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 옆에 설 수 있는 자격 (2)
힐다의 친부는 술을 마시면 그녀를 구타하곤 했다.
그때 어머니는 동생을 임신하고 있었으므로 평소처럼 맞다간 유산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구석에서 벌벌 떨기만 했다.
그러다가 친부가 죽고 모녀는 해방되었다.
물론 학대받았던 과거는 그녀들에게 정신적인 흔적을 깊이 남겼다.
그런 그들에게 구원이 되었던 게 양부였다.
힐다의 새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힐다의 어머니와 함께하며, 힐다와 동생에게 아낌없는 정을 주었다.
“이제 한 가족이잖아. 그것 외에 뭐가 더 필요하겠어?”
오히려 힐다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커져만 갔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편이었다.
“힐다는 덩치가 너무 크고 많이 먹어요. 이러다간 우리가 굶어 죽겠어요. 그러니 버려요.”
어린 나이에 그런 모진 말을 듣는다는 건 진짜 고통이었다.
본심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수 없던 힐다였기 때문에, 그녀는 밤마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집 앞에 나와서 수레 위에 앉아, 새 아버지를 기다리기도 했다.
새 아버지는 독살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아내 앞에서, 그녀를 꾸짖지 않았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만나기 전에, 술주정뱅이 때문에 얼마나 모진 학대를 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힐다와 그녀의 동생에게 더 사랑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을 편견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는 그의 배운 수준과 상관없는, 그의 본질이었다.
새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가장으로서 미래를 걱정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까지 내렸다.
그러니까 그는 아주아주 좋은 사람이다.
다정하고 힐다를 아꼈던 사람이다.
처음으로 힐다에게 아버지라는 의미를 알게 해주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죽었다.
세인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소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똑똑한 사람까지는 못되지만, 적어도 바보는 아니었다.
바보가 아니니까 왜 이 소녀가 이렇게 무리한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족 중 하나가 광산에서 죽은 것일 거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이렇게 버티고 서 있었다.
죽은 자는 아마도 이 소녀의 아버지겠지.
끔찍한 형태로 변한 시체들은 그 자리에 파묻었었다.
그리고 묘비를 세워 주었다.
세인은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소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바로 귀족의 행동이었다.
그냥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고, 소녀의 행동을 묻어두는 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러나 그는 말 위에서 힐다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두 손은 엉망이 되어 있었는데, 아직 얼어붙어 거칠어진 밭을 고르고 온 길일 것이다.
그걸 본 그의 두 눈은 한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대신 말에서 내렸다.
그가 앞으로 걸어오자, 힐다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흠칫 놀라며 뒤로 약간 물러섰다.
그러나 세인은 앞으로 걸어가며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불경하게도, 주변의 난민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 탄성의 의미는 점점 가까워지는 소녀와 도시 주인의 사이에서 금세 묻혀 버렸다.
힐다는 세인이 손을 뻗었을 때, 공포감에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못 박힌 듯 고정되어 버린 이유는 세인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투구를 벗은 세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 표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가움과 잔인함으로 갈무리 되어 있었다.
하지만 힐다는 세인의 눈빛을 보았다.
눈빛만 보고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힐다는 세인의 눈에서 진심을 읽었다.
적어도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친부처럼 가학적인 것을 즐기는 폭군의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양아버지처럼 따뜻했다.
그 눈빛과 거기에 담긴 감정에서….
새삼 다시 일어난 상실감이 가슴을 칠 때, 세인의 한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손바닥을 힐다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머리가 시키는 행동에 저항하며, 가슴으로 주저 없이 말했다.
“미안하다.”
“….”
난민들은, 이제 정착해 가는 사람들은 그를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있었다.
법 위에 서 있으며 여기 보이는 모든 것의 주인이었으니까.
그에게 복종하고 충성하며,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 있다.
그런 대상이니까, 겉모습도 보통 인간과는 다르니까.
그런 생각은 점점 강해져 간다.
하지만 세인은 정말 그런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초월적인 존재라서 글리터의 일인자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앞으로도 감당 못 할 일이 생기겠지.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소녀 앞에서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힐다의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자신의 사과가 정말로 상대에게 전달되기를 빌면서 말이다.
