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32화 (132/307)

# 132

& 지크를 만나러 가는 길 (2)

미스틸 테인의 말이 멈춘 곳은 트리엔의 왕성 앞이었다.

검을 차고 걸어가는 그의 서슬 푸름에 보초병들은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트리엔에서 미스틸 테인의 입지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는 왕이 있는 홀 앞에 섰다.

그쯤 되니 왕실 근위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고 말이다.

“알만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무장하고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비켜라.”

마침 근처에 있던 근위대장이 이 실랑이를 보고 달려왔다.

그는 거구의 남자로 타고난 힘이 장사였다.

그가 미스틸 테인을 잡고 밀쳐낼 수 있음에도, 당장 그러지 않은 까닭은 간단했다.

미스틸 테인이 트리엔에서 몇 안 되는 진짜 귀족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에 눈길을 준 그는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그 검은 설마….”

“사람을 물려주십시오.”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압니다. 그래서 통과시켜 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진심이십니까?”

미스틸 테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근위대장은 고뇌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결심을 내린 듯 근위병들에게 물러서라 명령했다.

마음 같아서야 미스틸 테인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가 목숨을 걸고 행동할 때, 그것을 막는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근위대장은 잘 알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미스틸 테인이 걸음을 떼자 근위대장은 그 뒤를 따랐다.

안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신하들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상석에 있는 나이 든 왕도 놀라 단잠에서 깨어났고 말이다.

턱을 괴고 졸던 왕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앞으로 보았다.

그곳에는 미스틸 테인이 있었고, 곧 그가 든 검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이게 무슨?”

미스틸 테인은 검을 뽑았다.

그러자 잘 닦여서 녹은 슬지 않았지만, 세월에 무뎌진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히 무엄한 행동이 아닐 수 없는 이 짓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 모습을 보고 흥분한 신하들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왕이 손을 들어 올려 진정시켰다.

“미스틸 테인. 다른 자도 아니고 어찌 그대가…. 내 면전에서 무슨 짓이냐.”

미스틸 테인은 한차례 심호흡을 한 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고약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저분이 누구이신데!”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다시 난리를 쳤지만, 백발의 왕은 오히려 침착했다.

그는 기력이 없을 뿐이지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미스틸 테인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트리엔의 주인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간신히 다시 일어난 이 땅은 불모지가 되고 맙니다.”

“살벌한 말이군.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가이더의 캐시오란 자는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품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고, 포악한 이리같이 굽니다. 그와 거리를 두셔야 합니다. 트리엔은 쇠약하고 가이더는 광기에 차 있으니, 그가 노리는 게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나라 간의 약속이다.”

“그는 가이더의 왕이 아닙니다.”

왕은 미스틸 테인의 결연한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충언한 그대는 충신이오. 그대의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하지. 그대는 그대의 선대가 왕족을 지키기 위해 휘둘렀던 칼을 가지고 왔군.”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누구보다 고귀한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은 트리엔의 주인으로서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미스틸 테인의 폭언 앞에서 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의 내용은 테인의 폭언에 절대 뒤지지 않는 또 다른 폭언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라. 미스틸 테인. 너와 달리 국난 때 몸을 뺐던 몰염치한 자 투성이다. 충신들은 다 죽었고, 약삭빠른 자들만이 그림자로 남아 저주처럼 왕성을 떠돌고 있다. 그림자의 무게만큼이나 가볍고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면서 말이다. 더구나 나는 왕가의 정통 핏줄도 아니고, 더 큰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런 망령 같은 내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나?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거 같나?”

말을 마친 왕은 미스틸 테인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돌연 사자처럼 호령했다.

“잡아라!”

그러자 잽싸게 몸을 움직인 근위대장이 자결하려는 미스틸 테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그와 함께 바닥을 나뒹군다.

쇳소리를 내며 검이 바깥쪽으로 밀려 나갈 때,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낮게 소리쳤다.

팔걸이를 주먹으로 치며 말이다.

