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23화 (123/307)

# 123

& 옆에 설 수 있는 자격 (3)

그 소속감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그걸 하신다고요?”

더이스와 맥 그리고 행크는 눈을 크게 뜨고 세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세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 무슨 문제 있나?”

“아, 아뇨 문제는 없지만….”

맥이 말을 얼버무리자, 더이스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라도 말 좀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은, 세인의 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들키지 않았다.

세인은 현재 창문을 열어놓고 야경을 감상 중이었다.

행크까지 옆구리 찌르기에 합세하자, 맥은 견디다 못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건 아비게일을 너무 치켜세워주는 게 아닐까요? 다른 인재들도 많이 합류했지만, 행정처리에서 너무 독보적이고 주도적이라서 말입니다. 자칫 독주를 부추기는 꼴이 될까 봐요.”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니까, 그의 공을 아니까. 그에 맞게 대우해주려는 거야.”

그러면서 세인은 정원 중앙에 호수가 있으면 좋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화제를 바꾸는 바람에, 기사들은 더 말할 기회를 놓쳤다.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린 두 명과 방을 나오는 맥이었다.

“그게, 그렇게 배가 아픈가?”

맥이 그렇게 묻자, 더이스는 맥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질투가 나기도 하고, 어찌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요.”

그때 행크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작게 외쳤다.

“모르겠어? 대단한 거라고! 그건 대단한 거야! 꼭 상금이나 뭘 줘야 대단한 건가? 이게 대단한 게 아니면 뭐겠어?”

더이스는 행크의 소리죽인 광분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아까 그 소리를 직접 하셨어야죠. 저처럼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해놓고, 왜 여기에서….”

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투덜거리는 둘을 뒤로하고 앞으로 걸었다.

드워프에게 간판 제작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드워프가 만든 간판이 아무래도 오래가고 튼튼하겠지.”

그때 득달같이 달려온 더이스가 맥의 팔을 잡았다.

“자, 잠깐! 이 마당에 꼭, 굳이 드워프 것을 써야만 하겠어요? 오래가고 튼튼한 드워프 것을 써야만 하겠느냐고요? 검소하고 소박하며, 아주 건전한데 수수하기까지 한 작은 나무 간판이 좋잖아요?”

그러자 맥이 더이스의 손을 뿌리치며 근엄하게 말했다.

“이봐. 남자의 질투는 추해.”

“….”

더럽게 질척거리지 말라고.

*  *  *

다음날 아비게일은 눈을 가린 채 걷고 있었다.

교수형을 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깜짝쇼를 위해서였다.

세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소매를 잡고 안내 중이었다.

마치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그를 데리고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멀미가 날 것 같아요.”

“고작 눈을 가린 거로요?”

“잠깐 멈춰서 토해도 돼요?”

“….”

우여곡절 끝에 아비게일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준비된 장소에서 세리스는 아비게일의 눈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아비게일은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가,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글리터 성을 제외하면, 건물들의 구획과 디자인을 설계한 게 그 자신이다.

배수로와 교통망을 고려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으니까…. 정리해 말하자면, 그가 모르는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눈가리개를 풀고 본 거리는, 아비게일에게 낯선 점이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무슨 깜짝 선물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꽃다발 같은 것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행인들만 눈가리개를 했던 아비게일을 이상한 표정으로 보았다.

“이게 대체 뭡니까? 저는 오늘 할 일이 많은 몸이라고요!”

아비게일이 항의하자, 세리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아비게일의 시선은 그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처음에는 아비게일도 상황파악을 못 하더니, 가장 높은 건물 옆에 세워진 기둥을 발견했다.

보통 때 기둥 위엔 램프를 다는 공간밖에 없었을 텐데, 옆으로 간판이 보였다.

철로 만들어진 그 간판은 아주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적혀 있는 글자.

“으….”

세리스는 옆에서 아비게일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왈칵 눈물을 쏟더니, 소매를 얼굴에 가져가며 훌쩍이는 것도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뭐 지금 그의 감성 폭발이 전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당히 난감했다.

