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 옆에 설 수 있는 자격 (7)
“저 녀석들을 여기서 까지 봐야 하는 거야? 세상 참 말세로군.”
세상에는 별별 성격이 다 있어서 엘프들의 합류를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존재도 있었다.
뭐가 불만인지 투덜거리는 드워프 크릭 옆에서 아비게일이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 시선을 알아차린 크릭은 크게 떠들었다.
“모르겠어? 나만 아는 거야? 쟤네 순수는 너무 방탕해서 그야말로 대책이 없다고! 여긴 곧 개판이 될 거야!”
“순수와 방탕이 서로 합쳐질 수 있는 말이었습니까?”
“아비게일 자네가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몰라서 그래, 원래 요정에 가까운 것들은 천지 분간이 없어. 개념과 한계가 없는 행동에 두손 두발 다 들게 될 거다!”
장담하는 크릭 옆에서 아비게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크릭이 괜한 심술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행동이 크릭의 심사를 제대로 긁었나 보다.
안 그래도 평소 아비게일에 대해 배알이 뒤틀려 있는 그였다.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걸 보니 아비게일 자네도 상당히 거만해졌어! 그래 이제 자기 이름을 딴 거리까지 있느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거지?”
“예?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까?”
불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아비게일은 안절부절못했다.
그 옆에서 크릭은 ‘이제 그가 권력의 꿀맛을 보더니 사람이 변했다’라느니, ‘싹수없어졌다’라느니 하며 실컷 갈궈댔다.
주변이 이렇게 시끄러운 가운데, 세인이 주목한 건 청년 엘프들이었다.
이들은 진실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엘프들을 위해 최선의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의무도 요구했다.
어린 엘프가 아닌 청년 엘프들은 고급스러운 옷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에 만든 법전도 받았다.
‘트라이얼 워커’라고 불리게 된 그들은 재판을 열고 심판을 내릴 권한도 세인에게 위임받았다.
그리고 글리터 곳곳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들 중 한 명당 따라붙게 되는 병사는 8명, 나머지 두 명은 기사 수업을 하는 종자이거나 기사로 채워지게 되어 있었다.
이건 너무 과한 보호가 아닌가 싶지만, 훗날 글리터 외부를 여행할 것까지 배려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세인은 이들의 순수성과 진실을 가려내는 능력 때문에 관리직으로 임명하는 것도 추진했다.
청년 엘프들은 선을 향한 맹목적인 방향성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인 이익을 위해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글리터에서 세인이 원하는 것이면 이루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심사숙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일을 청렴하게 잘할 수 있다고 생각돼도, 세인님 개인을 향한 충성심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아직은 여기에 대한 애착이 없는데, 그들의 본질만 보고 일을 맡기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건 여유를 가지고 추진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일 같습니다.”
세인은 사람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생각해 보니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엘프들의 합류는 참 대단한 일이었다.
그들은 좀처럼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
난폭한 결과가 발생한다면, 아이들이 화가나 다투는 것처럼 격렬한 감정의 발로이거나.
또는, 요정 특유의 무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인간처럼 개인의 사욕을 위해 비리나 부정을 저지르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진실을 가려내는 능력이 있었으며, 존재 그 자체는 자연의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엘프들이 있는 곳에서 식물이 잘못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세인에겐 유고의 완전한 유산보다도, 이게 정말 사기같이 느껴졌다.
아군을 세뇌해 노예로 만들고 개조하는 끔찍한 힘보단, 위험성이 없는 엘프들의 존재가 행운 그 자체였다.
더불어 글리터도 활기찬 엘프들이 자리하자 새로운 생동감이 움트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언데드라고 생각한 원주민들과 난민들 사이에 어려운 분위기가 팽배했던 건 사실이다.
드워프들은 그 둘 사이에 함부로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눈치가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로 여겼다.
하지만 어린 엘프들은 눈치 없는 그 특유의 모습으로 거부감 없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글리터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잘 다녀오세요. 힐다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세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힐다의 옷깃을 여며 주었다.
