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35화 (135/307)

# 135

& 진격과 전투 (3)

“여기가 어디지?”

수십 구의 시체가 생겨나고 그 밑으로 고인 피 웅덩이가 세인의 발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콧수염의 남자에게 묻는 그였다. 하지만 남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난 모른다.”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죽여라.”

이제 병사들은 포로들을 끌어내지 않았다.

그냥 울부짖는 사람들 속으로 난입해 무기를 휘둘렀다.

매우 살풍경한 광경이었다.

“너는 이 요지에 와있을 정도로 중요한 자다. 그리고 캐시오가 신뢰하는 자이기도 하지. 그런 네가 모를 리는 없어. 네 부하가 저렇게 개돼지처럼 죽어가고 있는데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자니까, 더더욱 알고 있겠지. 수도 근처 어디쯤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 내부 구조와 돌아가는 사정을 원한다.”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도 세인의 눈은 한점 떨림이 없었다.

그는 앞으로 펼쳐질 콧수염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포에 질린 콧수염만 그걸 모르는 거 같아서 좀 안타깝기도 했다.

“지금 내가 하는 걸 보면 짐작했겠지만, 넌 더 비참하게 죽게 될 거야. 실컷 놀림당하다가 결국 화형당할 거다. 너를 매달고 구멍이란 구멍에서 뿜어내는 연기와 악취를 감상하마.”

“이 미친놈.”

“그렇게 팔딱거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넌 어차피 내게 필사적으로 애원하게 될 거다. 그때는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겠지.”

세인은 잔인한 눈빛을 흘리며 콧수염 기른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리고 장난감처럼 위아래로 흔들었다.

공포도 공포지만 수치스러움에 남자가 눈물을 흘릴 때, 세인은 다시 말했다.

“어차피 넌 그렇게 최악의 상태로 죽는 거야. 이곳까지 오면서 홀몸일 리는 없겠지? 내가 권하는 것은 네 가족의 죽음을 사라는 것이다. 네 가족을 너와 똑같이 고문한 다음에 불태워 죽일지. 아니면 단칼에 죽일지는 내게 달려있다. 그러니 오히려 너는 내게 애원해야 해. 저곳을 말해 줄 테니 제발 들어달라고 말이다. 내가 듣지 않으려 해도 매달려야지. 그런데 지금은 반대가 된 것 같구나.”

“….”

세인은 처음부터 여기 있는 놈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뿌리부터 썩은 놈들이었다.

아주 긴 시간을 주면 언젠가 이들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건 종교인의 시각이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필요한 정보를 듣고 이놈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일이었다.

세리스는 자신의 권한으로 갇힌 사람 중 일부를 광장으로 나오게 했다.

노예와 다름없던 가이더의 백성들은, 그들을 괴롭히던 가이더 병사들의 최후를 목격했다.

얼떨떨한 기분인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이는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기억에 담으려 했다.

혹사당한 사람들의 심정이야 제각각이겠지만 그것까지 헤아려 줄 수는 없었다.

“사람이 절망에 빠졌을 때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고 위안을 받는 것처럼, 학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장면도 필요한 법이지. 그게 바로 사람이란 동물의 심리지. 슬프지만 무시할 수 없는 심리.”

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불붙은 막대기를 들고 걸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떠는 포로들의 몸에 불을 붙이며 뒤로 물러났다.

소름 끼치는 비명이 사방에 울려 퍼지고 불타는 인간이 몸부림쳤다.

권력에 짓밟힌 사람들을 치유하는 방법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노예처럼 일하고, 짓밟히며… 착취당하고, 굶주리며 갖은 학대를 받아야만 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이 정도 뿐이다.

매듭을 푸는 정도가 아니라 불태우는 것을 보여주는 일.

세인은 눈을 빛내는 가이더의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불타 죽는 사람들의 죄목을 하나하나 읊지도 않았다.

그냥 덤덤하게 일을 진행했고 콧수염의 남자는 가장 마지막에 남겨놓았다.

그는 부하들이 비명에 죽어가는 것을 보며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뽑아냈다.

부하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저렇게 죽을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엄청난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발광하듯 죽어간다.

그들이 내뿜는 열기와 비명이 얼굴과 고막을 때렸다.