주변의 행인들이 전부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누구 생각입니까?”

“누구 생각이겠어요? 권리가 있는 분의 생각이지. 저기 그보다 아비게일. 지금의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조금만 진정하는 것도….”

그러나 세리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비게일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크게 울었다.

그러면서 손수건을 꺼내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데, 입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니 상황이 더욱 이상했다.

이제 주변의 행인들은 그들의 행색에 쉽사리 다가오진 못했지만, 손으로 입을 막고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뭔가, 오해한 듯싶다.

“저기, 아비게일 제발 진정해요. 예, 가슴이 벅찬 건 알겠어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도, 몸에 좋지 않아요.”

“으허허헝!”

오히려 더 크게 우는 아비게일을 보며, 세리스는 정색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아비게일이 이렇게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철 기둥 위에 붙어 있는 간판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아비게일 거리.

넓은 글리터 중 조각 케이크 같은 한 부분에, 그의 이름으로 된 거리가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어떤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농담으로라도 세금 같은 걸, 걷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거리에, 거주구에 자신의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영광이었다.

냉소적인 사람은 그게 뭐 별거냐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본인의 이름이 적힌 간판을 위로 올리고, 거리 이름으로 공표한다면 기분이 묘할 것이다.

아비게일은 뜬구름처럼 살았고 부평초(浮萍草)처럼 살았다.

연못에 둥둥 떠 있는 식물처럼 어디를 가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로소 노고가 씻겨 나가고,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로서는 매우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이 중요한 경험의 순간, 그는 체면을 잊고 떼를 쓰듯 크게 울었다.

그만큼 옆의 세리스는 절망했다.

‘당했구나!’

그제야 세리스는, 행크나 더이스 그리고 맥 같은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이번 일을 부탁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하긴 이런 일이 예상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잖아.

보기 좋게 당해 버렸어!

그렇게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어대는 아비게일을 진정시키려고, 낮고 강하게 말했다.

“진정해요, 아비게일. 이건 거리를 당신에게 준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이름만 붙인 것이라고요. 그동안 애쓴 걸 인정해서요. 그뿐이에요.”

“세리스.”

“예. 진정하세요, 진정. 자아 심호흡을 하고….”

“세리스.”

“예? 예. 말씀하세요.”

“나 한 번만 안아봐도 돼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잔뜩 찡그린 채, 바보같이 말한 아비게일이 두 팔을 벌렸다.

뭔가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고, 감정이 북받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동조를 갈구하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세리스는 칠색 팔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눈물 콧물 범벅인 아비게일 앞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요.”

“….”

*  *  *

가이더는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그건 다른 북부의 나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북쪽의 불안 요소도 요소지만, 밑으로는 북상하는 드레퓨스가 골치였다.

그리고 안으로는 나라를 재건하려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심각한 경우 내전 수준에 달하는 진통도 겪었다.

가이더의 경우에는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심각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후에 수도의 잘 닦인 길 위를 지나가는 마차가 있었다.

호위하는 남자들로 볼 때 꽤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인 것 같았다.

마차 안에는 대머리인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몸이 근육질이라서 옷이 터질 듯 했다.

그는 가이더의 이름난 장군의 자제로, 화가 지망생이었던 남자다.

아버지는 수도에서 전사했고 본인은 산속에 숨어 간신히 화를 피했지만, 지금은 수도로 올라와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었다.

영민한 둘째 동생이 전투에서 죽었기에, 장남인 그가 졸지에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 재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가이더에 남아 몬스터와 싸운 사람이라는 인식이었다.

해외로 도망갔던 귀족들이 수도에 득실거리는 요즘, 그건 꽤 큰 권력이다.

이 캐시오라는 남자가 정작 그 혼란 동안 산속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방금 전만해도,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드레퓨스를 성토했었다.

드레퓨스의 야욕과 침탈을 꾸짖었다.

진짜 속마음이 그래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포지션을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세핀이 귀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가이더에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왕자도 그녀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걸 보면 말입니다.”

“말씀 조심하시오!”

