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 옆에 설 수 있는 자격 (1)
마치 북을 채로 두드리는 듯한 땅의 울림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너른 대지 위에서 말 한 마리가 내달리는 것이다.
그 앞에 노출된 것은, 바위 뒤에 숨어 있는 오크였다.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매복이라도 하려는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웃겨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오크라고 해도, 그 정도로 뻔한 수작을 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때, 말을 내달리던 세인의 발밑 흙더미가 폭발했다.
우악스러운 검은 손이 말의 발을 움켜잡은 것이다.
놀란 말의 비명과 함께 갈기가 마구 흩날렸다.
밑에 잠복해 있던 오크 중 한 마리는, 말이 쓰러지기 직전 발굽에 밟혀 머리가 터져 나갔다.
하지만 오크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옆으로 드러누운 말들에게 몰려들어 이빨을 들이대는 그들이었다.
왜 매복을 했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놈들은, 위장을 점령한 허기를 해소하기 위해 말의 몸을 물어뜯었다.
구슬픈 말의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지는데, 그들의 손이 말의 머리를 붙잡고 부숴버린다.
얼마나 배를 채웠을까?
오크들은 뒤통수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받았다.
뒤늦게 돌아보려 했지만, 검은 소용돌이가 뒤에서 몰아쳤다.
세인의 공격이었다.
그가 든 마검이 오크들의 몸을 관통했다.
오크들의 목을 단번에 날려준다면, 의식이 끊기고 저세상에 갈 것이다.
하지만 세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오크들에게 관통상을 입혀, 피를 흘리고 경련하게 만들었다.
워낙 강인한 녀석들이라 관통상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세인은 그들을 걷어차며 다시 넘어뜨리길 반복했다.
“으아아아!!”
그때 바위산 쪽에서 뛰어 내려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달리는 오크들과 맞닥뜨리기 전에, 굴려진 바위가 세인의 앞에 먼저 도달했다.
마검을 건틀렛으로 변화시키고 주먹으로 후려갈기자, 꽝 하는 소리가 나며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시야를 확보하고 앞을 보는데, 정작 오크는 코앞에 보이지 않았다.
세인의 몸 위에 그늘이 졌다.
무식한 오크가 급경사 위쪽에서 몸을 날린 것이다.
세인은 다시 피하지 않고, 내려오는 오크의 복부에 손을 질러 넣었다.
오크가 몸을 들썩이며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자 세인이 상대의 배를 움켜잡고, 그대로 뒤로 넘겼다.
그리고 땅에 처박힌 오크에게 뒷발질을 하는데, 발길질에 적중한 오크의 머리가 부서져 나갔다.
소가 뒷발질한 것도 아니고….
인간의 발길에 오크의 단단한 두개골이 부서져 나간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 달려오던 오크들의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게 강한 힘이다.
강력한 오크의 육체를 마치 장난감처럼 짓이긴 그 모습은, 절대적인 강자 그 자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행동을 한 눈앞의 인간은 전혀 지친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공포가 뒷덜미를 잡아 당겼지만, 후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변변찮은 무기도 없이, 그들이 급조해둔 창을 치켜들고 세인에게 도달했다.
퍽! 으드득!
그리고 그 기세는 허무하게 짓뭉개졌다.
세인의 건틀렛은 창대를 부수고 오크의 멱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으스러뜨렸다.
그동안 수련을 거듭한 기술들을 쓸 필요도 없었다.
힘에서부터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지 오래된 세인이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단숨에 오크들을 뭉개 버리자, 뒤늦게 도착한 병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반대로 오크들의 사기가 땅을 향해 곤두박질친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때 크릭이 세인을 스쳐 지나가며 고함을 질렀고, 그 소리만큼이나 용맹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일단 그렇게 거침없이 오크들의 팔다리를 베고 들어가니,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크릭을 따라 뛰던 병사들이 창으로 오크들을 찔러 무력화시켰다.
광산을 점거한 녀석 중 일부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보기 좋게 무산되어 버린 셈이다.