“이 멍청한 위인아. 너는 목숨을 걸고 간언했다 생각했겠지만! 그런 비분강개로 인해 일국의 충신 하나가 죽어버리면 무엇이 남는단 말이냐. 이 홀의 그림자 전부가 죽는 것보다 트리엔에게 더 큰 손해임을 왜 모르는 것이냐? 너는 나보다 더욱 어리석은 자구나!”

그리고 눈물투성이가 된 미스틸 테인의 볼이 땅바닥에 닿는 것을 지켜보았다.

근위대장은 그런 미스틸 테인을 필사적으로 찍어 누르며 속삭이고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제발 진정하십시오.”

주변이 정적에 휩싸인 가운데 왕은 장탄식을 쏟아냈다.

사실 여기서 미스틸 테인만큼이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왕은 무겁게 말했다.

“알겠다, 미스틸 테인. 너의 뜻을 받아들이겠다. 캐시오와 거리를 두도록 하지. 그러니 자택으로 돌아가 근신하거라.”

*  *  *

한센은 수많은 사람과 함께 글리터로 출발했다.

어느 때보다도 풍족한 상태로 말이다.

짐 마차와 수레들이 움직이는 가운데 모자란 것은 병사들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많아지고 나면, 오히려 몬스터들 쪽에서 마주치는 것을 꺼리게 된다.

밤이 되면 펼쳐지는 바람막이 천들은 인근을 다 뒤덮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천천히 글리터쪽을 향해 이동했다.

한센은 낮에는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옆에는 건장한 남자 한 명이 붙어 있었다.

그 남자는 옷깃을 여미며 한센에게 말했다.

“정말 춥군요. 바람 때문에 그런지 살갗이 마비될 정도예요.”

“그래도 전보다 많이 따뜻해진 거라고 그러더군.”

“나이도 있으신데 이런 일을 하시려니 힘드시겠어요. 아무리 캐시오의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동행하는 까닭은 글리터 때문인가요? 그쪽과 연이 있으시니까요.”

그러나 한센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닐세.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가고 있는 거지.”

“그 사람이 누굽니까?”

“지크라고, 이렇게 말해줘도 자네는 모를 사람일세.”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는지, 질문을 던졌던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자리를 떠났다.

한센은 말 위에서 움직임에 맞춰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상단 일을 하면서 참 많이도 떠돌았다.

하지만 이렇게 추운 곳을 지나는 것은 그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센이 가슴까지 내려와 있던 머플러를 추어올려 입을 가리고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으로 긴 행렬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고, 수레 위에서 졸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에게는 이게 초행길이니까 고단한 여행길일 것이다.

그리고 유독 길게 느껴질 것이다.

초행길은 원래 그런 법이다.

아까 떨어졌던 남자가 다시 되돌아 왔다.

그리고 한센에게 말했다.

“끼니를 때울 시간입니다. 멈추고 준비하죠.”

한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점심은 감자가 들어간 고기 수프였다.

옆에서 수프를 떠먹는 남자에게 한센이 물었다.

“저 사람들이야 캐시오의 폭정에 못 이겨 이런 생고생을 한다지만, 자네는 왜 글리터에 가는 거지? 아직 젊고 능력도 많아 보이는데? 가이더는 자네를 반길 텐데 말이야.”

그러자 남자가 씨익 하고 웃더니 소매를 걷고 채찍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 자국은 당연히 억울하게 생긴 상처였다.

“많은 사람이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해요. 단지 이런 모험을 할 용기가 없을 뿐이죠. 이 기회를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 그러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나저나 이렇게 추운데 당장 오늘 밤이 걱정이네요. 노약자들도 많은데.”

한센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우리 상단에서 준비해온 벌꿀 술을 마시면 괜찮을 거야. 밤에 몸이 후끈할 테니까. 약초까지 섞어서 새벽까지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네.”

“오. 얼마만큼 있습니까?”

“모두에게 돌리지. 양은 충분해.”

“이 많은 사람에게 다요? 설마 돈 받고 파는 건 아닐 테고….”

흙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그게 가능하냐는 식의 말에, 한센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역할이 자네들을 목적지로 보내는 거야. 그런데 다 동상에 걸려버리면 그게 가능하겠나?”