“소문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소문이.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왜 정당한 후계자가 있어야 할 곳에 데리고 오지 않는 걸까요? 대체 왜?”

귀족들은 후계자의 몸에 이변이 생긴 것은 아니냐는 캐시오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재떨이를 찾았다.

이건 참 예민한 주제였다.

조세핀의 처지에서 생각하자면, 미치지 않고서야 제 발로 가이더로 올 턱이 없는 것이었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여기로 온다고 해봤자 꼭두각시 신세가 될 뿐이다.

그녀의 집안은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망한 지 오래였다.

뒷세력도 없는데 여기 왔다 간 독살당할 위험도 있어 보였다.

그녀가 생각할 때, 이곳에 있는 자들은 애국자도 아니었다.

귀족다운 귀족과 애국자는 이미 다 죽었을 테니까.

더구나 의탁 중인 곳의 주인인 레드는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승냥이 떼에 몸을 의탁하겠는가?

하지만 수도를 차지한 가이더의 귀족들 입장에서는, 레드가 믿을만한 남자인 걸 알 리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다만, 사신이 찾아가도 응하지 않는 조세핀이 괘씸할 뿐이었다.

캐시오가 탄 마차는 이제 막 회색 건물들이 밀집된 지역을 빠져나가려는 참이었다.

이 다음 지역에 있는, 그의 화려한 별장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창문 밖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일반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마차 안의 대머리 남자에게는 너무나도 느리게 보였다. 그리고 의욕이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과연 가이더는 이대로 괜찮을 것인가?

저 망자처럼 생기 없이 행동하는 국민들을 믿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순간에도 야반도주하고 국경을 넘어 이탈하는 국민이 존재할 것이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군!”

마차 안에 있던 캐시오는 의자의 팔걸이를 양손으로 내리쳤다.

그 바람에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의 첩들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캐시오는 당장 마차를 돌리라 일렀다.

그리고 다시 왕성으로 돌아간 그는, 부랴부랴 회의를 재소집했다.

귀족들은 투덜거리며 캐시오의 소환에 응했다.

이 정도로 급하게 회의를 소집하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확실히 급하긴 급한 일이었다.

캐시오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는 호위병들을 시켜 회의장의 문을 걸어 잠그게 했다.

이미 밖은 사람들이 죽어나는 소리로 난리였다.

그제야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귀족 중 한 명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왜? 도대체 왜?”

캐시오는 거친 콧바람을 뀌었다.

그러면서 대답했다.

“다 가이더를 위해서요! 이런 결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이 나라가 살아날 수 없어! 질병을 치료 하려면 머리부터 시작해야지!”

그리고 도끼를 꺼내 마구 휘둘렀다.

역사는 움직이는 자가 차지한다.

과감하고 재빠르게 움직여야, 승리한 찬탈자가 되는 것이다.

캐시오의 이런 결단은 상당히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본질을 살펴보자면 정신병자에 가까웠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행동이기도 하다.

회의장 내부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도망가는 귀족들의 등판에 장작을 패듯 도끼를 꽂고, 좌우로 흔들면서 빼냈다.

그런 캐시오의 모습은 악마와도 같았다.

그런 귀족 중에서는 나이 어린 청년들도 있었는데, 캐시오의 호위병들에게 머리채가 잡혀서 질질 끌려와 죽음을 맞이했다.

“이들의 머리를 베어서 성문에 걸어 놔라. 죄명은 반역죄다.”

무엇을 위한 반역죄인가?

그것이 성립되려면 반역을 해야 하는데, 살해당한 귀족들에게는 뚜렷한 반역 행위랄 게 없었다.

“백성들이 몬스터의 소굴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그런 무책임이 반역이고, 나라 상태를 이렇게 썩어들어 가도록 방치했으니, 귀족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반역이다.”

그리고 캐시오는 귀족들의 저택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나머지 가족들에게 항복 문서를 받아오게 이르고, 저항하는 가문에는 불을 지르라고 명령 내렸다.

그날 밤 수도 곳곳이 불탔다.

그리고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캐시오의 병력이 수도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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