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 옆에 설 수 있는 자격 (6)
엘라이저와 그 일행들은 그로부터 일주일간 글리터에 머물렀다.
그녀의 동행자들은 당연히 다크 엘프였다.
그 다크 엘프들은 글리터 내부와 주변을 꼼꼼히 관찰하는 듯 보였다.
그들이 왜 그렇게 헤집고 다니는지 알 리가 없던 기사들은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그래서 세인에게 넌지시 물어보면 이런 대꾸만 들을 뿐이었다.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니, 지켜만 봐.”
엘라이저는 주로 세인의 집무실에 머물렀는데, 그건 세리스를 은근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을 훈련 시키고 정예병으로 만드는데 집중하던 그녀다.
하지만 관심사가 딴 곳에 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원인을 생각해 보니, 이미 답은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무딘 여자가 아니었다.
대부분 여자가 그러하듯이 내면을 섬세하고 민감하게 살필 줄 아는 여자였다.
자신이 세인을 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세리스는, 곤혹스러워하기보다는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자 엘릭서는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비록 이 시대의 주인공이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힘은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세리스는 점점 강해졌다.
엘릭서라는 힘을 잘 발휘하기 위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발휘하는 의지가 강할수록, 엘릭서는 그 자신에 가까운 힘을 전달해 주었다.
생각해보면 미래의 세리스가 절망하고 힘없이 죽어갔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휘두를 자가 모든 소망을 잃고 좌절한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엘릭서는 타인이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아니니까 말이다.
세리스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엘라이저는 집무실에서, 세인에게 세계수 근방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코다로, 머독 그리고 비비안의 일상들과 어떤 낙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세인은 문서를 정리 중임에도, 옆에서 그녀가 해주는 그런 이야기들을 유심히 들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가 최근의 일 중 가장 기분 좋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있으니, 불면증이 치료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세인은 그렇게 말하다가 엘라이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쉽사리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 시선이 약간 유별난 것이라, 엘라이저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제 얼굴을 구멍 낼 듯이 바라보고 있나요? 제 얼굴의 구멍은 이거 한 개면 족해요.”
그러면서 안대 부분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걸 본 세인은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무심코 해버리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이 다크 엘프에게 공포감보다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나는 당신과 결혼했을까요?”
“예?”
“왜 당신과 결혼했을까요? 우린 이어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야?’하고 생각한 엘라이저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꿈속의 일을 제게 물으면 안 되죠.”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내뱉게 된 세인은, 사과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자신은 왜 엘라이저와 결혼했지?
왜일까?
‘차라리 세리스라면 이해가 돼. 그런데 왜 엘라이저인 걸까?’
세리스는 유능한 기사일 뿐만 아니라 강했으며 인간인 동시에 미모도 대단했다.
또 다른 엘릭서인 그녀를 확보한다는 의미도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정략결혼처럼 소름 끼치는 계산일 수도 있겠지만, 냉정한 현실이 그랬다.
‘세리스와 나는 같은 라이트닝 블러드니까, 서로 끌리고 있어. 그것만 봐도, 아니 모든 걸 다 고려해 봐도 그래. 그녀와 이루어지는 게 정상인데, 왜 나는 엘라이저와 결혼했던 거지?’
그는 이 다크 엘프의 어떤 점에 끌렸던 걸까?
왜 이 여자에게 사랑을 바친 걸까?
지금의 세인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눈앞의 다크 엘프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름답기로 따지자면 세리스도 엄청난 미인이었다.
세인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두 여자를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실례니까 이런 생각을 그만두기로 한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 파보았자 풀 수 없는 의문이다.
집무실을 떠난 엘라이저는 다른 다크 엘프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회의를 했다.
진지한 얼굴로 의견을 나눈 그녀는 모두의 결론을 세인에게 전달했다.
“당신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세인은 오히려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저는 당신들이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짧은 기간 내에, 이런 결정을 통보해 주는군요.”
그런 그의 앞에서 엘라이저는 글리터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난간 쪽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글리터의 전경은 아니더라도 일부분이 아주 잘 보였다.
“지금 다크 엘프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쩌면 우리 존재는 순수한 엘프들에게 있어 몹시 나쁜 교훈이 될 거란 걱정이죠.”
세인이 엘라이저의 옆얼굴을 보는 가운데,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존재가 그들에게 나쁜 길도 있다고 보여주는 것만 같아요. 타락이라는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 마음이 이번 결정에도 투영된 거예요. 어쩌면 이제 그들은 우리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죠. 그리고 그들 자체가 모험을 바란다면, 그건 그것대로 존중해 줘야 해요.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몬스터가 줄어든 세상의 알 권리는 누구에나 있잖아요.”
비록 다른 종족 이야기지만, 세인은 여기서 참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전후 사정을 알았기에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가족 중에 나쁜 형제가 있다 해도, 그 가족은 형제를 욕할 수 없을 거예요. 그 형제는 가족 전체를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수했기 때문입니다. 설령 세상 전체가 나쁘다고 손가락질을 해도, 그 가족만큼은 그 형제를 감싸줘야죠. 오히려 가족이 형제를 손가락질하게 놔둔다면, 그건 그 가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당신 종족의 일에 이렇게 끼어들어서 미안합니다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러자 엘라이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손가락질받고 있단 의미는 아니에요.”
엘라이저는 다음날 동료들과 함께 세계수 지역으로 돌아갔다.
세인은 그들을 멀리까지 배웅해 주고 글리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바쁘게 계획을 짜고 아비게일과 논의하기 시작했다.
마플이 밥도 안 먹고 집무실에만 있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둘은 계획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 계획이 완성되려는 찰나에 글리터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 손님들의 기준으론 잠깐을 머무른다 생각할지 몰라도, 글리터의 인간들 기준에선 그게 평생이 될 수도 있었다.
