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 피의 운명을 따라가세요. (2)
세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그녀가 생각할 때, 세인은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사슴은 악과 선을 빚어 뒤섞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도 그랬다.
사악한 의도와 선의가 뒤섞여 있는 듯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뒤죽박죽으로 태어난 존재가 그녀일까?
상반된 두 본성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는 것만 같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든, 나는 앞으로 신에게 죽임을 당할 자에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저의 정체성이랍니다.”
“신….”
갑작스러운 단어에 세인은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그런 건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고, 찾아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신부에게 도움을 줬던 것은 영지민을 위해서이지, 그가 종교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위해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만 했는데, 신이라는 의존성도 포기한 것 중 하나였다.
“죽음과 삶을 부리는 신에게 말이에요.”
“세상에 정말로 신이 있나.”
믿지 못하겠다는 세인의 중얼거림에, 사슴은 묘한 눈길을 보냈다.
지금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 눈빛은 아주 깊었는데, 그와 반대로 입에서는 무서운 말이 흘러나왔다.
“마검을 휘둘러요. 그렇지 않으면 사분오열된 인간들은 다 죽을 거예요. 일단 드레퓨스부터 피로 물들이고 정복해요. 이런 변방에서 성을 세우느니, 그게 빠른 방법이에요.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앞으로의 위기를. 그런데 이렇게 태만하다니, 이건 죄를 짓는 거예요. 하나의 나라를 피로 물들이면, 당연히 다른 나라들은 당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귀를 기울여 줄 겁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에요. 왜 아니겠어요?”
그녀의 권유와는 반대로 세인은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이젠 그녀가 누구인지 아니까.
“인간에게 기회를 줘. 그게 힘들다면 시간이라도 줘.”
“예. 그 기회와 시간을 위해서는, 당신이 당신 운명에 따라 피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요.”
그의 손이 사슴의 머리를 뒤덮었다.
사슴은 그의 손바닥에서 온기를 느꼈다.
현명한 자도 인간다운 자도 아니지만….
인간을 위해 온기를 발산할 줄 아는 손길이었다.
“이제야. 이제야 사람들은, 괴물들이 없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걷기 시작했어. 말도 안 되는 악의에서 풀려난 거야.”
“그 악의는 끝나지 않았어요. 당신의 믿음과 기대는 신기루에 불과해요. 당장 드레퓨스를 보세요. 저들이 몰려오는 게 느껴지나요? 당신의 조국은? 당신의 조국은 멀쩡할 거 같나요?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고, 자신을 망치기 위해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정말 인간을 믿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은 우둔한 자군요.”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남부에라도 있을 것이다.
좋은 지도자만 있다면 인간들은 좋은 뜻으로 결집할 수 있었고,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세인은 그렇게도 생각했다.
자신처럼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똑똑하고 군주다운 군주가 있다면, 인간들이 웃는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러, 생명이 살 수 없는 지옥을 세상에 펼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몬스터를 죽이겠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몬스터가 되는 길이었다.
그렇게 피와 칼로 미래를 덮어버린다면, 그것이 최고의 죄악이다.
그게 바로 그녀와의 궁극적인 견해차였다.
결국, 머리를 들어 올린 사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그녀는 결국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마검의 본질은 언젠가 세인을 설득시킬 것이다.
다만 그것이 앞당겨지길 바라는 것은, 신에게 자신이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세인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그녀의 운명이 바뀔 테니까.
아니 어쩌면….
어쩌면 운명은 불변일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성녀처럼.
“예지력이 있는 스포일러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
“처음에는 죽음을 피해가고 싶어 해요. 그러다가 결국 운명에 승복하고, 고통 없는 죽음을 원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쉽지 않죠. 정말 쉽지 않아요.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는 거랍니다. 예정된 결과를 뒤집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세인에게서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사슴이 속삭였는데,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제 선물입니다. 유고의 유물이 둘로 나누어지기 전, 고통의 용광로는 본디 하나였어요. 그러니 지금 당신에게 있는 그게 완전한 모습이에요. 이로써 내 호의를 알겠죠? 나는 당신에게 도움을 주려는 겁니다. 이 설득력을 밑거름 삼아, 아까 충고를 잘 생각해 보세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문제니까요.”
