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 진격과 전투 (1)
글리터로 돌아온 세인은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푹 쉬고 싶었다.
머릿속에 차오르는 분노보다도 마음을 채운 탈력감 때문이었다.
과거 한센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던 자신이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이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군주가 원한다고 해서 그때마다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판단을 내릴 시간이 촉박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괴로운 자신을 수습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다.
부름을 받고 세인의 방으로 초대된 기사들은 그에게서 캐시오가 저지른 짓을 전해 들었다.
세인은 이야기를 전해 주면서도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평소 전령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럼,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침중한 안색의 맥이 물어오자 세인은 바로 대답했다.
“먼저 너희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그다음에 내 생각을 말하지.”
세인이 먼저 생각을 말한다면 기사들이 의견을 내놓기 힘들 수도 있었다.
행크와 더이스, 맥이 자기 생각을 말하고 나자 세리스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하며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달려가면, 결국 가이더의 국민들이 죽을 거예요. 그리고 가이더 주변에서 우리를 어떻게 볼지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린 이유가 있어서 가이더로 가는 것이지만, 그런 사정을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아시잖아요. 우리가 출발하면 이 문제는 여러 방향으로 확대될 겁니다.”
“….”
“게다가 우리는 가이더에서 태어났어요. 정말로 병사들에게 가이더의 병력을 창으로 찌르라 명령하실 수 있겠어요?”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 세인이 눈을 내리깔고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지?”
“여기서 제 결론까진 필요 없어요. 제 말은 무겁게 생각해서 판단하시라는 이야기에요.”
“그냥 내가 듣고 싶은 거야. 이야기해봐.”
세리스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캐시오를 죽여야 합니다. 그는 가이더에 있어서 외부의 적보다 더 치명적인 존재예요. 그야말로 가이더의 진정한 적입니다.”
그리고 세인은 입을 연 맥의 의견도 들었다.
맥의 의견도 세리스와 같았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가이더를 공격해야겠어.”
“준비시키겠습니다. 시간이 촉발할 테니까요.”
세인이 하고 싶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한 맥이 말하는데 세인이 덧붙였다.
“가이더는 우리에게 공격 의사를 보인 거야. 이미 외교적인 단계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이렇게 명백하고 치명적인 도발과 적의를 확인했는데, 수비가 답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저쪽은 이미 드레퓨스의 편이다. 물론 그걸 드레퓨스가 모른다는 게 희극적이지만,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수단을 마련할 것이다. 우리가 망설이거나 수비를 굳힌다면, 가이더의 다음 공격을 채찍질하는 꼴이지.”
그리고 침묵.
“또 그걸 떠나, 나는….”
그 침묵을 깨고 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그의 얼굴은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죽어간 사람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죽어갈 사람도 눈앞에 떠올랐다.
전쟁이란 것은 원래 어쩔 수 없었다.
끔찍한 만큼 희생자가 생겨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놈을 죽여버리고 싶다.”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각기 흩어져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말들을 끌어내고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대장간에서 화살을 받아오도록 지시하고 장비들을 점검한다.
병사들을 집합시키는 그 모습을, 세인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이 서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캐시오는 바보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글리터에 도달하는 시간과 반응이 오는 시간을 대충 계산하고 있을 것이었다.
정 궁금하면 나중에 정찰자를 보내겠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 시간 동안은 캐시오가 방심하는 시간이라는 뜻도 된다.
도중에 한센이 사람들을 독살하고 자살했을 줄이야.
신도 아닌 캐시오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이제 시작될 전투가 한결 수월해질 수도 있었다.
병사들이 모인 가운데 세인은 가능한 한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장된 연설로 사람들을 부추기지 않았다.
반대로 사기를 고조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포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이 전쟁은 필요하다. 해야만 한다. 저쪽이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가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출발하는 이유는 이쪽이 중지하거나 피하고 싶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끝낼 수 있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눈이 한결같은 시선으로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깃든 것은 충성심이었다.
세인도 그런 그들을 마주 내려다보더니, 자리에서 내려갔다.
