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 지크를 만나러 가는 길 (1)
악담을 상대하는 최고 방법은 아예 상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귀를 막고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꼭 들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대범한 위인이라도 하루 이틀.
그리고 매일매일 계속되는 악담에 인내가 바닥날 것이다.
낙수가 바위를 뚫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를 부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아부도 그러했다.
가이더의 왕이나 마찬가지인 캐시오는 아부에 녹아들어 있었다.
처음에야 그도 상대가 기분을 맞춰서 하는 빈말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반년이 지나도록 주위에서 아부만 해대자 그도 그 아부에 동화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현실적인 감각이 사라져갔다.
권력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코와 귀를 통해 술술 들어오는 성질의 것이었다.
캐시오는 권력에 취하면서 ‘설마 이것도 될까?’ 하는 심정으로 일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면 어떻게든 그 일은 이루어졌다.
물론 그 일을 실현 가능케 하려면 많은 사람의 피땀과 희생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건 캐시오에게는 상관없었다.
일차적으로 피부에 와 닿지 않으니까.
“요즘에는 따분하구나. 그 심심함이 최대의 적이다. 그러니 국사에 시간을 더 할애해야겠다.”
캐시오는 이렇게 태평한 소리나 하며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친위대들이 우르르 움직여 세계 지도를 펼쳐 들었다.
캐시오는 포도주를 마시며 반쯤 감은 눈으로 그 지도를 감상했다.
남부는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돌덩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중부는 무섭게 팽창 중이었다.
드레퓨스는 절제를 모르는 물고기처럼 주변을 잡아먹고 말이다.
그런데 하도 덩치가 커서, 보통 물고기처럼 당장 배가 터져 죽진 않을 것이다.
캐시오의 눈은 바쁘게 위아래로 저울질했다.
하지만 결론은 너무 뻔했다.
이미 한참 전에 나와 있었다.
그는 부하 중 한 명에게 물었다.
“한센은?”
“언제나 그렇듯이 독대를 청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 시킨 일은 잘했냐는 말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그는 누구랑은 달라. 사고도 안 치고, 적어도 시킨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지.”
권력에 취해 발이 땅에서 떨어져 공중에 뜬 기분인 캐시오는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자 부하들의 목이 자라목이 되었다.
캐시오는 북쪽에 장벽 쌓는 일을 끝마쳤다.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 나갔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친 것뿐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부추겨 장벽을 쌓게 한 마당이다.
이제 사람들은 북쪽으로 탈출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남쪽으로 갈 것인가?
거긴 전쟁이 한창인데.
“한센 그자는 속이 검고 음흉한 자입니다. 말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하 중 한 명이 볼멘소리를 하자 캐시오가 소리를 질렀다.
“누가 그걸 몰라?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내가 그놈을 어떻게 하고 싶어도, 할트 백작의 측근이 바로 그놈이잖아! 내가 그놈을 가지고 놀면 놀수록 할트의 속이 어떻겠어? 할트 그놈이 유일하게 내게 반기를 드는 놈인데? 멍청아!”
최근 캐시오의 친위대는 귀족 여식을 납치한 사고를 쳤다.
그래서 안 그래도 죄지은 표정이었고 말이다.
물론 그 여자는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더욱 자라목을 만들며 양손을 뒤로하는 그들에게 혀를 차 보인 캐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도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중얼거렸다.
“좋은 수가 없을까?”
이렇게 돌아다니며 생각해도, 모든 상황은 그에게 지극히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안주해선 안 된다.
가이더에서 온갖 미친 짓을 저지르는 위인이었지만, 캐시오는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권력의 단맛을 맛보니 무슨 짓을 해서든 이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드레퓨스가 북상하고 있는 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안다.
“좋아. 결심했다.”
캐시오가 그렇게 내뱉었다.
그리고 정확히 석 달이 지나, 그는 신하들을 궁전에 소집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발표했다.
“우리는 북쪽 세력과 손을 잡는다.”
모두가 웅성거릴 때, 캐시오는 이 쭉정이 같은 자들을 둘러보더니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허수아비 같은 작자들이었다.
그것도 속이 비거나 썩은 허수아비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돈이나 뒤로 빼돌리고 여자나 탐하는 것뿐이지.
입을 열려는 신하들에게 그만두란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제지를 했다.
그리고 캐시오는 선언하듯이 다음 순서를 말했다.
“내 생각은 이미 굳어졌고 더 이상 경들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다. 이미 주변국으로 가이더의 뜻에 동참하길 바라는 서찰도 보냈다. 국경 중립지대에서 미팅 테이블이 열릴 것이다. 지금은 그것에 대한 준비만으로 벅차.”
그리고서는 총총히 걸어가 사라져 버렸다.
남의 의견을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 비상식적인 행동은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겐 일상으로 굳어진 듯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정말로 미팅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주변국들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장시간 유지되었다.
그들은 캐시오의 의견에 동조한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빠져나왔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왕들이 뜻을 하나로 모으자 남은 것은 실행뿐이었다.
물론 주도하는 쪽은 캐시오였다.
그는 한동안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신하들이 보기에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고민을 끝낸 캐시오는 한센을 불렀다.
한센이 그렇게 원하던 독대였다.
그동안 캐시오는 한센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익만 취하기 바빴다.
어찌나 교활하게 이용하는지 알면서도 당할 정도였다.
이래서야 누가 상인이고 누가 왕인지 헷갈릴 정도다.
한센은 캐시오를 만나면 할 말이 많았는데, 정작 그의 앞에 서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오늘따라 캐시오는 매우 진지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건 토를 달면 안 되는 일이야. 그러니 명령만 내리면 될 일이지만 특별히 자네에게 한 번만 말하겠네. 그동안 너무 굴린 게 미안하기도 하고, 자네도 납득이 되야 열심히 움직이겠지.”