힐다는 중무장을 한 채 추위에 볼을 붉히며 서 있었다.
그녀는 세리스의 눈에 띈 후 기사 수업을 받았다.
힐다의 괴력과 결단력 그리고 선한 품성을 알아본 세리스는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글리터는 많은 기사를 필요로 했다.
뭐 그건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글리터의 경우 더 절박했다.
하지만 기사라는 게 원한다고 바로바로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재가 눈에 띄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힐다의 얼굴은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그러나 세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힐다의 어깨를 탁탁 두들겨 주었다.
그 반동으로 힐다의 어깨에 매달린 망치가 진동한다.
세리스는 힐다의 상체에 사선으로 매어져 있던 멜빵끈을 정돈해 주며, 그녀를 안심시키고 격려해 주었다.
“무기를 든 자로서 밖을 경험하고 병사들을 이끄는 것을 배워야 해요. 거친 들판에서 밤바람과 아침 이슬을 맞으며 앞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대상도 생각해보세요. 그 외에도 할 게 많겠지만, 결국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당신에겐 선한 마음과 책임감이 있으니까요.”
“….”
힐다는 세리스의 따뜻한 말이 자신에겐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세리스가 등을 밀어주자 힐다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지금 아주 불안해 보였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세리스의 눈은 정확하니까.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 사이로 하얀 옷을 입은 채 앉아 있는 소년이 있었다.
두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긴 귀를 가진 엘프다.
그는 다가오는 힐다의 거구를 보더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서투른 인간의 언어로 힐다에게 이야기했다.
“잘 부탁합니다.”
그런 소년 앞에 선 힐다의 눈빛이 잘게 떨렸지만, 그것과 상반된 행동을 보이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이들은 글리터 성 내에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성 밖으로 나가 마을들을 돌 것이다.
야영도 밥 먹듯이 해야만 했다.
기사가 되기 위한 종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바깥을 떠돌았다.
편하게 수련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세인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있는 방은 볕이 잘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 밀폐된 곳에 가까웠다.
그래서 아비게일은 이곳에 올 때마다 숨 막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세인은 그가 가져다준 보고서를 읽고 있다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도서관을 만드는 건 어때? 하나 짓고 싶은데.”
아비게일은 그 말을 듣자 ‘도서관을요?’라든가, ‘어디에다 만들까요?’라는 말을 뱉지 않았다. 순식간에 머리를 굴린 그는 ‘근처 중앙광장에 만들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세인은 보고서를 건네주며, 앉은 채로 아비게일을 올려다보았다.
“그 정도는 아니야. 가까운 광장에는 더 중요한 것들이 들어가야 하니까 말이야. 어쨌든 반대하지는 않는 거지?”
“예. 당연히 그렇습니다.”
아비게일이 반대한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별장을 만들든 수영장을 만들든, 뭘 짓든 간에 누가 나서서 반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이며 물러가는 아비게일을 보곤 오늘 밤의 계획을 세웠다.
저녁이 되자 세인은 검은 망토를 두르고는 성을 빠져나갔다.
마검은 풀어놓고 호위 한 명도 거느리지 않은 채였다.
높게 솟아있는 글리터 성 주변은 코어 지역이라고 해서 통일된 건물 양식이 주를 이루었다. 검은색이나 흰색으로 된 단색 건물이 많았고, 지붕은 뾰족하게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분위기는 정돈되어 있었고 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거주인들은 아레이즈 때부터 함께한 영지민이 전부였다.
난민들에게 마음을 연다 해도 충성심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세인에게 가장 깊은 충성심을 보이며,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것은 그들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성 주변은 그들의 집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게 은근히 신분을 나누는 방식이 된다 해도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파랗거나 푸른 램프가 달린 구역에서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병사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순찰을 강화해서 치안에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다.
한참을 지나 그런 코어 지역을 벗어나면, 다양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지역이 나왔다.
