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38화 (138/307)

# 138

& 진격과 전투 (6)

세리스가 이끄는 사람들은 질풍노도처럼 달렸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도착한 곳은, 코린토스 운하 근처의 등대였다.

근처에서 사람들과 말들을 쉬게 한 그녀는 한밤중에 풍경화를 펼쳐 보았다.

옆에서는 힐다가 램프를 들고 그림을 비추었다.

여기가 확실했다.

등대 뒤의 하얀 집까지 똑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세리스는 그림을 둘둘 말아 다시 원통에 넣었다.

그리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주변에 흩어져 쉬던 사람들은 말을 끌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곳을 습격하겠습니다. 조를 나누어 주겠어요. 각 조의 선두는 저와 힐다가 맡습니다. 힐다.”

힐다의 이름을 부른 그녀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빛냈을 뿐이다.

그러자 힐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에 멘 방패를 끌어 내렸다.

대장장이 잭이 만든 엄청 큰 방패가 힐다의 상반신을 다 가렸다.

무게도 무게지만 엄청나게 커다란 방패였다.

그길로 세리스는 하얀 집으로 쳐들어갔다.

물론 침입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마중 나온 병력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세리스의 강력한 검술은 상대를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뒤쪽의 힐다는 탈출하는 관리인을 잡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을 제압하고 관리인을 무릎 꿇린 세리스는 차갑게 말했다.

“숨겨진 입구를 말하세요.”

그러나 관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세리스가 쓴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바로 진실을 말해준 것이다.

“한 번 더. 저는 딱 한 번 더 당신에게 입구의 위치를 묻겠어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입니다. 어차피 우린 입구를 찾아낼 거예요. 그러지 못할 것이었으면 여길 피바다로 만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세리스는 끝까지 입을 다문다면, 그를 앞으로 찾아낼 공간에 집어넣겠다고 말해주었다.

진심이었다.

그러자 관리인은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입구의 위치를 실토해 버렸다.

그 공간 안에 들어간다는 건 전염병에 걸린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정보를 얻은 세리스는 힐다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힐다는 관리인의 목덜미를 내려쳐 기절시켜 버렸다.

세리스는 병사들에게 불을 환하게 밝히고 주변을 망보라 했다.

그녀는 힐다와 함께 입구를 찾아냈다.

그녀들 앞에 있는 것은 지하로 통하는 철문이었다.

“약초를 입에 무세요.”

“예.”

힐다는 질병 저항제를 마신 후 해독 약초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복면을 썼다.

손에는 두꺼운 장갑도 꼈다.

그러나 세리스는 질병에 대비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대신 뽑아 든 검에 희미한 빛이 서렸다.

악을 물러서게 한다는 성기사들의 기술, 홀리 라이트였다.

여기에서의 악은 성기사에게 해를 주는 모든 것을 포함하므로, 당연히 질병 같은 것도 해당이 된다.

방패를 높게 든 힐다는 세리스를 따라 어두운 지하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녀는 세리스의 앞에 서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세리스는 선두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미약하게 빛나는 하얀 검을 든 성녀.

힐다의 눈에는 그렇게만 보였다.

호리호리하고 아름다운 성녀는 순백의 검을 든 채 불길하고 어두운 지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어떤 위협이 아래쪽에 도사리고 있을까?

축축한 물방울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힐다는 자신이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자신이 방패로 그녀를 보호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어둠이 세리스를 집어삼켜 흔적도 없이 녹여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힐다의 철저한 기우였다.

세리스는 힐다의 도움이 필요해서 그녀를 동행한 게 아니었다.

단지 힐다가 이번 일을 계기 삼아 정신 무장이 되길 바란 것이다.

지하는 좁은 공간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돌로 된 통로 안쪽은 들어갈수록 악취가 났다.

썩은 냄새가 후각을 자극할 무렵, 갑자기 어둠 속에서 습격자가 나타났다.

힐다가 놀라며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세리스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가장 빠른 것은 세리스의 검이었다.

상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검날이 앞을 베었다.

마치 전광이 번쩍이듯 통로가 밝아졌고 습격자는 바닥에 쓰러졌다.

무기를 든 남자들이 연이어 나타났지만 소용없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은 세리스는 상대가 거침없이 나타나는 족족 해치웠다.

좁은 공간에서 사용하는 그녀의 검술은 주로 찌르기였다.

