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 진격과 전투 (7)
수도까지 가는데 몇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래도 길게 끌지 않고 압도적으로 이겼으며, 관문 몇 개를 넘으니 왕성이 바로 코앞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뚫리는 방어선을 보며 세인의 일행들은 묘한 심정이 되었다.
착잡하기도 하고 씁쓸한 기분.
그리고 아무리 멀리에서 스쳐 지나가듯 관찰해도 알 수 있었던 건, 백성들의 삶이 많이 피폐해져 있다는 것이다.
몬스터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무너진 채 시간이 흐른 집터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그것을 본 병사들의 마음을 다독이느라 기사들이 부단히 애를 썼다.
한편으론 캐시오에 대한 분노를 부추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밤이었다.
밤하늘 속에는 하얀 구름이 간간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세인의 일행은 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불을 피웠다.
한밤중에 이러는 건 나 여기 있다고 알려주는 꼴이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왕성 쪽을 바라본 세인이 대뜸 한 말은 이것이었다.
“미친놈.”
아직도 수복 중인 수도가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왕성의 외성은 반파된 채 그대로였다.
가까이 다가간다면 뻥뻥 뚫린 성벽에 처진 그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임시방편으로 해둔 것이었다.
몬스터에게 당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런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니.
내치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모습에, 캐시오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내성 쪽은 방비를 굳건히 했지만, 그거야 자신의 안전을 위한 거였다.
백성들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외성을 저렇게 놔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왕성 쪽으로 고개를 돌린 백성들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외성이기 때문이다.
그때 굳건한 성벽이 버티고 있어야 마음에 안정감과 믿음이 생긴다.
게다가 엽기적인 것은, 외성부터 내성으로 이어지는 다리 건설이었다.
저것이 어떤 필요 때문에 건설되는지는 몰라도, 수도가 저 지경인데 저런 대규모 공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의아한 일이다.
결국, 신하 중에서도 저런 이상한 짓을 하는 캐시오를 말릴 자가 없다는 소리였다.
캐시오도 문제가 있지만, 저런 공사를 저지하지 못한 신하들도 문제였다.
병사들은 나무를 쓰러뜨리고 땅을 정리했다.
그리고 임시 야영지를 만들었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밥을 짓고 배를 채우는 일이다.
파수꾼들을 주변에 넉넉하게 세운 세인은 술도 돌리도록 했다.
물론 그와 기사들은 제외였다.
그들의 야영지로 세리스가 합류한 것은 새벽 즈음이었다.
야영지 중앙으로 간 그녀는 화롯불 앞에 앉아 있는 세인을 보았다.
맥이나 다른 기사들은 일어나 세리스를 맞이했지만, 세인은 밤이 구워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으로 간 세리스는 끈으로 말린 문서 뭉치를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게 불만 노려보고 계시면 눈이 상해요.”
그녀가 건넨 문서를 받아든 세인은 내용을 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내용을 봤나?”
“그러면 안 되죠. 그리고 볼 필요도 없었어요. 직접 가보니 공격의 선두에 서고 싶어졌어요.”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락한다.”
그리고 호치라는 남자를 부르게 했다.
물론 밤을 같이 나눠 먹자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기사들과 세인이 바라보는 앞에서 호치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로서는 몬스터들 사이에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었을 것이다.
“이제 자네가 우리와 합류하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세인의 말에 호치는 재깍 대답했다.
“캐시오는 내성 밑에 비밀 통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위기 때 탈출하려고 아주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 놓았어요. 그걸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은밀한 곳이라면 지도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지도가 존재한다면 호치의 머릿속이 유일할 것이다.
사람들은 내성 밑에 지하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곤 신음했다.
“뭐? 탈출로를 만들어 놓았다고? 그것도 외성에 백성의 피난용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캐시오 본인이 쓰기 위해?”
더이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것까지는 평소 생각해보지 못했군.
물론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도 생목숨이니까 살고는 싶겠지.
하지만 이거 왠지 힘이 빠지는걸.
“그런 인간이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의미를 알 리가 없겠지.”
행크가 더이스의 말을 받았다.
국난 시에 꼭 왕이 목숨을 같이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런 건 그냥 상식으로 굳어진 것이었다.