극도의 공포가 그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악마! 이 미친 악마!”

“몬스터라고 불러. 몬스터니까, 너희 쪽에서 사람 목숨을 도구 삼아 질병을 보냈잖아. 이건 그런 행동에 대한 화답이다. 몬스터인 내가 할 줄 아는 건, 다른 몬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고문하고 불태우는 것뿐이다. 그게 너에겐 의외인 건가?”

역겨운 냄새에 기절 직전인 콧수염의 남자는 기가 완전히 꺾인 상태였다.

“새삼스럽게 굴기는.”

남자는 그제야 완전한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뒤늦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눈물 섞인 자백을 들은 세인은 사람들을 시켜 그를 무자비하게 구타하라 지시했다.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네.”

사람 하나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그 장면에서 눈을 돌린 세인이 기사들에게 말했다.

“이 그림에 그려져 있는 장소는 전염병을 만들어 내기 위해 캐시오가 만든 집이다. 누군가가 가서 여기를 점령하고 증거를 모아 와야 해.”

“훗날 캐시오 폐위의 근거로 삼으실 생각이십니까?”

“폐위?”

콧수염의 남자를 잘 다진 고기로 만들고 있는 광경 앞에서 세인이 피식 웃었다.

“나는 그를 왕은커녕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아. 그의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일말의 존중이라도 있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어. 앞으로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잘 봐라.”

“….”

“그곳에 가면 아비규환의 지옥을 보게 될 거다. 그가 목적을 위해 인간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안 봐도 뻔해. 누가 지원하겠나?”

세인의 말에 맥이 나섰다.

그는 손을 들어 올린 세리스를 무시하며 앞으로 나선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릴 때 맥이 말했다.

“이런 건 나이 많은 사람이 해야죠. 이미 살면서 못 볼 걸 많이 보았으니까요.”

극도로 굳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행크가 참 별것이 다 자랑이라고 투덜거렸다.

“어차피 버린 감수성. 막 굴린다는 이야기인가.”

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유대가 깊어져 있었다.

충격적인 장면 속에서도 이런 행동까지 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세인도 행크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그 투덜거림을 듣고 뭐라 나무라지 않았다.

흘러가는 상황이 맥으로 결정되는 분위기였다.

고개를 끄덕인 맥은 콧수염 남자의 몸에 불을 붙이는 병사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군중의 원독에 가득 찬 눈빛을 바라보았다.

콧수염 남자의 처절한 비명이 주위를 길게 찢었다.

수많은 시선 속에서 그가 지옥으로 향하는 여행을 떠났다.

누더기를 걸친 관람자들은 알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추운 곳에서 저런 옷차림은 너무 가혹하다.

옷을 가져다주라고 말하려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가겠습니다.”

세리스는 아직도 들어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제가 먼저 지원했어요.”

“세리스.”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아요. 견딜 수 있습니다. 나이나 성별이 문제가 아니라면 보내 주십시오. 병사 스무 명 이상만 주신다면 은밀히 달려가서 정리하고 증거도 모아 오겠습니다.”

맥과 세인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최악의 것을 보게 될 거야. 몬스터가 한 짓이라면 우린 충격을 받더라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같은 인간이 한 짓이다. 거기에서 뭘 보게 될지 생각해. 어떤 생각이 들지도.”

손을 내린 세리스는 검의 손잡이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저는 기사고 실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감당할 마음의 준비도 되었고요. 그러니 보내 주세요. 맥님은 번우드에서 글리터로 돌아올 만큼 확신을 하셨죠. 저도 그런 확신을 더 쌓아 나가려는 겁니다. 보내 주십시오. 세상을 직시하지 않으면 제 몫을 발휘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세인은 이제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락한다.”

콧수염의 남자가 죽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던 사람들은 일단 제대로 된 집으로 옮겨졌다.

그렇다고 당장 좋은 대접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쪽도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사람들에게 적당한 통제를 가하며 관리에 힘썼다.

세인은 나뭇가지로 땅에 가이더의 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을 해주었다.

“후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를 써두었다. 그리고 대부분 병력은 여기 방벽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 이렇게 된 이상 여기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해. 번우드가 글리터를 방어벽으로 삼는 것처럼 여기는 우리 글리터의 방벽이 된다.”