이 기세를 몰아 광산으로 몰아칠 생각이 없었다는 게 의외인 점일까?
생각해보면 광산에는 빨리 구출해야 할 포로가 없었다.
물론 구출하려고 해도 오크들의 성질상 가장 먼저 죽였을 것이다.
결국, 구출의 가능성도 없는 것이다.
세인은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오크들을 한데 모으게 했다.
그리고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병사들을 시키겠다고 맥이 말했지만, 세인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반 이상이 폭행에 죽어나갈 때, 세인은 맥에게 장작더미를 주문했다.
결국, 광산에 있던 오크들은 불에 타며 울부짖는 동료들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지금쯤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들의 최후를 상상하고 있을 거다.
세인의 의도는 명확했다.
단숨에 끝내는 게 아니라 피를 말려 죽이겠다는 것이다.
제어가 가능한 글리터라면 모를까.
광산들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있었고 지금도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아 광산의 수는 더 늘어갈 것이다.
오크들의 힘은 그 광산을 활용하는 데 있어 아주 좋았다.
그들의 노동력이 없다면 영지민이 그 여백을 채워야만 한다.
그러니 오크들의 힘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게 바로 세인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언제든지 오늘날 같은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걸 잦게 하지 않기 위해 본보기가 필요했다.
이제 광산 안의 오크들은 자신들이 최대한 잔인하게 죽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건 그들에게 있어 생소한 공포였다.
전장에서 단숨에 죽는 것과 다른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얼마 남지도 않은 식량이 바닥날 것이다.
그리고 식수도 동이 난다.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바깥의 인간들은 포위망을 풀지 않고, 탈출하려는 오크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리고 산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불에 타 죽는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세상에서 극도로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이 바로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는 것이다.
그리고 광산에서 굶어 죽는 것은, 그 극악한 고통의 순위에서 세 번째쯤 된다.
선동하는 힘을 가진 오크들이 있었다면, 이 무식한 전사들을 어떻게든 조종했을 거다.
그렇게 됐다면 큰 공격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궁지에 몰린 쥐와 같은 기세로 말이다.
그래 봐야 세인의 압도적인 강함에 분쇄되었겠지만….
며칠이 지나자 광산 안은 고통의 숨결로 가득 찼다.
그리고 계속 시간이 지났다.
세인은 밖에서 광산을 구경했다.
오크들이 내는 신음과 울음소리를 들었다.
굶주림에 못 이겨, 서로 잡아먹으려 상잔하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는 나서지 않았다.
다만 가끔 내려오는 오크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해서 죽였다.
그 시체들 사이에서 살아있던 몇 안 되는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병사들의 창에 찔린 채 불구덩이에서 녹아내렸다.
살아 있는 게 불타 죽는 모습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렇게 불타 죽는 게 인간이 아니라는 것에서 안도할 뿐이었다.
과거 몬스터들이 인간을 산채로 불태워 죽이는 것을 보았던 병사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광산 안에서 침체된 분위기가 극을 달리자, 그제야 세인은 포위망을 완전히 좁히게 했다.
사람들은 입구 쪽으로 달라붙듯이 늘어섰다.
세인은 선두에서 빠져나오려는 오크들을 발로 걷어찼다.
그때쯤에는 이미 거동이 온전한 오크는 없었다.
오크들은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병사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창으로 찌르고 발로 걷어차며, 오크를 다시 광산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모습을 보던 크릭이 세인에게 말했다.
“그래도 여기가 아깝지 않겠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그래?”
하지만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일의 마무리는, 여러 입 사이에서 회자 되어야 해. 그래야 의미가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오크를 불질러 죽였다는 쪽이 좋겠지.”
“….”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크릭은 광산 내부에 불을 지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불에 타는 지지대들이 무너지고, 광산이 그 뒤를 따라갈 때.
목숨이 붙어 있는 오크들이 마지막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세인은 그 생매장 앞에서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다.
참으로 잔인하고 모진 행동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악한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맥조차 옆에서 오크들의 마지막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24번 광산의 일이 마무리되었다.