신하들이야 왕의 목숨을 살리고 싶어 하겠지만, 왕이 왕좌와 목숨을 함께하는 건 본능적인 것이다.
그때 생각을 정리한 세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왜 토레스가 눈앞의 인물을 합류하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위기가 닥쳐오면 캐시오는 당연히 그 통로를 이용할 것이었다.
호치가 없었다면 닭 쫓던 개 꼴 나기가 십상이다.
그를 만난 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건 호치에 대한 것이었다.
“지도를 그려줄 수 있나?”
“복잡합니다. 그리고 지도만 안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에요.”
세인은 호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거기 들어가는 것은 혹독한 훈련을 받은 정예들이다.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을 지켜줄 수 있을 거란 보장은 못 해. 그런 장담은 누구도 해줄 수 없는 거야.”
그때 호치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우리 아틀리에 사람들은 공사에 투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큰 걸 바란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땀 흘리며 일한 정당한 대가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캐시오는 그런 기본적인 신용조차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호치의 눈은 분기가 서려 있었고, 그의 격양된 감정은 입을 통해 말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에게는 채무가 있어요. 보수는커녕 모두를 떼죽음시킨 벌이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그게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하루하루를 견뎠습니다. 때론 그것이 너무 꿈처럼 느껴져서 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실현될지도 모르니 제 목숨은 상관없습니다. 통로 안에서 목숨을 잃어도 좋아요. 그래 봐야 동료들 곁으로 돌아갈 뿐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그를 물러가게 했다.
그리고 기사들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캐시오 같은 인간이면 결정적인 위기 때 기필코 도망친다고 봐도 좋았다.
그것을 고려해 의논했다.
열띤 논의 중에 맥이 물었다.
“그런데 저 문서는 어쩌실 겁니까? 저걸 백성들에게 공표하면 다들 공분할 테지만, 우리에게 힘이 실릴 텐데요.”
팔짱을 낀 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은 알 권리가 있지만,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나라의 기강 정도가 아니라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문제다. 아주 기본적인 신뢰가 무너지고 나면 극심한 혼란이 찾아올 거야. 그리고 우리 몫도 아냐. 결정권자는 여기에 없다. 아주 멀리에 있지. 그녀는 조세핀이라는 여자야. 그리고 그녀의 자식이지. 그들이 나라를 위해 결정할 사안이야.”
“….”
“다만, 보안이 철저한 테이블에서라면 이걸 이용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먼 이야기군.”
회의가 끝나고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
천막 안에서 뒤척이던 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나무를 지나쳐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았다.
나무 그루터기 위에서 그는 수도를 감상했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불빛들이 많았다.
이 야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평소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일까?
각자의 꿈과 마음을 안고 삶과 투쟁하고 있을까?
그때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는 시선을 수도에 고정한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세리스의 향수 냄새는 아주 미약했기에,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체향을 더욱 짙게 실어다 주었다.
“이곳으로 복귀하는 중 휴식을 취하다가 소녀의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
“잘 부르더군요. 가사는 좀 슬픈 것이었지만, 그게 백성들의 일상을 말해준다고 느꼈어요.”
세인은 턱짓으로 도시를 가리켰다.
“저 안에도 그런 소녀가 있을 거야. 어쩌면 달리는 말 앞에 서 있을지도 모르지.”
세리스와 세인은 말없이 빛을 뿜어내고 있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나 높은 산에 있는데도, 도시를 채운 인간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살갗에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땐 당신을 위해 고삐를 늦추지 않고 말을 달리게 하겠습니다.”
전혀 그녀답지 않은 말이, 세인으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게 했다.
세리스의 아름다운 옆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마음도 그럴까?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제게 말했어요. 기사의 자격이 없다고. 맞는 말일지도 몰라요. 저는 위선자고 악한 사람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할머니는 저에게 말했어요. 제가 할머니에게 고마워하게 될 거라고 말이죠. 어쩌면…. 그건, 사실일지도 몰라요.”
“….”
“캐시오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이 감정도 한낱 위장이고, 거짓말일는지도 몰라요. 정의는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고, 저는 작은 것. 제 욕망이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그런 게 중요해요. 수백 개의 소원보다 그런 하나의 소원이 중요해요.”