“….”
한센이 두 손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캐시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흠이 많지. 나도 그걸 잘 알아. 그리고 독단적이지. 북쪽에 방벽을 쌓는 일 때문에, 자네와 자네…. 부류의 사람들이 내게 실망한 걸 잘 알아. 하지만 실수 안 하는 사람도 있나? 그리고 그 장벽은 언젠가 도움이 될 거야. 나는 분명 도덕과는 거리가 멀고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이야. 하지만 지금 가이더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누군가?”
“제 눈앞에 있는 분이 주인이십니다.”
한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캐시오는 안락한 자리에서 일어나 한센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내게 어떤 말을 해도 좋아. 하지만 이 일은 자네가 맡아서 제대로 해줘야겠어.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 지금 가이더의 상태와 내 상태가 어떻든, 밑에서 큰 적이 올라오고 있어. 적어도 나는 내 자리를 유지하고 싶다네. 하지만 드레퓨스가 올라오면 어떻게 될까?”
“….”
“여기가 쑥대밭이 되면 내게 남는 게 뭐지?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죽으면 가이더는 회생불능이야. 또 한 번의 공백이 생기니까? 그렇지 않나 한센?”
이번 질문은 답변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캐시오는 재빨리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방벽 안쪽으로 북쪽의 그들을 들이진 않을 거야. 아직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거든. 울타리는 최소한의 보호막이야. 하지만 그들을 배제할 수도 없어. 드레퓨스는 강대국이다. 지금은 그 규모가 숫제 괴물이 되어 버렸지. 주변국과의 연합만으로는 대립할 수 없어.”
그러면서 그는 품에 있는 문서를 보여 주었다.
놀랍게도 주변국들의 인장이 찍힌 문서였다.
물론 가이더의 인장도 찍혀 있었다.
모두가 이 문서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한센. 이 순간만큼은 모든 걸 초월해 보자고. 나도 살자고 하는 짓이고, 자네도 가이더를 살리고 싶을 거 아닌가?”
문서를 본 한센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캐시오는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문서를 건네주었다.
한센이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 때, 캐시오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북쪽과 손을 잡을 거다.”
“….”
“물론 갑자기 믿어 달라고 하면 저쪽은 이쪽을 의심하겠지. 그래서 확실한 표시도 할 셈이야. 우리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 일에는 자네가 적임자네. 나는 그 이유를 당장 열 가지 정도는 댈 수 있어. 그걸 일일이 읊어주길 바라나?”
“아닙니다.”
캐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게. 그리고 꼭 성사시켜.”
캐시오가 북쪽의 신뢰를 얻기 위해 쓴 방법은 간단했다.
지금까지 고수한 행동의 정반대였다.
그리고 북쪽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었다.
바로 난민이다.
“참 고약한 일이지만, 여기에 불만을 품고 북쪽으로 가길 바라는 사람도 있으니 어렵지 않은 일이죠. 제 발로 가고 싶어 하니 징집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길게 보면 어차피 한편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 테고요.”
캐시오의 측근은 그렇게 설명하며 한센을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장벽 근처의 광장이었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꽉 차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가이더가 이런 것을 준비하며 정치적인 스탠스를 취했을 때, 다른 나라들도 가이더를 도왔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하는 일은 부가적인 지원 정도였다.
말이나 마차, 물자 정도를 지원하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드레퓨스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트리엔의 미스틸 테인이었다.
트리엔의 사정은 가이더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좋지 못했다.
나라가 돌아가는 구조를 받쳐줘야 할 귀족들이 죽어 버렸으니 휘청이는 건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빈자리에 들어찬 쭉정이 같은 귀족들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만 한다.
지금 트리엔의 일인자 자리를 차지한 이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으며 오늘내일하는 늙은이일 뿐이었다.
전대 왕의 먼 외사촌인 그가 왕위에 앉으니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귀족들은 허수아비 왕을 비웃으며 보란 듯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그래도 트리엔이 아직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지방에서 묵묵히 자기 의무를 다하는 토박이 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앙을 받쳐주기엔 많이 모자랐다.
애초에 중앙을 받쳐줘야 하는 수도의 귀족들은 딴짓에 열심이었고 말이다.
가이더의 경우 집단적인 광기로서 존립의 위기를 넘겼다면, 트리엔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의 상태였다.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생각은 비단 미스틸 테인만이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트리엔은 지금 답이 없어도, 너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미스틸 테인도 지방에 있는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트리엔을 완벽하게 부활시킬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걸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행하기가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느 날 미스틸 테인은 장원을 가로질러 집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움직였다.
거기에는 그가 원하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자 놀라서 어머니가 뛰쳐나왔다.
“무슨 짓이냐?”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남자가 이렇게 경솔해서야 무슨 일을 해내겠느냐? 어서 그걸 내려놓아라.”
“어머니.”
미스틸 테인은 어머니의 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물건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 뜨거운 눈빛을 받으며 그의 어머니는 탄식했다.
“나라고 뭐고 지금 내 소원은 네가 무사히 살아 돌아오는 것뿐이다.”
“죄송합니다. 그건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스틸 테인 이 쥔 것은 한 자루 검이었다.
고풍스러운 문양이 검집에 새겨진 그 검은 집안의 가보다.
그는 그것을 들고 집을 떠났다.
테인이 말을 타고 사라질 때까지, 맨발로 달려온 어머니는 그저 침묵으로 그의 등을 배웅할 뿐이었다.
미스틸 테인이 점이 되어 사라지자.
그녀는 다리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