그때 현실에서는, 세인의 옷 속에 있던 다크 스타가 열기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며 깨어나려고 하는데, 사슴이 마지막으로 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걸 제대로 써서 영지민을 구해야 하지 않겠어요?”
생각해 보면 왜 몬스터들은 고통의 용광로를 끝까지 쓰지 않았을까?
용광로를 흉내 낸 조악한 물건으로 대체하고, 용광로를 폐기하듯 버린 것일까?
몬스터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인이, 유고의 물건과 마검에 완벽히 잠식당하기를 바랐다.
붉은 두 개의 빛은 그렇게 점점 뒤로 멀어져 사라졌다.
한편 담요를 들고 세인에게 다가서던 맥은, 세인에게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오자 깜짝 놀랐다.
야영지를 돌던 경비병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맥과 세인쪽을 바라봤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세인이 일어섰다.
그리고 가슴 섶을 뒤적여, 숨겨 놓았던 유고의 유물을 꺼내었다.
돌처럼 딱딱한 물건은 이제 선명한 초록색을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빛을 발하며, 사방으로 흘려냈다.
계속 바라본다면, 홀릴 것만 같은 보석이었다.
보석을 보던 세인의 손아귀에 약동(躍動)이 감지됐다.
전에도 조금 그랬지만, 이제는 살아있는 물건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물건이 둘로 나뉘게 된 경위는, 이 위험한 힘을 경계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맥은 세인이 숨기는 보석을 보며 입을 뗐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별거 아냐. 세계수를 만났어.”
“세…계수요?”
“꿈에서.”
세인의 짧은 대답에, 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꿈에서….
이렇게 야외에서 졸다 보면 꿈자리가 사나운 것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며 세인의 몸에 담요를 덮어 준다.
세인은 어깨에 둘리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제 곧 자정이 넘어 새벽인데, 그때의 추위는 망토로 견딜만한 것이 아니었다.
맥은 다시 의자에 앉는 세인의 앞에서 불을 피웠다.
멀리에서 눈치만 보던 병사들이 다가와 거들어 주려고 하자, 맥은 손을 저으며 그들을 말렸다.
세인은 맥이 불을 피우고 고구마를 나뭇가지에 꿰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안에서는 포로들이 굶주리고 있을 텐데, 아직은 음식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아.”
“누가 와도 저들은 살릴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린 살아야죠.”
시간이 흐르고, 따로 빼낸 잿더미 속에서 고구마가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냈다.
맥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것을 집어, 그대로 세인에게 건네주었다.
껍질을 벗기니 노란 속살이 드러난다.
아주 잘 익은 고구마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세인은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금세 뜨거운 고구마가 가득 찼다.
입을 벌리니 고구마의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혀를 통해 비로소 단맛이 느껴졌다.
* * *
다음 날 아침에도 포위망은 유지되었다.
그리고 오크들이 나와 고함을 치며 마지막 포로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포로들은 광산에서 고문을 당했는지 상태가 엉망이었다.
세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인간과 드워프들은 가능한 이를 악물고 죽어갔다.
비명을 지른다면 오크들이 좋아하는 것은 둘째 치고, 멀리에서 지켜볼 사람들이 고통스러울까 봐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때는 다른 광산에 볼일이 있어 뒤늦게 합류한 울프크릭도 함께 하고 있었다.
세인은 마지막 처형이 끝나고, 버려지는 시체들을 보았다.
돌무더기 위에 쓰러지는 육신들을 보고 침묵을 유지했다.
그의 입이 열린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고, 크릭을 향해서였다.