군은 세인이 이끄는 부대와, 세리스를 주축으로 기사들이 결집한 부대로 나뉘었다.
세리스는 자신 앞에 몰려든 병사들에게 짧게 말했다.
“흩어져서 저마다 투쟁하고자 하면, 필요 이상으로 고통받고 고립되어 새벽이 찾아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두 하나가 되어 투쟁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당당히 새벽을 맞이합시다.”
오래전에 검제가 했다던 말이었다.
하나가 되어 당당히 맞서 싸우자는 이야기다.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대로 방패를 두들겨 보였다.
그리고 행군하기 위해 자리를 찾아갔다.
행크는 시끄럽게 떠들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더이스는 농담으로 병사들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기사들은 개성에 따라 병사들을 다루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났다.
세리스의 경우에는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근처에 서 있는 힐다를 손짓해서 불렀다.
“제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그날이 온 거 같아요, 힐다. 당신이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걸 알지만 어쩔 수 없군요. 고난은 함께 해야 하니까요. 당신만 아낄 수는 없어요.”
힐다는 세리스의 앞에서 얼어붙었다.
직감적으로 그녀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안돼요. 세리스님. 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동안 육체적으로 많이 굴렀다.
정신적으로는 트라이얼 워커와 붙어 다니며 사람들을 상대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러면서 경험을 쌓았다.
이제 그녀는 거구에 맞게 전투하는 법을 알았고, 타고난 힘을 다룰 수 있었다.
타고난 재능 때문인지 그녀의 실력은 이미 발군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사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세리스가 허리춤에서 하얀 검을 뽑자 힐다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행동을 세리스의 말이 붙잡았다.
“친아버지 때문인가요?”
힐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바보처럼 굳었다.
그 앞에서 세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왜 진실을 볼 줄 아는 엘프와의 동행을 부담스러워 했는지 이젠 알아요. 기사 될 사람이 어떤 됨됨이를 가졌는지 확인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당신 어머니에게 모든 사정을 전해 들었어요.”
“그렇다면 더욱 잘 아시잖아요. 저 같은 범죄자가 왜 기사가 될 수 없는지!”
힐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생각해보면 그녀의 운명도 참 기구했다.
세리스는 힐다 앞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따라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가 힐다의 눈을 현혹했다.
“목이 졸리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와 맞선 건 죄가 아니에요. 그때 당신은 당신의 힘도 자각하지 못했잖아요. 당신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술 취한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와 남동생이 죽었을 거예요. 그건 사고였고, 당신이 쓰고 있는 그 굴레는 부당해요. 힐다.”
힐다는 벌벌 떨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세리스의 목소리가 그보다 빨리 힐다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힐다. 친아버지와 일어난 비극보다. 당신이 양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생각하세요. 힐다. 제발 저를 보세요.”
힐다 앞에서 세리스는 자신을 내보였다.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배덕자입니다. 그런 주제에 뻔뻔한 낯을 하고 기사라 자처하며 싸웠습니다. 지금의 저를 보면, 정의보다는 한 개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얽매여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지조차 회의감이 들 뿐입니다. 그러나 힐다.”
성검을 든 그녀가 힐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우리가 기사가 되는 이유는 약점이 없고 완벽해서가 아니에요. 인간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불완전하더라도 다른 인간을 보듬어 줄 수 있습니다. 모자란 부분으로도 타인을 지키겠다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사가 되어 주시겠어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인간을 위해서.”
이 시간.
그녀는 시공을 초월해 자신의 가치관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떤 시간의 채로 걸러내더라도, 변치 않는 믿음이 그녀를 끊임없이 결정했다. 그리고 정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바로 세리스의 본질이다.
힐다는 믿을 수 없게도 그런 세리스의 눈 안에서 성화같은 것을 보았다.
그 앞에서 그녀는 맥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지금 이 시각, 힐다의 대답이었다.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높게 들려졌고, 아래로 추락하며 힐다의 한쪽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세리스는 말했다.