“미안하다.”
그는 변명 등의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설득시키고 싶지 않았으며, 삶이란 이런 거라며 억지 주장을 하고 싶진 않았다.
세인이 생각하기에 이 불쌍한 소녀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그녀에게 사과를 전달했다.
“미안하다.”
그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기에는, 그 되풀이 되는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무거웠다.
용서를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되풀이하는 이유는, 힐다가 충분하다고 여길 때까지 사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힐다의 머리를 한차례 부드럽게 어루만진 그는, 손을 떼며 마지막으로 말한다.
“미안하다.”
그리고 말의 고삐를 쥔 세인은, 천천히 얼어붙어 있는 힐다의 옆을 돌아서 걸어갔다.
그가 자리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힐다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적이 얼어붙은 그곳에서 오로지 세인만이 말과 함께 걸었다.
그러다가 그는 고삐를 놓고 혼자 걸어갔다.
성까지 가는 길이 유독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가슴 속의 죄책감 때문인 걸까?
이 죄책감은 앞으로도 되풀이될 것이다.
전에도 그러했듯이….
전방에 몰려 있던 환영 인파는, 세인이 다가오자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비게일도 있었다.
그는 세인이 스쳐 지나가며 하는 말을 들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을 했군.”
아비게일의 얼굴이 무안함으로 붉어질 때.
그 옆의 세리스는 세인의 얼굴이 참담함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치고, 다시 쳐서 끝내 얼굴까지 올라온 모습이다.
세인이 성에 들어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흩어질 수 있었다.
왜인지 먹먹한 가슴을 안고 저마다 일터로,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힐다도 있었다.
물론 그녀는 지금 죽도록 슬프지만, 닥친 고통을 어떻게든 이겨낼 것이었다.
그 시련을 이겨내는 데 있어 세인의 진심 어린 사과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세인의 진심을 보았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다.
병사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일은 일반인이 아닌 병사들에게도 머리가 아닌 가슴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평범한 지배자를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불현듯 떠올렸다.
여기서 평범하지 않다는 뜻은, 세인이 가진 겉모습이나 공포스러운 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아스칼리온은 이 모든 모습을 다 보고 신전으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신부가 앉아 있었다.
그는 십자가 앞에서 침묵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스칼리온은 그런 침묵을 방해하며 신부의 옆자리에 앉아 중얼거렸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할 거 같은 사람을 알고 있네.”
“….”
“그분은 말이야. 엄청난 힘을 가졌어. 그리고 엄청난 자리에 있지. 그분이 원한다면 여자든 음식이든, 고급술이나 향락까지 그 모든 걸 사치스럽게 누릴 수 있을 거야. 이곳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즐거움이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생각해보면 나는 그가 한 번도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보지 못했어. 앞으로 그는 행복할 수 있을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내가 아는 연약하고 불행한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아. 아무리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말이야. 그것과는 별개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 같아.”
“….”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면, 그는 그 손가락질이 향하는 자리에 기꺼이 앉아 있겠지. 그게 그 자리의 의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리고 한때 나도 손가락질하던 사람이었어. 나는 그렇게 손가락질하면서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어. 다른 사람들이 과거 나와 같은 과오를 저지른다 해도, 난 그들을 말릴 수는 없을 거네. 과오라는 건 스스로 인정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니까.”
고개를 끄덕인 신부는 아스칼리온의 말을 들으며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 * *
이번 일은 묘하게도 난민들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시대는, 몬스터보다 같은 인간이 주는 상처가 더 위협이 되는 시간대였다.
불안정한 미래를 담보로 고향의 고통을 피해 여정을 끝마친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책임감 있는 통치자였다.
강한 힘을 보여준들 그 힘으로 도리어 자신들을 괴롭힌다면, 지긋지긋한 과거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적어도 글리터의 주인이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셈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은혜를 받아도 ‘이것이 채무가 되어 노예의 빌미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오크들에 대한 불안.
그리고 각오는 했지만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을 내기도 하는 글리터인까지.