세인은 다시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성기사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신선하군. 아주 참신해.”
그러자 세리스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이 팔짱을 끼었다.
“어느새 물들었나 보죠. 그 성기사는 불행히도 몬스터의 옆에 항상 붙어 있잖아요.”
“….”
세리스가 방금 내뱉었던 말과는 달리, 질주하는 말 앞에 소녀가 있다면 그녀는 당연히 달리던 말을 멈출 것이다.
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밤공기 속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던 둘은 그렇게 오래 시간을 보냈다.
* * *
어딘가를 습격할 때 가장 좋은 시간은 동이 떠오르기 전의 새벽이었다.
정신 무장도 그렇고, 그때가 바로 사람의 신체 리듬이 가장 취약해지는 시간이었다.
산 아래로 내려온 사람들은 그제야 말 위에 탔다.
갑옷들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말들의 입김은 직선을 그리며, 그들과 함께했다.
“도시에서 나는 쇳소리는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가장 좋아. 그게 가장 듣기 좋은 소리지. 철은 그렇게 쓰여야 하는 거야.”
그 말이 바로 세인이 출발하기 전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투구를 눌러쓴 사람들이 타고 있던 말을 재촉하자, 말들은 점점 속도를 높여 갔다.
옆을 지나치던 나무들이 점점 사이를 좁히고 땅이 빠르게 물결쳤다.
말발굽이 평평한 도로를 밟는 것은 금방이었다.
새벽이라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점점 왕성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달려가는 사람들은 두꺼운 망토를 둘렀고 한결같이 방패를 옆으로 차고 있었다.
안장에 달린 철제 무기들은 말의 동체를 따라 위아래로 요동쳤으며 거친 칼바람 속에서 더욱 싸늘한 예기를 흘려냈다.
그들이 처음으로 저항에 부딪힌 장소는 바로 외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였다.
거기에는 미리 방비를 하던 가이더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외성 벽의 상태는 방어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간밤에 불빛을 발견하고 대책을 세웠겠지만, 그 대책이 그물로 막아놓은 벽을 복구시켜 주진 못한다.
그물이야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름이 큰 외성을 지키려면 많은 수의 병사가 빙 두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투입해봐야 널리 분산된다는 이야기다.
최소한의 머리라도 있다면, 여기에 많은 병사를 투입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방어력을 기대할 수 없는 외성.
큰 원을 지키는 것보다 내성인 작은 원을 견고하게 지키는 게 더욱 쉽다.
게다가 우두머리는 백성들의 안위를 상관하지 않는 캐시오였다.
내성에는 그 말고도 귀족들이 몰려 있을 것이고 말이다.
습격자들이야 외부를 쑥대밭으로 만들든 말든, 그들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자기들 목숨이었다.
“어차피 외부 방위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공성 병기도 없고, 보급도 없는 무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동맹국도 있으니 저들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나 마찬가지입니다.”
내성에서는 당연히 그런 의견이 나왔다.
그렇다 쳐도 한나라의 수도가 이런 급습을 받는 것 자체가 너무 비정상적인 일이긴 했다.
캐시오가 얼마나 국방에 관심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세인이 탄 말은 앞을 막아놓은 장애물로 도달하기 전에 속도를 늦췄다.
그래도 꽤 급박하게 속도를 줄이느라, 뒷다리에서 전달되는 힘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말의 상체가 번쩍 들렸다.
그에 따라 세인의 몸도 뒤로 움직였다.
말의 상체가 다시 내려오며 앞발굽이 땅을 디뎠을 때에는 주위에 병사들이 몰려든 상태였다. 그들은 창으로 세인을 찌르려고 했다.
성이 난 듯 날뛰는 말 근처에서 보인 그들의 분전은 좋은 결과로 보답받지 못했다.
세인은 찔러오는 창들을 방패로 막아냈다.
그 방패를 등 뒤로 둘렀을 때는 뒤에서 응원군이 도착한 다음이었다.
번개처럼 달려온 사람들은 병사들을 몰아쳤다.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부딪쳐 오는 경우도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비명을 꼬리처럼 매달고 날아간 병사가 설치물 위를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