“그렇군요. 과연 대상인이십니다. 통이 크시군요.”

대상인이라….

한때는 그런 꿈도 꿨었지.

너무 오래전 일이 생각나 한센은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날 밤 넉넉하게 벌꿀 술을 돌렸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것을 마신 사람들은 정말 몸에서 열기가 난다고 좋아했다.

한센은 하는 김에 음식까지 풀어버리고 자신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마차에서 자라고 했지만 사양한 것이다.

“노약자들이나 좀 따뜻한 곳에서 눈 감으라고 해.”

비좁은 곳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으려니 멀리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가락과 음성을 들으며, 그 노래 안에 서려 있는 기대와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글리터라는 미지가 차후 어떤 식으로 눈 앞에 펼쳐질지 걱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불안해하지 말게. 걱정하지도 말게.”

모포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한센이었다.

*  *  *

비싼 새는 그 값어치를 한다.

새끼 때부터 거금을 들여 꾸준히 훈련하고 튼튼하게 만든 새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 요구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 때문이다.

가이더를 향해 출발하기 전, 한센은 돈을 아끼지 않고 그런 새를 구입해 날려 보냈다.

새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은 바로 글리터 쪽이었다.

그 새의 발목에는 편지가 매달려 있었고 그것은 결국 세인에게 전달되었다.

편지를 살펴본 세인은 홀로 성을 나섰다.

사람들이 따라가겠다고 해도 물리며 말을 몬 것이다.

검은 말은 한참을 달렸고 결국 목적지에 세인을 데려다주었다.

그는 지친 말의 갈기를 손으로 쓰다듬어주곤 얼어붙은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추위에 조각처럼 굳어버린 시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자다가 죽음을 맞이한 듯 누워있는 시체들이 대부분이었다.

외곽 쪽에는 경비를 보다가 쓰러진 듯, 볼썽사납게 고꾸라져 있는 남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말에서 내린 세인은 바람에 쓰러져 있는 천막들을 바라보았다.

나부끼는 천 조각 밑으로 여인의 시퍼렇게 변색한 손이 보였고 아이의 손도 같이 보였다.

두 손은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포개어져 있었다.

그는 할 말을 잃고 시체들 사이를 지나쳤다.

얼마나 걸었을까? 수많은 시체 사이로 유일하게 몸을 일으킨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은 강추위 속에서 얇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앉아 뭔가를 보고 있는 중이다.

세인은 검을 뽑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걸어가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한센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을 같이 바라보았다.

한센의 손에는 나무 컵이 쥐어져 있었는데 비워진 상태였다.

멀리에서 세인이 나타난 것을 보고 마지막 내용물을 마신 것이다.

그 내용물은 여기의 모든 사람이 마시고 죽음에 이르게 한 벌꿀 술이었다.

“근래에 캐시오는 결심을 했습니다.”

자진해서 가이더와 함께 드레퓨스 밑으로 들어가기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안위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범인이 갖추지 못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런 재주를 가지고 도모한다는 것이 고작 일신의 안녕이죠. 그의 입장에서는 글리터와 공존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몬스터의 도시이기 때문에 손을 잡을 수 없다는 건 핑계고, 사실 드레퓨스가 결국 승리하리라 믿었던 겁니다. 그는 정의 곁에 서는 자가 아니라, 승리 곁에 빌붙는 자이죠.”

지금의 드레퓨스는 전의 드레퓨스가 아니었다.

대제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캐시오는 자신의 선택이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다.

재물을 챙겨 가이더에서 사라지거나, 드레퓨스에게 복종하는 것이었다.

권력자의 자리에 있다 보니 전자는 택하기 싫어졌다.

사람들에게 호령하며 사는데 맛이 들린 것이다.

그런데 강대국인 드레퓨스와 화친을 하자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그들과 한편이라는 걸 입증해야만 한다.

뒤통수치지 않는 개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빼낼 겸, 그리고 글리터에 함정을 팔 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글리터에게 독이 든 사과를 건네는 것이었다.