“기사는 이익을 좇는 자가 아니다. 기사는 목숨을 나눠주는 자이다. 기사여 약자 앞에서 약해지고.”
다시 성검이 들려졌다가 다른 쪽 어깨를 짚었다.
“기사여 강자 앞에서 한없이 오만해 져라. 기사여 악 앞에서 거침없이 선을 변호하거라. 기사여 네가 벌거벗어야 할 때는 오로지 동정심 앞에서다.”
그리고 성검이 힐다의 머리 위에 놓였다.
“마지막으로 기사여 한계 없이 명예로워라. 네가 이것을 심지로 품고 매일 아침 일어나. 네 의지를 검이 아닌 방패로서 실천할 수 있다면, 너는 이미 모두가 갈구하던 바로 그 기사다.”
그리고 세리스는 이제 기사가 된 힐다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세리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그녀를 부축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동지. 이제 갑시다. 가슴 아픈 전쟁을 하러.”
* * *
글리터의 병력은 북의 허리띠 지역에서 강했다.
그러니 남들에게는 지옥 같은 행군인 것이, 사실 이들에겐 별것 아니었다.
집이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이미 추위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돌아다니는 요령도 붙어 있었고 보온도구도 잔뜩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정말 경이로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허리띠 지역을 돌파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가이더가 만든 방벽은 매우 두껍고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런 게 가능했다는 건, 그만큼이나 사람들을 혹사했다는 이야기였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몰아붙이고, 시체가 나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건 그거고 현실은 쉽게 넘기 어려워 보이는 장벽이 버티고 서있었다.
세인은 그 해결책을 자연 성벽처럼 버티고 있는 산에서 찾았다.
가이더도 성벽이 될 수 있는 산을 놔두고 따로 벽을 만들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래서 피레네 산의 경우, 고지를 넘어가면 바로 가이더의 안마당이었다.
“대신 산에 많은 보초가 포진해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걸리면 밑에서 소란을 떨 거고요.”
더이스의 말에 세인이 대답했다.
“나와 몇 명이 일단 돌파하겠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가 안쪽에서 문을 열어 보이겠어.”
“위험하지 않을까요?”
“지금 여기까지 무기를 들고 와서 안전함을 따지자는 거야?”
세인은 앞으로 가이더가 세운 장벽을 전부 소유할 심산이었다.
이제 이 장벽은 거꾸로 그들을 지키는 방패이자 경계수단이 될 것이다.
점령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야음을 틈타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을 데리고 산을 올랐다.
물론 말들과 함께였다.
밤눈이 좋은 남자들이 산의 지세를 훑으며 오르는 가운데, 세워진 초소가 보였다.
하지만 보초들은 추위에 못 이겨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지금 가이더의 상태를 보면 병사들이 본분에 충실한 게 오히려 이상하기도 하다.
입을 막은 말들을 끌고 산을 오른 그들은 능선에서 노출되지 않도록 재빨리 정상을 넘었다.
그때를 계기로 방벽 안쪽의 건물들이 그들의 눈에 노출되었다.
곳곳에 횃불로 밝힌 구역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나무가 빽빽이 자란 지역을 벗어나자 눈으로 뒤덮인 땅이 나왔다.
그제야 말 위에 올라탄 세인은 장검을 빼 들었다.
달빛을 받은 장검은 재를 묻히지 않아 번쩍거렸다.
그 빛이 호선을 그리며 몇 바퀴 돌았다.
그러자 검날에 맞은 흡혈 새들이 조각나서 부서진다.
먹잇감인 줄 알고 날아오던 새들은 놀라며 분주히 흩어졌다.
그런 새들에게서 관심을 끈 세인은 말을 몰아 경사를 타고 달렸다.
발굽에 눈이 차일 때마다 얼어붙은 땅의 속살이 드러났고, 말이 지나가며 두두두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아직 밑까지는 한참이므로, 소리가 저쪽까지 들리진 않는다.
말들은 처음에는 발목이 부러질까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이었지만, 경사가 완만해지자 점점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