그리고 물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아치형 다리와 밑으로, 시끄럽게 흐르는 온천을 볼 수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흐르는 물속엔 따뜻한 곳에서도 살 수 있는 물고기들이 떼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세인이 지나가는 구역은 낮 동안엔 활기를 띠었다가, 밤이 되면 휴식을 찾고 조용해지는 지역이었다.
여기에는 광장이나 공용으로 쓰이는 건물이 많았다.
세인이 돌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지붕들의 바다 위로 약간 떨어진 글리터 성이 검은 산처럼 보였다.
그는 골목길을 빠져나오며 도서관을 세울 곳이 있나 하고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쓸 수 있게 정비된 빈 땅에는 이미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구조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권력이라면 아무 곳이나 밀어 버리고 건물을 세우라 말해도 상관은 없었다.
굳이 이렇게 직접 나와볼 게 아니라, 지도의 한 점을 손가락으로 짚고서 명령을 내리면 될 일이다.
그러나 세인은 발길을 외곽 쪽으로 돌렸다.
글리터의 외부 성벽을 빠져나오면 찬바람이 불었다.
아직은 화룡석이 많이 깔려있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 찬바람은 가끔 미지근한 바람으로 돌변하기도 했는데, 많은 사람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벽 밖으로 나오면 수많은 불빛이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드워프, 인간, 엘프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바람에 활기로 가득 찼다.
이곳은 밤이 돼도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그리고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가 주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밤늦게 일하는 사람들은 수레를 끌고 다니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램프를 주렁주렁 매달은 장사치들도 좌판의 물건을 계속 팔아댔다.
야시장은 빛의 뿌리처럼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나뭇잎처럼 주택가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운데, 크고 넓은 길이 나무의 몸통처럼 이어지며 사람들을 위에 실었다.
세인은 어느덧 인파 속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주정뱅이들이 킬킬거리는 소리가 났고, 행인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수다를 떨었다.
그런 행인들의 온기에 주변은 추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언제 심었는지 모를 파인애플 나무들이 오른쪽에서 그를 스쳐 지나갔다.
개들 여러 마리가 마음껏 짖으며 지붕 위를 돌아다니고, 그중에서는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빙글빙글 도는 녀석도 보인다.
멀리 있는 공터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는데, 엘프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살이 익는 냄새에 발걸음을 멈춘 세인은 고개를 돌려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장작들을 깔아놓고 불을 피웠는데, 그 위에 커다란 돌을 얹어 놓았다.
그리고 돌 위에서는 커다란 돌문어가 붉게 익은 상태로 축 늘어져 있었다.
지하 바위틈에 사는 돌문어는 물에 닿으면 기운을 못 쓰고 죽는데, 물에 닿지만 않으면 꽤 강한 포식자다.
그들은 주로 하나뿐인 눈을 빙글빙글 돌리며 벌레를 잡아먹었다.
벌레퇴치용으로도 제격인 것이다.
지금 구워지고 있는 돌문어는 너무 커서 벌레 퇴치용 병 안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주인은 마흔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얼굴의 반은 화상 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그 자국은 목덜미까지 이어진다.
“어서 오세요. 어느 정도 드릴까?”
칼을 든 그녀는 세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고 물어왔다.
어차피 얼굴을 봤어도 평소 멀리에나 봐왔을 글리터의 주인이었다.
이곳의 주민들이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세인이 손가락으로 문어 다리 끝을 가리키자 여성은 칼로 끝을 썰어냈다.
붉은 껍질 안쪽으로 하얀 살이 보이는데 보기에도 참 부드러워 보였다.
무심코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자 여인이 잠시 기다리라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서는 파인애플 조각을 돌 위에 얹어 놓았다.
순식간에 익혀지는 파인애플은 액즙을 흘려내며 단맛이 극도로 활성화되었다.
그것을 칼끝으로 찍고 문어 위에 올려주며 그제야 손을 내미는 여인이었다.
“환전소가 멀어서 물건으로만 값을 받아요. 돈 바꾸느라 왔다 갔다 하면 한세월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