글리터를 공적으로 만들어 그동안 국민을 빼앗긴 설움도 풀고, 드레퓨스에게 자신의 행보를 보여주고 선언하는 것이다.

우린 너희들과 같은 편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캐시오는 자신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글리터로 떠나길 희망한 자들이 방벽을 넘었을 때, 그들은 병에 오염되었다.

추운 곳을 지나느라 병의 잠복기가 길어질 수 있었고, 예상보다 빨리 진행된다고 해도 가이더로 돌아오기에는 험난한 길이었다.

중요한 건 가이더를 떠나기 전에 병이 발현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패해도 글리터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일단 방벽 밖으로 사람들을 몰아내고 병을 발동시키면 된다.

그렇게 대세가 가이더 쪽으로 기운다.

침략의 빌미는 명분이 결정하니까.

세인은 한센의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쭉 들었다. 그리고 풍경화를 같이 바라보았다.

“여기의 사람들은 모두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근원은 동물의 피와 독초에 의한 전염병입니다. 긴 잠복기를 거쳐 가이더에 도달할 때쯤이면 발작하기 시작할 것이었습니다. 이때를 위해 실험용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그는 결국 계획대로 글리터에게 죽음의 선물을 보낸 것입니다.”

“한센.”

그때 처음으로 세인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한센은 자기의 말만 계속했다.

“그는 주변국까지 끌어들이면서 연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여러 나라 중 어떤 곳이 캐시오의 만행을 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몇몇 주변국과 공범이 되는 것만으로도 결속력을 다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한센.”

두 번째로 불렀을 때, 세인은 그가 이제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자세히 바라보니, 한센은 앞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새 청력과 함께 시력을 잃은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 홀로 갇혀 죽음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세인님 죄송합니다.”

“뭐가.”

세인은 상대가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답을 해버렸다.

“가이더를 등질 수밖에 없었던 세인님을 생각해서라도 제가 현명하게 굴었어야 했는데, 결국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비밀 결사대에 들어가 노력했지만, 결국은 이런 결과를 만들고자 발버둥 친 건가 싶기도 합니다. 저는 고작 이런 그릇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상황이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굴러갔다.

결국, 여기에서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차피 캐시오가 이들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캐시오의 소굴과 마찬가지인 가이더에서 저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본보기로 사람들만 비참하게 죽어 나갈 뿐이다.

가이더의 백성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하던 시도도 몇 번이나 무산되었다.

방벽을 넘은 이후부터, 아니 방벽을 지나기 전부터 그들 모두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염병은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의 가치를 전염병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이기심과 계략이다.

이 많은 사람을 이용해 글리터를 흔들려는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는 것이 섬뜩했다.

이런 건 악마나 낼 수 있는 계략이었다.

“ 저는 이제 죽음 속으로 떨어집니다.”

어차피 지독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갈 주변인들이었다고 해도, 사람들을 깨어날 수 없는 꿈속으로 인도한 건 바로 한센이었다.

그는 죽음 너머의 지옥에 도달해 어떤 형벌을 받게 될까?

마지막으로 한센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가이더 쪽을 보려 했다.

눈꺼풀을 깜박일 때마다 초점 없는 눈이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곁에 있는 세인은 그런 한센의 어깨를 잡아주려다가 말았다.

지금 이 순간을 방해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었다.

안타깝지만 놔줘야만 한다.

한센.

천천히 눈을 감은 그는,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바람이 부는 가운데 세인은 이제 홀로 서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 가운데, 바람 소리가 요란하게 그의 망토를 잡고 흔들었다.

세인은 앞으로 걸어가 그림을 집어 들었다.

그림의 흙을 털어낸 그는 몸을 돌려 죽어 있는 한센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이 참으로 무심해 보인다.

걸어가는 그는 대지를 뒤덮고 있는 시체를 눈에 담았다.

어떻게든 수습해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야 마검의 힘 때문에 안전하다 쳐도, 다른 인간들이 접근했다가 전염병이라도 옮으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는 시종일관 우울한 얼굴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를 죽인 것은 나였을까?’

과거 한센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렇게 세인이 망자들의 장소를 완전히 빠져나오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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