급소만을 골라 치명타를 날리는 세리스 앞에서 남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에 힐다가 감탄할 무렵 통로 끝의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제대로 무장한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세리스가 힐다에게 등을 맡길 차례였다.

힐다는 커다란 방패를 휘두르며 남자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허리춤의 단검을 들어 목숨을 빼앗는다.

세리스는 그야말로 물 흐르듯이 움직이며 적들을 해치웠다.

왜 그녀가 자신 있게 이곳으로 뛰어들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금발이 등 뒤에서 춤을 추며 사방을 누빌 때마다, 목이 베인 남자들이 털썩털썩 쓰러진다.

그리고 이제 느껴지는 악취는 최고조에 도달했다.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던 세리스는 힐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의미를 몰라 머뭇거렸던 힐다는 뜻을 알아채고 단검을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든 세리스의 손 위에서 단검이 빙글빙글 돌며 솟구쳤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은 세리스가 단검을 앞으로 힘차게 내던졌다.

“아악!”

그러자 단검에 명중된 몬스터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반신이 달팽이와 닮은 끔찍한 몰골에, 힐다가 다시 단검을 꺼내 들 때였다.

“잠깐! 잠깐!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몬스터는 놀랍게도 인간의 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는 그런 말 실력으로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딱 봐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어서 몬스터도 필사적이었다.

“살려주세요! 저는 원래 인간들 사이에서 유명한 현자였습니다. 그러니 저를 살려주셔야 합니다. 저는 유용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죠!”

세리스는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장검을 몇 바퀴 돌렸다.

상대에게 겁을 주려는 게 아니라, 단칼에 치기 전 손목을 푸는 행동이었다.

의외로 뼈가 굵으면 잘라낼 때 손목이 시큰거릴 수도 있으니까 하는 준비운동이다.

“당신은 좀처럼 믿지 못하겠지만 아까 제가 한 말은 진짜입니다.”

그런 말을 한 몬스터는 상대가 자신을 단칼에 죽이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재빨리 선수를 친다.

“좋습니다! 좋아! 제가 쓸만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죠! 이렇게 합시다. 당신에게 있어서 절실한 문제를 하나 내면, 제 지식으로 그것을 해결해 주겠습니다. 제가 명쾌하게 답을 준다면 그 답례로 저를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그녀는 세인이 아니었다.

세리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죽어.”

그리고 몬스터의 팔을 잘라냈다.

“으아악!”

체액이 바닥에 흩뿌려질 때 세리스는 상대를 걷어찼다.

몬스터가 쓰러지며 중심을 잃었을 때 민첩하게 날아가 검을 휘둘렀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다.

일격으로 몬스터의 머리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세리스는 그것을 발로 걷어차 멀리 보내 버렸다.

이렇듯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다만 캐시오가 몬스터를 이런 곳에 놔둔 것이 치가 떨릴 뿐이었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게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전염병을 연구하기 위해 몬스터의 힘을 빌린 건가?’

그녀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지식이 많은 괴물을 발견한 캐시오는, 오히려 그 괴물을 이용할 생각을 한 것이다.

상당히 엽기적인 선택이었다.

세리스가 자신 안에서 고조되는 분노를 느낄 때, 어디선가에서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미약한 멜로디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힐다에게 말한다.

“힐다.”

“예!”

“천천히 제 뒤를 따라오면서 문서 같은 것이 보이면 모조리 챙기세요. 우리가 나갈 때 여기를 불태울 겁니다. 여기는 너무 위험한 공간이에요.”

“알겠습니다.”

힐다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세리스는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달려가는 방향에는 미약하게 들려오는 멜로디가 있었다.

그 멜로디가 나오는 곳을 가기 위해서는 가로막는 남자들을 해치워야만 했다. 그건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세리스는 단칼에 한 명씩 물리쳤다.

힐다는 그런 그녀를 따라가다 금고를 발견했고, 방패로 내리쳐 자물쇠를 부쉈다.

그녀가 안에 든 문서를 뒤적일 때 세리스의 앞을 가로막는 거인이 있었다.

근육질의 남자는 세리스를 보며 뭔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리스는 그런 상대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자들은 다 죽을 놈들이었다.

이들은 인간을 공격하고자 악마 같은 일을 계획했다.

그것도 모자라 안에 들어와 보니 몬스터와도 손을 잡은 판이다.

그녀의 눈빛이 얼마나 차가운지 도끼를 든 남자도 긴장할 정도였다.