그 모든 것에 스멀스멀 올라왔던 공포감도 완화가 되었다.
멀리에서 세인과 힐다를 본 사람들은 알았다.
적어도 이 도시의 주인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는 이유로 소녀를 짓밟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안정을 찾아갈 때 세리스는 힐다를 조사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래도 힐다의 힘도 그렇지만, 그 소녀가 보여준 대담함에 관심이 가는가 보다.
높은 성벽이 거의 완성될 무렵, 경계선 밖으로 밭들이 할당되었다.
처음에는 지하의 온천 지류를 따라 형성되었지만, 화룡석들이 깔리자 경작지가 늘어나고 공백을 채운다.
건물들도 빠르게 지어졌고, 하루가 다르게 층을 높였다.
번우드 지역만큼은 아니지만 모든 게 순조롭다.
사람들은 계속 밀려들었고, 그 인력은 태어나는 도시의 힘줄이 되었다.
근육의 역할은 여전히 오크들이 맡고 있었다.
그들은 위험한 대신 폭발적인 힘이 되어주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힘세고 날랜 젊은이들을 뽑아 훈련시키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드워프들은 광산의 이익을 나누면서도, 글리터를 통해 자신들의 창작 욕구를 마음껏 채웠다. 그리고 글리터 한쪽에 아예 거주지를 만들고 여러 도구를 만들어 냈다.
그중에는 쓸만한 무기도 있었으며, 정신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조형물도 나왔다.
유리 장인들은 광산에서 채취한 물질을 가져와, 형형색색의 유리를 만든다고 난리였다.
번우드는 아주 풍요로웠지만, 너무 정적이었다.
그래서 상당수의 드워프가 글리터로 와서, 이 격변하는 시기를 공감하며 즐기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거기는 너무 평화롭지만, 확실히 젊은이들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야. 번우드에 있으면 졸려. 그래서 낮잠을 자다 보면 말릴 친구도 없고, 하루의 경계가 모호해진다고.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는 기분이야. 드워프들은 대체로 불과 같은 젊음을 닮았지.”
크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술병을 들고 성곽 위에 앉아 야경을 구경했다.
성벽 너머로 무수한 불빛들이 강을 이루었다.
어떤 밭은 화룡석으로 만든 기둥 위에 유리나 천을 덧씌우기도 했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면 아늑했고, 조용히 있다 보면 식물들이 쑥쑥 자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안에서 불을 밝히면, 위쪽에서 봤을 때 등잔처럼 보였다.
그런 등잔들이 성벽 아래에서 잔뜩 모여 있는 모습이, 크릭의 가슴에 감흥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짧은 발을 흔들었다.
발밑 아래의 불빛 강들이 커져서 바다로 변하는 날이 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낮에 달구어진 돌들이 식는 냄새.
인간들과 드워프들의 열기가 데운 공기는, 그의 코를 벌렁거리게 했다.
아주 멀리에서, 목자가 야행성 동물을 몰기 위해 든 불 장대의 빛이 보였다.
그리고 더욱 멀리에는 군사 훈련을 하는 빛들이 보인다.
그들은 지평선을 향해 이동하는 듯했다.
어두운 평야를 밝히는 것은 기둥으로 세워놓은 야광석이었다.
세인은 이 야광석에 글리터의 법문을 새길 작정이다.
목자와 낯선 여행자들이 볼 수 있게.
크릭은 이렇게 글리터 주변을 내려다보는 시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한편 아비게일은 전의 일 이후로 세인의 눈 밖에 난 것 같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이 좀 낯설었다.
그는 세상을 물과 기름처럼 살았었다.
각성자가 갖는 특징이다.
자신이 무엇에 대해 특별한지 모르던 그는, 마법사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냥 세상을 등진 것처럼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도 자신의 유별난 점을 좀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뭔가와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렵다고 여겼었는데, 어느덧 욕심이 생겼다.
자신의 계획대로 길이 생겨나고, 건물이 지어지니.
대단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그래 착각이지. 착각이야.”
아비게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일과를 마치고 소파에 앉으면,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