“미안하다.”
“뭐? 자네가 왜 미안해? 자네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세인이 크릭을 바라보았지만, 크릭은 진심이었다.
그는 빨개진 두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코가 맵다는 듯이 킁킁거렸다.
울음을 참느라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다.
크릭은 원망의 화살을 세인에게로 돌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마검을 들고 어떻게 해보란 식의 닦달도 하지 않았다.
그도 여러 드워프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과 그에 따른 반동의 의미를 아는 자니까.
크릭은 오히려 세인을 툭툭 쳐보였다.
“저들은 그래도 우리 얼굴을 보고 갔잖아. 그러니 위안이라도 얻었을 거야. 우리가 얼마나 잔인하게 복수할지 알고 갔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들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복수를 해줄 생각이야.”
그러면서 이를 드러내 보이곤 웃었다.
크릭은 세인 옆에서 의자를 세워 놓고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광산 안의 오크들은 피 말리는 고통을 느꼈다.
포로들을 보란 듯이 죽인 오크들은, 사람들의 동요를 기대했다. 그리고 포위망이 흔들릴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잘못돼도 한 참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이제는 바보라도 피를 말려 죽이려는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크들은 급한 마음에 땅굴도 파보았다.
포위한 병력의 기세가 흉험하니, 땅굴로 도망을 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땅굴이란 게 그렇게 쉽고 길게 파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는 온천이나 화룡석으로 데워진 땅이 아니라 얼어붙은 땅이다.
바위도 가득한 지반이고 말이다.
덕분에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체력만 고갈되어 버렸다.
결국, 다시 며칠이 지나자.
오크들은 괴로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려는 새벽, 푸르스름한 기운이 땅 위로 번져나갈 때.
세인과 크릭은 달군 철판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보고 있었다.
철제 방패의 표면을 잘 닦아 놓고 그 위에 두툼한 소고기를 얹으니, 지글거리는 기름이 끈적하게 베어 나왔다.
크릭이 작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그중 한 점을 찔러보았다.
그러자 진득한 육즙이 고기 옆으로 보인다.
“으뜨뜨….”
크릭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손끝으로 또 그걸 집어 들었다.
아니 집어 들려고 했다.
그런데 철에 달라붙은 고기는 조금 떼어진다 싶다니, 철썩이는 소리를 내며 다시 원상복구가 되었다.
크릭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자신의 귀를 잡아갔고 말이다.
옆에서 그 꼴을 보던 세인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세인과 크릭은 아주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각기 돌아서는데, 이미 말 고삐를 끌고 빠르게 달려오는 맥이 보였다.
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인에게 고삐를 내주었다.
크릭이 땅에 내려놓았던 양날 도끼를 집어 든 뒤로, 세인이 말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차갑게 묻는다.
“어느 쪽이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맥은 그렇게 말하고는 병사들에게 빨리 신호를 보내라고 손짓을 했다.
멀리에서 수기가 움직이는 것을 본 병사들은, 맥에게 그 신호를 전달했다.
그러자 맥이 금방 신호를 해석하여 대답했다.
“광산 뒤쪽이랍니다.”
“양동작전일지 모르니 여기서 대기해.”
“알겠습니다.”
오크들이 지금 양동작전을 쓸만한 머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포위전에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세인이 탄 말은 주인의 조바심을 아는 듯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크릭은 말의 뒷발굽이 채는 흙더미를 맞고, 퉤퉤 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내 소는? 어디 있어?”
세인의 망토가 말이 달리는 속도에 따라 뒤로 들려졌다.
그리고 그 밑에서 그의 손이 움직였다.
스르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장에 달려있던 검집에서, 마검이 검신을 드러냈다.
그것을 옆으로 몇 번 휘둘러본 그는, 고삐를 쥔 나머지 손으로 말의 방향을 조종했다.
점점 말머리는 오크들에게 가까워져 갔다.