‘훗날 이 일이 역사에 남게 된다.’ 가정하자.
다시 ‘후대가 세인을 평가할 수 있다’ 가정해 본다면, 오크에 대해 참 잔인한 구석이 많았다.
일단 하나의 종족을 철저히 노예로 부리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었다.
위험성은 둘째치고 말이다.
인간들이 미래의 위협에서 살아남는다면….
까마득한 시대의 후대들이 보기에, 세인은 대단히 잔인하며 정도를 걷지 않는 인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들은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몬스터에게 갖는 감정을 알 수 없을 테니까.
글리터로 돌아가는 세인은 오크들에 대해서 제재와 분풀이의 의미로 더욱 강한 탄압을 한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사악한 행동이었다.
대상이 얼마나 뼈저리게 증오를 부추기고 죽일 놈들이냐를 떠나, 생명체들을 그렇게 대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인도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옳으냐 그르냐가 쟁점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필요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오늘 자신의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움직였다.
그가 사람들을 끌고 다시 글리터로 돌아왔을 때,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아비게일의 생각으로는 세인이 한 일을 긍정적으로 끌어 올리고, 승리만 부각해 비극을 덮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 그의 의도와 시너지를 일으킨 것은, 세인의 모습이 궁금한 난민들이었다.
한참 이주 중인 그들에게는, 지배자의 모습이 미래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서였다.
그래서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인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손을 들고 지르는 그들의 함성도, 박수 소리도 전부 그랬다.
‘아비게일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군.’
세인이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의 본질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뼈아픈 대가였다.
그 대가를 지불한 것은, 그 자신도 아닌 밑의 사람들이었다.
투구를 쓴 그는, 병사들과 함께 킹스 로드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아비게일이 준비시킨 화환 든 사람을 무시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는 예상하지 못한 제지에 막혀 버리고 만다.
힐다.
힐다는 소녀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덩치가 아주 컸으며 힘이 강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게도 병사들을 제치며 길 위로 뛰어들었다.
대담무쌍한 이 소란은 경악을 넘어 엽기적인 일이었다.
힐다 당사자의 목숨도 그렇지만, 그녀의 가족 목숨도 달린 일이었다.
물론 그녀는 어려서 자신이 한 행동의 무게를 모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촌구석에서 자란 아이가 뭘 알겠는가?
그 영지의 영주 얼굴도 태어나서 한번 봤을까 말까일 텐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중 나와 있던 세리스는 멀리에서 그런 소녀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힐다의 행동 자체에 대한 감상보다는, 성인 남성들을 밀치고 뛰어든 힘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병사들은 힐다를 잡아서 끌어내려고 난리였지만, 소녀는 그 자리에서 버텼다.
그 낑낑대는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전체적으로 난감한 구도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희극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모두 배를 잡고 깔깔 웃을 수 있었을 텐데…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난민들도 그렇고, 원지민은 경악한 상태로 힐다와 병사들을 보았다.
이제 소녀의 피로 길이 더럽혀지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다 못한 행크가 달려가 힐다를 억지로 끌어내려고 할 때였다.
“놔둬라.”
행크는 힘을 쓰느라 얼굴이 빨개진 힐다 앞에서 세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세인이 말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행크에게 물러나라는 듯 손짓한 세인이, 힐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힐다에게는 말에 탄 세인이 엄청나게 높아 보였고, 그만큼 무서워 보였다.
그녀는 막상 속에서 끓어오는 울분 비슷한 것에 이렇게 난입해 버렸지만,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뭔가 생각을 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노와 슬픔이 그녀를 충동적으로 채찍질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말을 조리 있게 하거나, 뭔가를 노리고 웅변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어린 소녀는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가슴을 치는 슬픔과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 말이다.
그건 마치 어린아이가 일을 저질러 놓고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
주위가 숨 막히는 정적으로 둘러싸인 지는 좀 되었다.
그 안에서 세인은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구 안에 숨겨진 그의 눈빛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