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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