그녀가 별안간 왼쪽으로 움직이자, 남자는 오른쪽으로 한 발짝 떼며 도끼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게 남자의 마지막이었다.

도끼날 위로 수평을 이룬 하얀 검날이 남자의 목을 날려버렸다.

나뭇가지를 치는 양 깨끗하게 목을 쳐낸 세리스는 남자가 막아섰던 문으로 다가갔다.

그 뒤에서 이제 멜로디가 곧 끊어질 듯 미약한 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시체들이 산과 언덕을 이루며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종종 몬스터나 동물 사체도 보였다.

이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캐시오였다.

그는 사악한 계획을 위해 사람들을 납치하고 몬스터를 시켜 연구하게 했다.

코를 찌르는 시취에, 세리스는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지하라서 서늘한 공간은 밑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연주자의 정체는 문 앞에서 모포 한 장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 남자였다.

나이가 꽤 돼 보이는 남자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세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수난을 당한 흔적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고급스러운 옷차림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이런 곳에서 고생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낯이 익는군.”

피리를 입술에서 떼어낸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리스는 잔뜩 쌓여 있는 시체들을 보다가 마지막으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다시 입을 연 건 남자였다.

“크림힐트의 손녀?”

“예. 저희 할머니 되십니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외자로군.”

사실 세리스는 그 남자에게 손을 내밀고 같이 나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외자라는 단어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들어왔다.

남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드러난 그의 하얀 목에는 검게 변한 혈관들이 도드라져 보였다.

“캐시오와 결탁한 건가? 새로운 책임자로 여기에 온 건가?”

“구출하러 왔습니다.”

“구출할 사람은 없다네.”

“최소한 제 눈앞에 한 명 보이는데요?”

세리스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한센이 떠올랐다.

그는 한센의 뒤를 밀어줬던 귀족이었고 가이더를 재건하려는 비밀결사대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결국 캐시오의 눈 밖에 나서 이런 꼴이 되고야 말았다.

캐시오가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을 때만 해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던 그의 희망은 무참히 박살 났다.

캐시오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저열하고 치사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파들을 제거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설득이라든지, 최소한의 존중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바보 같군.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갈 거네. 내 가족들은 여기에서 실험체로 다 죽었어. 그러니 나도 가족이 간 곳으로 가야지. 여기가 지옥이라면, 정작 여기에서 구원되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아나?”

“….”

“그건 나라의 위기 때 국외로 몸을 빼낸 당신이야. 그리고 당신 일가지. 그래. 크림힐트의 손녀. 어떤가? 나라를 저버리고 비겁하게 도망간 이후의 삶 말이네. 안타깝게도 아주 혈색도 좋아 보이고 건강해 보이는군. 세상은 참 이상하게 변해 버렸어. 몬스터들은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는데, 캐시오 같은 자가 날뛰고 자네 같은 인물이 건강하게 내 앞에 서 있군. 나는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야.”

세리스는 원색적인 비난 앞에서 침묵을 지키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고 서 있던 그녀는 다시 눈을 뜨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를 불태울 겁니다. 그러니 같이 나가요. 찾아보면 치료 방법도 있을 겁니다.”

팔짱을 낀 남자는 세리스의 상냥한 말에도, 내민 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지만, 캐시오의 계획이 망가진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다행이야.”

그리고 다시 피리를 집어 들었다.

“저와 같이 가세요.”

“세리스.”

그때 남자가 처음으로 세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서도 배신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게 정말 싫다는 표정이었다.

“세리스. 기억하게. 내가 나라를 망친 죄인이라면 자네는 나라를 버린 죄인이야. 그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마치 천사처럼 서 있지만, 자네는 접대부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인간이라네. 최소한 접대부는 흉기를 들고 설치진 않거든. 검을 들고 있는데, 설마 아직도 자신을 기사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

“돌아가게. 내게 있어 자네는 캐시오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인간이야. 설령 내가 건강한 상태였다 하더라도 결코 자네의 손을 잡지 않았을 거야.”

결국, 그 완강한 거절 앞에서, 세리스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은 남자는 계속 피리를 불었다.

그 피리는 딸의 유품이다.

지금 그는 죽음을 기다리며 딸에게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셈이었다.

그의 딸은 산처럼 쌓여 있는 시체 더미 어딘가에 묻혀 있었다.

서툴고 가냘픈 피리 소리는, 화마가 지하 공간을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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