세인은 성의 첨탑 중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글리터로 들어오는 빛의 행렬을 보았다.
땅거미가 지고 서서히 어스름이 깔리는 광활한 대지에, 빛의 선이 세인이 있는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제 여기는 어떤 곳이 될까?
보루를 떠나 명실공히 삶의 터전이 되지 않을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거대한 성문이 열리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완성된 글리터 성의 성문은 성벽만큼이나 아주 거대했다.
성벽에는 정면에 위치한 성문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굳이 그 문을 열 것까지는 없었는데, 이번 경우에는 실리적인 목적보다는 글리터의 동반자를 맞이한다는 의미가 컸다.
웅장한 성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양쪽으로 갈라진 인파 속을, 두건 달린 망토를 걸친 인영들이 걸어갔다.
선두와 후미에만 전사들을 연상케 하는 성인들이 있었고, 대부분 행인은 키가 작은 편에 속했다.
소년 소녀 체구부터 어린아이로 보이는 체구까지 다양하다.
선두가 든 깃발은, 번우드를 상징하는 깃발이 아니었다.
그들이 번우드의 깃발을 들고 왔다면, 하얀 바탕에 금빛 새가 수놓아지며 글리터와 한 짝을 이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그냥 하얀 천에 나뭇가지를 붙여놓았다.
제각각 들고 있는 깃발 안의 나뭇가지는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척 봐도 그냥 아무 나뭇가지나 붙여 놓은 것이다.
그때 세찬 바람에 펄럭이는 두건이 귀찮았는지, 한 아이가 그것을 잡아 뒤로 넘겼다.
그러자 모인 군중들 사이에서는 ‘아-.’하는 탄식 성이 흘러나왔다.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볼이 통통한 아이는, 푸르고 큰 눈동자를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아장아장 걸으면서도 씩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많은 사람은 입을 손으로 막으며 감탄사를 흘렸다.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인간과 겉모습이 유사지만 인간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사실 그게 더 신기한 일이다.
신비로운 아이는 약간 크고 긴 귀를 가졌다.
이 아이의 정체, 아니 이 행렬의 정체는 바로 엘프들이었다.
청소년부터 유아기에 이르는 엘프들이 글리터에 온 것이다.
세계수 깊숙한 곳에서 다크 엘프들이 보호하며 숨겨왔던 존재들이다.
다크 엘프인 엘라이저는 그렇게 숨겨왔던 엘프 중 상당수를 글리터로 보냈다.
그 계기는 세인의 청이었다.
세인은 엘프들이 글리터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확실한데, 문제는 다크 엘프들이 과연 그의 청을 들어줄 것이냐였다.
가능성은 희박했다고 생각했는데 결론은 이렇게 나버렸다.
세계수 지역 전부가 아닌 극히 일부분이었지만, 글리터 입장에선 매우 많은 엘프가 제 발로 품 안에 들어온 것이다.
엘프의 근원은 자연이었다.
자연의 정수가 연결된 게 요정이었고, 요정의 다음 단계가 어린 엘프였다.
아이인 엘프들은 본능적으로 진실을 볼 수 있는 심장이 있었다.
천진난만 그 자체인 어린 엘프는,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어린 엘프가 성숙하게 되면 청소년인 보통 엘프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이성적으로 진실을 가릴 줄 아는 머리와 입도 가지게 되었다.
보통 엘프의 다음 단계는 성숙의 끝판이나 마찬가지인 나무 형태였다.
다만 나무가 되기 전에 죽는 경우도 많았다.
노인이길 거부하며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또 엘프의 성향에도 맞았다.
엘프는 요정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 흥분과 호기심, 격렬함을 담을 때 정체성이 가장 많이 드러나니까 말이다.
엘프가 지나치게 성숙해진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가 될 때까지 산다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자연의 정수이기 때문에, 자연의 은혜를 바라는 종족에겐 축복 그 자체나 마찬가지이다.
그 외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이로운 효과를 가져다준다.
아장아장 걷는 작은 엘프들을 데리고 가는 소년 소녀 엘프들은 침착하고 점잖아 보였다.
앞서 말한 지식을 안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지금의 소년 소녀 엘프들은 그들의 사회 속에서 말하자면, 이미 다 자란 어른과 마찬가지이다.
그에 비해 아주 어린 엘프들은, 눈을 빛내며 주위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금세 흥미를 잃고, 자기들끼리 손장난을 치는 엘프들도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귀여웠고 해맑아 보였다.
눈동자는 가지각색이었는데, 어떤 어린 엘프는 눈 전체가 검었고 그 안에는 별빛이 가득 차 보였다.
그중에는 귀만 가리면 겉모습이 인간 아이와 흡사한 엘프도 있었다.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는 확실히 이질감을 준다.
가까이 다가가서 관찰하면 살결에서 풍기는 냄새도 인간과 다를 것이다.
글리터의 사람들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걸어가는 엘프들을 보았다.
여러 가지 생명체가 모여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엘프는 확실히 보기 힘든 존재다.
다크 엘프만 해도 어지간하면 마주치기 힘들 텐데, 지금 이들은 한둘도 아닌 수많은 엘프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세인은 기사들과 함께 엘프들을 환영하기 위해 내성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몰려오는 엘프들을 보았다.
가장 선두의 엘프는 양손에 묘목을 들고 있었다.
그 나무는 몸체가 하얗고 분홍색의 잎사귀를 틔우고 있었다.
엘프들이 세인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을 때, 세인은 그 나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 묘목을 안고 있던 청년이 웃으며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시원했다.
“이건 열기를 내뿜는 나무입니다.”
묘목과 엘프의 얼굴을 번갈아 본 세인이 입을 열었다.
“글리터에 온 걸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