더이스가 눈치도 없이 손을 들자 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야? 요즘은 손을 드는 게 유행이야?”

헛기침을 한 더이스는 세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대부분 병력을 여기로 빼면 수도는 어떻게 합니까? 시간이 지나면 관문마다 병사가 들어찰 겁니다. 아무리 상태가 안 좋은 가이더라지만 그 정도 인물들은 남아 있겠죠.”

“우리는 운용할 수 있는 기마대를 가지고 남하한다. 가장 빠른 속도로 중간 거점들을 타격하지 않고 내려갈 것이다.”

기사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가이더 위에 수직으로 내리그어진 선을 바라보았다.

지금 세인의 의도를 그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성은 물론이고 작은 거점들도 다 무시한단 말씀입니까?”

“그래. 여긴 우리 조국이다. 중요한 길도 알고, 이름 있는 성의 위치도 알고 있다. 수도까지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어. 가장 빠르게 가는 거다.”

“목격되지 않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빨라도 전서구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운이 좋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수도는 방비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병사가 필요합니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빨리 달리기 경주가 아니었다.

이겨야 끝나는 싸움이다.

그리고 빨리 달리기가 관건이라도, 어차피 말이나 사람이 훈련받은 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수도의 책임자가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소식을 받고 성문 정도는 닫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병사들과 병사들 간의 싸움이었다.

그게 아니라 해도, 최소한 포위를 하려면 어느 정도 이상의 숫자가 필요했다.

병사가 많을수록 전투에 유리한 건 세 살 먹은 애도 아는 이치다.

소수 병력을 이용해 빠르게 수도로 진격한다 치자.

그런 마당에 모든 군대 운영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병참선이었다.

성이 뒤로 남겨진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세인이 지나가고 난 후에 성문이 열리고 보급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많은 숫자는 전투에 유리하고, 그 숫자는 먹고 자야 유지된다.

병참선이 끊기면 운용할 수 있는 병력에 한계가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성이나 거점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성채 하나만 붙잡고 시간을 보내는 것도 꽤 장기전이었다.

이런 것 때문에 나라 하나를 치려면 대군이 필요한 것이었다.

세인이 지금처럼 후방의 보급선을 무시하려면, 가이더의 민가를 불태우고 식량을 빼앗는 것도 고려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도 보급을 해결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지금 세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전투에만 국한된 얘기였다.

기세 좋게 진격해서 성문을 두드린들 뭘 할 것인가?

전투가 아닌 전쟁에서 이겨야 원하는 결과가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세인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정석대로 하면 장기전이다. 난 털끝만큼도 우리가 질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만심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우린 드레퓨스와도 맞서 싸울 정도로 무장되어 있었고, 숱한 아수라장을 헤쳐왔다. 여기저기 떠돌며 마음을 하나로 뭉쳤고, 고난 속에서 전우로 매일 다시 태어났다. 가이더와 싸우면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그게 현실이야.”

기사들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석대로 천천히 진행하면 가이더는 복구할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된다. 아무리 엉망인 나라라도, 그 나라를 목숨 걸고 지키려는 애국자는 어디에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 자체가 존속할 수 없어.”

과거 그들도 그런 위치에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우린 명백한 적이고 몬스터다. 더러운 침략자들이다. 목숨을 걸고 맞설 것이다. 그런 자들의 목숨마저 연소하게 되면? 가이더는 정말로 최후의 불씨마저 빼앗기는 거야. 그런 그들을 뒤에 남겨놓을지라도 빠르게 수도로 달려간다.”

사람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캐시오는 본인이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없는 인간의 나라가 존재할 수 있나? 그는 그런 것조차도 모르는 저능아다. 그런데 그 저능아가 가장 고귀한 자리에 앉아 있어. 나는 개인적인 원한 외에도 결코 그놈을 인정할 수 없다. 그는 나의 적이며. 가이더에게 적이 되며. 글리터의 적이 되고. 이미 인간의 적이다.”

그때 세인의 눈은 차갑게 불타고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었다.

상반되는 그 말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허공에 뱉어지는 그의 음성도 날선 분노를 담고 있었다.

“가장 빠르게 달리겠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겠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함께할 수 없는 조국. 가이더를 위해 가이더의 왕을 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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